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03
6월29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연중 제1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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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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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IsLD3s-SsQ
[서울대교구 조승현 베드로(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보도주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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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톨릭교회라는 건물의 주춧돌이 되신 두 사도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살아생전 보여준 복음 선포를 향한 놀라운 헌신과 열정, 주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을 인정받아 이제는 하늘나라의 별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이 되시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국 문의 열쇠를 지닌 관리인으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요 탁월한 말씀 선포자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베드로 바오로 사도이지만, 한때 두분 다 스승님과의 관계 안에서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 잠잘때마다 ‘내가 그때 왜 그랬지?’하면서 이불킥을 계속해야만 하는,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게파, 즉 반석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신뢰받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능동의 시기가 지나가고 수동의 때가 된 어느 날, 정말 잘 나가던 그분께서 한없이 나약한 한 인간 존재로 추락하는 그 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파악한 베드로 사도는, 여지없이 스승님을 버렸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세 번 씩이나 스승님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베드로 사도 못지않았습니다. 회심 이전 그는 예수님과 신생 그리스도교 교회를 박해하는 데 있어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결정적인 회심을 하게 된 그 날도 사실 어딘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우글우글 모여있다는 첩보를 듣고, 싸그리 체포하려고 달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사람, 자신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을 가장 가까운 제자로 부르시고, 그 배반, 그 박해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럴수록 더 큰 사랑을 베푸시며, 지속적인 스승 제자 사이를 맺으시며, 가장 큰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두 핵심 사도의 흑역사는 초세기 교회 안에서 정말이지 감추고 싶었던 큰 오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 한 가지는 이 두 사도의 흑역사에 대해 성경과 교회 전통은 전혀 감추지 않았습니다. 보통 세상의 조직이었으면, 벌써 두 분의 흑역사를 몇 번이고 세탁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싸그리 삭제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사가들을 비롯한 성경 저자들의 서술은 냉정하기만 합니다. 두 사도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흑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했습니다.
교회의 초석이 된 두 위대한 인물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우회적으로, 혹은 완곡한 표현으로 기술할 만도 한데, 성경 저자들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습니다. 일체의 옹호나 왜곡 없이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의도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두 분의 흑역사 통해서 우리는 나름대로 한 가지 진리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 인간의 언약, 인간의 역사, 인생의 모든 각본은 한순간에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는 진리 말입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던 베드로였지만, 순식간에 가장 낮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만은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단 몇 시간 만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토록 기고만장던 그가 단 몇 시간 만에 완전히 찌그러집니다. 금강석보다도 더 단단했던 그의 언약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철저한 배신에 따른 수치심과 죄책감, 부끄러움만이 그를 휘감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자세는 ‘지속적인 겸손’ 입니다. “주님, 이 연약한 인간을 보십시오. 천국을 살다가도 일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이 가련한 인간을, 시시각각으로 배신을 거듭하는 이 불충실한 인간을….” 그래서 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이제 주님 당신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제 삶의 의미입니다. 당신만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붕괴된 한 인격을 사랑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평생 따라다니게 될 죄책감과 좌절감으로부터 한 인간을 사랑으로 다시 건져내십니다. 무너질 데로 무너진 폐허, 완전히 맛이 간 반석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그 위에 다시금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십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트리십니다. 바닥에서 겪게 될 고통이 만만치 않겠지만, 그 바닥에서 우리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정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헤매고 있는 그 바닥까지 내려오십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재창조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야말로 하느님 자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는 은총의 꼭지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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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NqmfMRB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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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든지, 불편하든지!>
이번 코로나 사태 이후, 앞으로는 ‘비대면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많이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비대면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본성상 사회적 동물임을 간과한 채 쏟아내는 예측입니다.
지금 코로나가 장기화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제 사람들이 집에서 버티는 것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람과 대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 자매님이 상담을 원해 들어주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아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다 보니 우울증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우울증 증세 안에는 세상에 나 혼자라는 외로움도 들어있습니다.
사람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더 심해지면 귀신도 볼 수 있고 환청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데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해버리면 저절로 마귀와도 관계를 맺게 됩니다.
