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글 | 월간조선
2018년은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대한민국은 민족사상 유례가 없는 자유와 번영을 일구어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갓 벗어나 남북으로 분단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나라가 지금은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으로 우뚝 섰고,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 회원국이 됐습니다. 근대까지는 중국에서, 해방 이후에는 미국에서 문화를 수입하던 나라가 ‘한류(韓流)’를 전파하는 문화 수출국이 됐습니다. 한민족이 세운 나라가 이만큼 인정받고 대접받은 적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건국 70년을 맞는 나라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습니다. 민주헌정을 시작한 지 40년 가까이 흐른 지난 1987년 이후 민주주의가 정착되는가 싶었지만, 그 민주주의가 거짓선동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북한 김씨 왕조의 핵 협박 앞에서 제대로 맞서기는커녕 국민의 의지조차 하나로 모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40여 년간 우리를 먹여 살려온 산업들은 중국 등 후발국가들의 도전으로 흔들리고 있고, 앞으로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할지도 막막합니다.
무엇보다도 답답한 것은 건국 70년을 맞도록 이 나라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존중한다 해도,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것은 1948년이라는 법적·정치적 상식에 눈을 감는 세력마저 있습니다.
《월간조선》은 설날을 맞아 ‘책 속의 책’으로 ‘건국 70년 대한민국 70장면’을 준비했습니다. 될 수 있으면 1회성 사건보다는 이후의 역사에 지속적인 흔적을 남긴 사건들을 선정하면서, 우리 현대사를 긍정적으로 조망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시절을 겪어온 많은 분에게는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던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젊은 분들에게는 간략하나마 현대사에 대한 좋은 교재가 될 것입니다. 저희도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 현대사를 돌아보면서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꼈습니다. 지난 70년 동안 이 나라 대한민국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는지, 우리가 이룩한 성취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새삼 절감했습니다. 《월간조선》은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을 지켜나가는 데 앞장설 것입니다.
1. 5·10 총선거(1948년)
![]() |
1948년 5·10 총선 포스터. ‘총선거로 독립문은 열린다’ ‘중앙정부수립’이라는 문구가 첫 총선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
1947년 7월 제2차 미소(美蘇)공동위원회가 결렬됐다.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결의했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물론 김구와 한국독립당, 중도우파의 김규식 등도 모두 이를 환영했다.
하지만 38선 이북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하면서 정국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좌익 세력의 선동으로, 소련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유엔 감시하의 총선을 받아들이는 것은 남북한에 분단정부가 들어서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들은 4월 19일~4월 26일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제(諸)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했다. 소련의 지시에 따라 북한 정권이 사전에 준비한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회의에서 이들은 선전용 꼭두각시 이상의 역할은 할 수 없었다. 이에 앞서 4월 3일에는 제주도에서 5월 10일로 예정된 총선거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 뒤에는 남로당이 있었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5월 10일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좌익 세력은 투표소와 경찰관서, 우익인사들을 습격했다. 전국에서 40여 명이 사망했다. 제주도에서는 폭도들의 준동으로 3개 투표소 가운데 2개 투표소에서 투표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선거인 등록자의 89.8%가 투표에 참여했다. 전체 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71.6%에 달했다. 198명의 당선자 가운데 무소속은 85명, 독립촉성국민회 54명, 한국민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기타 18명이 당선되었다.
유엔위원단은 선거에 대해 “언론·출판·결사의 민주적 권리가 보장된 합당한 수준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실시된 이번 선거는 전체 한국 인구의 3분의 2가 거주하며 유엔위원단의 접근이 허용된 지역에서 유권자의 자유의사가 정확히 표현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5·10 총선은 우리 민족이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을 행사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백성(百姓)’은 ‘국민(國民)’이 되기 시작했다.
