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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 묵상글 ( 모든 성인 대축일. - 욕심으로는 될 수 없는 성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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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01 01:31
- 욕심으로는 될 수 없는 성인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내며 우리 전례의 첫째 독서는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 성인들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렇지요.
성인들 가운데 환난을 겪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 많고 큰 고통을 겪은 이들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환난을 겪은 사람은 누구나 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때문에 환난을 겪지 않은 사람도 성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능력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의 가난이 거룩한 가난이라고 할 수 없듯이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환난을 겪은 것도 성인의 환난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왜 이런 얘기를 제가 할까요?
그것은 저에 대한 반성 때문입니다.
저는 일생 큰 환난을 겪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환난을 조금 겪었다고 해도 하느님 때문에 또는 하느님을 위해서
환난을 별로 겪지 않은 일생이었으니 성인은커녕 성도도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행복 선언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모든 성인의 날에 이 행복 선언을 듣는 것은
모든 성인은 다 이런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여기서 성인답게 행복한 사람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은 사람이요.
하느님 때문에 모욕과 박해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래야 하는데 저는 하느님 때문에 환난이나 모욕이나 박해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저도 한때 성인이 되고 싶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저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고
그런 뜻에서 그것들을 견디고 참아낸 적은 있지만 하느님 때문에
또 하느님을 위해 그것들을 감수하고 감당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말하자면 성인 욕심이었던 것이지 사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는 이제 성인을 내려놨습니다.
성인은 욕심으로 될 수 없는 것이고 되어서도 아니 되겠지요.
그러니 하느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환난을 받아들이지 못할지라도
나이 먹어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닥칠 때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봉헌할 수 있기를 이 모든 성인의 날에 바라고 비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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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50년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태어난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어른이 될 때까지 추적 관찰하는 종단연구(긴 시간 동안 특정 표본을 관찰하는 연구)가 시행되었습니다. 부모가 범죄자이거나 알코올중독자, 정신질환자여서 불안전한 환경에서 양육된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 살펴본 연구입니다. 40년에 걸쳐 시행된 이 연구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양육 환경이 불안정하고 피폐했던 200여 명의 연구 대상자 중 70여 명은 성인이 되었을 때 자기 부모와는 전혀 다른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물려준 유년기 양육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의 온전한 삶을 지켜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바로 ‘한 사람의 존재’에 있었습니다. 아이의 인생에서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 이해하고 수용했던 어른이 적어도 단 한 명은 존재했다는 사실이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게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환경에 지배받는 존재이고 때로는 너무 취약하지만,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이며 그것은 단 한 명의 영향력으로도 충분함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연구였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부모 때문에, 가족 때문에, 환경 때문에…. 그러나 그렇게 탓하면서 자기에게 다가왔던 유일한 한 사람을 스스로 거부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나’ 역시 그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왜 잊어 버릴까요?
주님께서는 그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을 철저하게 따른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이 바로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모든 성인은 세상의 행복을 좇지 않고, 주님 안에서의 행복만을 좇으셨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목적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나만을 위한 ‘누군가의 한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신 분들입니다. 이런 분을 우리는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모습대로 살지 않고 세상의 모습대로만 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기보다, 나를 위한 한 사람만을 찾았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의 성인을 기억하며,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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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칭찬보다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라.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은 즐겁고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더 가치 있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이다(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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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잘 익어 가는 11월의 가을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의 축복과 자비가 잘 익어 ‘성덕’의 열매가 맺혔으면 좋겠습니다.
정녕, 가을은 하나의 ‘변화의 극점’입니다. 자신을 찬란하게 꾸며오던 일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비우는 일에로의 ‘건너감’입니다. 그것은 붙들고 있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바람 부는 대로 나뒹구는 낙엽처럼, 매여 있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영의 이끄심’에 끌려 다니는 일입니다. 임을 찾아 바삐 달리던 일에서, 찾아 만난 ‘임과의 속삭임’에로의 건너가는 일입니다.
이제는 뒹구는 낙엽처럼,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지를,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지를,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어지기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비워지고서야 타인의 존귀함이 보이고, 허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자신이 비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해야 할 때입니다. 자신이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보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주님 안의 자신과 홀로 고독할 줄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는 공동체에 힘입어 살아왔다면, 이제는 공동체에 거름으로 자신을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성성’에로 나아가라는 강력한 호소를 듣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권고 문헌’인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2)에서 밝히셨습니다. “모든 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의 사명입니다.”(9항)
오늘 <말씀전례>는 ‘성성’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입니다.
그것은 ‘가난을 사는 일’입니다.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할 것입니다.
그것은 ‘슬퍼할 줄을 아는 일’입니다. 자신과 세상의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를 받고 기쁠 것입니다. 이미 깨어, 항상 임을 바라보며 기도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유해 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 있어야 할 하느님 품에 안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그것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고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대축일”, 이토록 우리는 복된 삶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말합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십시오.”(수도규칙 4,62)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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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하십시오!
