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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츠 – 괴테에게 발길질당한 천재 작가 위대한 패배자
렌츠 – 괴테에게 발길질당한 천재 작가 (1751-1792)
미워하기에는 너무 재능이 뛰어난 사람
세상에는 처음부터 패배자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더구나 그런 사람이 뛰어난 재능이라도 타고났다면 비극적인 길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사람들 중 하나가 야콥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1751-1792)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설상가상으로 괴테와 경쟁까지 벌였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비극적인 코미디였다. 렌츠가 젊은 괴테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과시한 것이 괴테에게는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1771년 초 스트라스부르에서 처음 만난 뒤로 차츰 우정을 키워 나갔다. 그런데 바로 이 우정이 훗날 괴테에게는 분노로, 렌츠에게는 불운으로 변했다. 두 사람은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고, 시를 썼으며, 연극을 완전히 뜯어고치려는 대담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점만 빼면 둘은 상당히 달랐다.
당시 스물 두 살이던 괴테는 유복한 부모 밑에서 아무 걱정 없이 자란 풍채 좋은 법학석사였고 그보다 1년 6개월 어린 렌츠는 신학 공부를 중단한 뒤 가정교사로 근근이 살아가는 산만하고 왜소한 청년이었다. 헤센 지방 출신의 괴테는 상당히 수다스러웠던 반면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늘날 라트비아에 해당하는 곳에서 성장한 렌츠는 발트 지역의 억양으로 천천히 말을 하는 유형이었다. 그 밖에 두 사람의 마지막 안식처도 극단적으로 갈렸다. 괴테는 기품 있는 바이마르 영주 묘지에 묻혔지만 렌츠는 모스크바의 빈민굴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괴테가 1771년 8월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을 때 렌츠는 그에게 기묘한 것을 물려주었다. 렌츠는 제젠하임의 아름다운 목사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을 연모했는데, 렌츠가 프리데리케에게 서신으로 이별을 고하기 전에 괴테가 먼저 열렬히 사랑에 빠진 것이다. 렌츠에게 프리데리케는 놓치고 싶지 않은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렌츠는 저돌적으로 달려들기에는 너무 소심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생각하면 결혼 같은 건 아예 가당치도 않는 일이라고 여겼다. 한 친구에게 자신의 연정을 이렇게 털어놓은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정말 그 여인을 사랑해도 될까?”
그런데 괴테로서는 렌츠가 자신에 앞서 프리데리케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평생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괴테는 나중에 제젠하임을 방문했을 때 프리데리케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다. 괴테가 연애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괜히 자기가 렌츠에게 양다리나 걸치는 몹쓸 사람으로 취급받았다는 것이다. 괴테는 렌츠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늘 자기 방식대로 사랑했고, 프리데리카가 그런 그를 알아주지 않자 유치하게도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게다가 이런 소동의 배경에는 나에게 피해를 주고, 주위의 동정을 끌어 나를 파멸코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괴테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참으로 이상할 정도의 거친 반응이었다. 왜 그랬을까? 괴테가 한동안 렌츠를 위험한 경쟁자로 생각했다는 것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실제로 그런 증거도 있다. 청년 렌츠는 결코 괴테에게 뒤지지 않는 시인이었다. 괴테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 그러니까 프리테리케가 죽은 지 23년이 흐른 1835년 괴테의 [제젠하임 시가집]이 출간되었다. 이 중에서 프리데리카에게 보낸 연애시 11편이 프리데리케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는데, 모두 괴테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최소한 다섯 편은 렌츠의 작품으로 증명되었다.
괴테는 1773년에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겐]으로 명성을 얻었다. 렌츠는 이듬해에 [연극에 관한 주석]을 발표했다. 그는 이 책에서 프랑스 드라마의 경직된 규칙들을 포기하고, ‘사건이 마치 천둥소리처럼 잇달아 전개되는’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을 실현한 작품이 바로 괴테의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었다. 그런데 렌츠는 [연극에 관한 주석] 서문에서 자신이 벌써 1771년에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책의 내용을 낭독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것은 괴테에게 영감을 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었다. 괴테는 당연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 불쾌감이 얼마나 컸던지 수십 년이 지난 1813년 [시와 진실]에서도 렌츠 때문에 야기된 일종의 ‘정신적 저작권’ 시비를 거론하며 렌츠를 강한 어조로 비난하였다. 그는 렌츠가 이런 시비를 불러일으킨 이유를 이렇게 썼다.
