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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 지역의 중심. 홍산문화와 고조선의 고향 조양시
조양(朝陽-차오양)은 요서 지역의 핵심 도시입니다. 현재 중국의 행정구역상 면적이 19,736㎢로 경상북도 전체 면적보다 조금 더 크며, 인구는 340만으로 인구밀도는 높지 않습니다. 현재 조양시에는 북표시, 능원시, 건평현, 조양현,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이 속해 있습니다. 고대 조양시는 현재 조양시(쌍탑구, 용성구)와 조양현 일대를 주로 의미합니다. 이곳은 시대별 인구의 증감이 큰 곳입니다. 다만 북경에서 요양으로 이어지는 길과, 조양에서 홍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교차하며, 대릉하를 끼고 넓은 평지가 조성되어 있다는 지리적 강점이 오랜 세월 요서지역의 교통 중심지, 정치 중심지로 기능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조양시에는 홍산문화 유적을 전시하는 대표적인 박물관인 조양시박물관이 있습니다. 조양시는 내몽골자치주 홍산시, 우한기와 더불어 요하문명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홍산문화를 상징하는 옥기 가운데 요령성 조양시는 옥웅룡(玉熊龍)을 상징으로 삼고 우하량에서 발견된 여신상을 강조하는 반면, 내몽고자치주 홍산시는 옥저룡(玉猪龍)과 오한기에서 발견된 남신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조양시가 강조하는 옥웅룡은 곰토템과 관련이 있으며, 단군의 어머니 웅녀(熊女)와도 관련성이 높습니다. 조양시 일대에는 전기 청동기문화인 하가점하층 문화 유적지가 많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대릉하 주변에 있는 풍하 유적, 대규모 석성 유적인 북표시 강가둔 유적 등이 대표적입니다. 홍산문화가 붕괴된 후 소하연문화 단계를 지나 B.C 2,200~1,600년 사이에 번성했던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조선과 관련성으로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하가점 하층문화의 대표 유적 가운데 하나인 홍산시 삼좌성 석성에는 고구려 성에서 발견되는 치가 대량으로 있습니다. 연대 차이가 2천 년 정도 차이가 있으므로, 직접적인 계승성을 말하기는 어려우나, 고구려의 치와 연관성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가점 하층문화 토기와 고조선의 표지유물로 꼽히는 미송리형 토기와의 연관성도 주목할 만합니다. 하가점 하층문화를 고조선 문화로 볼 것인지, 고조선 문화에 영향을 준 문화로 볼 것인지는 많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요서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적봉시 일대는 B.C 2,400년, 조양시 지역은 B.C 1,700년, 요동 지역은 B.C 1,500년경에 청동기시대로 진입합니다. 연대는 앞으로 수정될 가능성이 있지만, 요서 지역이 요동 지역에 비해 빠르다는 것에는 다른 견해가 없습니다. 고조선의 초기 활동 무대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한국 청동기 문화의 시작, 고조선의 시작 시점을 다르게 볼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가점 하층문화보다 더 중요하게 우리가 주목할 문제는 하가점 하층문화 다음 시기에 요서지역의 문화권역에 대한 것입니다. 1958년 조양시 서남 지역에서 발견된 십이대영자 무덤에서는 비파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이 동반 출토되었습니다. 십이대영자 유적을 대표로 하는 십이대영자문화 B.C 9~4세기 유행한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를 일컫습니다. 최근에는 요하 중류의 심양-요양 일대는 물론, 내몽고 동남부 일부까지 포함시켜 이해하는 추세입니다. 토광묘가 발달하였고, 비파형동검, 기하학문 선형동부, 이중구연(겹아가리) 이나 점토대가 있는 발형(鉢形)토기가 표지 유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 이후석, 「요령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네트워크와 교류」, 『고조선의 네트워크와 그 주변사회』, 주류성, 2022년, 313쪽
요령지역 비파형동검문화 전기 단계를 의미하는 십이대영자문화는 1980년대 이전까지는 동호(東胡)의 문화로 보는 관점이 많았지만, 이후에는 고조선으로 보는 관점이 많아졌습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B.C 8세기경에 고조선이 남긴 유적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초기에는 요서 지역, 후기에는 요동과 한반도 지역으로 변했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합리적인 견해라고 생각된다. 요서지역에서 하가점상층문화가 전개된 홍산 등 서북부 지역은 북방 유목민의 문화권역으로, 연산산맥 남쪽은 공병식동검문화로 상징되는 중원 농경민의 문화권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반면 비파형동검문화가 꽃피운 조양을 포함한 요서 동남부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가정 하층문화 이후 시기에 지역이 구분된 만큼, 고조선의 영역이나 역사를 규명할 때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요서 지역의 이러한 3개 문화 접점 지역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집니다. 7세기 고구려-돌궐-수(당)이 대결하던 지역도 요서 일대입니다. 요서 지역은 다문화가 공존하던 곳입니다. 현재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 평양이 어디였는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조양도 그 후보지로 꼽을 수가 있습니다.