교회가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 ‘성인들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은총의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성인들의 거룩한 생애나 업적을 일부라도 본을 받도록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느님과 일치하여 영생에 참여하고 있는 성인들이 아직 현세에서 구원의 길을 순례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하여 주기를 청원하기 위한 것입니다’(정하권). 다시 말하면 현세를 사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의 모범을 우리가 살아감으로써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인을 올바로 공경한다는 것은 외적 행사의 복잡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가경자 알베리오네는 “날마다 쉬지 않고 조금씩 주님께로 발길을 옮기는 것, 이것이 성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자 앙투안 슈브리에도 성인의 길을 말씀하십니다.“예수 그리스도님에 대한 앎이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님을 아는 것, 바로 그것만이 성인의 길을 걷는 신앙인의 목표요, 지름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인은“어쩌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사신 분들입니다”(함께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험난한 고난의 길,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의 길을 묵묵히 걸으신 분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1요한 1,12-13)이기에 성인입니다.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저희도 당신 집의 좋은 것을, 거룩한 당신 궁전의 좋은 것을 누리리이다”(시편 65,4). 그러나 그 성인의 거룩함을 잃어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거룩함을 잘 지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8가지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근원을 미래에서 찾아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기에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슬퍼함이 행복이 아니라 위로를 받음이 행복입니다. 땅을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하고 만족할 것을 기대하니 행복하고 자비를 입게 되고 하느님을 뵙게 되니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고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그 큰 행복을 차지할 기회를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주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행복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의 가난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그에게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고 자기의 죄에 애통해 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행복합니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 온유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황, 처지, 여건에 흔들림 없이 평상심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 자제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진선미를 갈망하며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5. 행복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자비는 사랑입니다. 애간장을 녹이는 안타까움을 간직하며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람입니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주님은 ‘내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을 지닌 사람, 죄에 물들지 않은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행복합니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외형적인 평온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심과 무질서, 불의와 미움을 거두고 화해를 전해주며 갈라진 사람을 맺어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선한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모욕과 중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들은 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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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의 작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은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한국 문학이라는 밭에서 자랐습니다. 저의 작품은 한국 문학이라는 밭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제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한국 문학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저의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준 선배, 동료, 후배 문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제게는 영광입니다. 저를 키워준 한국 문학과 함께 기뻐하고 싶습니다.” 저는 한강의 수상 소감을 보면서 그의 겸손과 인품도 노벨 문학상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와 이예원’의 번역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교황청에서 근무하는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 있습니다. 시대의 큰 어른이었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습니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가 있습니다. 500만이 넘는 가톨릭 신자가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이렇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도 박해의 칼 아래 쓰러진 수많은 무명 순교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역사에 드러나는 성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숭고한 삶과 희생 그리고 순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 모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 사도가 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고, 초대교회의 신학적인 기틀을 마련했던 바오로 사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분들만의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이웃을 사랑한 분들이 있어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본당도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있습니다.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신앙의 향기를 전해주는 수도자가 있습니다. 본당에는 지체를 이루는 봉사단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당은 그런 건물과 조직, 봉사자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 일찍 성당에 오셔서 기도하는 분들이 있기에, 주보를 나누어 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기에, 나눔과 희생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분들이 있기에 본당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을 기억하는 달입니다. 제 기억 속에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을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는 1970년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수염이 멋있었습니다. 곰방대로 담배 피우셨습니다. 제가 어렸고, 54년이 지나서인지 그 이상 생각은 잘 나지 않습니다. 작은형은 2004년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키도 컸고, 운동을 잘했던 형입니다. 구속되기보다는 자유를 좋아했던 형은 자유롭게 먼저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2011년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큰 산과 같았던 아버지는 제게 신앙을 주었습니다. 책을 가까이하였고,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하였습니다. 어머니는 2020년 코로나 시기에 하느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저를 사랑하였고, 자랑스러워하였던 어머니입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시기여서, 어머니 장례미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남아 있는 가족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새로운 삶으로 옮겨 갈 겁니다. 교회가 위령성월을 지내는 건,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는 우리의 희망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는 쉼터에 불과합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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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많은 영적 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빛나는 영적 보물이 성인(聖人)들 일 것입니다.
우리 교리 중 ‘모든 성인의 통공’에 대한 교리 내용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은 기도나 선행의 대가가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천국이나 연옥의 다른 이에게도 통하기에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 합니다.
즉 다른 이의 선행이나 기도가 누군가에게, 특히 그 선행과 기도가 필요한 이들에게 공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명을 통해 성인과 함께 살아갑니다. 또한 모든 거룩한 곳에는 그 ‘주보 성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각 본당도 ‘주보 성인’을 모시고 있고 한국천주교회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주보 성인들은 우리와 함께 이 신앙의 걷고 계십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서 나와 함께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주보 성인을 기억합시다. 성인들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하느님 안에서 행복의 은총을 누렸던 성인들처럼 우리도 행복의 은총을 얻을 수 있도록 청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성인의 공적을 우리는 나누어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누군가에게 우리의 선행과 기도를 나누어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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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성화음
화음은 서로 어우러지는 음을 말합니다.
피성화음은 화음의 반대 의미로 어울리지 못하는 음들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듣는 거의 모든 음악은 화음에 그 기반을 두고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귀에도 거슬리지 않고 매끄럽게 가슴을 파고듭니다. 어울리는 음들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즈(Jazz)라는 음악은 이 피성화음을 받아들입니다. 재즈는 어울리지 않는 음들도 받아들입니다. 재즈가 우리 귀에 거슬린다면 바로 피성화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즈는 말합니다. 피성화음 또한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재즈에는 ‘틀렸다’라는 말이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피성화음이 존재할까요? 너, 나, 우리가 혹시 피성화음은 아닐까요? 그것을 서로 받아들여 준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틀렸다’가 아닌 ‘다르다’라고 말하며 서로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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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성인들(All Saints)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성인성월, 희망성월”
어제 외출했다가 귀원 도중 수도원 정문을 통과하던 택시기사와 주고 받은 덕담이 생각납니다.
“천국에 들어오는 기분입니다.”
“맞습니다. 수도원은 지상천국입니다. 수도원 천국에 방문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연이어 ‘천국엔 누가 살고 있나? 성인들이 아닌가? 그럼 여기 수도원에 살고 있는 수도자들은 성인이겠다!’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천상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모든 성인들, 그리고 지상에서 살아가는 알려지지 않은 모든 성인들의 대축일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희망이자 성소입니다. 성인은 기억하고 기념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불림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여전히 좋아하는 오래 전 시가 생각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인들입니다.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참 기분 상쾌한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착한 삶을 살다가 죽어 영광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세례받은 신자들 역시 넓은 의미의 성인들이요, 양심의 확신에 따라 진실로 착한 삶을 살았던 모든 비크리스찬들 역시 오늘 축일에 포함되는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은 비단 그리스도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무수한 별들처럼 곳곳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가톨릭교회의 품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 넓고도 깊습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이 회색빛 11월 위령성월을 희망의 빛으로 환히 밝히는 느낌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위령성월이요 그래서 저는 11월 위령성월을 주저없이 성인성월이요 희망성월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위령성월이 끝나면 대망의 대림시기에 돌입합니다. 11월 위령성월 한달은 오늘 저녁성무일도시 흥겨운 후렴을 끊임없는 기도로 노래하려 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 근거한 천국의 성인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 가는 도다.”