제가 보좌 신부로 어떤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왔습니다. 오전 10시 미사를 마치고 신자분들과 인사를 하고 성당 로비에는 저 혼자만 있었습니다.
사제관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한 자매님이 비를 홀딱 맞고 머리를 귀신처럼 늘어뜨리고 성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제 앞으로 오더니 뜬금없이 상담하자고 하였습니다.
자신 안에 마귀가 있는데 그 마귀가 지금 성당에 들어가면 보좌 신부 혼자 있을 것인데 상담을 하고 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서울 사는 사람이고 신자도 아니고 그냥 지나는 길이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집무실로 들어가 문을 열어놓고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냥 상태만 보아도 노처녀에 경쟁심이 클 것으로 보였습니다. 예쁘기는 했지만 무서운 사감 선생님처럼 생겼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분은 보험설계사로 나름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였고, 특별히 남자들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부족함이 없는데 ‘외로움’ 때문에 마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종교는 없지만, 그 존재가 마귀인 것은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마귀와 심지어 잠자리까지 함께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갑자기 서울 어디 사는지가 궁금하여, “아까, 잠실에 사신다고 하셨나요?”라고 물으니, 남자의 거친 목소리로 바뀌며 눈을 매섭게 뜨고 소리치듯 말했습니다. “제가 언제 잠실이라고 했어요, 목동이라고 했지.”
자신이 한 말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화가 난 것입니다. 저는 좀 무서웠지만 위축되면 안 되기에, “아니, 그럼 자매님은 한 번 들으면 다 기억해요?”라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아뇨.”라고 하며 인정하였습니다.
저는 이럴 때마다 말해줍니다. 마귀는 자신이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외로워서 스스로 마귀와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우리 선택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외롭든가, 불편하든가.”
분명 사람을 만나는 일은 불편합니다. 혼자 있으면 편합니다. 세상은 경쟁의 시대이고 그렇게 사람을 경쟁자로 보게 만듭니다. 그렇게 혼자가 되고 몸은 편합니다. 그러나 마귀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마귀와 친구가 되는데 어떻게 외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보이기 시작하면 엄청 불편합니다. 혼자 있을 때도 혼자가 아니게 됩니다. 그분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불편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았고, 바오로만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며 항상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불편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면 영원히 외롭게 살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받아들이던 수도회가 있었습니다. 스승은 그 작은 수사님들 중 한 아이만 특별히 사랑하였습니다. 이에 다른 아이들의 불만이 컸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각자에게 참새 한 마리씩 주며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죽여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수도원에 머물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다들 으슥한 곳을 찾아 참새를 죽여왔습니다.
그 작은 아이만 못 죽이고 참새를 살려서 가져왔습니다. 왜 죽이지 못 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을 찾아도 주님께서 보고 계셔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수사는 왜 원장이 그 아이만 사랑하는지를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참호에 수류탄이 떨어지면 군인들은 분명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집어던지던지, 피하든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라면 수류탄이 떨어져도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이도 이와 같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신 분들이 성인들이시고, 오늘 특별히 공경하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입니다.
외롭든지 불편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며 온종일 불편한 삶을 산다면 외로움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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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트렌드 코리아 2024의 내용 중에 ‘스핀오프(Spin-Off)'를 읽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스핀오프는 기존의 브랜드에 새로운 콘텐츠를 끼워 넣는 겁니다. 월트 디즈니는 생쥐 한 마리로 그만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디즈니는 영화, 음악, 놀이공원, 장난감, 생활용품, 식당과 같이 디즈니만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고객은 디즈니 월드에서 꿈을 꾸고, 디즈니 월드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고객의 가족은 물론, 고객의 자녀들까지 대를 이어 디즈니의 세계에 머물게 됩니다. 기존의 밭을 갈아엎고 새로운 품종을 심는 것이 아니라, 밭 주변에 콩도 심고, 깻잎도 심고, 호박도 심는 겁니다. 저도 용문 수련장에서 있을 때 비슷한 흉내를 낸 적이 있습니다. 구역장, 반장들이 피정이나 강의를 듣기 위해서 오면 양평 읍과 연계해서 농산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했습니다. 수련장에 오신 분들은 피정도 하고, 시장도 보니 시간도 절약되고, 따로 장을 보러가지 않아도 되니 좋아했습니다.