2. 대한민국 건국(1948년)
![]() |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정부수립기념축전. 이날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써 건국에 이르는 긴 과정이 일단락됐다. |
5·10 총선으로 구성된 제헌의회는 5월 30일 개원(開院)했다. 초대 의장은 이승만이 맡았다. 제헌의회는 바로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가장 큰 쟁점이 된 것은 정부구조였다. 유진오 등 친(親)한민당계 인사들이 주축이 된 헌법기초위원회는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건국 초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주장했다. 결국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되,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무총리를 두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당시 세계적인 유행이었던 ‘진보적’ 사조(思潮)의 영향을 받아 헌법은 주요 산업의 국·공유화와 ‘노동자이익균점권(均霑權)’ 등을 규정하는 등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을 짙게 띠었다.
헌법은 7월 12일 국회를 통과, 같은 달 17일 공포됐다. 7월 20일 초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이승만은 출석 196명 중 180명의 지지를 받아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부통령으로는 상해임시정부의 원로인 이시영이 선출됐다.
이승만은 광복군 참모장 출신인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 초대 내각을 구성했다. 내심 자당(自黨) 지도자인 김성수가 국무총리로 지명되기를 기대하고 있던 한민당은 야당의 역할을 자임했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는 대한민국정부수립기념축전이 거행됐다. 이날 자정을 기해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미(美)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과 정부 수립 선포는 우리 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국을 탄생시킨 사건으로서 그 자체가 프랑스혁명이나 미국독립혁명과 같은 ‘성공한 혁명’이었다”고 평한다.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1949년 1월 1일에는 미국이 대한민국을 승인했다. 이듬해 3월까지 자유진영 26개국이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국교를 맺었다.
3. 여순반란사건(1948년)
![]() |
여순반란이 진압된 후 붙잡힌 반란군들. 이들 가운데 1000여 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
1948년 9월 9일 38선 이북에서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헌법안도 국호도 국기도 소련이 만들어 준 ‘괴뢰국가’였다.
그로부터 한 달 열흘 뒤인 10월 19일에는 여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제주도로 출동할 예정이었다. 14연대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세포였던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는 “경찰이 습격해 오고 있다” “동족상잔의 싸움터인 제주도로 갈 수 없다”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38선을 넘어 진격해 오고 있다”고 선동했다. 장교들과 반란에 반대하는 사병들은 사살됐다. 여수를 장악한 2000여 명의 반란군은 경찰관, 한민당 등 우익 정당·사회단체 간부 및 그 가족을 학살했다.
여수경찰서장 고인수 경감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총살당했다. 여수경찰서에 근무하던 여경(女警)들도 처참하게 학살됐다. 20일에는 순천이, 22일에는 보성·고흥·광양·구례·곡성이 반란군의 손에 떨어졌다. 순천에서는 순천중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된 인민재판이 벌어져 400여 명이 총살되거나 맞아 죽거나 목 졸려 죽었다. 산 채로 불에 태워진 사람도 있었다.
반란은 일주일 만에 진압됐다. 7000여 명이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3000여 명이 체포되어 그중 1000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토벌군에 쫓긴 반란군은 지리산 등으로 들어가 공비가 됐다.
여순반란이 일어난 것은 미군정이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를 만들면서 장병들의 이념을 검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순반란을 계기로 국군은 군내 좌익 세력에 대한 숙군(肅軍)을 단행했다.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군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던 군번 1~100번 가운데 25명이 좌익으로 처벌되었다. 초급 장교와 부사관 가운데 3분의 1이 좌익으로 드러났다. 병사들까지 포함해 병력의 5%에 달하는 4749명이 총살, 징역, 파면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육사 2기 출신 박정희 소령도 있었다. 이러한 숙군 덕분에 1950년 6·25가 일어났을 때, 국군은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1948년 12월에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됐다.
