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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시인
1955년~
경상북도 울진 출생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
1979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
2001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시전문 계간지 포에지 편집위원
1978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평론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
1994 제9회 소설문학상 우수상
1997 제16회 김수영 문학상
2000 제1회 현대시 작품상 [나의 우파니샤드,서울] 제15회 소월 시문학상 [잘익은 사과]
ㅇ시집
[또 다른 별에서] , 문학과지성사, 1981. /[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 [어느 별의 지옥], 청하, 1988 / [우리들의 음화] 문학과지성사, 1990 /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 문학과지성사, 1994 /
[불쌍한 사랑기계] , 문학과지성사, 1997 /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2000 / [연꽃나무가 자라는 배꼽], [7대 문학상 수상시인 대표작] , 작가정신, 2000, / [잘 익은 사과] [제15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2000/ [한 잔의 붉은 거울], 문학과지성사, 2004
[피어라 돼지], 문학과 지성사, 2016
환한 걸레 / 김혜순
물동이 인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저 아래 우물에서 동이 가득 물을 이고
언덕을 오르는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땅속에서 싱싱한 영양을 퍼올려
굵은 가지들 작은 줄기들 속으로 젖물을 퍼붓는
여자들 가득 품고 서 있는 저 나무
아래 누워 그 여자들 가랑이 만지고 싶다
짓이겨진 초록 비린내 후욱 풍긴다
가파른 계단을 다 올라
더이상 올라갈 곳 없는
물동이들이 줄기 끝
위태로운 가지에 쏟아 부어진다
허공중에 분홍색 꽃이 한꺼번에 핀다
분홍색 꽃나무 한그루 허공을 닦는다
겨우내 텅 비었던 그곳이 몇 나절 찬찬히 닦인다
물동이 인 여자들이 치켜든
분홍색 대걸레가 환하다
□ 안도현 시인 시평
김혜순 시인에게 와서 우리 시의 여성성은 비로소 착근을 한 느낌이다. 시가 몸속으로 젖어들어가고, 몸이 시속으로 들어가 불화와 화해가 한 식솔이 됐다. 이 시에서 물동이.
여자.가랑이.땅속.젖물.나무.초록.비린내와 같은 말은 기호의 모양은 다르지만 그 뜻은 대동소이하다.
이 말들은 서로 내통하면서도 서로를 밀어내는 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생산의 고향인 '여자들의 가랑이' 를 이처럼 건강한 감각으로 되살려 낸 시는 많지 않다. 걸레가 환하다니! 나도 환해진다.
※ 출처: 중앙일보
□ 김혜순 시인
1955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초등 학교에 입학할 무렵 강원도 원주에 이사해 거기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원주여고를 거쳐
1973년 건국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가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78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처음 써 본 평론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입선하고, 이어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도솔가」등의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대학 졸업 뒤 「평민사」와 「문장」의 편집부에서 일하던 그는 1993년 「김수영 시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1998년 '김수영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낯설고 이색적이어서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던 그의 시세계는 비로소 문단의 공인을 받는다.
2019년 캐나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그리핀 시 문학상(Griffin Poetry Prize)를 수상했다.
김혜순 시의 착지점은 '몸', 그것도 해탈이 불가능한 '여성의 몸'이다.
해탈이 불가능한 몸에서 출발한 그의 시적 상상력은 때때로 그로테스크한 식육적 상상력으로까지 뻗친다. 이런 점에서 김혜순의 시를 "블랙유머에 바탕을 둔 경쾌한 악마주의"의 시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는 자기 시의 발생론적 근거를 '여성'과 '여성의 몸'에서 찾는다.
이에 대해 그는 "식민지에 사는 사람은 절대 해탈이 불가능하다. 여성은 식민지 상황에서 살고 있다. 사회학적 요인이 아니라 유전자에 새겨진 식민지성이 있다.
이때의 여성은 인식론적 여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여성이다."라고 말한다.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 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제15회 2001년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잘 익은 사과』,《문학사상사》에서
모래여자 /김혜순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을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검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수상시 ]
김혜순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건국대 및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김수영문학상, 현대시 작품상 수상. 현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어느 별의 지옥』『우리들의 음화』『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불쌍한 사랑기계』등.
미라 같은 '여성의 삶' 깊고 조용하게 응시
―미당문학상 심사평
최종심에 오른 250여 편의 시 가운데서 오직 한 편을 뽑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이라면 점과 취향에 따른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고, 그런 만큼 일렬로 순위를 매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250여 편의 시 속을 조심스레 헤집고 들어가 오랜 시간 의견을 조율하였다.