노래를 듣는 프로그램도 예전에는 ‘가요톱텐이나 가요무대’가 있었습니다. 일정한 형식이 있어서 조금 단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래를 듣는 프로그램도 다양해지고, 전문화 되고 있습니다. ‘팬텀싱어, 복면가왕, 나는 가수다, 전설의 무대, 히든싱어, 슈퍼스타 K'와 같이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습니다. 영화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관객들로부터 사랑받았던 영화의 줄거리에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무대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도 하고, 극중에서 사랑받았던 조연 배우를 주연 배우로 삼아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영화는 ‘스타워즈, 어벤저스’ 시리즈가 있습니다. 자동차의 브랜드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도요타는 중저가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도요타에서 도요타라는 브랜드를 빼고 ‘렉서스’라는 차를 출시했습니다. 사람들은 렉서스가 도요타에서 만든 차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렉서스에 만족한 사람들은 나중에 도요타에서 출시한 다른 차에도 구매력을 느꼈습니다. 렉서스에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현대 자동차도 비슷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제네시스는 현대 자동차에서 만들었지만 현대 자동차의 로고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제네시스를 좋아하는 고객들은 나중에 현대 자동차에도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네시스가 현대 자동차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스핀오프(Spin-Off)'의 원조는 ‘교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교회가 있습니다. 그 브랜드 위에 동방 가톨릭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스, 러시아 정교회가 생겼습니다. 성공회가 생겼습니다. 루터를 중심으로 개신교회가 생겼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교회가 이렇게 많이 생겼습니다. 때로는 경쟁하기도 했고, 때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죄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하느님나라를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공동선을 위해서 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속해 있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시몬 베드로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처럼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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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6월29일 [성 베드로와 바울로 대축일]
복음: 마태 16,13-19: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 호수에 가까운 벳사이다 출신으로 시몬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동생인 안드레아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케파(반석,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세우셨다. 그는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도이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인 서기 65년경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고 그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사도보다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를 박해하며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사도가 되었다. 그는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 여행을 다니며 교회를 세웠다. 많은 편지가 성경으로 되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네로 황제 박해 때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제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자, 이렇게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이 질문은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더욱 심오한 이해로 인도하시려는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군중들의 수준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그동안 줄곧 그분과 함께 지내며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으며 스승님과 함께 많은 기적을 행했던 제자들의 생각은 어떠한지를 물으신다. 이 질문은 바로 당신을 따라다니던 모든 제자에게 던지신 질문이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즉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은 제자들이 올바로 알아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분에게 열두 제자들은 아직 부족한 사람들일 뿐이다. 마르코 복음에 보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8,33)라고 무섭게 책하시는 말씀이 나올 정도이다. 이 제자들이 어찌 주님께 믿을 수 있는 제자들이었겠는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열두 사도의 신앙고백이며, 교회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 고백을 통하여 교회의 기초인 반석(케파)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루카 복음에 나오듯이(9,23)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주님만 따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유혹이며, 하느님의 일과는 거리가 멀다. 십자가를 통한 죽음을 통하여서만이 부활의 신비를 우리는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은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먼 길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복이 있다고 하셨다. 베드로의 첫 번째 이름은 시몬이었다. 시몬이란 말은 말씀에 온순하다는, 잘 따른다는 뜻이다. 하여간에 주님은 이 이름 대신에 ‘케파’라는, 반석, 믿음에 있어 확고한 이름을 주셨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반석과 같은 신앙 위에 주님은 당신 교회를 세우셨다. 본래 바위는 주님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바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바위 위에 서 있는 사도들의 신앙은 결코 정복당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9절) 사도가 땅에서 맨 이는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푼 이는 하늘에서도 풀리도록, 하늘나라의 열쇠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제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로의 행진을 계속하실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으로 내가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가? 혹시 나는 주님을 기계적인 주님, 혹은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의 양대 산맥인 이 두 분의 축일을 지내면서 그분들이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죽기까지 충실했던 신앙을 우리도 이 시대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진정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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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교회의 두 기둥이라고 불리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같은 날 기념하는 두 성인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이 다름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양면이며 교회의 풍요로움입니다.
