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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가르침
행 8:26-40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행 8:26-40 / [빌립과 에디오피아의 내시] 그무렵 빌립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말하였다. `예루살렘에서 가사 광야로 통하는 길까지 남쪽으로 내려가라.' 27) 빌립이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더니 에디오피아 사람 하나가 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에디오파아 여왕 간다게 밑에서 큰 권력을 쥐고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드리러 갔다가 28)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마차에 앉아 예언자 이사야의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29) 성령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마차 가까이로 걸어가라.' 30) 빌립이 달려가서 그가 책 읽는 소리를 듣고 물었다. `그 뜻을 이해하십니까?' 31) 그 내시가 대답하였다. `잘 모릅니다. 아무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으니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고는 빌립에게 마차에 올라와서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32) 그가 읽고 있던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ㄱ) `그는 학대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그 고통을 다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하고 털 깎는 자 앞에 선 어미 양처럼 입 한번 열지 않고 모든 고난을 다 참았다. (ㄱ. 70인역 사53:7-8) 33) 그가 체포되고 유죄판결을 받아서 감옥으로 끌려갔으나 그를 위해서 걱정해 주는 사람이 그의 시대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내 백성의 허물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내 백성의 죄악이 결과적으로 그를 죽였다.' 34) 내시가 빌립에게 물었다. `그분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이사야 자신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까?' 35) 그래서 빌립은 이 구절에서 시작하여 많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예수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36) 그들이 물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내시가 말하였다. `저기 물이 있습니다! 나도 침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37) 빌립이 대답하였다. `만일 당신의 온 마음을 다하여 믿는다면 침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내시가 대답하였다. 38) 그들은 마차를 멈추고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서 빌립이 내시에게 침례를 주었다. 39) 두 사람이 물에서 올라왔을 때는 이미 주님의 영이 빌립을 데려가셨으므로 내시는 다시 빌립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기쁨에 넘쳐서 자기 길을 갔다. 40) 빌립은 아소도의 여러 도시를 두루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뒤 가이사랴로 갔다.
성령의 말씀하심에 따라 광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빌립은 에디오피아의 관리인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합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26) 빌립 집사에게 사마리아에서의 복음사역을 마치고 새로운 사역에 관한 이야기가 주어집니다. 그 시작은 “주의 사자가 말하여 이르되...” 스데반의 죽음 이후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고 빌립도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마리아 성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역의 시작도 주의 사자가 말씀하심으로 시작합니다. 그 곳은 사람이 없는 광야로 가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립의 대답은 “일어나 가서 보니”의 말씀처럼 순종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내가 내 이해와 지식과 경험으로 내 역사를 만들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순종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27-39)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광야에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있었습니다. 이는 이방인이지만 예루살렘으로 예배하고 돌아가는 것을 보아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든지 유대교와 관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이었을 것입니다. 성령의 명령을 따라 수레 가까이 간 빌립은 그가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보고 그 글의 내용을 깨닫느냐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빌립의 태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전도자인 빌립은 늘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자였습니다. 성령이 이르신 것에 대하여 그의 태도는 언제나 순종하며 달려가는 성실함이었습니다. 또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한 줄 알고, 깨달아 알기를 바라는, 말씀을 사모하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이사야의 말씀이 예수를 가르치는 복음임을 깨달은 내시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기를 절실하게 바랍니다. 그래서 당장 물이 있는 곳에 가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내시는 기쁘게 길을 떠납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재점검하시기를 바랍니다. 빌립과 같이 우리는 주님의 성령에 이끌리어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성실하게 따르고 있습니까? 말씀을 사모함이 또한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그 은혜를 지금도 에디오피아 내시와 같이 귀한 줄 알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적용: 우리는 매순간을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그리고 들은 음성에 대하여 순종하며 성실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인생을 점차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적으로 생각하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서서히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은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거듭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생각하면 허무하고 불안해 할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그 반대로 평안 가운데 노후를 살아갑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는 “산다는 것, 그것은 서서히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 설 교 >
내시의 성경공부
이정익 목사 / 사도행전 8:26-39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복중의 복입니다. 성경을 보면 세상의 근원을 알 수 있고 창조과정과 나의 뿌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운명과 나의 종말을 알 수 있고 종말 이후의 문제나 내가 가야 하는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없을 때에는 진화론이 대세였습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주어지면서 이 세상의 근원이 분명해졌고 창조과정이 적나라하게 밝혀져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섭리와 계획을 모두 성경에서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성경을 연구하고 풀어야 하나님의 섭리와 비밀을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마치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는 것처럼 수고하고 노력하여 밝히고 찾는 사람만이 비밀을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 점을 오늘 읽은 본문이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디오피아의 내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디오피아 왕국의 국고를 맡은 장관 내시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가는 길에 마차를 타고 가며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이 내시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한 절기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돌아가는 독실한 유대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 성경이 이사야서 53장이었습니다. 