아마 나만큼 그 사람에게 가상적 증오의 대상이 되기에 적합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추구해야 할 위험하고 망상적인 목표로 나를 선택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패배자로 낙인 찍히고, 러시아에서 행방불명까지 된 사람에 대한 지나친 공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괴테는 1774년에도 렌츠로 인해 불쾌한 일을 겪었다. 까다로운 성격인 렌츠는 괴테의 주선으로 간신히 자신의 희비극 [가정교사]를 출간할 출판사를 찾았다. 그런데 렌츠는 별난 성격 그대로 이 작품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사실 렌츠의 유별난 행동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발표된 희곡들도 가명으로 발표했을 뿐 아니라 평생 동안 자신의 시를 한자리에 모아볼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가정교사]에서 나타난 활기찬 언어와 급격한 사건 전개를 보면서 괴테가 썼다고 느낄 정도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시인 크리스티안 슈바르트가 발행한 [독일 연대기] 잡지는 아예 괴테 작품으로 확정짓기도 하였다.
“셰익스피어 버금가는 괴테 박사가 [가정교사]라는 드라마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드라마의 줄거리는 혼란스럽게 엉켜 있다. 1950년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이 드라마를 개작하면서 줄거리를 가지런히 정리하였다. 1778년 초연에서 제 5막에 나오는 자기 거세 장면은 삭제되었다. 그런데 가난한 가정교사가 부유한 육군소령의 딸을 유혹하는 사회비판적 요소는 동시대인들을 매료시켰다. 또한 드라마의 언어 역시 60년 뒤에 게오르크 뷔히너가 표상으로 삼고 현재의 우리에게도 생생하고 활기찬 느낌을 줄 정도로 정곡을 찌른다. 가정교사는 극중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진실을 말하더라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 그건 오이샐러드의 후추처럼 대화의 맛을 살리는 양념입니다.”
퇴역 소령 집으로 돌아온 딸을 맞이하며 내적 갈등을 드러낸다.
“내가 너를 다시 안게 되었구나. 이 몹쓸 것아!”
괴테와 착각을 일으키고, 뷔히너의 찬탄을 받았던 렌츠는 시에서도 하인리히 하이네를 연상케 하는, 춤추는 듯한 냉소적 가벼움을 보여준다.
가련한 어린 소녀여. 환영해요.
요란한 거짓의 계곡에 온 것을!
그대 그곳으로 가는구려. 미소 짓는 소녀여,
그대를 영원히 속이기 위해.
그대 어째서 우는 건가요? 세상은 둥글고
그 위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오.
울음은 건강을 해칠 뿐
상실은 필연이라오.
렌츠는 이 시를 자신의 대녀이자 괴테의 조카딸에게 바쳤다. 1776년 초 렌츠는 무일푼으로 스트라스부르를 등졌다. 그는 친구들 앞에서 소름끼치면서도 달콤하게 울리는 이별의 송가를 낭독하였는데, 그 안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나는 인생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세 번이나 헤어져야 했네….
1776년 3월 렌츠는 바이마르에 모습을 나타냈다. 괴테가 지난해 11월부터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의 초청으로 머물던 곳이었다. 렌츠는 괴테에게 이렇게 썼다.
"여기 날갯죽지 꺾인 종달새 한 마리가 도착했네만 이제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모르겠네."
렌츠는 아우구스트 공작에게 근사한 시를 한 편 써 바쳤고, 궁정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렌츠의 재치 있는 말솜씨에 무척 즐거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성격과 제어할 수 없는 조롱에 당혹스러워했다. 그래서 렌츠는 바이마르 궁이 생활비 전액을 책임지는 공작의 손님이었지만 궁전에서 1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바트 베르카에서 지내야 했다.
