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청미래덩굴
20161123전라닷컴[한송주 길 인연] 환경운동가 조상현
아름답고 쾌적한 목포만들기에 몸바쳐
갓밝에 들창을 여니 햇덧이 잘리고 하늘이 잠포록하더니, 행길에 나서자 벌써 매지구름이 두세두세 몰려든다. 나주 들평참에서 먹장으로 바뀌어 월출영봉을 는개 속에 파묻고는 몽탄에 이르러 가랑비가 되어 늦가을을 적신다. 이윽고 얼큰한 갯내가 달려들면서 작달로 퍼붓기 시작하는데, 역시 포구는 이렇게 놀치는 맛이 아니랴.
절로 흥얼타령이 나오는데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다. 남진의 ‘비내리는 호남선’은 기자가 목포에 오면 역 앞 주막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다. 물론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도 곡진하게 모신다. 찻기 없이도 휘휘친친 감기는 명가수의 절창에 일행은 이미 푹 젖어버렸다.
오늘의 손님 목포문화원 조상현 사무국장은 첫 매에 퍽 드레있는 인상이다. 조국장은 목포에서 30년 동안 환경운동과 문화운동을 펼쳐온 일꾼이다. 저명한 서한태박사를 모시고 한 길을 걸어왔다.
“어르신 먼저 뵙기로 하지요. 오늘 마침 두레모임이 있습니다. 환경운동 일꾼들이 달에 한 번 모이는데 서박사님은 불편하신 몸인데도 이 자리에는 꼭 참석하신답니다.”
주변의 작은 일부터 실천하라
목포문화원 이웃 아담한 식당에 목포환경연합 두레꾼들이 모여 있다. 곰탕으로 술적심을 하며 법담을 나눈다. 서한태박사는 구순의 연치를 비웃으며 왕성한 식성, 우렁찬 목청, 형형한 안광을 과시한다.
“요즘 나라꼴이 말이 아니드만. 한 가지가 잘못 되어서 그래요.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게 거꾸로 되었어. 풀뿌리민주주의라는 말, 참 좋은 말이야. 그게 정답이거든. 뭐든 아래서부터 위로, 작은 일부터 큰 일로, 가까운 곳에서 멀리 가는 게 순리이고 철칙이지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문이 이 상식대로 움직이면 탈이 없을 터인데. 환경운동도 마찬가지여. 어려운 수치를 내세우며 입으로 떠들 게 아니라 내 집 앞 쓰레기를 줍는 작은 행동이 앞서야 하는 거지.”
그런가? 톺아보자면 결국 환경이 화두인가? 정치환경 문화환경 생태환경... 그리고, 그 화두의 극칙은 역시 ‘소통’이었던가?
서한태박사는 2014년 펴낸 <쾌적한 환경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환경과 인류와의 관계를 한 마디의 촌철법문으로 정리한 바 있다. “우리가 환경을 살리면 환경이 우리를 살린다.” 당신의 환경운동 50년 역사를 갈무리한 이 명저를 통해 그는 환경에 관한 150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입때껏 손전화와 자동차가 없이 생활하는 서박사는 치산치수, 식생활개선, 쓰레기처리, 에너지절약 등 오계를 실천하고 있다.
그의 강의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세계적인 환경일꾼 존 라이언의 저작 <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인 텐진갸초가 경제석학 존갤브레이트 교수와 거량하면서 이 화두 일할로 상대의 입을 봉해버렸다는. “만약 전 세계인이 미국사람처럼 모두 자동차를 몬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렇게 되면 석유에너지 사용량이 현재의 4배로 증가하고 이 행성에는 대재앙이 닥칠 것이다.
역사문화유적 보존에도 앞장
우리의 주인공으로 돌아갔다.
환경운동 인연사를 물었다.
“원래 화순 출신인데 대학선배로부터 서한태 박사님 이야기를 듣고 목포로 와 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88년 8월 8일 밤 8시에 창립된 목포녹색연구회 간사를 맡게 됐습니다. 녹색회사무실이 목포의원 1층에 있었는데 목포의원은 결핵전문병원으로 당시 여성숙원장님이 공간을 내주셨어요. 여성숙 원장님은 경성여자의학전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 안병무 박사 등과 교유하셨고 지역에서 인술을 펼치셨습니다. 나중에 인도주의설천의사협의회로부터 제1회 인도주의실천의사상도 받으셨고요.
작년에 서한태 박사님과 함께 목포 교외 한산촌에 찾아가서 뵙는데 100세가 다된 연세에도 아주 정정한 모습이더군요. 1990년에는 3당 합당에 맞서 20여개 목포지역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목포민주시민운동협의회(목민협) 사무실을 목포의원 별관에 내주셔서 자연스럽게 녹색연구회와 목민협 일을 함께 봤습니다.”
민주환경 조성에도 한 운동 했다는 이야기다.
“1991년 목포 출신 박승희 열사의 분신 등이 있을 때 목포시민회관 앞에 분향소가 설치되고 거의 매일 집회가 열렸어요. 그때 성명서란 성명서는 원 없이 써봤지요. 한번은 즉석에서 볼펜으로 성명서를 쓴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의 희생 속에 일군 민주주의인데 요즘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 가슴 아픕니다.”
