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조>
신설(新雪)
새해 첫눈
정지상(鄭知常, ? 1135)
지난밤 흩날리던 서설에 새날이 밝아
새벽부터 만조백관 임금님께 하례하네
바람 한 점 없어도 검은 구름 걷히고
하얀 꽃 활짝 피어 온 나무네 봄이 왔네
昨夜紛紛瑞雪新(작야분분서설신)
曉來鵷鷺賀中宸(효래원로하중신)
輕風不起陰雲捲(경풍불기음운권)
白玉花開萬樹春(백옥화개만수춘)
새해아침, 간밤에 상서로운 눈이 흠뻑 내렸다. 새벽이 되자 구름은 걷히고 시리
도록 파란 하늘이 열렸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만조백관이 입권하여 줄지어 서
서 임금님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나뭇가지에는 눈이 쌓여 마치 흰 꽃이 탐스럽
게 피어난 모습니다. 설날 아침에 급제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장래가 촉망
되던 관료 시절의 정지상은 청소년기에 썼던 구슬픈 서정성은 찾아보기 어려
워졌다. 그의 대표작으로 지금까지 사랑받는 시는 대부분 그가 청년기에 쓴 시
들이다. 시인은 가난해야 하나?
[작가소개]
정지상[ 鄭知常 ]
고려 중기에 정지상이 지은 한시. 칠언절구. 송우인이라고도 하고, 송인이라고도 한다.
호 : 남호(南湖)
시대 : 고려
출생 – 사망 : 미상 ~ 1135년(인종 13)
성격 : 관리, 문신
출신지 : 서경(西京)
성별 : 남
관련사건 : 묘청의 난
저서(작품) : 신설(新雪), 향연치어(鄕宴致語), 백률사(栢律寺), 서루(西樓)
대표관직(경력) : 지제고(知制誥)
<정의>
고려전기 좌정언, 좌사간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개설
서경 출신. 초명은 정지원(鄭之元). 호는 남호(南湖).
<생애 및 활동사항>
1114년(예종 9) 과거에 급제하였다.
1127년(인종 5) 좌정언(左正言)으로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믿고 발호하는 척준경(拓俊京)을 탄핵해 유배하도록 하였다.
1129년 좌사간(左司諫)으로 기거랑(起居郎) 윤언이(尹彦頤) 등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는 소(疏)를 올리니 왕이 받아들였다. 음양비술(陰陽祕術)에도 관심이 많아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 등과 함께 삼성(三聖)으로 불렸다.
1132년에 기거주(起居注)로서 윤언이가 강론한 『역경(易經)』의 건괘(乾卦)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이듬해에도 기거주로서 김부식이 강론한 『주역(周易)』과 『상서(尙書)』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서경출신으로 서울을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해,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사대적인 성향이 강하던 개경 세력과 대립하였다. 서경을 거점으로 묘청 등이 난을 일으키자, 적극 가담해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며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하였다. 그러나 개경 세력의 김부식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패해 개경에서 참살되었다.
정지상은 정치인으로서만이 아니라, 뛰어난 시인으로서 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지상의 시재(詩才)는 이미 5세 때에 강 위에 뜬 해오라기를 보고 “어느 누가 흰 붓을 가지고 乙자를 강물에 썼는고(何人將白筆 乙字寫江波).”라는 시를 지었다는 일화가 야사로 전해올 만큼 뛰어났다.
1130년 지제고(知制誥)로 왕명에 따라 곽여(郭輿)를 위해 「산재기(山齋記)」를 짓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재로 고려 12시인 중의 하나로 꼽혔다. 노장사상에 심취했으며, 역학(易學)·불교(佛敎)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그림·글씨에도 능통했는데, 특히 사륙변려체를 잘 썼다고 한다.
작품으로는 『동문선』에 「신설(新雪)」·「향연치어(鄕宴致語)」가,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백률사(栢律寺)」·「서루(西樓)」등이 전하며, 『정사간집(鄭司諫集)』·『동국여지승람』등에도 시 몇 수가 실려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보한집(補閑集)』, 『파한집(破閑集)』
「정지상」(양주동, 『한국의 인간상』5, 신구문화사, 1980)
[네이버 지식백과] 정지상 [鄭知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첫댓글 첫눈을 바라보며
하례를 올리네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