같은 해 6월, 아직 감성과 열정으로만 넘치던 ‘질풍노도운동(합리주의 계몽 숭배에서 벗어나 자연, 감정, 개인주의를 고양하는 문예운동으로 18세기 말 독일에서 일어났다.) 시기에 자신의 모습을 아는 사람과 바이마르 궁정에 함께 있는 것이 몹시 불편했을 뿐 아니라 그런 렌츠가 궁정에서 어릿광대 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도 못마땅했다. 게다가 자신이 흠모하던 슈타인 부인이 9월에 렌츠를 자신의 영지로 불러 일곱 자녀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한 것도 상당히 신경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1776년 11월 렌츠는 ‘미련한 짓(괴테의 표현이다)’ 을 저질러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불렀다. 이 미련한 것이 어떤 일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궁정 사람들을 조롱하는 시를 쓴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괴테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렌츠를 24시간 안에 여기서 떠나게 하라는 공작의 명령을 받아냈다.
한편으로는 괴테의 심정이 이해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비정하고 매몰찬 행동으로 느껴진다. 현실 논리에 어둡고 현실을 타개할 재주도 없는 옛 친구를 이런 식으로 내팽개치는 행동은 자칫 자멸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괴테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승리자가 패배자에게 발길질까지 한 셈이다.
이처럼 렌츠의 파멸에는 천차만별의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모두 다섯 개 정도로 원인을 구분해보면 그 중 세 개가 괴테 때문이었다.
첫째, 렌츠에게는 혼란스럽게 뒤엉킨 수많은 착상을 일목요연하게 하나의 작품으로 엮어내는 데 필요한 ‘형상화의 의지’ 와 ‘철저한 장인 정신’ 이 부족했다. 게오르크 뷔히너는 렌츠의 나이에 이미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마 렌츠가 괴테만큼 오래 살았다고 하더라도 긴 호흡을 가지고 자신의 몇몇 위대한 작품에 지속적인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업을 수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토마스 만은 요셉에 관한 4부작 소설을 완성하는 데 16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이 걸렸고, 괴테는 1771년에 처음으로 구상한 파우스트를 구체적인 형식으로 완성하기까지 무려 60년 동안 자신과 씨름해야 했다.
둘째, 렌츠는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고, 자신의 작품을 선전하고, 자신을 상품화할 줄 아는 기술이 없었다. 이 점에서는 괴테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괴테는 자신을 찬양하는 시를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 [예술과 고대에 관하여] 에 실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만큼 자기 선전에 능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렌츠에게는 리하르트 바그너나 브레히트, 또는 살바도르 달리처럼 자신의 명성을 기발하게 관리하는 능력도 없었다. 자신의 책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거부한 사람이 아니던가!
‘나는 형상화 능력 없는 사람’ 이라는 생각과 ‘내 작품이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 는 태도, 이 두 가지만으로도 렌츠가 괴테처럼 높은 명성을 누릴 수 없었던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그가 괴테에 버금갈 정도로 걸출한 문학적 재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런 예정된 실패 위에 괴테의 그림자가 3겹으로 짙게 드리워지는 바람에 렌츠가 겪은 좌절은 더 한층 가속화되었다.
렌츠보다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도 [괴츠 폰 베를리힝겐] 을 쓴 작가가 1년 사이에 연이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면 아마 기가 꺾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니체는 언젠가 “모든 위대한 재능은 다른 사람들이 지닌 보다 미약한 능력과 싹을 억누르고, 주변의 다른 재능을 황폐하게 만드는 재앙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고 말했다. 베토벤도 잠재력을 지닌 수많은 작곡가의 용기를 꺾어놓은 위대한 천재에 속했다.
물론 이것은 괴테를 탓할 수 만은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우선 괴테는 다른 위대한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동등한 자리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하는 성향이었다. 실러가 ‘문학적 천재’라는 말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1794년 바이마르를 방문했을 때 괴테는 뭐라고 했던가? 그는 실러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그(횔덜린)에게 좀더 짧은 시를 쓰고 인간과 관계되는 개별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충고했다."