사랑의 사도 요한이 둘째 독서에서 우리 모두가 성인임을 기분좋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단숨에 읽혀지는 2독서 사도의 말씀 대부분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복된 신원은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인 성인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런 희망을 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바로 순결한 그리스도처럼 순결한 하느님의 자녀인 성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행복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마침 다산어록 11월은 주제어와 11월1일 오늘의 말씀도 성인다운 삶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일일청한(一日淸閑;하루만이라도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본다는 것)”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중심이 있다. 마음에 중심을 곧게 세운 사람을 어른이라고 한다.”<다산>
어른을 성인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늘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드러나지 않는다. 섬세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 그 중심을 붙잡아야 한다.”<송나라 진덕수의 심경>
늘 하느님 중심을 꽉 붙잡고 사는 자가 성인이요 참 어른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 산상수훈의 진복팔단이 성인이 되는 구체적 방법을 알려 줍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대영성가들이 열광하는 산상설교의 참행복입니다. 말그대로 ‘거룩함의 대헌장’입니다. 구약의 십계명과는 비교가 불가합니다. “...하지말라”는,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금령의 십계명은 착한 모범적 신자는 될 수 있겠지만 절대 성인은 되지 못합니다. 닫힌 금령의 십계명과는 달리 하느님을 닮은 성인의 삶으로 끝없이 활짝 열린 참행복선언입니다.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요 늘 시작임을 깨닫게 하는, 늘 우리를 앞으로, 위로 향하게 하는, 참으로 우리를 겸허하게 하는 진복팔단을 살았던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참행복의 중심에 우리의 영원한 멘토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인들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가 하느님이자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거룩한 욕심, 청정욕(淸淨慾)의 성인들이 목표하는 참행복의 목록을 보며 여러분의 성덕 수준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머리맡에 써붙여놓고 평생 좌우명 삼아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모두가 이만하면 됐다가 아닌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전력을 다해야 하는, 늘 시작처럼 느껴지는 성덕의 여정임을 깨닫게 합니다. 진정 참행복을 추구하며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은 진짜 성인들입니다.
고백성사 성찰시 십계명 기준이 아니라 진복팔단을 기준으로 삼아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성화의 여정, 성덕의 여정에 이보다 거룩하고 적절한 수행은, 영적훈련은 없습니다. 아니 하늘에 가기 전, 참행복의 삶을 추구하는 진리의 사람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의 상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한껏 격려하고 고무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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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리라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온 누리 모든 이를
섬기러 마음이 가난하니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온 누리 모든 이를
위로하러 슬퍼하니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온 누리 모든 이를
세우러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니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온 누리 모든 이를
품으러 자비로우니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온 누리 모든 이를
비추러 마음이 깨끗하니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온 누리 모든 이와
더불어 살러 평화를 이루니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온 누리 모든 이를
살리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으니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온 누리 모든 이에게
주님을 드러내러 모욕당하고 박해받으니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리라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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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마태 5,1)
높은 영적 덕에서 나오는 설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가르치실 수 없었던가요? 예수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신 데는 두 가지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이사 40,9)고 한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
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음은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의 올라가심은 덕의 정점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신 것은 하느님의 의로움에 대해 가르치고 듣는 이는 누구든지 가장 높은 영적 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십시오”(1티모 4,12) 라는 사도의 말대로 가르치는 사람은 말보다 행실로 가르칠 수 있도록 스스로 자기 말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삶의 골짜기를 가는 사람은 어두컴컴한 길을 걸으며 부풀려 말합니다. 그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으며 자기 자신만을 단련합니다. 골짜기에 있으면서 산 위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야기하는 것에 어울리는 곳에 서 있도록 하십시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본 설교에서 우리는 엑카르트가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느님의 길을 따라 창조된 “새사람”을 입는 “영적인 혁명”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엑카르트가 강조하는 첫 번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즉,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이러저러하게 가지고 있는 관념들을 하느님에게 투사하는 짓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린 하느님 관념들을 하느님에게 투사하다가는 하느님을 죽일 뿐이다. 하느님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되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이 경우들은 모두 우리 지신이 빚은 것들이다. 하느님을 살해하는 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하느님을 살해하는 첫째 경우는 우리가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이려고 시도할 때다. 우리는 액카르트가 설교 11 에서 설파한 “힘 있는 하느님”을 흠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무명씨다. 하느님에 관해 무언가를 알거나 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지만 실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표현과 이해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언어는 하느님에게 이름을 지어 붙이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수단이다. 엑카르트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좋은”, “더 좋은”, “가장 좋은”과 “지혜로운" “더 지혜로운”, “가장 지혜로운”이라는 형용사를 자세히 설명한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스러운 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사랑과 사랑스러움보다 빼어나기 때문이다.(271)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성체성사에 대하여 (강론 272)
아우구스티노가 성체성사에 관해 한 이 강론은 405년에서 411년 사이에 막 영세한 사람들에게 행한 것이다. 예비신자는 당시 고대 교회의 일반적 관습에 따라 미사의 성찬례에 함께할 수 없었다. 이들은 말씀의 전례가 끝나면 성당에서 나와야 했다. 부활 밤 미사에서 세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미사 전체에 함께할 수 있었고 성체도 영할 수 있었다. 예비신자들이 이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가졌던 기다림과 기대 그리고 설렘은 분명히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다림 끝에 얻은 것은 무엇인가? 한 조각 빵과 한 모금 포도주이다. 이것만이 모든 것일까? 이것이 엄격한 교리를 배우며 길고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얻은 것의 전부란 말민가?
아우구스티노는 새 영세자들이 받을 수 있는 실망에 대해 감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들에게 이 강론으로 다가가려 시도했다. 이 강론의 중심에는 우리가 짐작하는 대로 성체의 거룩한 변화에 대한 이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일치를 이루는 성체성사에 대한 이론이 놓여 있다. 아우구스티노가 이 강론을 새 영세자와 첫영성체를 하는 사람에게 한 것을 보면 이 강론에 담겨 있는 내용은 성체성사에 대한 그의 생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우구스티노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유명한 표현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몸' 이 가진 두 가지 의미를 사도 바오로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또한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다.(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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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행복하여라!”(마태오 5, 3.4.5.6.7.8.9.10)
11월은 위령의 달이며, 11월의 첫날인 오늘은 모든 성인의 대축일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성인聖人이란 거룩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까? 하늘에 있는 사람이 거룩합니까? 아니면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하고 완전무결한 사람이 거룩합니까? 저는 믿습니다. 그 사람이 하늘에 있든, 땅에 살고 있던지 예수를 닮은 사람이 거룩하며, 예수를 닮은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과 함께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며”(묵7,14), 하늘에서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뵈옵는 사람들”(1요3,2참조)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닮은 사람은 그러기에 늘 상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께서 사셨고 우리가 당신처럼 살기 바라신, 참된 행복을 살려고 힘쓰는 사람일 겁니다.