그가 그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빌립에게 명하여 그에게 가 보라고 지시하십니다. 여기 빌립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7집사중 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고 예루살렘에 핍박이 시작되었을 때 그 핍박을 피하여 돌아다니던 디아스포라 중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빌립을 사용하셨습니다. 부름을 받고 빌립이 급히 가보니까 내시가 마차를 타고 가며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르쳐 주었더니 듣고 감동을 받고 회심하여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 결과 이 내시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게 되었고 이디오피아에 돌아가 복음을 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디오피아 나라가 전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접한 나라가 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한 사회의 리더가 되면 역할이 그렇게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회심이 한 나라를 영적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여기 내시 한 사람이 회심하는 순간 이디오피아 나라와 민족이 전도되고 회심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 내시가 성경을 공부하는 순서가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을 손에 들음
성경을 손에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입지 않으면 성경을 손에 든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손에 성경을 들고 읽고 묵상하고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생활하는 것은 엄청난 축복을 입은 삶인 줄 아십시오. 내시는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가는 길에 이사야서를 깊이 묵상하고 지금 진지하게 읽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더 깊이 알려고 성경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첫 번째 순서가 성경을 읽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것의 근원이 들어있고 기준이 들어있고 각종 비밀이 들어있고 그 해답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캐논이라고 부르고 바이블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모든 교훈 중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고 법의 기준이 되고 삶의 기준도 되며 인생의 기준이 되고 영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하였습니다. 박멸하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다 싶어서 먼저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읽다가 그는 박멸이 아니고 스스로 성경 속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기독교를 박멸할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이제는 그 하나님을 증거 해야겠다 해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영화가 벤허라고 영화이고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생키비치라는 감독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거기에 길이 있고 뜻이 있고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 내시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작은 일이 마침내 이디오피아 한 나라에 전도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구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리고 갈구하면 하나님은 누군가 보내서라도 가르쳐 알게 하시고 기회를 주시고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내시의 겸손
내시는 본디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거리가 자그마치 15,000km나 되는 곳을 마차를 타고 한 달을 달려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이제 일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먼 거리를 개의치 않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배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국 도중에 마차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가 읽은 성경은 오늘 우리들이 읽은 사도행전이 인용한 이사야서 53장 내용입니다. 내시가 고난 받는 종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지만 그는 그 고난 받는 종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사마리아에서 사역 중이던 빌립을 그에게로 보내신 것입니다. 빌립이 명령에 순종하여 급히 가보니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이해되느냐 ?”고 묻자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알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빌립을 청하여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면서 “여기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이 누구냐 ?”고 묻습니다. 빌립이 “그는 고난받 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고 “오셔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하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내시는 그 내용이 생전 처음 듣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과정을 듣지 못하여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충격도 컷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회심하고 마침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내시는 참 겸손한 사람입니다. 모르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한 나라의 국고 맡은 장관이니까 교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르쳐 주는 자가 없는데 어찌 알겠느냐, 올라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합니다. 참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말씀을 잘 받아들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전도할 때 더 잘 영접합니다. 겸손함은 축복이고 은혜 받은 성품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사역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줍니다. 성령은 오늘도 쉬지 않고 이렇게 다니시며 역사하시고 섭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설교를 들으면 곧 잊어버리는데 그것도 은혜입니다.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도 걱정할 것 없는 것은 필요할 때마다 성령께서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마음에 뜻을 품으면 그 뜻을 풀어줄 사람을 보내 주시고 그 뜻을 이룰 사람을 알게 하시고 성취할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내시는 이사야서를 읽어도 뜻 모를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었지만 그때 성령이 사람을 보내서 알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 뜻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뜻을 간직하고 품으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신비 경험