베티나 브렌타노(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누이)는 이러한 괴테를 가리켜 ‘자기보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괴테는 1808년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에게는 뭐라고 썼던가? 클라이스트는 “존경하는 추밀고문관(괴테의 직함이다)께” 라는 말로 시작되는 편지에 자신의 비극 [펜테질레아]의 일부를 동봉하며 이 작품을 바이마르 궁정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지를 정중히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괴테는 이렇게 썼다.
"나는 자신의 작품이 반드시 상연되리라고 생각하고 극장을 기다리는 총명하고 유능한 젊은이들을 보면 우울하고 걱정스럽네."
게다가 마치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을 보는 것처럼 불쾌하다고까지 말했다. 나중에는 한 서평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클라이스트가 지은 작품은 자연이 만든 아름다운 몸이 마치 갑자기 불치병에 걸린 것처럼 언제나 소름과 혐오감을 유발한다."
토마스 만은 괴테의 이 평가를 ‘비난받아 마땅한’ 평가라고 했고, 스위스 작가 헤르만 부르거는 1987년에 이렇게 썼다. 괴테가 클라이스트에게 내뱉은 그 교만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파우스트 2부를 포기하겠다.
괴테는 렌츠를 왜소한 인물로 만들려고 두 번의 시도를 했다. 한번은 1776년에 자신의 근거지인 바이마르에서 렌츠를 몰아낸 일이었고, 다른 한번은 1813년 [시와 진실] 제 3부에서 렌츠를 언급한 일이었다. 괴테는 렌츠를 가리켜 키는 작지만 귀여운 외모에 ‘다소 뭉툭한 얼굴선을 지닌 사랑스럽고 영리한 사람’이고, 그다지 유려하지는 않지만 편안한 언어를 구사한다고 말했다. 또한 “짧은 시들, 특히 자신이 쓴 시들을 아주 잘 낭독하고, 천박한 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재능이 뛰어나다”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이 부분에는 어쩐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어조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감히 자신과 재능을 견주려고 했던 젊을 적 친구에 대한 불쾌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싶다. 렌츠는 실제로 자신의 행방불명된 원고 [우리의 결혼에 관하여] 에서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괴테는 [시와 진실]에서 횔덜린과 클라이스트라는 두 천재를 미흡하나마 어느 정도 문학적 가치를 인정해주었지만, 렌츠에 대해서는 단순히 깎아 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악의에 찬 비방까지 서슴지 않았다. 괴테와 렌츠가 마지막으로 만난 지 37년이 지났고, 렌츠가 죽은 지 21년이 흐른 1813년 일이었다. 물론 바이마르에서는 렌츠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렌츠 탄생 250주년 기념식에 부친 추도사에서 [시와 진실] 제 14권에 나오는 괴테의 언급을 “이미 고인이 된 동료를 두 번 죽이는 최악의 공격”이었다고 평했다. “(괴테의) 한마디 한마디는 자신에 대한 기합이자 (렌츠의) 무덤으로 보내는 잘 다듬어진 저주였다.”
당시 예순넷의 괴테는 이렇게 썼다.
:그(렌츠)는 음모를 꾸미는 데 소질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특별한 목적 없이 그냥 음모가 좋아서 음모를 꾸미는 성향이었다…. 그는 도착적인 수단으로 자신의 애착과 미움에 현실성을 부여하려 했고, 언제나 스스로 일을 망쳐 버렸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된 적이 없거니와 증오하던 이들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전체적으로 평한다면 렌츠라는 인간은 단지 자신을 벌하기 위해 죄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괴테는 계속 썼다.
"나름대로 상당한 특색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아주 우둔하고 괴팍한 인간한테도 사랑스런 부드러움이 풍겨 나올 수 있으니까…. 그의 일상은 아무 쓸모 없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교묘한 재주가 있었다."
이 말에 이어 괴테는 앞서 인용했던 것처럼 렌츠가 자신을 ‘가상적 증오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썼다.
