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고종 12년) 조선 황해도 평산에서 아버지 이경선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말란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승만은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이자 태종 이방원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이후 배재학당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 연마하였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YMCA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하에서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황제 퇴위 음모에 가담한 사실이 있어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러일전쟁 중에 사면되어 을사조약의 국제법적 부당함을 주장하는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돼 활동하였고, 한국의 주권회복을 위한 청원외교를 전개하였다.
1877년 서울로 이사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종손인 이근수(李根秀)의 사숙(私塾)에서 과거를 목표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후 실시된 갑오경장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개설한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했다.
이 학당에서 기독교 위주의 정규교육을 받는 한편 갑신정변 가담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의 특별 연속강연과 학내 토론단체인 협성회(協成會)를 통하여 서양의 근대 시민사회와 조선왕조의 정치현실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1897년 7월 8일에 배재학당을 졸업할 때, 졸업생 대표로서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로 영어 연설을 했다.
그 후 언론 및 정치 활동을 통하여 민중 계몽과 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협성회회보』 논설위원,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의 사장 겸 기재원, 『제국신문』 편집인 등을 차례로 맡는 한편,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에서 신진 소장파의 일원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898년 11월 종 9품인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으로 선임된 후 반역죄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朴泳孝)의 소환 ・ 서용(恕容)운동에 앞장섰다가 투옥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한성감옥에서 석방되자 대미 외교와 유학을 목적으로 그 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8월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 주선에 나섰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회견하고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에 힘써줄 것을 요청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때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Katsura-Taft Agreement)이 성립된 직후였다.
그 후 학업에 열중하여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각각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이승만의 잘못: 노덕술
노덕술은 반민특위법 위반 외에도 수도경찰청 고문치사사건, 반민특위 요원 암살 음모사건 등으로 추가 기소되었다.
이승만은 재차 노덕술의 석방을 지시했지만 반민특위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 위원들을 빨갱이로 모는 프락치 사건을 만들어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게 하여 반민특위를 와해시겨 버렸다. 반민특위가 와해되자 노덕술은 경찰간부로 재임된다.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노덕술은 군헌병 장교로 변신한다.
1952년 치러진 선거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이승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에 많이 당선되었다.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은 국회의원이 탄 버스를 납치하여 헌병사령부에 감금한 다음 개헌을 강요하여 정권 연장에 성공하였다.
이 사건의 실행자는 특무대장 김창룡과 헌병대장 노덕술이었다. 이 일로 노덕술은 이승만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미국대사 무초는 이승만 대통령이 노덕술 등이 올리는 보고서만 믿고 미국이 제공하는 정보를 믿지 않아 한미동맹이 흔들린다는 지적을 하였다.
육군 부산 범죄수사단 단장으로 근무할 때 미국 군수물자를 빼돌리려는 오두수의 뇌물을 받고 협조하다가 1955년 재판에 회부되었다.
노덕술은 뇌물이 선거자금이라고 주장했지만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파면되었다. 김창룡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결과라고도 한다.
2,전시작전통제권
6.25 전쟁 당시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군 측에 넘겨준 장본인격인 이승만도 전쟁 중에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에서 철수시켜 독자적으로 북진하겠다“
는 의사를 간혹 펼치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38선을 넘어 북진하도록 이승만이 독단적으로 북진 명령에 결재를 하여 국군 단독으로 북진을 하게 되었으며 맥아더는 하루나 이틀 정도 뒤에 유엔군을 북진시켜 사실상 눈감아주었다.
다만 전작권을 가진 미군의 북진은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할 명분으로 써먹은 건 어쩔 수 없다.
이승만은 625가 일어나자 서울을 버리고 도망을 갔고, 이승만이 전쟁을 수행할 능력과 의사가 없음을 판단한 미군이 어쩔 수 없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이 없다면, 아니 작전통제권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승만의 사례에서 보듯이 한국군은 마음대로 북진을 선포하고 북한을 공격하며 자기 마음대로 전쟁을 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625 이후 지금까지도 전시작전통제권은 주한미군 사령관의 손에 있다.
3. 부정선거와 독재, 그리고 진보 정치인 조봉암의 사형
1956년에 치러진 이전 대선에서 이승만은 라이벌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병사하는 개인적 호재에도 불구하고 본인 아래에서 장관직을 역임하여 농지개혁을 주도한 진보당 조봉암에게 30% 가량의 득표율을 내주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했다.
당시 결과는 이승만 약 500만 표, 조봉암 약 220만 표에 투표 당시 사망 상태인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약 185만 표나 나오는 놀라운 결과였다.
그러자 국부로서 존경받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그가 상심한 것은 당연한 일.
이승만이 1956년의 3대 대선에서 드러낸 불쾌한 감정 표현에 대해서 성균관대학교 서중석 명예교수는 1955년경부터 '이승만 숭배 운동' 비슷한 것이 일었던 당시의 상황을 지적한다.
요약하자면 3대 대선을 전후해서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이승만에 대한 일종의 '버프'가 자유당 정권 및 친여 세력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나온 결과가 그 버프에 비해 그렇게 압도적이지 못했다는 것에 이승만이 불쾌해 했으며 자유당 역시도 위기를 느꼈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최전선에는 항상 최인규가 있었다.
그는 내무부장관 취임식 연설에서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기필코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며 일찌감치 싹수를 보인 그는 전국 시·읍·면·동에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해 매주 1회씩 모여 득표 공작을 점검하고 같은 해 5월부터 11월까지 서울, 인천, 대전, 춘천, 대구, 광주, 부산 등지를 순회하면서 공무원들에게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측 후보자가 당선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의 원인이 되었고, 516 쿠테타로 박정희 독재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대한 노욕은 진보당 인사 조봉암의 죽음을 가져왔고, 한국 진보 정치의 싹을 잘라버렸다.
4. 뉴라이트의 중심
이명박과 윤석열 주변의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은 전부 뉴라이트다. 특히, 방송통신위원장을 했던 이동관은 대표적인 뉴라이트다.
뉴라이트는 한국 근대화의 시점을 일제 강점기로 본다.
일제 강점기의 인프라를 한국 자본주의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건설과 전쟁을 호의적인 식선으로 보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윤석열이 일본에 우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친일파들을 요직에 등용한 이유가 그것이다.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몽양 여운형은 이승만을 지지율에서 두 배나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암살되었다.
암살 배후로 미국과 이승만이 거론되었다.
몽양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한반도는 연방제 북한과 별 문제 없이 살아갔을 것이다.
몽양은 북한과 함께 중립국 선언을 주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