모든 성인의 대축일과 위령의 날 첫 미사의 복음은 똑같이 마태오 복음 5, 1~12절을 들려줍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저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께 도달하리라고, 천국으로 초대받았다고 믿습니다. 산상수훈의 진복팔단 첫 말씀은 언제나 “행복하여라!”(5,3.4.5.6.7.8.9.10)로 시작하고 있으며, 이를 과거는 진복팔단眞福八端이라 하였습니다. 영어로는 Beatitudes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영어 Be + Attitudes의 합성어로 풀이하자면, 존재하는 태도, 존재의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태도는 바로 예수님께서 아빠 하느님 앞에서 사셨던 삶의 자세이며 태도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의 참된 행복을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하느님 앞에서 존재하는 8가지의 태도이자 마음가짐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해 아버지의 뜻을 준행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향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듣기 위해 맨 앞줄을 채웠던 그들은 그러면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용서받고 치유 받아 다시 삶을 삶대로 살도록 일으켜 세워진 사람들 곧 거리 모퉁이에 버려진 라자로들(=루16,19~31)과 또한 뒷골목 한적하고 으슥한 곳에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며 망가진 인생살이 후회로 하염없이 눈물짓던 마리아들(=요8,1~11)이었겠지요. 이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 당시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면 구걸하는 길밖에 없음을 깨닫는 지경까지 가난해진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하늘 향하여,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께 깡통을 쳐들었으며, 그게 그들이 한 일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은 하늘 말고는 하느님 외에는 더 바라볼 데가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철저히 낮아졌습니다. 어쩜 우리 역시도 그들처럼 영적으로 밑바닥까지 낮아질 때, 하느님 말고는 바라볼 때가 없을 때 온전히 그분께 매달리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 역시도 텅 빈 손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구걸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향해 내밀 때, 아빠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님과 더불어 먹고, 주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먹는 은혜를 내리리라 믿습니다.
산상수훈의 군중들은 세상에서 참으로 가난한 존재였고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을 통해 왜 사는지 그리고 누구 때문에 살아가는지 해답을 찾았기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처럼 아빠 하느님 앞에서 살아야 할 존재의 태도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주님처럼 아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서 그 사랑받음으로 행복하게 사는 데 있습니다. 행복은 먼 훗날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부터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며, 주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행복, 기쁨이며 위안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 살아온,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5,3~10)이야 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진복팔단을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이기에, 이들은 바로 살아 있든 죽었든, 이승에 있든 저승에 있든 하느님의 마음에서 보면 성인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묵7,9)
예수님이 제시해 주신 행복의 비결, 즉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여덟 개의 길이 있습니다. 이 여덟 개의 길 중에 어느 한 가지 길만이라도 제대로 걸어간다면, 제대로 살아간다면 마침내 행복에 도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덟 가지 길은 서로 다른 길이지만 마침내는 서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인들은 이미 이 땅에서부터 하느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으며, 우리도 그 길을 통해서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을 닮은 참된 행복을 누리며 마침내 천국에서 그분이 우리를 보시듯이 우리 또한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요한1서 3,2) 우리 모두 성인됩시다. 예전 꾸르실료 교육을 받을 때도, 꾸르실료 주말을 지도할 때도 마음에 와닿았던 마냐니타의 “성인되라고 새벽 인사를” 하고 불렀던 노래 가사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 성인되라고 서로 기도합시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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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하늘에서 받을 상은 지상의 행복으로 /
박윤식 [big-llight] 241031 19:42 ㅣNo.177225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들!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흡족해질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들!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을 만나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하느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누가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에게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 유명한 산에서 가르치신 진복팔단(眞福八端)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부족함을 느끼는 데 진정한 행복이 있단다. 우리는 넉넉하여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행복의 첫째로 가난을 꼽으셨다. 가난한 이의 대칭이 부자이다. 재물이 넘쳐야 부자라는 소리를 듣는다나. 그렇다고 부자라고 다 행복해질까? 행복과 먼 듯이 사는 자칭 부자가 주위에 너무 많다. 마음의 가난은 소유 앞에서 절제하는 거다. 그런 행동을 할 때에 행복해진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신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다섯 살 소녀가 억울하게 병으로 죽어 간다. 그 애가 살 수 있는 가장 유일한 길은 항체가 생긴 오빠의 피를 수혈하는 것뿐이다. 의사는 그를 불렀다. “네 피를 수혈해야만 동생을 살린단다. 그러자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네, 그렇게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수혈이 끝난 뒤, 그 소년은 물었다. “선생님. 제가 언제쯤 죽게 되나요?”
사실 그는 수혈은 죽는 줄 알았다나. 죽고 사는 건 본시 지상의 인간 것이 아니라 했다. 물론 쉬운 행복도 하늘이 내려 주어야만 그렇게 될 게다. 그러기에 아무에게나 그게 주어지는 건 아니란다. 오직 자격을 갖추었을 때에야. 그래서 그걸 갖춘 이라면 어느 틈에 곁에 와 있는 행복을 느낄게다. 하느님 때문에 베풀고 희생하고 포기하면 결국 행복으로 인도됨을 뜻하리라.
11월 1일 오늘은 모든 성인의 대축일로 전례력에 별도 축일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날이다. 인생은 무한히 짧고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영원하니, 눈을 들어 하늘 바라보기를 정녕 잊지 않아야 하겠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이 순례의 길에서 헤매거나 낙오하지 않도록, 천상 교회의 모든 성인이 항상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게다.
그렇다. 참 행복도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박해 받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하느님을 만나 위로받는 이들에 존재한다.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고, 나의 삶과 생명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리라. 교회는 오늘을 통해 믿는 이들에게 죽음 후의 새로운 삶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늘 깨우쳐 준다. 지상에서 하느님 때문에 모욕을 받는 이들은 정말 ‘행복’할 게다!
어쩌면 지상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 누가 뭐래도 성인들이라 불리면서도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참 행복을 여전히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이렇게 지내면서 성인들처럼 하느님과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이미 성인 반열에 드신 모든 성인에게 다시 한 번 도움을 더 간청하자. 마음의 가난은 지식이 아닌 행동이다. 소유에 대한 시각을 과감히 바꾸자. 정녕 행복은 물질 소유가 아닌 하느님의 힘을 소유하는 데 있으리라.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하늘에서 받을 그 상은 정말 너무 너무 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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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성인은 탁월한 성덕과 영웅적인 신앙의 삶이 인정되어, 교회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보기로 삼고자 공적으로 선포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는 성인들을 공경하며 그들의 삶을 본받으려 합니다.
성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풍요로움을 드러냅니다.
단순해 보이는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여러 가지 색으로 펼쳐 드러나듯이,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 투영시켜 다양하게 드러내고 특정한 요소를 돋보이게 하며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줍니다.
다른 한편, 성인은 주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모든 이를 뜻하기도 합니다.