B.C 12~11세기에 은주청동기문화가 연산산맥을 넘어 대릉하 유역으로 확대되는데, 객좌현 등지에서 발견된 기후방정(箕侯方鼎)은 기자의 동래(東來)를 증거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한국 학계는 고조선이 언제부터 국가 단계였는가 문제에 크게 집착합니다. 하지만 국가 단계가 아니라고 해도,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고조선의 역사는 형성기부터 멸망기까지 동일한 성격을 가진 정체적 실체가 아닙니다. 국가라는 단계가 되어야만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복생의 『상서대전』 , 사마천의 『사기』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고 했다. 유물 출토로 볼 때 기자 집단이 분명한 정치적 실체를 갖고 있는 만큼, 기자가 망명한 B.C 12세기 이전에 분명히 조선이란 정치체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서 지역으로 이주한 은주(殷周) 세력(기자)의 문화적 범위가 한정된 것은, 고조선의 저항으로 기자 세력이 후퇴하여 소멸했음을 의미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고기(古記)』에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기자국 소멸 이후 단군조선이 존속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곧 조양(朝陽)일 수 있습니다.
고조선의 실체와 관련해, 많은 견해가 있지만, 고조선의 후보지인 조양시에 가서 그곳 박물관에 전시된 여러 유물들을 보고, 고조선이 실체에 대해 탐구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십이대영자 유적 현장에 가면 아무것도 볼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조양시박물관에 가서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조양시 자체를 보는 것도 한국인에게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조양시는 불탑이 많은 도시입니다. 조양박물관 옆에 남탑과 300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북탑은 조양시를 대표하는 불탑입니다. 남탑은 1076년 요나라에서 만든 탑으로, 높이 42.6m, 13층 벽돌탑입니다. 남탑에서 300m 거리에는 북탑이 있습니다. 남탑과 북탑을 연결하는 거리가 모용가(慕容街)입니다. 조양을 수도로 삼아 번영했던 모용선비의 역사를 기념해 만든 이름입니다. 조양가는 골동품 골목으로 유명합니다. 조양 북탑은 남탑과 비슷한 모양인데, 북위 효문제 시기인 485년에 세워졌다고 하고, 문헌상으로는 수나라 때 처음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요나라에 와서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져 1043년에 완성됩니다. 현재 외형은 전형적인 요나라 탑입니다. 탑 안에서는 금제 사리탑 등 다량의 유물이 나왔고, 4면에 소형화 한 8개의 불탑을 새겨 넣었습니다. 각 탑의 명칭도 새겨넣어 습니다. 불탑 안에 또 다시 불탑을 부조해 넣음으로써, 우주 속에 작은 우주가 존재하는 화엄 연화장 세계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조양을 대표하는 야외 유적인 만큼 한번 보고 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고조선 문화를 꽃피우고, 고구려의 변경이었던 대능하도 보려고 합니다. 2000년 조양시를 방문했을 때, 대릉하 강변에서 조죽과 꽈배기로 아침을 먹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릉하는 우리 고대문화를 꽃피운 강이라서, 이번에 다시 보고 싶습니다.
조양시, 요서지역과 관련된 고구려 이야기는 다음 편에.
첫댓글 여건만 되면 가고 싶은데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