4. 반민특위(1949년)
![]() |
1948년 9월 22일 발효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체포된 친일파들이 포승에 묶여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
제헌헌법은 부칙에서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다. 이에 따라 1948년 9월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국회 내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됐다. 이에 따라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일제하에서 밀정 행위를 했던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천도교 교령 최린, 문인 이광수, 역사학자 최남선 등이 체포됐다.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지만, 친일파 청산 작업은 새로운 갈등을 야기했다. 특히 반공전선의 최일선에 서 있던 경찰은 대공수사에 앞장섰던 노덕술 등 경찰 간부들이 반민특위 산하 특별경찰대에 체포되자 동요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런 상황을 불만스러워했다. 1949년 6월 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산하 특별경찰대를 습격해 이를 해산시켰다. 1949년 4월과 8월에는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 국회 부의장 김약수 등 13명의 국회의원이 체포됐다. 이들 가운데는 반민특위 활동을 주도하던 3명의 소장파 의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반민특위의 동력은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초 2년으로 되어 있던 반민특위의 활동 기간을 1년 단축하는 반민특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반민특위는 1949년 8월 말 문을 닫았다.
반민특위는 688명의 반민족 행위자를 수사하고 559명을 특별검찰부에 송치했다. 그중 293명이 기소됐다. 이 중 12명이 체형(體刑)을 선고받았다(사형 1명, 무기징역 1명, 2년6개월 이하의 징역 10명). 공민권 정지는 18명이었다. 건국 후의 혼란, 북한과의 대치 상황 등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일제 36년간의 쓰라림을 감안하면 미흡한 처사였다.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친일파’에 대한 사법적 처단 자체가 없었다. ‘반동분자’ 제거의 일환으로 초법적인 숙청만이 있었다. 하나 일제하 도의원을 지냈던 강양욱(국가부주석), 관동군 통역 김영주(김일성의 동생. 노동당 비서), 만주국 검사 한낙규(검찰총장), 일본군 항공장교 이활(초대 공군사령관) 등 공산정권에 협조한 자들은 과거와 상관없이 잘나갔다.
5. 김구 암살(1949년)
![]() |
안두희에게 피살된 후 경교장에 안치된 백범 김구의 유해. 이후 그는 ‘민족’을 상징하는 순교자로 추앙받게 된다. |
1949년 6월 26일 오후 12시40분경, 서울 서대문 경교장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평생을 조국 광복에 진력했던 전(前)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암살된 것이다. 범인인 육군 소위 안두희는 “김구가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있어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일제하에서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김구는 반공·친(親)이승만 노선을 견지했다. 1948년 유엔이 남북한 자유총선거 실시를 결의했을 때만 해도 이를 찬성했던 김구는 몇 차례 입장 번복을 거듭하다가 결국 ‘단정(單政)수립’ 반대로 흘렀다. 여기에는 한국독립당 세력의 집권 욕구, 그리고 김일성이 파견한 거물간첩 성시백의 공작이 있었다. 1948년 4월 김구는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며 남북협상 참석을 위해 38선을 넘었다. 사전 각본에 따라 남북정치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김구는 김일성에게 “남한은 물론 북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반대한다”는 뜻을 표했다. 물론 김일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평양에서 돌아온 뒤 김구의 행보는 어지러웠다. 그는 김규식과 함께 5·10 총선 거부를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1948년 7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중국 대표 유어만과 만난 자리에서는 “남한이 북한이 지금 이미 보유하고 있는 군사력에 필적할 수 있는 군대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련은 아무런 책임 추궁을 당함이 없이 언제든지 인민군을 동원하여 기습 남침을 전개할 수 있는 상태였으며, 바로 그 같은 순간을 위하여 별도의 정부를 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수립할 만반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구를 존경하던 우익청년단체 조직원들 사이에서도 “그분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나왔다. 김구 암살은 그런 분위기에서 발생했다. 김구는 죽음으로써 ‘국가’를 넘어서는 ‘민족’이라는 가치를 대변하는 순교자(殉敎者)가 됐다.
