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이야기 II] 달라진 연못 풍경의 새 주인공, 수국…… 그리고 왕자귀나무
[2010. 7. 19]
연못가의 풍경이 바뀌었습니다. 호우주의보까지 내렸던 천리포 지역의 집중호우로 엊그제 큰 연못의 물이 넘치는 약간의 혼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계절의 변화가 뚜렷해진 까닭입니다. 글과 사진을 통해 서둘러 그 변화를 차례차례 보여드리려 했으나, 미처 다 보여드리지 못한 변화는 적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보여드린 변화가 적다 해야 할 겁니다.
연못 한가득이던 수련 꽃이 모두 떨어진 건 지난 주에 이미 말씀올렸지요. 그리고 겨를을 내서 꼭 전해드리려 했던 해당화(Rosa rugosa) 꽃이 떨어진 것도 한 달 훨씬 더 지났습니다. 우리 수목원에는 지금 사진으로 보여드리는 해당화 외에 중국해당화(Rosa roxburghii for. normalis), 흰해당화(Rosa rugona 'Alba')도 있지요. 흰 해당화는 언덕 너머 비탈 길섶에 서있지만, 여러 그루의 해당화와 중국해당화는 큰연못 가장자리에 있습니다. 지난 늦봄, 만병초의 꽃이 활짝 피어나던 때에 예쁘장하게 꽃을 피웠던 나무들입니다.
해당화는 원래 바닷가 모래 밭에서 자라는 낙엽성 나무로 기껏해야 1미터 정도 크기로 자라는 작은 나무이지요. 바닷가의 소금기 머금은 바람 맞으며 자라는 나무들이 왕성한 생명력을 특징으로 가진 것처럼 해당화도 작지만 생명력이 강한 나무에 속합니다. 그래서 자생하는 바닷가 모래밭이 아닌 뭍에 들어와서도 잘 자랍니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소나무, 즉 해송(海松)이 내륙에서도 잘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수목원에서 연못 가장자리에 해당화를 심어 키우는 것은 그들이 좋아하는 자리를 내 준 것이지요.
해당화를 바라보면 섬마을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그건 오래 전에 불렸던 유행가 '섬마을 선생님'의 노랫말 때문이겠지요. 지금도 조금은 청승맞았던 그 가락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로 시작하는 노래이지요. 요즘 젊은이들이야 모르기 십상이지만, 60,70년대에 라디오를 요즘 텔레비전처럼 끼고 살았던 분들이라면 해당화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추억 아닌가 싶습니다.
계절 지나면서 제 빛깔과 모습을 바꾼 식물의 지난 모습이 그리워지는 게 어디 해당화 뿐이겠습니까. 그들의 지난 모습을 다시 만나려면 또 한해를 가만히 기다려야 하겠지요. 그래서 지난 시간들을 아쉬워하다 보면 지나간 것들, 혹은 사라진 것들이 참으로 소중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있을 때에는 잘 모르지만, 꼭 지나간 뒤에야 느끼게 되는 뒤늦은 존재감이라는 게 이런 것이겠지요.
지금 수목원의 연못 가장자리를 화려하게 하는 식물은 원추리 종류의 화려한 꽃들과 수국 꽃입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우선 큼지막하게 피어, 수목원을 찾는 분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수국((Hydrangea macrophylla for. otaksa) 종류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늦은 봄부터 피어나서 여름 내내 탐스러운 꽃을 피어내는 수국은 아마도 이 즈음에 가장 화려한 꽃 가운데 하나이지 싶습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볼 수 있는, 우리가 수국이라고 부르는 나무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는 약 80종이나 되는 수국 종류의 나무들은 대개 아시아 동부와 아메리카 지역에서 자생합니다. 품종 이름에 'White' 나 'Snow' 가 붙어 하얀 색의 꽃을 피우는 종류에서부터 'Bluebird'라는 이름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싶을 만큼 청초한 푸른 색의 꽃을 피우는 종류까지 수국 종류의 꽃 색깔은 다양합니다. 모두가 큼지막한 꽃을 피운다는 점이 이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에 공통으로 해당하는 특징입니다.