빌립으로부터 내시는 그 고난 받는 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고난은 곧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내시는 그 십자가의 고난은 다름 아닌 자신을 위한 고난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때 그는 생전 처음으로 십자가와 예수와 구원과 부활 같은 언어를 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풀지 못한 질문의 해답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시는 자기의 인생에서 자기의 지성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는 신비함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얼마나 신비함을 느꼈겠습니까.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길을 구원의 길이라고 부르고 구원의 도라고 부릅니다. 성경을 보면 말씀을 접하고 신비를 경험을 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유다왕 요아스는 성전수리를 하다가 발견한 율법 책을 발견하여 읽은 후 지금까지 율법 책을 모른 채 기준 없이 너무 무지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삶이 하나님께 너무 죄스러워 놀라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강화도에 살던 유학자인 종순일이라는 사람은 큰 지주였습니다. 그 일대의 사람들이 그에게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인이 된 후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임금님에게 탕감 받는 대목을 읽다가 충격을 받습니다. 이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빚 진자들을 다 모아놓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다 불태우면서 빚을 탕감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도적은 남의 집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쳐다 팔았는데 마지막까지 팔리지 않는 책이 한권 있어서 펼쳐 읽는데 첫 구절 에베소서4장28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도적질 하는 자는 다시는 도적질 하지 말고” 그 순간 얼마나 당황스러움을 느꼈겠습니까. 어거스틴은 방탕생활 하는 도중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들고 펼치는 순간 로마서13장13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방탕하지 말고 술 취하지 말고 호색하지 말며”. 그래서 모두 순간 변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영감의 의해서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다가 처음으로 십자가와 부활과 예수를 알게 되면서 그는 충격과 감동과 신비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단
그리고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는 빌립에게 “내게 세례를 달라, 무엇을 더 주저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스스로 결단하고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내시가 빌립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이디오피아 사람으로서 첫 번째 세례를 받은 사람이 된 셈입니다. 오늘 세례를 한낱 형식적인 것을 꼭 받아야 하느냐 하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유식한 것 같지만 아주 무지하고 교만한 생각입니다. 그렇게 형식적인 것이면 예수님은 왜 굳이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세례를 받기 위해서 광야 요단강까지 나아갔겠습니까. 그리고 세례요한은 또 굳이 그 형식적인 세례를 베풀려고 안달을 했겠습니까. 몰이해도 어쩌면 교만이고 자만입니다. 예식을 경시하는 태도도 교만일 수 있습니다. 이 내시는 참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나에게 세례를 달라”. 그 결과 내시는 그 순간 지성으로 깨달은 것을 영적으로 체험하는 새로운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내시는 여기서 지적으로 예수를 알았고 영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적 수준자가 영적인 수준자로 변모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의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로 발 돋음을 한 것입니다. 그 후 영적인 발전의 삶을 통해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였고 그 스스로 영적인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는 결단력입니다. 우유부단은 신앙생활의 적입니다. 머뭇머뭇, 기연가미연가, 우유부단, 꾸물꾸물은 모두 신앙생활의 적입니다. 내시는 알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순간 결단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나에게 세례를 달라.” 그 말은 “나는 이제부터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사용하시고 역사하시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뜻을 이루십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 싶을 순간에 그때 주저하지 않고 나섰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빌라도를 찾아가서 담판하여 예수의 시신을 인수하여 장례를 치렀습니다. 마리아는 지금이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임을 알고 주저하지 않고 옥합을 깨트려 예수의 머리위에 부었습니다. 에스더는 지금이 내가 일어날 때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때라는 것을 알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왕 앞에 나아가 민족을 위해서 탄원합니다.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그물을 버려두고 쫒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이 결단력이 발휘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섭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시는 무서운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모르니 가르쳐 달라”, “내가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나에게 세례를 달라” 이 결단력이 마침내 한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결단력이 있는 사람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결국 변화 받은 사람 빌립 한사람에 의해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 회심합니다. 그리고 내시 한사람을 통해서 이디오피아 나라에 복음이 전달되고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나 아프리카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나 한사람은 결코 나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큰일을 이루십니다. 복음이 세상에 주어질 때 예수 한사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12제자로 늘어나고 그 12명의 제자가 70명으로 120명으로 3천명으로 5천명으로 증가하여 마침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것도 처음에 한 두 사람이 이 땅에 들어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20년이 지난 오늘 천 만 명이 복음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 복음은 또 우리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성령 사역
이와 같은 역사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은 전도하는 영이십니다. 오늘 교회의 부흥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하시는 사역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확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실 계획을 겸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결단력을 가진 내시를 활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빌립을 보내 그를 가르치게 하였고 그 내시로 하여금 세례 받게 하여 그를 활용하신 것입니다. 이 빌립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 사마리아로 도망가 전도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때 성령이 빌립을 광야를 지나가고 있던 내시에게로 보내셨고 빌립과 내시의 잠간의 대화가 그 잠깐의 대화가 멀리 이방땅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에 박해가 주어진 것은 당장 생각할 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좀 멀리 보면 하나님은 그 핍박을 통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의 벽을 허물었고 또 그 기회에 이디오피아까지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사람의 집사를 통해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고 그리고 지경을 훨씬 넘어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까지 복음을 확장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내시가 성경을 손을 드는 순간부터 이 기적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가라!