6. 농지개혁(1950년)
![]() |
1940년대 말 농촌의 모습. 가난한 농업국가였던 당시 상황에서 농지개혁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
해방 당시 총경작지의 63.4%가 소작지였다. 전(全) 농가의 51.6%가 순소작농, 33.5%가 자작 겸 소작농이었다. 전 농가의 85%가 소작농이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1946년 3월 ‘무상(無償)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는 요란했지만, 실상은 농민들에게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만 주는 사이비 토지개혁이었다. 하지만 그 실상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북조선’의 토지개혁 소식은 ‘남조선’ 농민들에게는 복음이었다. 남로당은 이를 기화로 농민들에게 침투했다.
이승만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이승만은 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으로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조봉암을 임명, 농지개혁의 의지를 과시했다.
1949년 6월 15일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내용상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있어 시행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1950년 3월 3일 확정된 농지개혁법은 ‘유상(有償)몰수 유상분배’ 방식을 채택했다. 농민들이 매년 수확량의 30%를 5년간에 걸쳐 납부하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게 했다. 해방 전 소작료가 수확량의 50%에 달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환상적인 조건이었다.
“만난을 무릅쓰고 단행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촉에 따라 정부는 농지개혁법이 통과되기 이전인 1949년 6월부터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실무적 조치들을 해놓고 있었다. 덕분에 일단 법률이 통과된 지 불과 20여 일 후인 1950년 3월 25일경에는 사실상 농지분배가 끝났다.
농지개혁으로 58만5000정보의 농지가 농민들에게 분배됐다. 농지개혁 논의 과정에서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싼값에 팔아치운 농지도 71만3000정보에 달했다. 결국 전체 농지의 92.4%가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전(前)근대적 지주제가 완전히 해체됐다.
난생처음 자기 땅을 가지게 된 농민들은 ‘대한민국’의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았고, 6·25가 일어나자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했다. 자기 땅을 갖게 된 농민들이 열심히 일하면서 농업생산성이 올라갔다. 작으나마 여유가 생긴 농촌은 갓 만들어지기 시작한 국산 공업 제품의 소비시장도 되어 주었다.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이런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7. 6·25전쟁(1950년)
![]() |
6·25전쟁 발발 사흘 만에 북한군에게 서울이 함락됐다. 서울 시내를 지나는 북한군 전차. |
1949년 3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에게 무력통일 의사를 피력했다. 1949년 6월 말 미군은 500명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한국에서 철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군사원조를 호소했지만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1949~1950년 중공군에 소속되어 있던 3개 조선인 사단이 북한군에 편입됐다. 소련은 T-34전차와 각종 야포, 항공기 등을 북한에 지원했다. 1949년 10월 1일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했다. 1950년 1월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극동방위선 밖에 있다고 공표했다. 이는 남침을 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소련과 북한에 주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미국의 주도로 7월 7일 유엔은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의했다. 미국 등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다. 한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교두보를 방어하고 있는 사이에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결행했다.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했다. 10월 1일에는 국군 제3사단이 38선을 돌파했다.
궁지에 몰린 김일성의 구원 요청을 받은 중국의 마오쩌둥은 ‘의용군’으로 가장한 26만여 명의 중공군을 투입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자유통일의 기회는 날아갔다. 1951년 1월 4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그해 3월 서울을 탈환했지만, 이후 전선은 지루한 교착상태에 빠졌다.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협상은 2년여를 끌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3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300여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전쟁을 거치면서 국민들은 막연하게 동경하던 공산주의의 실체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전쟁은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켰다. 공산주의자들은 지하로 잠복했다.
8. 부산정치파동(1952년)
![]() |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관변단체와 지방의회 등을 통해 대중을 동원, 대통령직선제를 관철시켰다. |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 제정 과정 및 정부 수립 과정에서 한국민주당이 중심이 된 국회의 의지를 꺾고 대통령중심제를 관철했다. 야당인 민주국민당(한민당의 후신)은 1950년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내놓았지만 부결됐다.
