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스님묘지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고 시인.
홍성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동학농민운동을 하다 패하자
설악산으로 피신후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스님은 한평생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1945년 5월 독립을 석 달 남겨둔 채 .
그가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65세를 일기로 성북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지들은 홍제동에서 다비(茶毘)를 거쳐 묘소 하나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
오열 속에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만해 한용운선사의 오도송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 是故鄕) 남아란 어디나 곧 고향이거늘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 客愁中) 사람들은 시름속의 나그네로 오래도록 보내네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 三千界) 한소리 큰할로 삼천 대천세계를 깨뜨리니
설리도화편편홍(雪裏桃花 片片飛) 눈속에 복사 꽃잎이 붉게붉게 날리네
오도송(悟道頌)
연대: 1917년 12월3일 설악산 오세암에서 깨달음의 시를 읊은 만해 한용운의 오도송
사나이 가는 곳이 바로 고향이지
몇사람이나 오랫동안 나그네 근심속에 있었나 소리 한번 내어 꾸짖어, 三千界 (우주) 를 깨트리니 눈내리는 속에 복사꽃이 조각조각 날리네
한용운스님 생가지(韓龍雲先生 生家址) 기념물 제75호 충남홍성군
이 곳은 일제 식민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불교 시인인 한용운(韓龍雲, 1879 ? 1944)선생께서 1897년(고종16년)에 태어난 곳이다.
스님은 1904년에 강원도 인제 내설악산의 오세암(五歲菴)에 출가하고 1905년 백담사(百潭寺)에서 득도하였다.
계명(戒名)은 봉완(奉玩)이고 법호(法號)는 만해(萬海), 법명(法名)은 용운(龍雲)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을 이끈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의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작성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혼(民族魂)을 깨우려고 노력하였다.
1944년 5월 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66세를 일기로 입적하니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스님은 세상을 마칠 때까지 불교를 통한 애국 청년운동과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사상을 북돋워 일으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公約三章
1. 금일 오인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1.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한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1.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마저절위(磨杵絶韋) 정진을 일깨우는 만해의 글(서각) 가로30㎝, 세로30㎝
친필유묵(1)
두 언덕이 아득하여 희미하니
그윽한 사람의 마음을 바라보며
쉽게 돌아오지 못하누나.
절속에 미풍은 불고 해가 타는 듯 한데
가을 향기 무수히 선의를 때리누나
친필유묵(2)
남국의 국화꽃 채 피지 않고
강호에 노는 꿈이 누대에 머물렀네
기러기 그림자가 산하에 인간의 형상처럼 비추고
가이없는 가을 나무 사이로 달이 뜨네
살벌한 심문을 겪으면서도,
“내가 이 자리에서 당장 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노라.”
하셨던 스님의.일화 중에는.
총을 쏜 독립군 청년이 훗날 만해를 찾아와 사죄하자 그는 “나는 독립군이
그처럼 씩씩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나는 이제 맘을 놓게 됐다”며 오히려 용기를북돋워주었다.
그는 늘 스스로 지옥의 문지기가 되기를 마다지 않았다.
건봉사에서 대중 공양 도중 한-일 병합 조약 소식을 들은 만해는 승려들이 공양을 계속하자 “이중놈들아, 밥이 넘어가느냐”며 밥상을 걷어차 버렸다.
또 최린 등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다.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도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한일병합 소식듣고 울분 “밥이 먹어가느냐” 밥상 걷어차
민족대표 죽음 두려워하니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 똥물
만해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성북동 일대 20만평의
국유림을 불하해주겠다는 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총독부와 연계된 한 청년이
돈 보따리를 들고 오자 뺨을 때려 쫓아 보냈다.
일제시대(日帝時代)에 이완용(李完用)이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었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매국노(賣國奴) 저녁은 안 먹겠노라고 했겠지만,
호탕한 한용운은 쾌히 그 초대에 응하여 푸짐하게 대접도 받고,
시주라고 하는 명목으로 돈뭉치까지 두둑이 받았습니다. 저녁을 다 먹고 대문을 나서는데,
이완용의 어린 손자들이 나와 대사님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하자,
스님은 이완용에게서 받은 그 거액의 돈 봉투를 꼬마들에게 주면서,
‘과자나 사 먹으라.’고 되돌려 주고는 홀연히 떠나갔다고 합니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만공 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모두가 희망을 잃은 때에도 “보라 겨울이 가면 봄이 오지 않느냐”며 청년들에게
‘희망의 햇살’을 비춰주던 만해는 ‘해방의 봄’을 한 해 앞둔 44년 열반에 들어
비쩍 마른 몸마저 꽁꽁 얼어붙은 시대의 불쏘시개로 바쳤다.
한용운스님 프로필(1879~1944)
1879. 8.29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부 韓應俊의 차남으로 출생, 속명은 貞玉,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1884. ~1897 향리에서 한학 수학
1892. 천안 전씨와 결혼
1899.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
1904. 귀향하여 향리에서 수개월간 머물다
1905. 백담사 김연곡 스님에게서 득도. 김영제 스님에 의하여 수계.
이후 이학암 스님으로부터 <기신론>, <능업경>, <원각경> 등을 사사받음
1908. 4 일본으로 건너가 下關 등지를 순유하고 동경의 曹洞宗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함.
10월경 귀국
1910. <조선불교유신론> 탈고 (1913년 불교서관에서 간행)
1911.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 개최
1912. 불교경전 대중화의 일환으로 <불교대전>을 편찬하기 위해
양산 통도사의 고려 대장경을 열람함
1913.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
박한영 등과 함께 불교 종무원을 창설.
통도사 불교강사에 취임.
<불교대전>을 국한문으로 편찬(1914, 홍법원)
1917.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
1918. 월간 교양지 <惟心>을 발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됨
1919. 1월경 최린, 현상윤 등과 조선독립에 대해 의논함.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였으며 <공약 3장>을 추가함.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하고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고 투옥됨.
7월 10일 <조선독립의 개요> 제출
1922. ~23년 출옥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
1924.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
1926. 시집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
1927.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서울지부장에 피선됨
1931. 김법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승려비밀결사인 卍黨의 영수로 추대됨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
1933. 유숙원과 재혼.
벽산 스님, 방응모, 박광 등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尋牛莊을 짓다.
여기에서 소설 <흑풍>, <죽음> 등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40.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
1944. 6.29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심우장에서 이적. 미아리에서 화장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다
1962.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重章이 수여되다
1967.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가 파고다 공원에 건립됨
1973. <한용운 전집>(전 6권)이 신구문화사에서 간행됨
첫댓글 나무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