그렇다. 증오가 없을 수는 없다. 1776년 바이마르에서 쫓겨난 렌츠는 스위스에서 힘들게 살아갔고, 때때로 스스로 통제력을 상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778년 1월 렌츠는 포게젠 지방의 발더스바흐에서 개신교 목회 일을 하던 요한 프리드리히 오벌린의 집을 비척거리며 찾아 들어갔다. 오벌린은 그런 그를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1845년 게오르크 뷔히너는 오벌린의 일기와 렌츠의 편지를 토대로 한 천재 작가의 폭발적 광기를 묘사한 소설 [렌츠]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뷔히너가 어느 정도까지 광기를 문학적 자유로 포장하고, 세상에 대한 냉소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렌츠는 백설로 뒤덮인 포게젠 지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피로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때때로 머릿속이 맑지 않은 것이 불쾌한 따름이었다… 정체불명의 공포가 엄습했다… 마치 광인이 말을 타고 그를 쫓아오는 듯했다.”
그 외에 렌츠의 일상은 평범했다. 심지어 오벌린 목사의 권고로 직접 설교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 2층 창문에서 몸을 내던져 팔이 부러지는 일이 있었고, 또 한번은 우물에 빠져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가슴속으로 또다시 “저승의 피리소리가 들어왔다… 그는 엄청나게 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주먹을 하늘로 뻗어 신을 움켜잡고 구름 사이로 끌어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이 세상을 이빨로 질근질근 씹어 창조주의 얼굴에 뱉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오벌린은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렌츠를 스트라스부르로 쫓아 보냈다. 뷔히너의 유명한 마지막 문장처럼 “그는 그렇게 살아갔다.” 렌츠는 [가정교사]의 주인공처럼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참담한 삶을 이대로 마지막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 내게는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렌츠는 카이저슈툴 근처에 에멘딩겐에 사는 괴테의 매제 요한 게오르그 슐로서 집에 거처를 구했다. 그런데 분노와 광기의 화신처럼 행동하는 렌츠를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한 슐로서는 그를 처음엔 구두장이 집에 보냈다가 나중에는 산지기 집에 맡겼다. 괴테가 외교참사관에서 추밀고문관으로 승진한 1779년 여름 예나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렌츠의 동생 카를이 형을 리가의 고향집으로 데려갔다.
그 사이 리보니아의 관구총감독이 된 아버지는 아들의 병을 남에게 털어놓고 부끄러운 병으로 생각했고, 아들의 문학작품도 정신병적 탈선으로 여겼다. 그런데 다행이 고향집에서 건강을 회복한 렌츠는 1781년에 모스크바로 떠났고, 거기서 한 문학회에 가입해 셰익스피어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였다. 한동안 가정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던 1792년 5월 렌츠는 일정한 거처도 없이 거리를 방황하다가 빈민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향년 마흔한 살이었다. 누구에게도 따뜻한 사랑 한 번 받지 못한 외로운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 해 렌츠의 재능을 기리는 일이 있었다. 살아서 겪지 못한 것을 죽어서야 처음 경험해보는 찬사였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카람진은 [러시아 여행자의 편지]에서 렌츠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깊은 우울증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도 그는 탁월한 문학적 착상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고, 선량한 정신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 사람들은 그가 스물다섯 살 때까지 쓴 모든 작품을 보면서 한 위대한 정신의 여명을 느꼈다. 그러나 먹구름이 이 아름다운 여명을 덮었고, 해는 결코 뜨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를 위대한 문호로 만들었던 그 깊은 감성의 바다가 렌츠에게는 오히려 몰락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마 상황이 조금만 달랐더라도 렌츠는 불멸의 작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렌츠의 문학이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데에는 괴테의 [시와 진실]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문화 권력의 핵심에 있던 괴테의 말 한마디는 곧 진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1828년 루트비히 티크에 의해 3권짜리 렌츠 전집이 발간되었다. 렌츠가 쓴 글 중에 이런 시구가 있다.
“파괴하는 삶이여, 너울너울 날아라!”
대부분 다른 시처럼 이 시구에도 날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렌츠처럼 그렇게 한 점 희망 없이 철저하게 무너진 사람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