우선 전체적인 느낌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발표작품이 너무 많아서인지 몰라도 긴장이 풀어진 작품이 비교적 많았다는 점, 그리고 너무 사적인 세계에 빠져있는 경향이 지적되었다. 그래서 우선 시적 긴장과 공공성이라는 관점에서 좀더 신뢰감을 준 몇 분의 시인으로 좁혔고, 그들의 작품 가운데서 10여 편이 최종 후보작으로 선별되었다.
이후 논의는 작품의 어떤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시인의 전체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전개되었고, 한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지적과 그에 대한 동의가 있으면 해당 작품은 제외되었다. 가령 어떤 작품은 강력한 추천을 받았으나, 최근 우리 시단에 유행이 되고 있는 '선(禪)적인 모호성'이 지적되어 제외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김혜순의 '모래 여자'가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시력 20여 년의 김혜순은 우리 시단에서 가장 개성적인 시 세계를 구축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개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그의 시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은 이도 있지만, 그런 이들조차 김혜순의 시가 고수의 경지인 것은 인정하는 편이다.
'모래 여자'는 차분하게 정제된 언어를 보여주는 시다. 미라의 발굴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마치 미라의 발굴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모래 여자의 존재를 조금씩 펼쳐 보여준다. 독자들은 숨을 죽이고 모래 여자가 어떻게 존재했고 어떤 취급을 받았으며 이제 어떤 모습으로 남았는지를 비밀의 베일을 펼치듯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 모든 모습이 드러났을 때, 독자들은 그 모래 여자가 결국은 갖은 소외와 수모의 삶을 조용히 견뎌온 한 여성의 삶의 환유임을 알게 된다.
'모래 여자'는 어떤 면에서는 김혜순적이고, 다른 면에서는 김혜순적이 아니다. 김혜순의 깊고 조용한 응시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고, 우리 시대 여성성의 한 기호가 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심사위원들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다채로움보다는 조용함이라는 생각에서 '모래 여자' 쪽을 조용히 선택했다.
◆ 심사위원 = 정현종, 김주연, 황현산, 최승호, 이남호 (대표집필 이남호)
돼지는 말한다/ 김혜순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 없어
나는 선방에 와서 가부좌하고 명상을 하겠다고 벽을 째려본다
있지, 지금 고백하는 건데 사실 나 돼지거든. 있지, 나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어
더러워 나 더러워 진짜 더럽다니까. 영혼? 나 그런 거 없다니까
그러나 머리는 좋지 아이큐는 포유류 중 제일 높지 청결을 좋아하지
난 화장실 넘치는 꿈 제일 싫어해 그 꿈 꾸고 나면 아이큐가 삼십은 빠져
나는 더러운 물속에서 아침잠을 깬 사람처럼 쿨적거린다
코를 풀고 싶지만 선방엔 휴지가 없다 스님들은 콧물 안 나오나?
있지, 너 돼지도 우울하다는 거 아니? 돼지도 표정이 있다는 거?
물컹거리는 슬픔으로 살찐 몸, 더러운 물, 미끌미끌한 진흙
내가 로테르담의 쿤스트할레에서 얀 배닝이라는 사진가가 일제 식민지 치하
수마트라 할머니들 찍은 사진을 봤거든 그런데 그 사진 속 표정은 딱 두 종류였어
불안 아니면 슬픔, 그래서 난 걸어가면서 그 주름 얼굴들에게 이름을 붙여줬지
당신은 불안, 당신은 슬픔, 슬픔 다음 불안, 불안, 슬픔, 슬픔.
나의 내용물, 슬픔과 불안, 일평생 꿀꿀거리며 퍼먹은 것으로 만든 것
슬픔과 불안, 그 보리밭 사잇길로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돼지 한 마리 지나가네
그런데 돼지더러 마음속 돼지를 끌어내고 돼지우리를 청소하라 하다니
명상하다가 조는 돼지를 때려주려고 죽봉을 든 스님이 지나간다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 없어
아무래도 돼지가 죽어서 돼지로 부활한다면 어느 돼지가 믿겠어?
아무래도 여긴 괜히 왔나 봐, 나한테 템플스테이는 정말 안 어울려
있지 조금 있다 고백할 건데 나 돼지거든 나 본래 돼지였거든
뒈지는 돼지 / 김혜순
돼지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다. 내내 돼지다. 우울한 돼지다. 늑대가 온다 외치는 돼지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돼지를 왕으로 뽑은 돼지다.