사도행전 8:26-40 / 유기성 목사
이번 중앙 연회 은퇴 목사 찬하예배 때 설교하신 목사님께서 95세 되신 원로 목사님 이야기를 하셨는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70세 은퇴 때, ‘이젠 할 일이 없어졌구나.’ 하고 쓸쓸히 생각하였답니다. 그런데 25년을 더 사신 것입니다. 요즘 너무나 후회가 되는 것이 이렇게 오래 더 살 줄 알았으면 은퇴 때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까 계획을 세워 살 것을, 계획이 없이 살다 보니 25년을 허송세월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5세가 된 지금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셨답니다. 95세라고 이젠 다 살았겠지 하고 계획없이 살다가 10년을 더 살게 된다면 그 때 또 얼마나 후회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퇴하신 목사님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새 삶을 계획하시라는 권면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70이 넘으신 원로 목사님이 세운 계획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그 순간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는 분명히 세울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철저히 성령께 순종하며 살아보리라”하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놀라운 인생 계획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이나 형편과 상관없이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인생 계획은‘이제부터 항상 성령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리라!’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어떤 축복이, 어떤 역사가 일어날지 상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려고 결단하는 자를 통하여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았던 빌립이라고 하는 전도자를 통하여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도자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 지금으로 말하면 재무장관 쯤 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일화입니다. 에디오피아라는 나라는 시바 여왕 때 솔로몬에게 와서 지혜를 배워갔었는데, 그 때 유대교가 전해졌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고위 관리인 국고를 맡은 내시도 유대교인으로 유월절을 지키려고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왔다가 다시 이제 에디오피아로 가는 길입니다. 성지 순례를 해보면 다 경험하시겠지만, 마음이 특별히 갈급해지게 됩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대단합니다. 이 내시가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순례하면서 그 마음이 갈급했던 것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으십니다. 그를 통한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열리라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전도자 빌립을 에디오피아 내시가 가는 길목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빌립은 성령충만한 사람이었고, 항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마리아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많은 전도 결실을 얻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령님께서‘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늘 받았던 빌립은 순종합니다. 자기 사역을 다 내려놓고 성령이 지시하는데로 가사라고 하는 곳으로 내려갑니다.
가사는 이스라엘 서남쪽 땅으로 광야 지역이고 빌립이 활동하고 있던 사마리아 땅에서는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지금은 가자 지역이라 불리는데 팔레스타인들이 독립해서 살고 있으며 최근에도 분쟁이 잦은 곳입니다.
빌립이 성령님께 순종하여 가사 광야로 가보니 에디오피아 내시가 탄 병거가 오고 있었습니다. 이 때 성령께서 빌립에게 에디오피아 내시가 탄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병거에 다가갔더니 성경책 읽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책을 읽을 때 꼭 소리 내어 읽었지 않습니까? 책을 읽었다면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성경을 마음 속으로 읽지 않았습니다. 독특한 리듬으로 크게 소리를 내어 읽었습니다.
들어보니 이사야 53장이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예루살렘에서 출발할 때부터 두루마리로 된 이사야서를 읽어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빌립을 만났을 때가 바로 이사야 53장을 읽을 때였던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 아닙니까? 성령님의 세밀한 역사였습니다.
빌립이 내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읽고 있는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빌립더러 병거에 올라오기를 청합니다. 병거에 탄 빌립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난 당한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내시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지나가다가 마침 물 있는 곳에 이르러 에디오피아 내시가 세례받기를 청하게 됩니다. 병거를 머물러 두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었습니다.
오늘도 세례를 받으셨지만 세례는 너무나 놀라운 성례입니다. 세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로 고백하는 순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자가 된 증거요, 이전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그런 결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빌립 한 사람의 순종이 이처럼 에디오피아 내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그 가정과 나라,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영적 지도를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아프리카에도 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게 됩니다. 그와 함께 이 모든 일이 성령께서 친히 주도하셨다는 사실도 보게 됩니다. 빌립은 도구였습니다.
이 일은 빌립으로서는 알 수도, 계획을 세울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빌립은 오직 철저히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입니다.‘성령님, 오늘 나는 어떻게 할까요?’하며 살았던 것 뿐인데 성령님께서 빌립을 통하여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님으로 인하여 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도 성령님은 그와 같은 역사를 행하십니다.
지난 주간 선교사님들의 새벽 기도회 말씀으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수요일에 태국 신광준 선교사님이 선교 보고를 하셨습니다, 선교 보고하셨던 사진들을 보여주셨는데 많은 사역을 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태국과 베트남 많은 선교 보고 후 말씀하시기를 “나는 성령께서 일하시는 대로 따라 간 것 뿐 입니다. 내가 가기 전에 이미 성령께서 많은 일을 해 놓으셨습니다, 나는 성령께 순종하여 말하라면 말하고, 가라면 가고 했습니다. 저는 주님 가신 길에 나도 간다, 이런 자세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고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셨던 것입니다.