1951년 1월 야당 의원들이 국민방위군 사건을 폭로했다. 그해 2월에는 거창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정부의 잇단 비정(秕政)이 드러나면서 이시영 부통령이 하야했다. 국회는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1952년은 이승만의 첫 번째 임기가 끝나고 제2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이승만은 야당이 우세한 국회에서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1952년 4월 123명의 국회의원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개헌선 122명을 넘어서는 숫자였다. 4월 25일 지방선거에서는 친이승만 세력이 압승했다. 이승만은 이를 바탕으로 대중을 동원, 반격에 나섰다. 5월 14일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했다.
5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은 공비 출몰을 이유로 임시수도 부산과 경남, 전남·북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대통령의 친위부대인 헌병총사령부는 국회의원들의 출근버스를 견인하고, 야당 의원들을 ‘국제공산당’이라는 혐의를 씌워 구금했다.
미국은 휴전협상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이승만 대통령을 이 기회에 제거하려고 생각했다. 대안은 국무총리 장면이었다. 일부 한국군 장성들도 군을 정치의 수단으로 쓰려는 이승만에게 반발했다. 하지만 미국은 결국 이승만을 버리지 못했다. 미국은 이승만과 야당의 타협을 종용했다. 국무총리 장택상이 나서서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하되, 내각제적 요소도 강화하는 타협안을 마련했다. 7월 4일 발췌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헌정위기는 일단락됐다. 이후 “대통령은 국민의 손으로 뽑는 것”이라는 생각은 한국 국민들의 뇌리에 꽉 박혔다.
부산정치파동은 이승만의 정권욕이라는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6·25전쟁 수행과 극동정책에 대한 이승만의 반발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9.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 |
1953년 8월 8일 경무대에서 열린 한미상호방위조약 가(假)조인식. 서명하는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을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고 있다. |
1951년 7월 시작된 휴전협상은 2년여를 끌었다. 휴전선의 획정, 포로송환 등이 핵심 쟁점이었다. 공산 측은 무조건적인 포로송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유엔군 측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으로 송환됐던 소련군 전쟁포로들이 학대받은 경험, 북한군 포로 중에는 6·25 개전 후 남한 지역에서 강제 징집된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자유의사에 바탕을 둔 송환을 주장했다.
휴전협정이 지지부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스탈린이 전쟁을 오래 끌어 미국과 중국(중공)이 계속 소모전을 벌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1952년 미국 대선에서 한국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세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당선되고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휴전협상은 급진전됐다.
이승만은 3년여를 끌어온 전쟁이 통일이 아닌 휴전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휴전회담에서 한국군 대표들을 철수시키고, 휴전에 반대하는 관제데모를 조직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은 ‘에버레디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이승만 제거를 구상하기도 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전국 포로수용소에 있던 2만7000여 명의 반공포로들을 석방시켰다. 이승만의 ‘몽니’는 미국·영국 등 유엔군 파견국가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겼던 작전지휘권을 회수, 단독으로 북진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을 달래기 위해 부심(腐心)했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묵인하는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미국이 보기에 한국은 상호방위조약을 맺을 만큼 전략적 가치가 높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됐다. ‘벼랑 끝 외교’의 승리였다. 조약이 체결되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10. 사사오입 개헌과 민주당 창당(1954년·1955년)
![]() |
부결됐던 사사오입 개헌안의 가결이 선포되자 야당 소속 청년 국회의원 이철승(왼쪽)은 단상으로 뛰어올라 최순주 국회부의장(오른쪽)의 멱살을 잡았다. |
1952년 발췌개헌으로 정권을 연장했던 이승만 정권은 1954년 11월 다시 한 번 무리한 개헌을 감행했다.
당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4년 중임(重任)이었다. 자유당 정권은 헌법 부칙에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규정을 신설,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해 5월 민의원 총선에서 자유당이 확보한 의석은 모두 114석이었다. 자유당은 야당 및 무소속 의원들을 매수, 회유해 개헌선을 넘는 137석을 확보했다.