오 멋진 시궁창! 외치며 베개를 껴안는 돼지다. 뒈질
돼질 낳아주신 엄마를 잡아가면 좋겠네 혼자 웃는
돼지다. 온 세상이 다 쌀죽이라고 생각하는 입술이
부르튼 돼지다. 4XL 돼지다. 침대에 꽉 찬 돼지이다.
그 이름 도무지 돼지다. 바다 건너란 말만 들어도 벌
벌 때는 돼지다.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예예 돼지다. 밤하늘 드넓은 궁창을 우러르기만 해도 무서워
뒈져버리는 돼지다. 뒈지는 돼지는 돼지라고 생각하
는 뒈지는 돼지다
팔다리가 축 늘어진 돼지, 꼬리를 가랭이 사이에
감추고 쿨적거리는 돼지. 허공을 뮦었는데 왜 이리
무거워 돼지,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면 뜨거운 구름
냄새가 나 돼지, 부드러운 도대체 돼지, 아늑한 이윽고
돼지, 일평생 나를 타고 놀아 돼지, 쥐가 새끼를
갉아먹어도 아늑한 돼지, 눈동자에 무엇을 껴입었
니 돼지, 왜 돼지가 돼지인 줄 모르나 돼지, 사진은
아는데 거울은 아는데 너만 모르는 돼지. 한번도 창
문을 내다본 적 없는 돼지, 이빨 뽑힌 돼지, 탄식 돼
지, 후회 돼지, 이빨 뽑히고 꼬리 잘린 다음 입 안이
혼자 남은 외로운 혀 돼지, 그러나 입만 벌리면 돼지
돼지 소리가 나는 돼지, 고기 돼지
qqqq 까마귀가 머리에 올라 앉을 때 돼지가 따라서 우는 소리
qqqq 주인은 감옥 가고 똥물이 무릎 위까지 차
올라올 때 돼지가 지르는, 당연한 비명
qqqq 돼지가 돼지가 아니라고 할 때 속으로 외치는 말
qqqq 엄마를 데려갈 때 뒤돌아보는 건 돼지라고 말하는 돼지가 하는 말
qqqq 무엇보다 제가 돼지인 줄 모르는 우리나라 돼지들의 교성
철근 콘크리트 황제 폐하 / 김혜순
철근 콘크리트 사벽 황제 폐하!
기분이 엿 같아본 적은 없으세요?
도와달라는 소리 들어본 적은 있나요?
(다들 그렇게 외치니까)
왜 나보고 자꾸만 나를 버리라는 거예요?
엿 같다니까요?정신과 의사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경찰도 아니면서
이 세상은 후손 거라면서 왜 자꾸 셋방살이하는
기분이 들게 해요?
왜 새벽에 일어나 벽만 바라보라는 거예요?
지붕에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산 아래 좀 내려다보고 싶어요
아니면 부엌에 가서 밥 좀 더 먹고 올게요
속의 아이는 절대 성장하지 않고 징징대고 껄떡거리는데
왜 내가 벽 보고 나를 버려야 돼요?
내가 어디 있어서 나를 버려야 돼요?
철근 콘크리트 사벽 황제 폐하!
어깨에 손 좀 올려도 될까요?
나한테 말 좀 해봐요. 당신 말 듣는 건
물속에 빠진 내 그림자를 찾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덤벼봐! 사변 벽아! 해봤자 소용없다는 건 나도
알아요.
죽봉을 든 스님이 이기 뭐고? 하면서 내 어깨를
세번 치네요
나는 지금 벽 앞에 앉아 꿀꿀거리는 돼지 기분이
예요
시간을 백열등처럼 매달아 놓고
불안이 마련해준 특별 방석에 앉으셔서
돼지더러 돼지를 버리라 닦달하시니 대단하시네요
뒷주머니에 넣어둔 휴지를 부적처럼 꺼내 보다가
철근 콘크리트 사벽 황제 폐하!
앞으로 내가 먹을 쌀 한 톨 한 톨이 다 회오리치나봐요.
몸 바깥이 아파요.
육체로부터 나가지 못해봤나요?
네 분 벽님이 서로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나를 가운데 좌정시킨 다음
화두에 끌리지 말고 화두를 끌고 가라니
나더러 어디로 가란 말씀이예요?
도대체 넌 누구야?
글은 왜 쓰는 거야?
너 지금 나보고 죽자는 거야?
아님 나보고 먼저 죽으라는 거야?
타인의 고통을 먹고 사는 년아
나는 정말 면벽은 못 하겠어
벽하고 얘기하는 건 체질에 안 맞아
< 김혜순 '피어라 돼지' 시집의 첫 장>
<피어라 돼지>, 2016,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