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가 별로 없다. 물론 전무 하지는 않다. 거칠고 얌전한
화풍을 통해 어느 정도 사람됨됨이가 추측되기도 한다.
그런 반면 그림을 받아든 사람의 성격은 전혀 짐작할 길이
없다. 누구에게 그려주었는지를 밝힌 관서(款書)가 있기는
해도 받아든 사람이 그때의 감흥, 느낌 등을 글로 적어 남
긴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투의 직설적으로 속내를 털어놓은 이색적인 그림이 있
다. 김홍도와 그의 후배 화원화가 이명기가 합작해 그린
<서직수 초상>이다. 서직수(徐直修, 1735-1811)는 노
론 대표집안인 달성서씨 집안 출신으로 큰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그림과 골동을 좋아하며 화가들과도 자주 어울
렸던 문화인이다. 그는 수원으로 이장된 현륭원의 원령이
된 적이 있는데 이 무렵 수원 용주사에는 김홍도가 불화
(佛畵)를 제작하고 있어 두 사람의 관계가 추측되는
인물이다.
김홍도, 이명기 <서직수 초상> 1796년 견본채색 148.
8x72.0cm 국립중앙박물관
입은 선비가 서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림 오른
쪽 위에는 서직수 자신이 직접 쓴 화제가 적혀있다. 내용
은 다음과 같다.
臺. 惜乎 何不修道於林下 浪費心力於 名山雜記, 槪論其
平生不俗也貴, 丙辰夏日 十友軒六十二翁自評
대. 석호 하불수도어임하 낭비심력어명산잡기, 개론기평
생불속야귀, 병진하일 십우헌육십이옹자평
이명기(1756-1813이후)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
을 그렸다. 두 사람은 그림을 이름이 났으나 한 조각의 정
신도 그리지 못하였다. 아깝도다. 어찌하여 임하에서 도
를 닦지 않고 명산 잡기에 심력을 낭비하였는가. 대개 논
하자면 그 평생은 속되지 않았음은 귀하다 하겠다. 병일
하일, 십우헌 62살 늙은이가 자평하다.
흔적이 보인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흔히 서양 영화에 나
오듯이 방안에 걸어놓고 감상하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
다. 사당에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용도로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여기
에 성질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데 아무튼 서직수는 단원을 비롯한 그 주변 사람들과는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이런 화(?)를 여과 없이 터트렸는
지도 모를 일이다.
제작 前인지 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
는 <십우헌도(十友軒圖)>가 그것이다. 그는 당시 문인
들 사이에 유행했단 서화감상과 골동 수집 이외에 자신이
놓아하는 검, 술, 화초 등을 열거해 열 가지를 뽑고 이를
자신의 친구라고 하며 당호를 ‘십우헌(十友軒)’ 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를 단원의 절친 이인문을 시켜 그리게 한
것인데 이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한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이 중 한 사람만 실제 인물, 즉
주문자인 서직수이고 나머지 네 사람은 역사 속의 인물이
다. 그가 좋아한 십우에는 동기창의 글씨, 심주의 그림,
두보의 시 그리고 철형대사의 여행을 좋아하는 취미와 수
경도인의 혜안 등이 손꼽히는데 그림 속 4명은 이들을 의
인화해서 그린 것이다. 그런데 누구 누구인지 구체적으
로는 알 수 없다. 그외 검, 책, 술병, 문방구 등은 있는 그
대로 그렸다.
이인문 <십우도> 1783년 지본담채 126x56cm 국립중
앙박물관
을 적을 글도 있다. 그 내용은 ‘십우도는 세속을 초탈한
솜씨로 그려야한다. 이 그림은 깨끗하면서도 담백하고
인물과 나무와 돌이 모두 옛 뜻을 갖췄으니 실로 십우(
十友)라는 제목과 나란히 칭할 만하다(寫十友圖, 須得出
塵之筆, 此幅瀟灑澹蕩, 人物林石, 俱有古意. 眞與十友之
題相稱)’이다.
취미, 취향 이외에 당시 화가들과도 매우 가까웠으며
특히 표암 그룹과 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근묵자흑(
近墨者黑)이라고 이런 환경이었던 때문인지 어느 날 그
가 붓을 들어 그린 그림이 한 점이 현재 전하고 있다.