단순하고 우직한 베드로는 반석과 같이 안정되고 굳건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반석은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안정감을 줍니다. 교회의 어떤 결정이 시대의 흐름이나 세상의 요구에 따라 쉽게 바뀔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자칫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주님의 가르침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충분한 시간을 두고 깊이 숙고하고 논의를 한 다음에 결정하여야 합니다. 급변하는 세상에 견주어 교회는 너무나 느리게 움직여서 마치 변화하지 않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를 향하여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나아갑니다.
그 반면 바오로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에 전파되는 시기에 바오로는 급진적 개혁을 이루어 냅니다.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의 오랜 전통인 율법과 할례의 짐을 지우지 않으면서, 그들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들어오는 길을 열었습니다. 복음의 핵심에 더 집중하면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유연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서 벗어나 보편 종교가 됩니다.
이 두 성인의 모습은 우리 교회가 복음에 중심을 두면서도 변화와 개혁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을 일으켜야 함을 알려 줍니다. 교회가 복음을 그 중심에 두면서도 세상일에 유연하게 다가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더하여 주시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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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반석이 될 것인가? 걸림돌이 될 것인가?>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5-19)
1)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에 대해서,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 받은 사도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게 위대한 사도가 그럴 정도였으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표현이 다르게 되고, 부각시키는 점이 다르게 되고, 그 일에 대한 판단이 다르게 됩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는, 베드로 사도의 잘못에 초점을 맞춘 말이고, 그의 부족했던 점만 부각시킨 말입니다. 만일에 그렇게만 말하고 그친다면, 그는 전체 교회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고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한 사도가 그럴 정도였으니......”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초점을 맞춘 말이고, 사도들이 맞서기에는 십자가 수난이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을 부각시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하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을 취소하지 않으셨다는 것에 연결시키면, 베드로 사도의 잘못은, 그의 자격을 문제삼을만한 일은 아니었다고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2) 따라서 베드로 사도가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 받은 일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에 연결할 일이 아니라, ‘걸림돌’이라고 혼난 일에 연결해서 생각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여기서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는,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리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의 행동이 사탄의 행동과 같다는 뜻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는 “내 뒤로 가라.”, 즉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입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는 말씀은, 그의 행동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는 뜻입니다. <제자로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뒤따라가면 ‘반석’이 되고, 앞에서 가로막으면 ‘걸림돌’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무슨 사심을 품고 예수님을 가로막은 것은 아니고,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구원사업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감정만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면 반석이 되고, 인간적인 감정만 앞세우면 걸림돌이 됩니다.>
3)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그런 박해자를 사도로 삼으셨을까?”라고 말할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그런 박해자를 위대한 사도로 변화시키다니, 놀라운 일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박해자였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하느님의 섭리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외면하는 일이 되고, 그가 위대한 사도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하느님의 섭리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게 됩니다.
