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1월 18일, 월남전을 취재하기 위해 사이공에 도착한 오리아나는 ‘제트 전투기, 무거운 기관
총을 장착한 헬리콥터, 그리고 네이팜탄을 실은 트레일러들이 우울한 표정의 미군 병사들과 나란히
서 있었다.’는 제1신을 시작으로 종군기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13세 때부터 2년 동안 레지스탕스로
서 이차대전의 한복판을 체험해본 경험이 있어서 월남전이라고 특별히 두려움이나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군기자 생활이 8년 동안이나 지속될 줄은 몰랐다. 그 사이에 오리아나는 동남아시
아의 다른 나라도 취재했고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암살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미국도 다녀왔다. 독자들
은 오리아나의 생생한 기사에 열광했다.
사이공의 풍경은 혼란스러웠다. 전쟁의 흔적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번화가의 진열대마다 화려한
보석과 사치품이 홍수처럼 넘쳐났고, 밤거리는 불야성을 이룬 채 흥청거렸다. 호텔에서 조용하게 휴
식을 취하고 있는 월남인들은 전쟁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었다. 전기‧전화‧수도 등 모든 기반시설은
정상적이었고, 식당의 테이블에는 고급 와인과 싱싱한 과일이 그득했다. 와인 잔을 든 채 웃으며 대
화를 나누는 월남인들의 표정에는 죽음의 그림자 따위는 범접할 여지조차 없었다. 오리아나가 첫날
밤을 보내기 위해 닥토에 도착하자 곧바로 베트콩이 환영의식을 베풀었다. 박격포로 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그녀는 미군 장교의 침착한 안내에 따라 1383고지의 지하벙커로 대피했다. 그러나 공격이 계
속되는 1시간 동안, 미군 병사들은 벙커 안에서 태연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고향 얘기를 들
려주고 있었다.
오리아나는 베트콩 포로를 심문할 기회를 얻었다. 월남은 1882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
기 때문에 월남인들은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프랑스어가 유창한 오리아나로서는 좋은 소재
를 얻을 절호의 기회였다. 미칸식당을 폭파한 테러리스트 응구옌 반 삼을 인터뷰하면서 오리아나는
20년 전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수용되어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미국을 동경하면서
도 월남을 침공한 미국의 정책에는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정부터 두 시간 동안 응구옌을 인터뷰
한 오리아나는 그가 월남경찰의 고문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소개했
다. 그의 테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지적에는 그가 모든 잘못을 미국에 전가했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이후에도 오리아나의 기사는 미군에 대한 반감을 지속적으로 드러냈다. 그녀의 심경은 한
베트콩의 일기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 베트콩은 미군의 공격으로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
의 얘기를 중심으로 미국인들을 악마로 묘사해놓았고, 오리아나는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했다.
미군은 그녀의 기사가 비위에 거슬렸지만 여전히 오리아나가 원하는 기사를 쓸 수 있도록 모든 편의
를 제공했다. 그러나 월맹을 취재하기 위해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그녀의 모든 행동
과 글을 통제했다. 미국에 대한 개인적 호오(好惡)의 감정과 무관하게 월남과 월맹은 언론의 자유라
는 개념이 명확하게 분간되는 현장이었다. 그러나 오리아나는 여전히 변변찮은 무기로 압도적인 미
군의 화력에 맞서는 베트콩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1968년 2월, 한 미군 장교가 저격수의 총알로부터 오리아나를 구해준 일이 있었다.
“저들은 당신이 자기들 편인 줄 모르는 모양이군요.”
미군 장교는 미군 기지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도 미군에는 적대적이고 베트콩에게는 호의적인 오
리아나를 ‘자유주의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오리아나는 그 장교가 비록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서였
지만 베트콩 저격수를 사살한 죄책감은 평생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교는 앞으로도 더 많
은 적을 죽일 수밖에 없다며 오리아나의 지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군에 대한 그녀의 편견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 취재를 나갈 때마다 오리아나는 사망자의 대다수가 민간인이라는 데
치를 떨었다. 그리고 잔인하게 민간인을 학살하는 쪽은 대부분 베트콩이었다. 이럴 때는 오리아나의
필치가 바뀌어 베트콩을 맹비난하는 기사를 써 보내곤 했다. 1968년 5월, 베트콩들은 사이공전투 중
에 포로로 잡은 각국 기자들을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전원 학살했다. 기자들은 베트콩도 기자들은 죽
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큰 오판이었던 것이다. 오리아나는 먼저 학살된 기자들의 사진을
눈에 익힌 뒤, 현장으로 달려가 끔찍한 모습을 직접 취재했다. 거기에는 베트콩의 잔인한 마성이 고
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베트콩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은 기억에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베트콩은 자유
의 투사가 아니라 짐승이었던 것이다. 월남전 취재기인 「無, 그리고 아멘」에는 이때의 감정이 적나
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無, 그리고 아멘」은 최고의 전쟁기사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취재기간이 길어질수록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트콩이 본격적으로 침
투를 시작하여 전장은 사이공으로 이동해 있었다. 오리아나는 6시간에 걸쳐 월남총리 응구옌 카오
키를 인터뷰했다. 바람둥이로 소문난 키 총리는 미군이 전쟁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경제적 이득을 노
린 것이라며 맹렬하게 미국을 비난했다. 그는 관료들의 부패로 결국 월남이 패배할 것이라는 날카로
운 통찰력도 가지고 있었다. 키 총리는 키도 작고 매력도 없는데다 오만한 사람이었지만,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를 인정한 유일한 월남인이었다.
하노이로 날아가 보 응구옌 지압 장군을 인터뷰한 일은 월남전 취재의 하이라이트였다. 지압 장군은
호치민과 함께 1954년 디엔비엔푸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월맹의 영웅이었다. 지압 장군은 그
전쟁사를 「인민의 전쟁 ; 인민의 군대」라는 책으로 내서 미국에서 큰돈을 벌기도 했다. 호위장교는
오리아나에게 절대로 녹음이나 필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다짐을 받고서야 장군의 방으로 딜
고갔다. 장군은 월맹이 이미 50만 명의 전사자를 냈다는 등 전쟁의 모든 실상을 숨김없이 들려주었
다. 그러나 프랑스처럼 미국도 결국 손을 들고 월남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인터뷰
가 끝나자 호위장교는 사전에 준비해둔 보도용 문건을 건네주면서 이것만 보도하라고 협박하듯 말했
다. 약속을 하고 사이공으로 돌아온 오리아나는 실제 인터뷰 내용을 자세하게 작성하여 <에우로페오
>誌로 송고했다. 이 적나라한 지압 장군 인터뷰 기사로 월맹으로부터는 욕을 버지기로 얻어먹었지
만, 훗날 헨리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의 고위관리들을 편하게 인터뷰할 수 있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기업 특히 제조업들을 밤낮으로 뛰게한 신바람 문화가 사라진지 꽤 오래 되었고 이 정부 들어서 적폐라는 올가미로 옥죄어 침체 일로로 일관하는 풀죽은 기업은 4차 산업의 활력조차 동참하지 못한체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국민연금 의 적극적인 주주 역활이 또한번 발목을 잡는 일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일본 뿐 아니라 이곳 미국의 한주인 하와이의 관광활력이 높이 평가되고 있는 점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것과는 대조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