목요일에는 필리핀 홍성욱 선교사님이 놀라운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간증을 하셨습니다.
필리핀에서 빈민촌 선교를 하고 계십니다. 그는 고등학생 때 여학생을 사귀고 싶어서 교회에 나갔다가 여학생은 만나지 못하고 예수를 만나 목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목사가 되어 나간 임지가 의령에 있는 종합복지관이었는데, 8년 동안 무연고자 장례식만 치르면서 염도 수많이 하였는데, ‘왜 나는 결혼식 주례는 한번 못해 보고 장례만 치르는가.’ 했답니다. 그러다가 꿈 꾸던 미국 목회 길이 열려 떠나기 전 동기들과 필리핀 여행을 갔다가 필리핀 빈민촌을 들러 보다가 거기서 주님의 부름을 받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필리핀 빈민촌에 갔더니 한국 선교사가 왔다고 구제품을 달라고 모여들더랍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너는 이들에게 물질을 돕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말씀을 가르치라!’고 하셔서 구제품만 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복음을 전하니 침밷고 교회를 떠나더랍니다.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왔으나 3개월 동안 예배 드리러 오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가난한 집에 장례가 났는데 천주교에서도 장례를 치러주러 오지를 않더랍니다. 그래서 8년 동안 장례 훈련을 받은 선교사님이 장례를 치러주면서 마음이 돌아서 한 사람씩 나온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답니다. 교회가 300명 가까운 교회로 성장하였고 병원도 학교도 세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선교사님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우리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 원하나이다.” 하는 자세를 분명히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금요일에는 일본 김도형 선교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모험을 즐기는 사람으로 생각한답니다, 이유는 그 선교사님의 사역이 남이 하지 않는 대단히 모험적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이 일본에 가실 때, 한국 교인이나 일본 교인이나 가장 많이 물은 것이 “왜 하필 일본이냐?”는 것이었답니다, 선교사의 무덤이라는 일본에 왜 선교사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듣는 질문이 “왜 하필 교토냐?”는 것입니다. 교토는 일본에서도 가장 선교하기 힘든 도시입니다. 또 듣는 질문이 “왜 하필 일본인 교회냐?”는 것입니다. 재일동포 교회도 많은데, 언어도 잘 안되는 상황에서 일본 교회에 들어갔느냐는 것입니다. 또 듣는 질문은 “왜 하필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협력 선교사를 하시지 돈도 교인도 없으면서 일본인 교회를 어떻게 개척하느냐는 것입니다. 또 듣는 질문이 “왜 하필 교토에서도 가장 우상숭배가 심한 오오미야 지역에서 개척하는 것인가?” 그러나 믿음의 시작이시며 완성이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주님만 따라 살았더니 모험이 가득하면서도 간증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예배당이 마련되고 일본 현지 주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교회는 개척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정말 구체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는‘선교사님이니 그렇지, 내게도 그리하실까?’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오셨다면 반드시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믿었다면 성령님은 여러분의 삶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십니다. 믿어지지 않습니까? 인도하심을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그 동안‘어떤 사람에게 전도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없었습니까? 아마 틀림없이 한번 이상은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생각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전도와 선교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마음에‘누구에게 전도하면 좋겠다, 예수 믿게 하면 좋겠다.’이런 생각은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성령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자기 생각으로 여기고 지나쳐버렸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하였습니다.
만일 이 시대 그리스도인 모두가 좀 더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다면 우리 시대에 복음 전도의 위대한 부흥의 시대가 또 한번 도래할 것입니다.
선교와 전도는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전도는 참으로 쉬운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결과는 성령께서 이루시고 우리는 찬송할 뿐입니다.
어떤 전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우연히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은 하나님이 자신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아십니다.