4) 베드로 사도가 처음부터 완벽한 반석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과 바오로 사도가 처음부터 위대한 사도였던 것은 아니라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면서 동시에 큰 위안을 주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반석이었는데, 잠깐 걸림돌이 되었다가, 다시 반석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반석과 같이 단단하고 강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더라도, 언제 추락해서 걸림돌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반대로 지금 걸림돌처럼 살고 있어도 회개해서 반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반석인지, 나쁜 걸림돌인지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이고,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 바오로 사도를 생각하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마태 5,44)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박해자도 회개하면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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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제2독서의 말씀은 바오로 사도가 그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느끼는 감회를 매우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그야말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는 데 헌신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이제 자신도 예수님처럼 희생 제물이 되어 피 흘려 순교하게 될 것임을 예감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생의 마지막을 담담히 준비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이르러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시고, 제자들에게도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1)로 복음서의 문을 여는데,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정체가 16장에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으로 선포됩니다. 이를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하시고(16,21-23; 17,22-23; 20,17-19 참조),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제자였고,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으며(14,28-31; 15,15-20; 16,16-19 참조),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매고 푸는 권한과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고, 박해 속에서도 베드로는 주님의 보호 아래 교회를 충실히 이끌며 뒷날 순교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사명을 다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인 오늘, 특별히 주님의 사도이며 교회의 위대한 두 성인인 베드로와 바오로의 전구를 청하면서, 우리도 예수님과 더욱 일치하여 주님께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고백하고, 만나는 모든 이에게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열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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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28,19-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이 사명을 수행하며 참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감옥살이도 하였고, 매질도 당하였으며, 동족들에게서 모욕과 멸시를 받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에 뒤따르는 약속처럼 —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8,20). — 두 사도의 고된 여정에는 늘 주님의 손길이 머물고 있음을 오늘의 독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감옥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일련의 사건이 주님의 구원 행위였음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복음을 선포하며 겪은 여러 위기의 순간에 늘 주님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복음 선포에 대한 두 성인의 열정과 헌신을 기억합니다. 그들이라고 왜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온갖 두려움에서 구하시는 분이시며(시편 34[33],5 참조), 늘 당신의 일꾼과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시는 임마누엘이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유다인들, 이방인들, 그리고 임금과 총독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교 활동을 벌여 온 그동안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칠 때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하도록 달려야 할 길을 달려갑시다.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고 약속하신 임마누엘 예수님께서 우리가 달릴 그 길에 필요한 도움을 주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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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교회 공동체는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닌,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향하여 나아가는 지상 여정의 순례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베드로 사도는 명문가의 자제도 이른바 잘나가는 사람도 아닌 그저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며 두려움 속에서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 길을 멀리서 바라보았고, 주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숨어서 지냈습니다. 그런 그가 교회의 반석이 되어 하늘 나라의 열쇠를 관리합니다.
그럼 바오로 사도는 어떠하였나요? 그는 베드로 사도와는 달리 명문가 출신으로 율법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선동가며 하느님에 관한 가르침을 어지럽히는 불순분자였을 뿐입니다.
그런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을 박해하는 사람에서 주님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렇게 베드로와 바오로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속에서 교회는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두 사도를 이끌어 주지 않으셨다면, 그 둘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갔을 것이고 우리는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완성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변화되었듯이, 우리 자신도 우리가 만나는 공동체의 구성원도 하느님의 이끄심 안에서 변화될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들의 뜻과 계획이 아닌 주님의 뜻에 따라 완전하고 완성된 공동체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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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6,18)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맞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 대축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반성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만난 인연이 악연이 아니라 아름다운 인연이 되기 위해 서로 다른 인격이 서로의 다름에도 서로 보완하고 보충해 주는 관계와 상생의 관계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분명 가톨릭교회의 가장 중요한 분들이며 교회의 기초를 놓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두 분은 참으로 다른 분들입니다. 소위 출신 성분이나 자란 환경이나 학식 그리고 성격마저도 전혀 다르신 분들입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두 사람을 주님께서는 놀랍게 조화시키시며 당신의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한 주춧돌과 대들보로 활용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미사 감사송은 두 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이토록 다른 분들이시지만, 이 사도들이 지닌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 사도들이 지닌 공통점 안에서 우리가 두 성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고 봅니다.
첫째는 두 분 다 처음부터 완전하고 완벽한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회심을 통해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반하였던 상처를 지니고 살아갔던 분이잖아요. 비록 예수님으로부터 부활 후 용서받으셨지만, 그 자신 스스로는 평생 그 아둔한 기억(=흑역사)을 떨쳐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오로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고 더구나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했던 아픈 기억은 지울 수 없는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베드로나 바오로에게도 그 아둔하고 아픈 기억이 주님께 나아가는 데 전혀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디딤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두 사람의 회심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그들의 생애를 통해 지속적인 은총의 사건이었다는 점을 우리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누구도 처음부터 완전한 제자란 있을 수 없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체험해 가면서 점진적으로 예수의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가 고백하잖아요.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2디4,17)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고, 함께 계신 주님 안에 우리가 꿋꿋이 머물러 있다면.....