환경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찼던 기억이 있다면.
“단연 영산강4단계사업을 백지화시킨 것이죠. 이 사업은 무안 함평 일대의 갯벌을 매립하는 대규모사업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농진공, 학자 등 매립 찬성 세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1998년 6월 20일 목포상공회의소에서 공청회가 있었는데 그때 공청회장 앞에서 피켓시위도 벌이면서 반대운동을 했어요. 더 이상 갯벌매립은 안 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영산강 4단계사업은 백지화되었는데, 반대운동도 한 몫 했겠지만 당시 국민의정부, 특히 김성훈 농림부장관이 역할이 컸습니다.
그 뒤 해양수산부가 2001년 전국 최초로 습지보호지역 지정하고 체계적인 보호관리를 위해 무안생태갯벌센터를 건립했어요. 무안 함평 일대의 갯벌은 우리나라의 우수한 해양문화자원으로 자리매김 되었지요. 그 여세를 몰아 1998년에는 순천만 골재채취도 녹색연구회의 운동을 통해 금지시켰습니다. 지금의 순천만이 지닌 생태적 관광 적 가치를 생각한다면 얼마나 잘한 일인지 가슴 뿌듯하답니다.”
젊은 세대의 운동 참여 절실해
운동철학이 궁금했다. 그리고 지역 환경운동의 현주소, 바람직한 방향을 점검해달라고 주문했다.
“환경운동은 기본적으로 생태계의 건강과 사람의 건강을 추구합니다. 당연히 물질만능주의나 편의주의를 반대하지요. 환경운동은 결국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인본주의운동이라 하겠습니다.
목포지역 환경운동이 1983년 영산강 주정공장 반대운동으로 시작해 30여년의 오랜 역사를 이어왔지만 지금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다른 시민단체도 마찬가지겠지만 회원의 평균 연령대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을 만나기 어렵고 회원 수도 정체돼 있어요. 목포환경운동연합의 경우 내년이 창립 20주년이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새롭게 재도약하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시민과의 만남의 폭을 넓히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환경운동이 전개되어야 하겠죠. 그래야 사회가 건강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제도와 정책을 환경친화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도 지속되어야겠고요.”
현재 전력하고 있는 운동은 무엇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알찬 프로그램이 상시적으로 운영되는 좋은 공간이 마련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목포시민의 성금으로 마련된 목포청년회관은 당시 민족운동의 요람이었습니다.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시민사회운동의 어엿한 공간 하나 제대로 없다는 것은 안타까워요. 이런 공간을 마련하고 운영하는 길을 모색 중입니다.”
조국장은 목포 문화유적 보존에도 운동력을 보탰다.
“목포는 근대문화유산의 보고입니다. 2004년에 목포죽동교회 건물이 철거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1935년에 지어진 석조건물로 건축적으로도 가치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와 이후 목포의 기독교의 역사를 증언할 사료이자, 1990년대 목포지역 민주화운동의 현장으로서 가치가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시민대책위를 구성해 보존운동이 활발히 전개했는데 의문의 화재로 불타서 결국 철거되고 말았어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2006년에는 또 현재 등록문화재로 있는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을 철거하고 주차장 부지로 쓰겠다며 시에서 철거하려고 하는 거예요. 즉각 시민대책위를 구성해 싸웠지요. 죽동교회의 참화를 두 번 다시 겪지 말자는 결의가 대단했습니다. 대책위 대표단이 문화재청을 방문해 당시 유홍준 청장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문화재청이 예산지원을 약속하면서 보존의 길이 열렸어요. 지금은 오거리문화센터로 변모해 목포의 대표적인 근대문화유산으로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눈앞의 사고한 개발 이익을 위해 값진 문화유적을 없애겠다는 발상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우리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운동해가야 하는가.
“보수냐 진보냐의 가치 다툼도 중요하지만, 공(公)이냐 사(私)냐의 가치 설정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살기가 팍팍한 세상이라 ‘각자도생’ 하다 보니 사의 가치에 빠지기 쉬운데 그러면 사회는 더욱 불행해지고 결국 개인의 삶도 힘들어지지요. 공동체의 가치를 어서 회복해 우리 선조들이 운동으로 쌓아올린 대동사회를 완성해야 하겠습니다.”
그 사이 작달비는 한비가 커져 대지를 꺼멓게 덮는다. 물너울이 쓰나미처럼 몰려드는 목개 너머로 삼학도가 뿌옇게 떠올라 있다. 사십년 전에 억지로 붙여버린 세 섬을 이제 다시 떼어놓는 공사가 막대한 돈을 퍼부으며 진행되고 있다. 이야말로 목포의 눈물이고 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손목만 잡아도 잉태를 해 늘 배가 부른 채 무대에 섰다는 다산의 가왕 이난영의 엘레지가 애련하게 가슴으로 흐른다.
글 한송주대기자 사진 박갑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