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 에세이(4) - 광주상고 시절
자전 에세이(4) - 광주상고 시절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달랐다. 친구들도 다들 어른이었다. 광주와 전남 일대에서 대부분 나와 같은 이유로, 즉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고로 진학해온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모두가 공부를 잘하고 생각이 깊은 친구들이었다. 내가 입학하기 전까지는 상고는 인문계 시험을 치른 후 입학하는 후기였지만, 나부터는 전기로 바뀌었다. 즉, 나 이전에는 전기에 떨어지고 오는 학생들이었다면, 나부터는 자원해서 온 학생들이었다. 그래서 전에는 있었던 대학진학을 위한 진학반 편성도 없었다. 모든 교과과정은 은행과 기업에 취업을 위해 필요한 커리큘럼으로 짜여져 있었다.
나는 상업학교 교과과정에 적응하지 못했다. 특히 부기나 주산 등이 싫었다. 사춘기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학기마다 정해진 급수를 따야 졸업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런게 싫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상고로 진학을 했지만 자신의 미래를 다양하게 모색하는 시기에 한 틀에 묶어놓고 공부를 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이 적응을 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대신 나는 돌파구를 찾았다.
그때 광주지역에 흥사단 아카데미라는 학생단체가 있었다. 나는 광주상고 아카데미에 가입했다. 학교 근방에 사무실(‘단소’라고 불렀다)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단소’에 모여 도산 안창호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공부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남녀 고등학생들과 토론도 하고 물과 산을 찾아 수련회 활동도 했다. 나는 취업을 위해 주산이나 부기를 강조하는 학교 생활보다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이 더 좋았다. 그곳에는 인문계 남녀 고등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이때 자연스럽게 정치의식, 사회의식,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 조직은 일제하의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나는 자연히 민족, 분단, 통일, 민주주의 등에 대해 많은 말을 듣게 됐다. 도산 안창호와 흥사단은 민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준비하고 수련하는 참된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우리는 ‘도산의 말씀’을 공부하며 토론했다. 그리고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남녀(忠義男女)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며 덕·체·지 삼육을 동맹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의 전도대업(前途大業)의 기초를 준비하자”는 규약을 외웠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말 때 문답과 심사 등 여러 과정을 거쳐 흥사단 ‘일반단우’로 가입했다.
* 광주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 시절
당시 ‘단소’에는 서울과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 회원들이 많이 드나들곤 했다. 대학생 회원들은 당시 박정희 유신 정권 시절의 시국과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느 대학에서 데모가 있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곧 망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대학생 형들이 몰래 본다는 책도 함께 봤다. ‘사상계’와 ‘창작과 비평’을 돌려보고, 시인 김지하의 <오적>, 전남고 교사로 있다 해직당한 문병란 선생의 시집 등을 돌려봤다. 서울대 한완상 교수의 <민중과 지식인>이라는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매년 4.19 때는 광주공원에 있는 4.19 학생의거 학생탑을 참배했다.
나는 흥사단 활동은 재미있었지만, 학교 생활은 적응하지 못했다. 급기야 2학년부터는 선생님들과 충돌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주산을 가르치는 선생이 정해진 급수를 따지 못한 나를 포함한 학생들을 체벌했다. 손바닥을 때리고 엉덩이를 때렸다. 화가 났다. 부기 선생님은 문제를 풀지 못하는 나를 학생들 앞에서 때렸다. 나는 분을 못 이겨 칠판을 주먹으로 쳤다. 당황한 선생님은 급우 들 앞에서 벌을 세웠다. 나는 화가 났고 치욕을 느꼈다. 순간 몸이 경직되고 쓰려졌다. 양호실에 업혀가 안정을 취하고서야 몸이 바로 돌아왔다. 나 말고도 상업학교 커리큘럼에 적응하지 못해 수업에 충실할 것을 강요하는 선생님들과 충돌을 빚는 몇몇 친구들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학교를 그만두거나 아니면 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야구부에서 야구를 한 적이 있었다. 광주상고 야구부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나는 담임선생과 나의 상황을 걱정해 지명된 지도선생에게 1학년으로 내려가 야구를 하겠다고 말했다. 집에도 이야기를 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나를 두고 근심이 커졌다. 학교는 나를 설득할 꾀를 냈다. 하루는 흥사단 아카데미를 지도하는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가보니 야구 감독도 와 있었다. 지도 선생이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야구를 할 수 있는 몸이 되는지 한번 보자. 웃통을 벗어보라.”
나는 옷을 벗고 심사를 받았다. 그러더니 감독이 말했다.
“너는 야구할 몸이 아니다. 그만 포기하고 공부나 해라.”
당초 야구를 하겠다는 내 생각은 엉뚱했다. 어렸을 적부터 야구를 해도 적응하지 못하는 선수가 한둘이 아닌데 고등학교에 와서 야구를 시작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 고집을 꺾기 위해 야구감독 앞에서 옷을 벗고 몸을 심사하는 시늉을 하게 한 것이다.
나는 실망했다. 이틀 정도 학교를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밥맛을 잃었고 어머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나들은 나를 붙들고 설득했다. 나는 내 방 책상에 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생각을 거듭했다. 순간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나들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며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나는 방문을 열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펑펑 울며 용서를 빌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내 진로는 결정됐다. 부모님과도 대학진학 공부를 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학교에서도 뒷자리에서나마 주산이나 부기 등 공식 커리큘럼 수업과 관계없이 대학진학에 필요한 공부를 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학교에서는 더 이상 주산이나 부기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진학에 필요한 공부를 시작했다. 필요한 과목은 학원을 다니기도 하며 보충했다. 어떤 시험 과목은 상고 커리큘럼에는 없거나 일부만 배우고 취업 공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 나는 1978년 광주상고를 졸업했다. 졸업앨범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