래의 화보 속에 보이는 그림을 조합해놓은 듯한 느낌이
다. 우선 큰 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물가에 낚시 대를
드리운 고깃배 하나가 정박해 있다. 근경에서 원경으
로 넘어가는 중경(中景) 부분은 조금 애매해 빈말이라도
탁월한 솜씨라고는 말할 수 없는 그림이다. 그러나 필치
를 자세히 뜯어보면 당시 유행하던 여러 화풍을 익히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화면 속에 겸재와 남종화 화풍이
나란히 보인다는 점이다.
서직수 <산수도> 지본수묵 51x30.5cm 서울대
박물관
위에 뾰쪽한 점을 찍어 산등성이의 나무를 그렸는데 이
는 겸재의 금강산 그림 등에 자주 보이는 표현법이다. 그
리고 산 아래 몇 채의 집이 보이고 소나무 숲이 곁들여져
있는데 먹 선을 옆으로 그어 가지를 펼친 소나무를 그리
는 것 역시 겸재풍이다. 반면 강가에 메어있는 화보풍의
고깃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가지를 늘어트린 버드나무와
회나무 가지 표현은 다분히 남종화풍이다.
그런데 이 그림 위쪽으로 십우헌(十友軒)이란 관서와 함
께 시구절 하나가 적혀있다. ‘流下前灘也不知(예하전탄
야부지)’로 ‘앞 여울로 흘러드는 것도 알지 못하는구나‘
정도이다. 시는 만당 시인 두순학(杜筍鶴, 846-904)의
「계흥(溪興)」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두순학에 대해 잠
시 살펴보면 그는 강남 제1풍류재자(風流才子)로 유명했
으며 ‘南朝四百八十寺 多少樓臺煙雨中(남조사백팔십사
다소누대연우중)’ 구절로 이름난 「강남춘(江南春)」을 읊
은 두목(杜牧)의 막내아들이다.
와 있던 최치원과 교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최
치원이 신라로 떠날 때 전별시를 지어준 것이 당시집에
전한다. 그는 당이 무너질 무렵 후량(後粱)의 신하가 돼 후
량을 세운 주전충의 비호를 받았다. 그러나 재주를 믿고 천
성이 교만했던지 주위 관리들로부터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
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살해 직전에 병사했다. 그가 지
은 이 시는 그의 이런 행적과는 전혀 별개로 한가하기
그지없다.
작은 배이고 짐은 술을 따른다는 말이다. 비바람 불어
낚시 줄을 거두고 배안에 앉아 사발에 술을 따라 마시다
보니 잠이 들어버려 배가 살랑살랑 앞 여울로 흘러가는
것도 모른다고 하는 세상사를 잊고 사는 무욕과 여유을
뜻한다. 시의 정경 속에 선비의 욕심없는 생활이 투영돼 있
어 이 시는 명시가 됐다.
지만 시의 내용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거적
을 덮은 배와 뱃전에 드리운 낚시대가 그렇다. 그런데 비
바람에 세게불어 생업을 거둘 판인데 그림 속 풍경은 이
를 그리내지 못했다. 여기화가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김홍도 <어부오수도> 지본담채 29x42cm 개인
시구가 김홍도 그림에도 등장한다. <어부오수>라는
작은 편화(片畵)로 그림에는 작은 낚시배에 낚시대를 거
두고 팔베개를 하고 잠이 든 어부가 한 사람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아무 배경 없이 물 흐르는 모습만 보이는데 앞
여울이 가까워졌는지 뱃전부터 앞쪽의 물살이 한결 급해
진 것이 여실하게 표현돼있다. 대가의 솜씨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두 사람이 사이가 아니라 그림 <산수도>와
<어부오수>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인과 관계가 있었
는지는 당연히,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첫댓글 좋은 작품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은선생님: 안녕 하세요? 반갑습니다. 이렇게 오셔서 읽어 주시고 동행을 하여 주심에 고맙고 감사합니다. 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
송정님 노고 덕에 좋은 작품 잘 감상하였습니다.
한산선생님: 안녕 하세요? 반갑습니다. 이렇게 오셔서 관심을 가지시고 읽어 주심에 고맙고 감사합ㅈ니다. 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
잘 보았습니다^^
지기님: 안녕 하세요? 반갑습니다. 언제나 관심을 가지시고 읽어 주시고 평까지 하여 주심에 고맙고 감사합니다. 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
감사 드립니다.
구심선생님: 안녕 하세요? 반갑습니다. 오셔서 관심을 가지시고 읽어 주시고 댓글 까지 올려 주심에 고맙고 감사합니다. 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