천국에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이는 교회가 공적으로 선언하지 않았을 뿐, 하느님께는 당신 거룩함에 참여하고 있는 ‘성인’들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에 이 넓은 의미의 성인을 기리고, 우리도 성인이 되도록 부름받았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의지는 우리를 모두 성인으로 이끄신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인이 되겠다는 다짐은 자신의 노력으로 높은 경지에 닿겠다는 야망의 표현도 아니고, 다른 죄인과 나를 구분하며, 자신을 우월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교만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셨으니, 그분께서 반드시 완성하시리라는 믿음이고, 그분 뜻에 순종하는 겸손이며, 그분 부르심에 대한 성실하고 자유로운 협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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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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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행복 선언의 마지막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다른 경우와 다르게
예수님께서 부연 설명을 하십니다.
박해의 이유를 의로움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부연 설명에서는
'나'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살아가는 것과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같은 것처럼 나타납니다.
더욱이 이 모습은
예언자들의 모습과 비교되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살아가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의로움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단순히
성당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의롭게 살아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사회 안에서
정의를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데
점점 용기가 필요한 사회입니다.
그것을 말하면서 고통 받는 것을 피하고 싶다보니
신앙과 생활이 점점 분리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고
더욱이 그것으로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그 생각을 이어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간이 이어질수록
스스로도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주위 사람들 누구에게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그 일을 계속 이어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말씀을 통해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대단한 지지자가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반대해도
의로움을 살아가려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지지해 주시고
그 힘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즉 하느님의 힘으로
의로움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늘 나라임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데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편안한 길
고통이 없는 길을 선택하고 싶지만
하느님께서 지지해 주시는 길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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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인(聖人) 옆에 살기 힘듭니다!
저처럼 살짝 수준 떨어지는 수도자들끼리 수군수군 이야기하는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성인(聖人) 옆에 살다가 과로사한다!” 따지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백개의 팔을 지닌 사람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 저희 창립자 돈보스코도 결코 바오로 사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가였습니다.
넘쳐나는 뒷골목 청소년들, 산업화의 착취물로 이용당하는 청소년들을 보고 있노라니, 잠을 많이 잘 수 없었습니다.
천천히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두 가지,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 돈보스코가 전혀 다른 장소인 두 곳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에피소드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런 돈보스코와 함께 사목했던 제자들이니 얼마나 힘들었겠는지 상상이 쉽게 갑니다.
저는 늘그막에야 철이 들어 요즘 정말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다음 할 일, 밀려 있는 일을 생각합니다.
아침에 태안에 있었는데, 오후에는 서울에 찍고 저녁엔 대전 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간 게으름 피운 것을 반성하며 뛰어다니니,
다른 형제들에게는 부담이 될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성인은 과연 어떤 분일까 생각합니다.
물론 사목 현장에서 열심히 뛰어다닌 분들도 성인의 자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게 다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번째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신 ‘성덕(聖德)에로의 초대장’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인 ‘보편적 성화’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성인(聖人)의 길은 주교나 사제, 수도자의 전유물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건조하고 평범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성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덕이란 예수 그리스도 삶의 신비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특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친밀성, 그분의 가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평신도들께 아주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고 계십니다.
성인이 되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 고유한 벙법으로 성덕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들은 최선을 다해 요리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최선을 다해 도마질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방법에 따라 정성껏 지지고 볶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흡족해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요리의 달인’이 되는 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거기다 조금 더 보탠다면, 요리할 때 억지로, 짜증내며 하는 것이 아니라 환하고 기쁜 얼굴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는 요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요리하고 계신다면 그는 이미 훌륭한 성인 후보자입니다.
저는 가끔씩 우리 형제들 가운데, 성인 후보자가 있을까? 싶어서 형제들을 살펴봅니다.
정말 깜짝 놀란 일은?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몇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로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은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
늘 자주 차 한잔 했으면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아마 이 시대 성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 작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손길을 찾는 사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인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고 그 어떤 청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사건, 만남을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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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하늘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을 기리며, 또한 우리가 성인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날이다. 아무리 많은 성인을 모시고 그분들을 공경한다고 하여도 내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그 성인들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성인이 되도록 결심하는 날이어야 한다.
복음: 마태 5,1-12: 참 행복: 산상 설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1절) 산으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사람들을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장 높은 영적 덕을 갖추고서 그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회개하여 어린아이처럼 겸손해진 사람을 말한다. 세상의 부유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부유하게 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하늘나라는 이미 덕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이다. 이렇게 복된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가난해진 사람들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4절) 슬퍼하는 사람은 슬픔이라는 고통이 끝남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여기서 ‘슬퍼한다.’라는 말은 죽음이 아니라 죄 때문에 슬퍼한다는 의미이다. 나의 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그리고 온 세상의 죄 때문에 슬퍼하는 이들은 더욱 복된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5절) 복음 정신으로 젖은 온유한 사람은 주님의 온유함을 본받는다. 온유한 이들은 모욕하기보다는 모욕을 견디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이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이 타락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하느님 자녀의 영광에서 오는 자유를 얻으면, 살아있는 온유한 이들의 땅이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6절) 이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의로움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의로움에 대한 목마름은 가난도 배고픔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부를 낳는다. 하느님을 뵙는 것은 우리가 무로 사라지는 종말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해지는 종말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7절)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인간의 선행에 대해 다른 이들이 내리는 어떤 보상보다 뛰어나다. 거지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도 하느님 앞에서 거지임을 기억하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지를 대하는 대로 당신의 거지를 대하실 것이다. 참으로 자비로운 사람은 자신의 원수들에게도 자비를 베풀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8절)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죄를 끊고 믿음과 의로움을 실천하여 쌓는 행실로 하느님 마음에 든 사람을 의미한다. 바르게 행동하며 그렇게 하고자 생각하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을 본다. 인간의 정의는 하느님의 정의와 닮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어느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9절) 평화는 믿음이 빛나고 희망이 굳게 자리 잡고 자비의 불이 타오르는 곳에 있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말씀 아래 하나 되어 교회의 평화를 지키는 이들이다. 이 평화가 있는 곳에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든 일에 질서가 잘 잡혀있으며, 다툼이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0절)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견디는 이들에게는 불안에 떨지 않고 그것을 견디는 은총이 주어진다. 사도들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의로움을 위하여 받는 박해의 복됨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박해는 외국인에게서 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서도 의로움 때문에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1-12절)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늘나라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걸맞은 동료가 될 수 있도록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땅에서 걸림돌에 부딪히면 하늘의 영광을 그것에 비교해 보아야 한다.