두 번째로 두 분 모두 ‘믿음의 사람이고 믿음으로 순교하신’ 분들이십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에서 이렇게 이 두 분의 믿음을 노래합니다. “이 사도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의 피로 교회를 세웠으며,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되었네!” 이처럼 이 사도들은 주님을 만나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위해 한 생을 기꺼이 바치신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숱한 시련과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순교의 영예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감히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는 없다고 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바오로는 세 번째 칼날에 목이 잘린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두 분은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믿음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순교로 증거하신 분들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4,12~13)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일생을 요약하듯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해 마련되어 있습니다.”(2디4,6~8)
누가 참으로 진실하고 참된 신앙인입니까? 자신의 생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비와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끊임없이 회심하고 변화되어, 믿음의 사람으로 자신이 전해 받은 신앙의 지혜를 말로 선포하고, 행동으로 증거하면서도 그로 인한 시련이나 환난을 사랑으로 기꺼이 하느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드리려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마치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훌륭히 싸우고, 달릴 길을 끝까지 달리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진정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들처럼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닌 사람을 우리 시대도 하느님과 하느님의 교회는 필요합니다. 아멘.
*오늘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맞아 축일을 맞는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와 함께 기도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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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어느 인디언 보호 구역에 새로 백인 교사 부임했습니다. 이 교사는 학생들의 수준을 알기 위해 시험을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는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시험을 봐야 하니 서로 떨어져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했고, 제일 나이 많아 보이는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어른들에게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상의하라고 배웠습니다.”
어렸을 때, 시험 본다고 하면 가방을 세워놓고 또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를 오가며 시험 감독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 평가만 중요했고, 공동 평가라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선 아이의 말처럼, 어려울 때는 함께 상의해서 푸는 것이 진짜 교육이 아닐까요?
공동체보다 개인의 역량이 더 중요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개인보다 공동체의 힘이 훨씬 큽니다. 그런데도 개인만 강조하다 보니 개인주의가 더 활개 치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당신께 필요 없음에도 굳이 제자단을 형성하셨습니다.
그냥 혼자 열심히 기도하면 될 것 같은데,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당신께서 함께하시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함을 명령하십니다.
이웃을 통해 큰 상처를 받았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통해 큰 힘을 받았다는 분은 더 많습니다. 무엇을 봐야 할까요? 이웃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뽑아서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특히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그 제자단 공동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단의 으뜸이라고 말하는 베드로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정도로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제자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죄 많고 또 부족한 이들이었지만, 이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교회를 성장 발전시킵니다. 베드로를 통해 신앙 고백의 모범을 세우셨고, 바오로를 통해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종종 공동체에서 벗어나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봅니다. 자기의 죄 많음 때문에 차마 신앙생활을 못 하겠다고 말하고, 또 다른 죄 많은 사람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이 정답이라면, 베드로와 바오로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또 다른 이들이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도 안 됩니다. 그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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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세례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 사제 수품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께 주님의 충만한 은총을 기원합니다. 모두가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삶을 본받고 복음 전파의 열정에 목말라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사람들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 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소년에게 묻습니다. “너는 구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누구냐?’ 했을 때 당당하게 ‘저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무개입니다.’ 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그래, 나는 네가 사랑하는 너의 예수다’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배움이 부족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감정에 휘둘리고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모든 일을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에 처형되었고 바오로는 참수되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두 역할이 합하여져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협력하며 교회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각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예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그들을 다그치신 분께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들을 재촉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으며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제대로 된 신앙수업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많은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 덕에 이방인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 오늘 우리의 소명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반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확실히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 14,29) 하고 말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어 주시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하셨습니다. 세 번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베드로를 당신의 도구로 쓰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시몬이 기적적으로 물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말 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주님의 안배로 베드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으뜸 제자로서의 몫을 다했습니다.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했었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였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언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 4,6-8) 주님을 만난 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천상의 희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삶의 쇄신을 통해서 주님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는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에도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노력했고 어려움 중에서도 희망을 찾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열정을 가진 신앙인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하며 도대체 나에게 주님은 어떤 존재인가? 묻고,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종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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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가 뭐라고 하든>
마태오 16,13-19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누가 뭐라고 하든
당신은 나의 누구입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
당신은 나의 당신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당신은 나에게 그러하십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당신에게 그러하듯이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당신의 누구입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당신의 나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당신에게 그러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당신이 나에게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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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교회의 두 기둥>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 34,6)
위 화답송 시편도 좋고,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화답송 후렴도 참 경쾌합니다.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교회의 선물로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니 기쁨이 저절로 샘솟는 느낌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찬미의 기쁨’으로, ‘찬미의 맛’으로 살아갑니다. 감사의 응답이 바로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러니 감사의 사람으로, 찬미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저절로 겸손한 삶이요 샘솟는 기쁨입니다. 방금 부른 입당성가 291장도 두 사도의 교회를 위한 보완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반석, 성 베드로와 선교의 주보, 성 바오로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시고 승리의 관을 받으셨도다”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의 사명을 환히 밝혀 비교해 주는 감사송 내용도 참 은혜롭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하였나이다.”