어제 젊은이교회 전도 집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늘 하던 전도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전도 집회 현장에 가서 기도 중에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제게는 전도 설교가 늘 하던 평범한 일일지 몰라도, 이 순간 이 설교를 듣는 전도 대상자에게는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요, 가장 극적인 사건, 즉 위대한 만남을 이루는 사건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순간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전도자를 보내서 인도하셨고, 필요하면 하늘의 군대도 동원하시고, 필요하면 모든 환경까지도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기 전에‘하나님 그렇게 하시옵소서. 오늘 전하는 말씀을 통하여 인생을 바꾸시옵소서.’하는 간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오늘 우연히 교회 나왔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우연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듯이, 모세가 어쩌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고, 12명의 주의 제자들이 우연히 예수 만난 것이 아니듯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한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어쩌다가 되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명하여 부르신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성령의 가장 큰 축복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성령의 권능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아이가 손에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겠습니까? 어린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보호자인 부모가 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소유가 얼마나 되든지 얼마나 많이 배웠던지 상관없이, 여러분이 성령의 체험을 하고 능력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오셔서 여러분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하든지 시작부터 주님이 인도하신다! 는 것을 분명히 하고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자신이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이 시간“하나님이여, 내 인생을 성령님께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령님이 임하셔서 함께 생각하고 성령과 함께 말하고 성령님과 함께 행동하고 성령님과 함께 움직이게 하여 주시옵소서.”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이 항상 명심할 것은 여러분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언제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이것을 주님께 물으셔야 합니다.“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주님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병이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 주님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5천명을 먹이시겠다! 제자들을 통하여 먹이시겠다.’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더 늦기 전에 무리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해야 하겠다.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이 이러니 먹을 것을 주어 배부르게 해 달라고 기도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항상 주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최근 감리사를 비롯하여 해외 선교, 북한 선교, 학원 선교 단체의 책임을 연속적으로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들을 맡으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맡았지만, 이러한 교회 외부 사역 때문에 저의 목회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지 않을까? ‘이러다가 우리 교회는 큰 일 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생각이 다르셨습니다.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더 좋은 길이다.’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너무 바빠서 네 계획하는 목회하지 못하니 잘 되었다! 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네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 포기하라.’ ‘네 생각에 옳다고 여기는 것, 꺽어져야 한다.’ ‘네 교회를 만들려 하지 말라. 내 교회를 세우리라.’‘교인들을 네게로 모으려 하지 말라 나에게로 인도하라.’ 하셨습니다.
저는 최근 어느 때보다도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역사해 주세요.” 하고 기도해왔습니다, 그런 자세가 제 목회 계획대로 목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도 아마 더욱 그렇게 기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매 순간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죄짓는 일이 아니고 내 고집으로 하는 일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일이 분명하다면 일이 겹쳐있다 하더라도 걱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아무리 바빠도 걱정할 것 없고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만 받으면 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제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나는 죽고 예수는 사는 것’이었습니다. 담임 목사의 강한 지도력, 필요없는 것이었습니다. 포기했습니다. 과감히 부교역자들과 장로님들에게 사역을 맡기고 저도 주님만 바라보며 교인들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할 뿐입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만 분명하면 환경 때문에 조건 때문에 걱정할 것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께서 인도하십니다.
지난 OM선교훈련원 이사회가 열렸을 때, 중동 선교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선교사님 한 분이 오셔서 이집트 콥틱교회 대주교인 Father Zakaria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분은 지금 이슬람권에서 가장 복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는 위성 방송을 운영하면서 한 손에는 성경과 코란을 들고 이 둘을 비교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모슬렘들이 이 방송을 보고 개종하고 있습니다. 매일 접속자만 60만 명에 이릅니다, 모슬렘들이 진정한 복음에 목말라 있다는 증거입니다, 과격 이슬람 단체에서 그에게 공개적인 현상금 1억 달러를 걸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이 그에게 “현상금이 걸렸다는데 두렵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하여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매일 매 순간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실 뿐입니다. 저는 매 순간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역에 가름부음이 넘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처해있는 형편과 처지가 어떤지 상관 없습니다. 주님은 못 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우리가 주님이 이끄심을 받기 원합니다. 온전한 순종으로 주님께 반응하기 원합니다.”그렇게 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기도하시겠습니다. 말씀을 주셨으니 그 말씀 붙잡고 기도해야 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성령님에게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의 인도함을 받기 원합니다. 저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주님, 기가 막힌 계획을 갖고 계신 주님, 저를 이끌어주소서.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역사해 주소서.”