“참 행복”이라는 이 말씀은 인간적 논리로는 어리석어 보인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온유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비난받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세상은 아무도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들만이 하느님 나라의 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얼굴에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마태 5,48) 하려고 그들과 고통당하신 주님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강령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팔을 벌리고 그들 안에서 영광의 왕의 얼굴을 발견하면서(마태 25,31-46),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인간들을 바라보는 복음의 주요한 선포이다. 참 행복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 하늘나라를 얻는 우리, 즉 성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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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유혹할 수 없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성인이 어떤 분인지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그리 깨끗하고 거룩할 수 있었을까요?
일본의 오랜 민담 중에 ‘가구야 공주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지구에 내려와 인간의 삶을 경험하고 궁극적으로 천상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천상의 존재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숲속에서 빛나는 죽순을 발견한 나이 든 대나무를 잘라 파는 노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가 죽순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작고 빛나는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기뻐서 그는 그녀를 아내의 집으로 데려왔고, 그녀를 딸로 키우며 그녀의 이름을 가구야히메(가구야 공주)라고 지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대나무꾼은 숲으로 돌아올 때마다 다른 대나무 줄기에서 금과 보물을 발견하여 금세 부자가 됩니다.
가구야 공주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그녀를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로잡습니다.
노인은 시골의 친구들에게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자기 딸을 높은 귀족과 결혼시키기 위해
황제가 사는 도시로 이사 나와 커다란 집을 짓습니다.
가구야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각지에서 귀족들이 그녀의 결혼을 청하러 찾아옵니다.
모두 고위 왕자인 다섯 명의 끈질긴 구혼자가
그녀와 결혼할 것을 주장하지만, 가구야는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하기를 꺼려 각 구혼자에게 불가능한 일을 맡깁니다.
그녀는 신화 속 섬의 전설적인 보석 가지와 부처의 구걸하는 돌 그릇 등 희귀한 보물을
각 왕자에게 요청합니다.
각 구혼자는 결국 속임수나 패배로 실패하고
그들의 진정한 성격과 무가치함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일본 천황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듣고 그녀에게 구혼하려고 합니다.
그는 그녀의 온화한 성격과 신비로움에 반해 그녀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냅니다.
가구야는 그를 좋아하고 그의 친절함을 존경하지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며 그의 영역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그에게 밝힙니다.
어느 날 밤, 가구야는 자신이 실제로 달에서 왔으며 곧 천상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양부모에게 밝힙니다.
상심한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지구에 머물게 하려고 노력하고, 황제는 그녀를 다시 데려가려고 올 천상의 존재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경비원을 보냅니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천상의 행렬이 내려오고, 깃털 옷을 입은 가구야는 출발을 준비합니다.
그녀는 황제에게 줄 메모와 불멸의 비약이 담긴 약병을 남겨 둡니다.
그녀가 떠난 것에 깊은 슬픔을 느낀 황제는 비약을 마시지 않기로 했고, 그녀 없이 영원히 사는 것보다 슬픔을 안고 사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대신 그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 불로장생약을 불태우라고 명령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후지산(문자 그대로 ‘불멸의 산’을 의미함)에서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정상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가구야 공주에 대한 천황의 영원한 기억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가구야는 이 지상의 존재가 아님을 알고는 이 지상의 모든 유혹에 물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깨끗이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바로 믿음으로. 오늘 제2 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지상에서 하느님 자녀임을 시험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임을 믿는다면 이 지상의 어떤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는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이 잿더미처럼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모든 것’을 주시는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 독서에서는 오로지 구원이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오늘 복음은 이 시련을 이겨낸 이들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온 땅을 정복한 알렉산더가 힘과 재산으로 누르려 했을 때 그저 술통에 누워 “햇빛이나 가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구약의 욥은 다 잃었지만,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력을 잃고도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이런 성인들을 유혹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것입니다.
다 가진 이들은 죄를 짓지 않기에 성인들입니다.
다 주시는 분은 전부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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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2ㄴ).”
1)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그곳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행복하고 좋은 곳이어서 놀라고, 그 좋은 곳에 여러 가지로 부족하기만 한 자기가 들어왔다는 것에 놀라고, 절대로 천국에는 못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들어와 있어 놀란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곳이어서 놀라고, “남들은 다 지옥으로 떨어져도 나는 아니다.” 라고 생각했던 자기가 들어와서 놀라고, 틀림없이 천국에 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지옥에 와 있어서 놀라게 됩니다.>
천국은 “제가 어찌 감히...” 라고, 진심으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만 있는 곳, 지옥은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라고 화를 내고 항의하는 어리석고 교만한 위선자들만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는 천국에 간다.” 라고 큰소리쳐도 안 되고,
“천국에 가기는 틀렸다.” 라고 스스로 포기해도 안 됩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충실하게 노력하면서.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은 은총의 시간입니다.
‘지금’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입니다.
충실한 신앙인은 매 순간 순간 믿고 회개하고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 말씀은, 나중에 얻게 될 기쁨이 아니라, 지금 누리는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일시적인 위안이나 주는 진통제가 아니라,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주는 치료제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바로 그 기쁨을
얻어 누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5,40-42).”
사도들이 박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기쁨’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고난 자체가 기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기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뭔가 덜 하신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겪는 고난은 예수님 수난의 연속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사도들과 신자들을 통해서 지금도 진행 중인 일이고, 종말의 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 수난과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3) ‘성인들’은 ‘이곳’에서부터 성인으로 살았던 분들입니다.
