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공비부터 김신조까지…‘강남불패’ 탄생은 북한 덕분이었다? [사-연]
한주형 기자 moment@mk.co.kr
매일경제 기사 입력 : 2023-10-04 19:00:00 수정 : 2023-10-08 13:25:31
강남 개발사를 따라 걷다 (2) [사-연]
서울은 너무 북한과 가깝다
왜 파주나 일산과 같은 드넓은 평야를 두고 한강 아래 강남을 개발할 생각을 했을까요. 더욱이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도 세 개밖에 놓여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요. 사람이 살고 있던 강북에 비해 ‘텅 빈 도화지’ 같았던 강남이 개발에 용이하다는 점이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서, 1960~70년대 강남 개발을 앞두고의 사회상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60년대는 남북한 사이 대치와 이로 인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였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소요사태에, 당장 내일 전쟁이 발발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1960년 베트남 전쟁 발발을 계기로 북한은 대남 전략을 수정합니다. 접경지에서 잦은 국지도발을 일으켜 동요를 꾀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일례로, 1968년 DMZ 내에서 교전횟수는 약 500여회에 달했습니다. 이런 소규모 교전 외에도 1968년에는 크게 세 번 북한의 굵직한 도발이 있었습니다. 흔히 ‘김신조 사건’으로 알고 있는 ‘1.21 청와대 기습 미수 사건’, 청와대 기습 이틀 뒤 미국의 정보수집보조함이 북한 해군 초계정에 납치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 120여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한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입니다.
미수에 그쳤지만, 무장 게릴라들이 북한산 자락을 타고 청와대 코앞까지 내려와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곧 ‘서울은 너무 북한과 가깝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한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던 상황에서, 만약 다시 전쟁이 발발해 다리가 끊어진다면 당시 380만 명에 달했던 서울 인구를 도강하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서울 인구를 분산해 한강 남쪽으로 내려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생각은 당시 진행되던 서울의 개발계획에 영향을 주었고, 신시가지 및 택지의 개발이 한강 이북이 아니라 이남으로 향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위태했던 1960년대 국가안보 상황이 지금의 강남을 만든데 영향을 끼친 셈입니다.
고속도로 건설이 쏘아올린 영동 개발
영동지구 개발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왜 ‘영동’계획인가를 짚어보겠습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강남’이라는 말은 그냥 한강 이남의 땅을 지칭하는 말이었지, 지금과 같은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이때는 ‘강남’이라는 말 대신 ‘영동’, ‘남서울’, ‘새서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하던 ‘영동’이라는 말은 당시 한강 이남의 중심지였던 영등포의 동쪽 지역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독자적인 이름 없이 중심부로부터의 방향에서 기인한 이름만 보더라도, 강남 지역이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은 변방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강남을 그 누구도 ‘영동’이라 부르지 않지만, 그 이름은 영동고등학교, 영동세브란스병원, 영동대교 등 강남의 다양한 시설과 건축물에 남아있습니다.
1966년 강남 일대 넓은 땅을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 예정지로 지정한 것을 시작으로 강남 개발의 서막이 오릅니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를 집필한 손정목 교수에 따르면, 이때만 하더라도 사업은 말 그대로 ‘예정’이었을 뿐 서울시·건설부 공무원 및 실무자 그 누구도 다가올 광대한 강남의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를 뒤흔든 사건이 이듬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수면 위로 올라온 ‘경부고속도로 개발’이었습니다. 고속도로 건설을 앞두고 발족한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에서는 서울시에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게 될 제3한강교 이남지역에 대규모 구획정리사업을 실시할 것’을 주문합니다. 영동 구획정리 사업에 대해 여유 있던 서울시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습니다. 게다가 청와대에서 고속도로 건설에 중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만큼, 어영부영 뭉갤 수도 없었습니다.
고속도로의 기점인 제3한강교부터 양재동 분기점까지, 직선거리 7.6km 고속도로 일대가 전부 대상지였습니다. 1968년부터 시행된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은 이 드넓은 땅을 영동1지구(현 서초구 일대)와 영동2지구(강남구 일대)로 구분해 구획을 그어 개발의 토대를 다지는 사업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해서, 불규칙하게 산재한 토지나 미개발지를 자를 대고 재단한 것처럼 선을 긋고 나누어 도로와 택지, 상업지구, 공원 등 도시에 필요한 요소들을 배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속도로와 인접한 영동1지구의 사업이 우선시되어 시행되었고, 영동2지구는 1971년부터 개발이 진행되었습니다.
영동지구 구획의 특징은 50m 이상의 넓은 간선도로를 만들어 이를 축으로 격자형으로 도심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강남대로, 테헤란로, 영동대로 등 강남의 넓은 대로들이 이 과정에서 탄생했습니다. 다만 폭이 큰 대로에 비해 내부 블록에는 도로용지가 확보되지 못해 비정형적인 구조의 좁은 도로들이 많이 나타났고, 주택용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녹지나 상업용지의 비중이 적었습니다.
황량한 벌판을 사람 가득한 시가지로
지난 ‘사-연’ 한강 다리 편에서는 제3한강교(한남대교) 건설을, 경부고속도로 편에서는 고속도로의 준공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1970년, 한강의 남쪽을 향해 뻗은 번듯한 다리와 고속도로의 등장은 서울시민들에게 강남이라는 드넓은 땅을 인식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푸성귀나 재배하던 땅이었지만, 이제는 이곳 역시 ‘서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1970년대 초, 구획정리사업과 함께 영동지구 개발이 박차를 가하며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고속도로를 따라서 황량한 벌판이 방치되어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여의도 면적에 열배에 달하는 이 드넓은 땅을 하루빨리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시가지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시기, 강북을 억제하고 강남개발을 촉진하는 다양한 정책이 등장합니다. 강남에 집중된 인프라를 서울의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지금의 모습과는 정 반대의 방향이었습니다.
1970년 11월, 양택식 서울시장은 영동지구 개발과 관련된 ‘남서울개발계획’을 발표합니다. 영동1지구와 영동2지구를 합한 ‘남서울’에 167억 원을 들여 6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신시가지를 개발해 과밀한 구시가지의 인구를 분산하겠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습니다. 이를 위해 삼성동 5만평 부지에 상공부와 한국전력공사 등 12개 국영기업이 입주할 종합청사를 신축하고, 여기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거주할 수 있는 30만평의 주택용지를 확보한다는 안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더해 정부기관 및 사회단체를 적극 유치하여 공무원 타운을 조성하겠다는 계획도 내걸었습니다.
한술 더 떠 1975년 건설부는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하며 주택 및 건축물에 대해 각종 세제혜택을 주는 정책을 시행합니다. 이로 영동지구 내 주택과 대지가 부동산투기억제세, 영업세, 등록세 등을 면제받음으로써 개발에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해 구자춘 서울시장은 서울을 도심, 영등포 산업중심, 영동 금융업무중심의 3개 핵으로 분산하여 사대문 안에 집중된 중심기능을 이전하는 내용을 담은 ‘삼핵도시구상’에 대한 연구를 시작합니다. 이 구상은 2년 후 ‘서울도시기본구상’의 발표로 이어집니다. 이 구상은 실제로 많은 부분이 실현되어 강북에 편재된 중요 시설들과 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무엇이 이전하였기에 강북 서울시민들이 짐을 싸들고 강남으로 이사 가는 유인책이 되었을까요. 다음 회에서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자료>
ㅇ「강남 40년 영동에서 강남으로」, 서울역사박물관
ㅇ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 한울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