성령의 역사와 인도
행 8:34-40 / 이정익 목사
예수님의 일대기를 보면 몇 가지의 마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오심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과 장차의 재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여 일 동안 세상에 더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면서 성령강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몇 가지 준비를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회개입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보였던 시행착오와 졸렬함 그리고 자신들의 무능함과 두려움에 몸을 사렸던 점들을 통렬하게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면서 마음을 비웠을 것입니다. 구태의연함이 그냥 마음과 생각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새 생각을 가지려면 낡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새 옷을 입으려면 깨끗하게 목욕을 해야 하듯이, 새 집으로 이사 갈 때에는 낡은 가재도구는 버리고 새로 바꾸어야 하듯이, 성령을 입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120여명의 제자들은 열흘 동안 합심해서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14절을 보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이 합심과 마음을 같이 함이 중요합니다. 그때 그곳에 열흘 만에, 예수님의 부활 후 50일 만에, 오순절 명절날에 성령이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그날 성령이 강림하신 표시로 몇 가지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성령이 불같이, 바람같이” 임하신 것입니다. 물론 성령은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지만 그날에는 시각과 청각으로 확연히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레이저나 자외선 그리고 적외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태우고 수술하고 투시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파괴력을 갖듯이 그날 성령의 강림도 그렇게 사람들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적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그 반응은 그곳에 모인 120여명 모두에게 방언이 터진 일입니다. 방언은 성령 역사의 가장 기초적인 외적 표징입니다. 또 영적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의 입이 열리고 나가서 힘 있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전도는 강한 용기와 지혜와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 용기는 성령이 주시는 힘입니다. 그 성령의 감화를 받은 제자들은 이제 어제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어제는 무서워서 숨고 도망가고 예수를 부정하였지만 오늘은 폭발적인 능력이 나타나서 자신 있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병자들이 일어나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천명 5천 명씩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타났습니다. 성령이 사역에 깊이 간여하셨고 교통하고 변화시키고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는 많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계시의 역사
본문은 성령의 계시의 역사를 설명해 줍니다. 이디오피아 왕 내시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고 있습니다(27). 그는 독실한 유대교인입니다. 순례차 예루살렘에 왔다가 귀환하는 길에 마차 안에서 아사야서 53장7절을 읽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읽었지만 그 뜻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빌립에게 계시하십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하시니 그 길은 광야라”(26). 그 말은 “이디오피아 내시가 광야 길을 가고 있으니 가서 전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때 빌립은 사마리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달려가 보니 내시가 병거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뜻이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라고 묻자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알겠는가” 라고 반문합니다(31). 그리고 내시는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앉으라”하고 “여기 말하는 자가 누구를 말하는가”고 묻습니다(34). 그래서 “빌립이 입을 열어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다”고(35)고 했습니다. 그러자 내시는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 세례를 달라 해서 세례를 베풀었다”(36)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내시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것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복음의 흐름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복음이 처음에는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로 확대되고 마침내 로마로 세계선교로 발전되어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빌립이라는 제자를 통해서 복음이 사마리아를 넘어 세계화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특징은 하나님은 성령의 교감이 가장 민감했던 빌립을 사용하셨음을 말씀합니다. 그를 통해 복음이 세계화 되고 마침내 이디오피아로 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성령은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시는데 내시와 빌립을 사용하십니다. 결국 성령은 1500km 한 달간의 거리인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사용하셔서 결국 이디오피아를 복음화하고 아프리카에 복음을 확산시키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의 사건도 똑같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고넬료는 로마군인 백부장이고 군 지휘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경건한 신앙인으로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에 “욥바에 있는 베드로 청하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 시간에 베드로도 기도 중에 “누군가 찾아올테니 그를 따라가라”는 계시를 받게 됩니다. 의심하지 않고 가이사랴에 살고 있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 보니 성령이 그 집으로 인도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집에 성령이 임하심을 보고 온 집안 가족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고넬료 한사람이 세례를 받고 그 집안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골자는 고넬료 집안이 세례를 받음으로 로마전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로마전도 계획은 고넬료에게 계시로 나타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베드로와 고넬료는 신분의 차이로 서로 만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고넬료는 당시 로마인으로 지배계급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사사로이 만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역시 유대인 선민으로 이방인을 사사로이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만남을 성령이 주선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만남은 아주 은혜로운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그 일은 주선자나 연출자 그리고 출연자 섭외 모두를 성령이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의 역사
성령은 오늘도 똑같은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영적 교류가 예민하게 이루지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문제는 성령과 예민하게 교류하고 교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빌립이라는 한사람이 영적 교류가 아주 예민한 결과 하나님은 그 한사람을 통해 이디오피아를 복음화 시켰습니다. 베드로 한사람이 영적으로 예민함을 간직한 결과 기도 중에 계시가 주어져서 고넬료 집을 구원한 결과 그 사역이 결국 로마를 복음화 하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런데 소돔은 이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 한사람이 없어서 그 성이 멸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느 한사람을 사용하셔서 일을 하십니다. 니느웨 성을 구원하시는데 요나 한사람을 통해서 12만 명을 구하는 역사를 하셨습니다. 위기에 처한 민족을 에스더 한사람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나설 때 민족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느헤미야 한사람을 사용해서 이루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예수님 한분으로 족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때로 다수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이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장차 어떻게 사용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 중 누구를 선택하고 사용하실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영적으로 예민하게 주님의 영과 교류해야 합니다.