‘이곳의 삶’과 ‘그곳의 삶’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아무렇게나 막 살다가 그곳에서
성인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곳에서 성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성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곳과 천국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 있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지금 이곳에서 시작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지금 이곳에서부터 ‘천국의 기쁨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곳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신앙인은 기도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성인들이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면, 이곳이 천국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일은 우리 힘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가 참여하는 일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그렇게 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려고 일하시는 주님의 일에 동참한 분들을 기리는 날이고, 동시에 우리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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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5,1-12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있는 성인들의 신앙과 삶을 기념하며 그분들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나 하느님 나라에서나 참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통해 그분께서 주시는 찐 행복을 맘껏 누리는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逆說的)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지요. 돈이 많아야, 아프지 않고 건강해야,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지녀야, 외모가 남들보다 출중해야, 욕망을 맘껏 채워야, 남들로부터 주목받아야 행복해진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젠가 우리가 돌아갈 본향인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머니가 해주신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길거리에서 온갖 자극적인 냄새로 유혹하는 인스턴트 식품들을 뒤로 하고 집으로 달려가는 아이처럼,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비로소 누리게 될 참된 행복을 생각하며, 더 가질 수 있어도 더 누릴 수 있어도 적당한 선에서 욕망을 끊고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나 침묵 중에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너는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말씀을 듣게될까 두려워서,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는 말씀을 듣고 싶어서, 꼭 필요한 것 이상은, 내 것이 아닌 것들은 미련 없이 과감하게 내려놓지요. 그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을 누리는 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시는 것은, 그들이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행하며, 그분 뜻에 철저히 순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자신에게 닥쳐온 고통이나 시련 앞에 무릎 꿇거나 절망하지 않고, 인내와 믿음, 희망과 용기로 그것을 이겨내며, 그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선물처럼 자신을 찾아오는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행복하다”고 말이지요.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과 동떨어진 특별한 ‘공간’이 아닙니다.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환상의 세계도 아닙니다. 지금 내가 감사하면, 지금 내가 용서하면, 지금 내가 사랑하면 내가 사는 이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은 그것을 위한 조건들을 채우느라 그 행복을 누릴 시간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는 지혜로운 이들만이,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사는 온유한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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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천국은 얼마나 좋을까요? ”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게 대해서 수 없이 말씀하셨지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에서 “부활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 진다.”(마태 22,29-3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은 없으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은 초대는 받았지만 그곳이 얼마나 좋고 평화로운지에 대해서는
실감을 갖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열심하게 신앙생활을 하신 교우들 중에 임종을 맞다가 다시 살아 나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돌아와서 하는 이야기의 공통적인 것은
어두운 긴 터널을 빠른 속도로 지나서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계시는
천국은 이 세상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벼락을 맞았습니다’라는 책을 쓴 치과 의사인 글로리아 폴로는 콜롬비아 보고타 대학의
건물로 들어 가기 전에 벼락을 맞아 의학적으로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본인 자신도 그 순간에는 아무 것도 듣거나 느끼지 못하였지만 그녀 역시
긴 터널을 빠져나가는 순간을 체험했고 천국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작은 교회의 목회자이던 토드 버포는 그의 아들 콜튼을 통하여 증명된 사실을 토대로
‘천국에 다녀온 소년 (Heaven Is for Real)’을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당시 4살이었던 아들 콜튼이 급성맹장으로 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회복되었습니다.
훗날 콜튼은 수술을 받던 그 시간에 천국에 다녀왔다고 말하지만 누구도 귀를
기우리지 았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토트가 하나 둘 이야기에 놀라운 진실이 담겨져 있으면서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끝까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아이의 엄마와 교인들도 차차 어린이의 말을
믿게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하버드 출신의 신경외과 전문의였던 이븐 알렉산더(Even Alexander)는
‘나는 천국을 보았다 Proof of Heaven’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가 7일간의 뇌사상태를 겪게 되는데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권의 책으로
펴는데 여기에서 그는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맞지 못한 우리는 죽음 후에 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기에 경험보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요한의 서간에 귀를 기우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우리는 불완전한 현실의 우리의 모습을 보고 미구에 있을 부활의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 할 수는 없지만 진실하신 하느님께서 말씀해 주셨기에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교회의 모든 성인들의 축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례에 따라 하느님만을 믿고 살아가셨던 성인들께서 계시는
천국을 기억하며 성인들의 삶을 기리는 기쁜 축일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시문학의 표현을 하고 있는 요한 사도의 작품에서 우리는 천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하느님 어좌에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묵시 7,10)
그곳에 있는 원로들 하나가 희고 긴 옷을 입은 자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14절)
이 세상에서 살면서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우리도
걸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언젠가는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를 부활시켜
주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무수한 교회의 성인성녀들을 기리며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와 일치를 시킨 것입니다.
고통 없는 성인은 없습니다. 고통없는 십자가가 없듯이 죽음이 없는 부활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비록 우리가 부족하지만 언젠가 닥칠 죽음을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죽음에 대해서 때로는 두려움도 갖고 또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의심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주님을 의지하며 그 때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주님을 의지하며 그 때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고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의 길을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고 모욕을 받으며 온갖 사악한 말로 괴롭힘을
받지만 우리는 기뻐하며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지나가고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 때문입니다.
성인들께서 받은 상을 우리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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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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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우리 모두의 축일입니다. 교회가 성인으로 기리는 분들은 물론, 이름이 남겨지지 않았지만 주님 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무수한 무명의 성인들도 기억하며 경축하는 날이지요.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하니?" 하고 물으십니다.
"행복하여라"(마태 5,3-10).
산상설교에 등장하는 이 말씀은 이런 사람이 행복하다고 알리는 고전적 표현 방식이기도 하지만, 명령형으로도 들리고 감탄형으로도 들립니다. 세상 논리로는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은 이들을 거론하시면서 "행복하라!"고 명하시고 "넌 참 행복하구나!" 감탄하시니,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행복해야 하는 걸까요?
가난하고 슬프고 박해받는데 어떻게 행복할까요? 큰 소리 한 번 못 내고 맨날 지고 사는데, 무너지는 정의 앞에서 속이 타는데, 맨날 퍼주느라 바보 소리 듣고 이용만 당하는데, 두 마음 먹을 줄 몰라 맨날 요모양요꼴로 사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에이, 그래도 어떻게 그러고 살아! 재산도 좀 있고, 슬플 일은 피하고, 큰 소리로 내 권리 찾으면서, 원래 그런 거라며 불의도 슬쩍 넘길 줄도 알고, 자비도 손해 안 볼 만큼만, 이익이 된다면 양다리도 서슴없이, 당장 이익이 안 되면 평화는 무슨..." 하고 있다면 오늘의 말씀은 남의 나라 이야기, 사차원 언어에 불과할 겁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차지도 뜨겁지도 않게 예수님의 행복 선언과는 별개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지요.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가난 이야기를 하실 때 바리사이들이 비웃습니다(루카 16,14 참조). 아마 지금도 이 복음, 이 기쁜 소식이 울려 퍼질 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없지 않겠지요. 못마땅해 할 수도 있고, 복음 속 부자 청년처럼 결국 슬퍼하며 떠날 수도 있겠지요(마태 19,22 참조). 예수님을 따르는 길의 기본이 되는 이 행복 선언은 실은 엄청난 도전입니다. 가장 가난해지기로 작정하고 오신 예수님과 함께 인식의 전환, 가치의 전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저 액자 속 이야기로 그치고 말 겁니다.