그럼에도 11월 27일 국회 표결 결과는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나왔다. 가결정족수인 재적 3분의 2(136표)에서 한 표가 모자랐다. 자유당 소속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어쩔 수 없이 부결을 선포했다. 그러나 다음날 자유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기상천외한 논리를 전개했다. “재적 203석의 수학적 3분의 2는 135.333…인데 0.333…은 0.5 이하로서 수학의 사사오입(四捨五入)의 원칙에 따라 버릴 수 있는 수이므로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이 아니라 135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자유당은 11월 29일 본회의에서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다.
자유당의 이런 폭거는 야당 세력을 자극했다. 한국민주당에 뿌리를 둔 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계 등은 단일 야당 건설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조봉암 등의 혁신계를 동참시키느냐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이 출범했다. 조봉암은 그해 11월 진보당을 창당했다.
단일 야당이 탄생하기는 했지만 민주당은 출범 직후부터 내부 갈등을 겪었다.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 출신 구파(舊派)와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계 등 신파(新派)의 갈등이 그것이었다. 신익희·조병옥·윤보선·김도연 등이 구파, 장면·곽상훈·박순천·정일형 등이 신파였다. 4·19혁명 이후 집권한 민주당은 내내 신파와 구파 간의 내홍을 겪었다. 결국 구파는 신민당을 만들어 떨어져 나갔다. 후일 김영삼이 구파, 김대중이 신파의 맥을 이었다.
11. 실험용 원자로 마크2 기공식(1959년)
![]() |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7월 한국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 기공식에 직접 참석, 첫 삽을 떴다. |
1956년 7월 미국의 전력(電力)전문가 워커 L.시슬러가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했다. 그는 “원자력은 화석연료의 300만 배 에너지를 낼 수 있으며 자원빈국인 한국에 적합한 기술집약적인 ‘머리에서 캐는 에너지’”라면서 원자력 발전에 투자하라고 권고했다. 이승만은 “지금부터 투자하면 언제쯤 써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시슬러는 “20년 후쯤”이라고 대답했다.
이승만은 바로 원자력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1956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한미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써 미국으로부터 농축 우라늄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문교부 안에 원자력과를 설치하고 기술훈련생 2명을 미국 아르곤연구소에 파견했다. 20달러 이상 외화를 사용할 때에는 대통령 재가를 받던 시절에 1인당 6000달러가 들어가는 연구생을 보낸 것이다. 이후 100명에 가까운 연구생이 파견되었다. 이승만은 미국과 영국 대학의 원자력 관련 학과에 진학하는 유학생들을 경무대로 불러 달러가 든 봉투를 쥐여주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했다. 이후 10년간 240여 명의 원자력 전문인력이 양성됐다.
1958년 12월에는 미국 원조금 35만 달러에 정부 자금을 보탠 73만 달러로 연구용 원자로인 트리가 마크2를 구입했다. 1959년 7월 14일 연구용 원자로 설치공사 기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첫 삽을 떴다.
1959년 1월에는 대통령 직속의 원자력 전담 기관인 원자력원을 신설했다. 당시 정부 조직 전체 1·2급 공무원이 110여 명이었는데, 원자력원에 소속된 1·2급 공무원은 20명에 달했다. 원자력원 산하에는 원자력연구소를 두었다. 원자력연구소 연구원의 월급은 일반 공무원에 비해 3배에 달했다.
1978년 고리 원전 1호기가 준공식을 갖고 가동에 들어갔다. 이승만 정권 말기 양성되기 시작한 원자력 인력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승만이 워커 시슬러의 말에 따라 20년 후에 써먹을 인재들을 위한 투자를 한 것이 빛을 본 것이다.
