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상을 받을 것인가
마태복음 19:23~20:1
요절:“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태복음 19:30)
찬송가 450장(내 평생 소원 이것뿐)
어제 새벽에 우리가 유다의 한 부자 관원 청년이 예수님께 구원을 얻으려면,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물으려고 왔다가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재물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근심하면 예수님 곁을 떠난 것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 부자 청년이 떠난 후에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불러 놓고서 이르시기를, 구원의 문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오직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는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만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제자들에게 일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이 자기들에게 어떤 자랑할 만한 것, 구원의 원인이 될 만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요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임을 알고 오직 감사하며 찬양만 해야 하며 충성해야 함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가르침의 맥락을 깨우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제자 중 대표 격인 베드로가 대뜸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즉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베드로는 그 부자 청년이 자기의 많은 재산에 대한 미련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고 보고, 그에 반하여 자기는 배도 버리고 가정도 일시적으로 내려놓고 이렇게 주님을 따르고 있으니, 자기는 당연히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사실 부자 청년 관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면, 주님을 믿기 위한 자기 희생에 대하여 어떤 보상을 받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과 영생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은혜요 하나님의 너무나 큰 선물이라는 점을 주의 백성들이 깨닫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구원 영생도 무엇인가 보상적 차원으로 이해했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보다는 인간의 헌신에 대한 보상과 상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28절과 29절에서 이렇게 대답해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베드로와 세리 마태 등과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배와 직업을 버리고 제자가 되어 주님과 함께 다니느라고 가정도 아내에게 다 맡기고 주님을 따랐는데,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 장차 열두 보좌에 앉아 재판하는 높은 영적 관직에 앉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상속할 뿐 아니라 훗날 주님을 위하여 희생한 것들을 여러 배로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을 섬기는 까닭이 보상을 얻을 목적만 가지고 행할까봐 그들이 주님을 섬기고 희생하는 진정한 이유에 대하여 가르쳐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종의 경고로써 이렇게 말씀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태복음 19:30)
그리고 제자들에게 올바른 동기로 주님을 섬기도록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이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면,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의 수확을 위하여 하루 한 데나리온의 하루 품삯을 정하고 품꾼들을 아침 6시에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아침 9시에 인력 시장인 장터에 가보니 일 안하고 있는 품꾼들이 놀고 서 있기에, 그들에게 상당한 값을 주겠다고 말하면서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또한 12시에도 오후 1시에도 오후 3시에도 그렇게 놀고 섰는 장터의 일꾼들을 자기 포도원에 들여보내어 일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에 가보니 역시 하루 종일 놀고 있는 품꾼이 있자 주인이 어찌하여 하루 종일 놀고 서 있느냐고 말하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자기들을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인이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오후 5시에 있는 사람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날이 금방 저물고 품삯 계산할 때가 되자 주인은 청지기에게 나중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청지기는 놀랍게도 가장 늦게 온 사람 오후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세 시에 와서 세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 하루 품삯을 주고, 정오에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 오전 9시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 오전 6시부터 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품삯을 받은 후에 주인을 원망하여 말하기를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들의 계산은 합리적인 면이 있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 하루 종일 열두 시간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 받는 것은 불공평한 것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데나리온 받는 것은 주는 자의 선의에서 나온 것이기에 받는 입장에서 나름대로 계산하여 자기 계산보다 적게 받는다고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인이 적게 일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 것을 생각하며 주인을 칭송하기보다는 자기가 더 받을 것만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자 집단적으로 주인에게 원망하였습니다. 주인은 잘못한 것이 없고 도리어 칭찬을 받아야 하고 존경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처럼 원망을 돌렸으니, 이는 그들이 보상만을 생각하여 일하였고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을 특권이요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그 품삯이 자기 수고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 여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르신 이 비유 속에서 포도원은 주님의 몸된 교회요 부름받은 품꾼들은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아침 6시에 부름받은 품꾼은 모태 신앙인들이요 아침 9시에 부름받은 품꾼은 소년기에 부름받은 신앙인들입니다. 정오에 부름받은 자는 청년기에 부름받은 자요 오후 세 시에 부름받은 자는 장년기에 부름받은 자요 오후 다섯 시에 부름받은 자는 노년기에 부름받은 자입니다. 이들은 부름받아 하나님의 포도원인 교회에서 일하도록 부름받았는데, 이것 자체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섬기는 일로 부름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구원받은 자는 모두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름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상을 받을 어떤 노동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의 포도원에서 수고한 것에 대하여 포도원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냥 말지 않고 구원의 은혜도 주시고 또한 수고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아름다운 영광으로 갚아주십니다. 하지만 보상을 바라고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남보다 더 일했으니 더 많은 보상을 바라면서 일하는 자는 자칫 포도원 주인에게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고생스럽고 힘들면 그 일 때문에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 투정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뒤에 물이 없거나 길이 험하거나 고기가 떨어질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오 때에 부름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을 미워하여 교회에 가혹한 핍박을 가하는 중인데 주님께서 그를 불러주셨습니다. 자기는 마땅히 천벌을 받아야 할 대역 죄인인데 이렇게 용서해주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하여 그는 안수받고 눈을 뜨고 세례를 받자마자 곧장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서운 핍박이 가해져도 그는 굴하지 않고 계속 전도했습니다. 수없이 쫓기고 굶고 매맞고 감옥에 옥에 갇히면서 강과 바다와 산과 들을 가로지르면서 도시에서 도시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핍박받으면서도 그렇게 더 많이 수고하였는데, 그렇게 더 많은 수고를 한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고백하며 감사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9 이하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9,10)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끝까지 가장 기쁨으로 활기차게 일하는 품꾼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의 포도원에 부름받아 일한 것만으로도 가장 큰 은혜요 축복이요 특권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품삯이 적다고 불평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이야말로 포도원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더 많은 상으로 갚아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말씀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다른 사도들보다 나중에 부름받았지만 더 많이 기쁨과 감격으로 수고함으로써 먼저 되는 자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할 것입니다. 우리도 남은 인생의 여정에서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할 시간이 각자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 남은 시간에 집주애서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지상적인 보상을 바라기보다 구원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하여, 포도원에 불러 주셔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땀 흘려 일합시다. 그리하여 비록 나중 된 자였지만 먼저 될 자가 됩시다. 하나님의 포도원인 교회와 더 나아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과 우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여 원망이 전혀 없이 땀 흘려 섬김과 봉사과 구제와 전도와 기도에 힘쓰다가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에 주님으로부터 귀한 칭찬과 후한 상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