한편, 현재 가난한 마음으로 슬픔과 의분을 다독이고 있다면, 큰 욕심 없이 착하고 순수하게 살고 있다면, 하느님 손에 전적으로 의탁하며 박해를 견디고 있다면, 내 성공이나 이익보다 온 세상이 두루 평안하고 무탈하길 기원한다면 이 말씀들은 엄청난 축복이고 위로입니다. 제1독서의 요한 묵시록이 말하듯, 그들은 지금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묵시 7,14) 하는 중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렇게 사는 이들의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영원한 생명을 지복직관이라 하지요. 이 지상의 순례 여정 동안 평생 그리던 님, 주님의 얼굴을 뵙고 그분 곁에서 누리는 행복을 말합니다. 이 행복에 대한 희망은 비록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주어진 삶을 소중히 안고 견디며 가는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알게 된 삶을 감사하며 소박하게 성심껏 살면서도 이 말씀을 남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고 자신이 행복한 줄 모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나친 겸손 또는 완벽주의의 덫에 걸린 탓이지요. 내 가난과 의탁과 온유와 의로움과 자비와 깨끗함이 100%가 아니라서 스스로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물러서거나 스스로를 평가절하 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그야말로 "행복하라!"고, "넌 참 행복하구나!" 순수하게 감탄하며 던지시는 겁니다. 성찰한답시고 자신을 난도질하고 부족한 부분을 파내느라 우울하고 의기소침하라고, 저의를 깔고 의뭉히 제시하시는 게 아닙니다.
모든 성인의 날은 무엇 하나 손색 없이 완벽한 성인을 기리는 날이 아닙니다.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을 뿐더러, 완벽한 사람을 성인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말씀하신 여덟 가지 항목을 다 갖추어야 행복한 게 아니라, 하나라도 얻어 걸리라고 여덟 개나 말씀하셨으니 그 하나라도 겨우 커트라인 걸리듯 걸치기라도 하면 "기뻐하고 즐거워"(마태 5,12)해야 합니다.
오늘의 대축일은 주님 품 안에서 행복할 자질 하나만 있어도 가슴 쭉 펴고 실컷 행복하라고 펼쳐 주신 대축제의 장입니다.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면 죽는 날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미 지금 여기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덕은 덕을 부릅니다. 지금 완성되어 가는 덕이 하나라면 그 하나는 다른 덕을 부르고 또 다른 덕을 키우면서 차츰 조화롭게 변화되어 갑니다. 그리스도의 모상이 되어 가는 과정이지요. 우리는 모두 이미 성인이거나, 성인이 될 자질과 역량을 갖춘 존재들입니다. 우리 영혼과 인격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창세 1,27 참조)은 지워질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야, 행복하니?" 하고 물으시는 주님 앞에 마음을 열고 잠시 침묵해 봅시다. 내 마음이 무어라 답하는지 듣고, 또 주님께서 무어라 하시는지 귀 기울여 봅시다.
행복은, 진심을 다해 말씀드리는데, 결코 세상 가치들 순이 아닙니다. 돈, 명예, 권력, 학벌, 지위, 스펙, 인맥, 명품은 잠시 허영심을 만족시켜주고 생활을 편리하게 해줄지는 몰라도 깊은 내면의 행복은 건드리지도 못하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내 인생의 두 주연, "나"와 "주님"의 행복 이야기에 고요히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뭔가 피어날 것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벗님의 본명(세례명) 앞에 거룩할 聖자를 붙여서 불러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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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모든 성인 대축일.
바른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삶
<2024.11.1> 아침을 여는 묵상 (딤전 1:1~11절)
❝바른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삶❞
❚ 거짓되고 헛된 다른 교훈을 경계하며, 바른 교훈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 바른 믿음의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 예수님이 소망임을 인정하는 삶입니다(1~2절).
디모데전, 후서는 디도서와 함께 목회 서신이라 불리웁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젊은 감독 디모데에게 목회적 교훈을 편지로 쓰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었고,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습니다(행 16:1). 그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인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영접한 이후로 항상 바울과 동행하였습니다(행 16:2;행 14:8~19). 또한 바울의 영적인 아들로서 2차 전도 여행 때부터 가장 지근거리에서 바울을 도왔습니다. 편지를 보내는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인데, 그 사도 직분은 ‘구주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된 아들 디모데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와 평안이 함께하기를 간구함으로써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있는 그의 사역이 은혜 가운데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오로지 우리 자신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세상이나 자신의 행위를 통해 평강을 얻으려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예수님이 아닌 자신의 열심을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는 은혜와 긍휼로 날마다 평강을 누리며, 장차 올 완전한 평강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또한 소멸되지 않는 이 소망을 예수님 안에서 바울처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가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른 믿음의 삶이란, 예수님이 우리 자신의 소망임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 예수님이 전부임을 인정하는 삶입니다(3~7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에베소의 몇몇 사람들이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며 성도들을 돌보도록 합니다(3절). 그들이 가르치는 ‘다른 교훈’은 어리석은 내용들을 담고 있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4절). 하나님의 일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인데, 저러한 것들은 쓸데없는 말싸움이니 일으키며 하나님의 일에는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사랑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철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가르칩니다(5절). 복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을 주장하는 자들의 마음에는 율법의 선생이 되려는 생각만 가득할 뿐입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6~7절).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진리에서 벗어난 모든 교훈은 복음을 오해하며 왜곡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배우가 연극에서 가면을 쓰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듯이, 자신들의 정체를 철저히 감추고 자신들이 참 진리를 전하는 자인 것처럼 속이는 자들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거짓 없는 진실된 믿음만이 예수님의 사랑을 확증할 수 있을 것이며,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부합된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삶이어야 합니다. 바른 믿음의 삶이란, 놀라운 은혜로 우리 안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임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 예수님이 복음임을 인정하는 삶입니다(8~11절).
바울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바로잡습니다. 즉 율법은 원래 악한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그것을 선한 것으로 사실 착한 사람에게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법을 지키지 않고 어기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8~10절). 거짓 교사들은 율법에 대해 무지할 뿐 아니라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을 행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율법 교사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교훈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으로 따름이니라(11절)고 말하면서 ‘바른 복음, 바른 교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어야 구원의 필요성을 알게 되고, 그래야 십자가 복음이 선포될 때 참으로 믿고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율법을 통해 복음을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즉, 복음에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담겨 있으며, 실제로 복음은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능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가 어떠한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할 수 있을까...’ 바울의 외침에 대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에 아들을 보내심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바른 믿음의 삶이란,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며, 우리 삶의 전부이며, 복음임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죄와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소멸되지 않는 소망을 에수님 안에서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부이며, 기쁨의 원천이신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며 복음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딤전 1:1~1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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