꽃이 탐스럽다고 했지만, 한 송이 한 송이의 꽃이 큰 것은 아니지요. 잘 아시겠지만, 여러 송이의 꽃이 한데 모여서 커다란 공 모양을 이룬 것입니다. 꽃 뭉치가 큰 경우에는 조금 과장하자면 거의 핸드볼 경기에 쓰이는 공의 크기에 버금갈 정도까지 됩니다. 그런 꽃뭉치가 작은 수국 나무 전체에 주렁주렁 매달리니 얼마나 화려하겠어요. 게다가 초록의 이파리들에 비해 선명하게 눈에 띄는 색깔이기까지 하니, 오죽 눈에 잘 띄겠습니까.
그 꽃뭉치 모양 때문에 수국의 한자 이름은 수구화(繡毬花)입니다. 비단 수(繡)와 공모양 구(毬)입니다. 비단처럼 고운 천으로 빚은 공처럼 생긴 꽃을 피우는 나무라는 이야기겠지요. 자잘하게 모여 피어있는 수국 꽃 뭉치는 보는 것처럼 비단 느낌이 든다 해도 될 만큼 곱습니다. 수국 종류의 나무들은 이 탐스럽고 고운 꽃이 피어있는 상태 그대로 여름을 나게 됩니다. 지난 해에 드린 '나무편지'에서는 아마도 찬 바람 드는 가을 초입에서도 수국 꽃이 남아있더라는 말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비단처럼 곱게 보이는 부분이 꽃잎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실은 꽃을 둘러싼 꽃받침잎입니다. 화려하게 펼쳐진 부분이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잎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꽃받침잎이 크게 발달한 경우는 이미 '나무 편지'를 통해 여러 번 보여드렸습니다. '크리스마스 로즈' 혹은 '사순절의 장미'로도 불리는 헬레보러스나 산딸나무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지 싶습니다. 작은 꽃만으로는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기 어려운 까닭에 꽃을 드러내보이기 위해 선택한 생존전략인 겁니다.
꽃받침잎도 꽃의 한 부분이니, 저 꽃뭉치를 꽃이라 부른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닙니다. 또 꽃받침잎과 꽃잎을 정확히 구분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지만, 그저 정확히 알아두자는 것 뿐입니다. 이 꽃받침잎의 다양한 색깔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다는 것도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때로는 수국이 뿌리내린 땅의 성질에 따라 빛깔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렇게 변화하는 특징 때문인지, 수국의 꽃말은 '변심(變心)'입니다.
수국의 학명에 붙은 otaksa란 이름도 그런 변하는 색깔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 해 이맘 때의 나무 편지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식물학자가 일본에 식물조사를 하러 왔다가 한 기생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얼마 뒤, 그녀가 마음을 바꾸어 다른 남자에게 넘어갔다는 거지요. 그 기생의 이름이 바로 otaksa 였고, 식물학자 Zuccarnii는 변심한 기생의 이름을 나무의 이름에 넣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수국 가운데에는 우리 산에서 자라는 산수국(Hydrangea serrata for. acuminata)이라는 종류도 있습니다. 위의 사진이 산수국인 것은 아닙니다. 이 사진의 꽃은 Hydrangea macrophylla 'Sumida-no-hanabi'라는 품종의 꽃으로 우리의 산수국 꽃과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어서 함께 이야기할까 합니다. 같은 수국 종류이지만, 앞의 꽃들과 다른 생김새를 갖고 있기에 한번 짚어보렵니다.
이 꽃은 가운데에 올망졸망 피어나는 꽃 송이와 바깥 쪽으로 빙 둘러서 피어난 꽃 송이의 모습이 확연히 다릅니다. 이 가운데 안쪽에 올망졸망한 꽃송이를 잘 보시면, 푸른 빛의 작은 꽃잎과 안쪽에 꽃술도 보이실 겁니다. 사진이 작습니다만, 더 자세히 보시면 초록의 꽃받침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꽃송이를 유성화(有性花)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깥 쪽의 흰 꽃송이에서는 다른 부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에서 수국을 이야기할 때 말씀드린 꽃받침잎만이 겹으로 돋은 게 보입니다. 이 꽃송이를 무성화(無性花)라고 부르지요.