참 아름다운 보완관계의 사도요, 하느님께서 교회에 보내 주신 참 좋은 선물입니다. 어제 읽은 주석 내용 역시 두 분의 관계를 명쾌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베드로는 일치와 연속성의 위대한 상징인 교황에 의해 대표됩니다.
그의 역할이 없었다면 우리는 교회가 분열되고 붕괴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중앙 조직에서 분리된 교회의 일부에서 크게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많은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교회는 베드로의 중심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다시 하나의 교회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분열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반면 바오로는 또 다른 핵심 역할인 예언적이고 선교적인 역할을 대표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가장자리에서 일하고, 지리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교회의 관심을 소외된 사회적 관심 분야로 밀어넣고, 교회의 경계를 더욱 확장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교회의 일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하는’(semper reformanda) 교회입니다.”
두 사도의 보완으로 비로소 가톨릭 교회는 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w)”, 늘 한결같이 빛나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울 수 있는 삶입니다. 바로 살아있는 진리의 특징이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임을 깨닫습니다. 이 말마디는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를 포함한 모든 성인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성현들이 말하는 어른도 이런 분입니다.
“어른이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바른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날마다 몸부림치는 존재다.”<다산>
바로 안주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워지려 노력하는 다산의 피나는 내적고투를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어른은 말을 할 때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고, 행할 때 결과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으며, 오직 의만 따를 뿐이다.”
의로움을 추구하며 진리에 활짝 열려 있는 유연한 겸손한 이가 참으로 어른이자 성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똑같은 성인을 만들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의 역할이 있고 바오로의 역할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닮을 필요도 없고, 바오로를 닮을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나 고유의 성인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참으로 주님을 보완하고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교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은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역설적으로 고유의 참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두 사도는 우리가 배울 참 좋은 모범이 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극찬과 더불어 무한한 축복을 받아낸 베드로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을 정도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했기에 이런 고백이요, 역시 베드로를 꿰뚫어 알아본 주님의 감격에 벅찬 감동적 고백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 또한 이런 신앙고백의 베드로처럼 사는 것입니다. 얼마후 주님을 곡해함으로 “사탄아 물러가라”는 질책을 받았지만, 이 주님의 극찬과 축복의 말씀은 베드로 마음 깊이 각인되어 늘 평생 새롭게 자신을 쇄신하는 기회로 삼게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의 추억이 “늘 옛스러우면서 늘 새로운” 삶을 살게 함을 봅니다.
다음 순교의 죽음을 예감한 바오로의 유언같은 말씀도 그대로 우리의 유언으로 삼고 싶습니다. 역시 사도와 주님과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일치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참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사도의 삶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얼마나 힘찬 고무적인 고백인지요! 참으로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순교로 영적승리로 삶을 마감한 바오로의 고백은 그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지 그 깊이를 보여줍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방심할 수 없는 영적전쟁입니다. 혼자서의 싸움이, 영적전투가 아니라 더불어의 영적전투요, 교회의 도움, 주님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베드로가, 바오로가 장엄한 순교로 영적승리의 삶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음도 교회가, 주님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를 감옥에서 천사의 보호아래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교회 공동체의 열렬하고 한결같은 기도 덕분이었음을 봅니다. 오늘 사도행전 중심부에,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는 이 구절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우리의 자랑스런 배경이신 주님과 그분의 교회공동체가 함께 하기에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로 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복음 선포의 내 삶의 현장에서 천하무적 일당백의 주님 사랑의 전사로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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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음의 문을 열어 천국의 문도 여는>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어마어마한 권한을 주십니다. 이것은 물론 주님께서 베드로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에 주신 것이고, 베드로를 반석 삼아 손수 세우신 교회이니 교회에 이런 권한을 주심은 당연하지요.