사용받는 방법
그것은 “성령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과 함께 하고 교제하고 교통의 삶을 가지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4장2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보혜사로 와 계십니다(요16:7). 이 보혜사는 5가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도우시고, 가르치고, 위로, 변화, 판단하시는 역할”입니다. 성령과 깊이 교제할 때 이런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나 할 일을 그분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령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5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묵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자세히 읽고 관찰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뜻을 들려주시는 중요한 방법이고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꿈입니다. 하나님이 꿈으로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꿈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때로 꿈은 무의미한 꿈도 있지만 메시지가 담긴 꿈도 있습니다. 그리고 “환상”입니다. 구약시대 선지자와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환상을 통해 계시를 받았습니다. 고넬료, 빌립, 다니엘, 요셉 등 모두가 환상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환경과 사람을 통해서 계시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통해서 길을 인도하시고 또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뜻을 전하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감”입니다. 우리들이 누군가를 위해서 간절히 중보기도 할 때 우리에게 영감을 주셔서 교통하시기도 합니다.
■ 1873년에 뉴욕을 향해 항해하던 로크 에른호라는 유람선이 항해 중 조정타가 고장 나서 강한 바람으로 정상 항로에서 크게 이탈하여 하루하루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선장은 하루 내에 배가 침몰할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 배에 쿡이라는 목사가 승선하였는데 그 사태를 놓고 다급하게 기도였습니다. 그는 그 기도하는 중에 구조 받을 것을 확신을 얻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승객 모두 불안한 마음으로 갑판위로 모였습니다. 배는 심히 기울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브리티시 퀸이라는 배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전날 밤 그리스인 선장도 그 시간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는 쿡목사를 중심으로 구조를 위해서 기도하고 같은 시간에 두 배에서 기도한 것이 영적인 교통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스인 선장은 기도하는 중에 북쪽으로 선회하라는 내적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빌립에게 내시에게로 가라고 역사하신 하나님이 그 선장에게도 북쪽으로 선회하라고 영적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최고속력으로 달려가 도착해 보니 배가 침몰하고 있어 그 배를 구조한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아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인해서 그날 많은 사람이 구조되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 나라에, 우리교회에 이 성령의 음성을 분별한 줄 아는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소돔은 그런 한 사람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또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고 연합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순종과 연합의 삶을 살아갈 때 일어납니다. 사도바울은 1차 전도 여행 때 큰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구부로를 거쳐 안디옥에 이르러 많은 기적을 통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을 거닐면서 루스드라와 더베 등지에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사람들의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2차 전도여행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시아 지역으로 가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을 하지 않으시고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 말은 아시아지역으로 가지 말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가라는 계시였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은 오늘의 그리스지역을 말합니다. 그때 바울은 아시아지역으로 가기로 한 계획을 포기하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갑니다. 그 결과 오늘 유럽전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에 순종하고 연합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때 성령의 은혜와 섭리가 나타납니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인도를 받고 순종하고 따르면 안전하게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순박하고 순종을 잘 하니까 언제나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순종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분명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인데도 내 의지로 바꾸려고 하니까 사고가 일어나고 실패가 주어지고 시행착오를 겪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칭 엘리트라는 사람들과 유능인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자기고집이 강합니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습니다. 협동심도 약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예루살렘 대학으로 가서 성적표를 보고 수재나 엘리트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로 가셔서 어부들을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은 고기 잡아 살면서 실패를 경험했고 가난도 경험하였고 협동심을 발휘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엘리트나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자칭 지성인이고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협동심도 순종도 겸손의 정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목회자들 중에 재벌의 아들이 없고 미인 미남도 없고 엘리트들이 적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적으로 순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순종과 겸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이 스키를 탔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어떻게 스키를 탈 수 있는가 하면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빨간 조끼를 입혀 구별하게 한 후 각자에게 믿을만한 지도자 한사람씩을 배정합니다. 그리고 지근거리에서 스키 막대기를 두드릴 때 그 소리를 듣고 방향을 찾게 하고 앞의 상황에 대해서 육성으로 말해 줄 때마다 그 지시를 절대로 따라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각 장애인들은 그 지도자들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면 스키 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절대로 필요한 요소는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한마음으로 기도하다가 마침내 약속대로 성령을 받고 사역에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강림 후 제자들은 더 이상 옛날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은 오늘도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들의 영적 지도자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길을 안내하시고 삶을 인도하시고 신앙을 회복시키십니다. 그 성령과 함께 하려면 그 성령과 교류를 이루고 순종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때 성령은 보완하시고 변화를 주시며 힘을 공급하고 안내를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여기까지 살아온 것도 그 성령의 전적인 인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성령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갈 때 승리가 주어지고 능력과 인도하심을 받아 사역을 감당하고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