유성화는 나중에 열매를 맺는 부분이고, 무성화는 열매를 맺지 않는 꽃받침잎에 불과합니다. 유성화가 워낙 작아서 눈에 띄지 않으니, 벌과 나비를 불러모으기 위해 꽃 주위로 커다란 꽃받침잎의 무성화를 피워 스스로를 화려하게 분장하여 드러낸 겁니다. 이 무성화를 '가짜 꽃'이라고 하여 '위화(僞花)'라고도 부릅니다. 꽃이라 할 수는 없지만, 수국 꽃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부분인 건 틀림없습니다.
산수국 종류에서 위화의 생김새와 빛깔은 참으로 변화무쌍합니다. 색깔만으로도 흰 빛에서부터 푸른 빛까지 천차만별입니다. 앞의 수국들처럼 이 종류에서도 빛깔은 하나로 고정돼 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기 때문에 색깔로 특징을 정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김새도 다양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세 장 짜리 위화에서부터 다섯 장 짜리가 있는가 하면, 사진에서처럼 겹으로 돋아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역할은 똑같지만, 빛깔과 모양이 서로 다른 것이지요.
요즘 우리 수목원을 찾으시는 분들께 놓치지 마시라고 권할 만한 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왕자귀나무(Albizzia coreana)입니다. 7월 들어서면서부터 길가에 서있는 자귀나무(Albizzia julibrissin)에서 신비로운 모양의 꽃이 풍성하게 피어난 걸 이미 보셨을 겁니다. 공작새의 머리 깃처럼 돋아나는 보랏빛 꽃술은 자귀나무 꽃의 수술입니다. 꽃잎이 없어도 눈에 잘 띄는 까닭인지, 꽃잎은 모두 퇴화하고 3센티미터 가량으로 돋는 수술이 화려한 꽃입니다.
왕자귀나무는 바로 이 자귀나무와 가까운 친척 관계의 나무입니다. 꽃잎이 퇴화하고 꽃술만 발달한 꽃 모양은 자귀나무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자귀나무 꽃이 옅은 보랏빛인 것과 달리, 왕자귀나무 꽃의 수술은 흰 빛이 강하지요. 도감에는 그냥 흰 색으로 나오지만, 사진에 보시듯이 유백색 정도로 이야기하는 게 정확할 듯합니다. 자귀나무와 달리 왕자귀나무는 키가 크게 자라고, 그 가지 끝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가 어려워 사진도 이만큼으로밖에 찍지 못했습니다. 자세한 사진을 보여드리지 못해 아쉽네요.
자귀나무는 기껏 자라야 4미터 정도이지만, 왕자귀나무는 잘 자라면 거의 10미터 가깝게 자랍니다. 천리포수목원의 왕자귀나무도 거의 10미터 쯤 되는 큰 나무입니다. 이 큰 나무 가지 끝에서 지금 한창 유백색의 꽃이 피어난 겁니다. 잎사귀도 자귀나무와 왕자귀나무는 다릅니다. 자귀나무는 마치 미모사 잎사귀처럼 자잘하게 돋지만, 왕자귀나무는 마치 아까시나무 잎처럼 크게 돋아나서, 꽃이 피어나기 전에는 자귀나무의 친척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왕자귀나무는 목포 유달산 지역에서 자라는 특산식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희귀한 식물입니다. 중부지방에서 자라기는 쉽지 않은 나무인데, 우리 수목원에서는 한 그루의 왕자귀나무가 잘 자라서 지금 꽃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수목원의 '큰밭'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서 있는 나무입니다.
주말마다 비가 내린 게 중부 지방은 여섯 주 연속이고, 남부의 일부 지방에서는 여덟 주째 계속이랍니다. 그리고 비 갠 이번 주초부터는 열대야로 이어지는 무더위가 예상된답니다. 삼복의 시작인 초복이 들어있는 주간, 모두 몸보신 잘 하시고, 건강하게 더위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맨 끝의 사진은 왕자귀나무 맞은 편에 서있는 대왕참나무(Quercus phellos) 줄기에 뿌리를 내린 아이비의 생명 노래입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덧붙임] 나무 사진집 '동행'을 펴낸 지 한 달 남짓 됐습니다. 그 동안 출간 자체를 축하해 주신 분들도 많았고, 또 사진집을 구해 보신 뒤에, 따로 격려 글을 보내주신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모든 말씀 오래도록 잊지 않고, 더 좋은 사진과 글로 인사 올릴 수 있도록 더 애쓰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나무 사진집 '동행'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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