그러니 신앙인이라면 교회에 이런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관건은 이런 권한이 교회에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이런 권한을 제대로 그러니까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느냐 그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대로 제대로 사용하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하늘나라의 문을 닫는 것일까요? 여는 것일까요?
이렇게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당연히 열라고 주신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를 보면 우리 교회가 열기보다 닫는 짓을 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당시 지도자들에게 크게 나무라신 것이지요.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막는 것이고 어떻게 막습니까?
얼마 전 동성 간에 결혼하는 분들을 교회가 사목적으로 축복하는 문제로 매우 보수적인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교황님을 강하게 비난했지요. 동성애와 동성 결혼을 교회가 합법화하는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성 결혼을 성사혼으로 교회가 축복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찾아오는 이들과 교회의 축복을 청하는 이들을 교회가 물리치지 않고 축복을 거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청의 선언문은 이렇게 분명히 얘기하고 있지요. “축복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으며 그 누구도 이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주님께서 오신다면 이들에게 어떻게 하실까요? 너희는 교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쫓아내시고, 너희는 저주나 받으라고 하실까요?
당시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같이하시자 비난하는 지도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의사는 건강한 이가 아니라 병자에게 필요하다며, 당신은 이들을 위해 오셨다며 그들을 나무라셨고, 흩어진 양들을 교회 안으로 모아들이려고 오셨다고 하셨지요.
베드로 사도는 또 어떻게 했습니까? 이방인들과 음식을 같이 먹은 것 때문에 할례받은 이들이 베드로를 비난하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하느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습니까?”
베드로와 후임 교황들은 교회 열쇠 지기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누구에게든 교회가 문을 열 때 그것은 단지 교회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천국 문을 여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들에게 문을 열지 않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당시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여는 사람이고 여는 교회입니까? 닫는 사람이고 닫는 교회입니까?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어 나도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고 이웃도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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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오늘 복음(마태 16,13-19)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16,13ㄴ) 예수님의 이 물음은 당신 신원에 대한 여론조사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태 16,14)
이번에는 제자들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의 이 대답은 예수님께 대한 완전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8-19ㄱ)
오늘은 '교회의 두 기둥이신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바오로는 예루살렘 교회 밖에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같은 때인 64년경에 네로 황제 박해로 순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셨고, 바오로는 참수형으로 머리가 잘리셨습니다. 바오로의 잘린 머리가 바닥에서 세 번 튀었는데, 부딪힌 바닥마다 물이 샘솟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을 '트리 폰타네'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화답송 후렴)
오늘 1독서와 2독서는 이에 대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신앙고백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가? 나의 그리스도(구세주)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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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kDIW9xFeS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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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 15)
언제나
먼저 오셔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기다려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기다림을
나누어 주십니다.
나눈다는 것은
서로의
허물을 기쁘게
덮어준다는
것입니다.
찌르는 배신도
피 흘리는
가시관도
덮어주면서
공동체가 되고
최선의 성장이
되어갑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다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죽는
가장 좋은 행복을
두 사도는 뜨겁게
보여주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통하여 길을 찾고
최선의 삶을
배워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안과 밖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피 흘리지 않는
땀 흘리지 않는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의
삶이란 없습니다.
두 사도의
발자국 밑으로
은총의 길이
생겨납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처럼
깊은 사랑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살아있는 기도
살아있는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거부해도
거부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무너진 꽃들 사이에
꽃을 다시 일으키는
십자가의 사랑이
있습니다.
믿지 못하는
우리의 눈동자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게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충만하게 한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였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
그들의 삶이
우리 교회를
여전히
풍요롭게 합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심장을
닮은
두 사도를 통해
행복은 용기이며
문을 여는
희망임을 배웁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사람이길
기도드리는
대축일의 기쁜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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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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