12. 4·19혁명(1960년)
![]() |
4·19 당시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과 시민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하야했다. |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를 앞세워 자유당 후보 이승만을 공격했다.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승만은 손쉽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부통령에는 민주당 후보 장면이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됐다. 80대 중반을 넘은 이승만 대통령이 사망하기라도 하면 야당 출신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사태가 생기게 된 것이다.
1960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 조병옥이 급사했다. 이승만의 당선은 보장됐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은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3인조 투표 등 공개 투표가 실시됐다. 결국 이승만은 89%, 이기붕은 79%의 득표로 당선됐다.
민심과는 동떨어진 선거 결과에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은 ‘부정선거, 다시 하라’며 거리로 나섰다. 3월 15일 당일 경남 마산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체가 4월 11일 발견되자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경찰은 발포로 맞섰다.
4월 18일에는 서울에서 고려대학생들이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돌아가는 길에 동대문 인근에서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다음날 서울시내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가 경무대(청와대)로 향하자 경찰이 발포했다. 이날 하루에만 시민·학생 111명, 경찰관 4명이 사망했다.
4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됐다.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동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4월 25일에는 27개 대학 285명의 교수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며 시위를 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민의를 받아들여 하야했다.
4·19혁명은 민족사상 최초로 국민들의 저항으로 위정자를 교체한 일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4·19혁명은 체제전복은 아니었다. 1948년 제헌헌법 이래 헌법이 규정해 온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자는 요구였다. 그 선봉에 선 것은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과 교육투자 덕분에 성장한 대학생들이었다. 이승만은 ‘자기성공의 희생자’였다.
13. 5·16 군사혁명(1961년)
![]() |
1961년 5월 18일 육사생들의 혁명 지지시위를 지켜보는 박정희 소장. 이날 그는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1960년 6월 12일 야당의 숙원이었던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7월 29일에는 민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 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이 압승했다. 대통령으로는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국무총리로는 신파의 장면이 선출됐다.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곧 신파와 구파로 갈라져 정쟁을 벌였다.
이승만 시절 억눌렸던 정치적 욕구가 곳곳에서 분출했다. 일부 대학생과 혁신계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섣부른 통일논의를 전개했다.
군부는 이러한 상황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급팽창한 군부는 당시로서는 가장 선진적인 집단이었다. 매년 1000명 이상의 장교와 부사관들이 미국에 파견되어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지식인층에서 인기 높던 잡지 《사상계》는 이집트·파키스탄 등 제3세계에서 빈발하던 군부 주도의 근대화혁명을 소개하면서 이들을 자극했다.
4·19 이후 육사 8기생들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 장교들은 부패한 정치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整軍)운동에 나섰다. 이들이 리더로 추대한 인물이 청렴 강직함으로 인망을 얻고 있던 박정희 소장이었다.
1961년 5월 16일 해병 1여단, 제1공수단 병력을 주축으로 한 3600여 명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피신했다. 대통령 윤보선은 ‘내전을 막는다’는 이유로 쿠데타군에게 유리한 조치들을 취했다. 5월 19일 장면 총리가 나와 내각 총사퇴를 선언했다. 군인들로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3권을 장악했다. 7월에는 쿠데타 주역인 박정희 소장이 명목상의 지도자이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밀어내고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5·16은 소수의 군병력이 기습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쿠데타였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정치·경제·사회·문화에서 급격한 변화가 왔으며 이후 본격적인 근대화혁명이 시작됐다는 점 등에서 ‘혁명’이었다.
14.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년)
![]() |
‘성장률 7.12%’ ‘식량 자급’ 등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요 목표를 보도한 1961년 11월 26일 자 《조선일보》. |
5·16 군사정부는 혁명공약에서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는다’고 선언하는 한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고 천명했다. 이를 위해 군사정부는 출범 직후인 1961년 7월 경제기획원을 신설했다.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군사정부는 이 계획에서 1966년까지의 연평균 성장률을 7.1%로 상정했다.
정부가 종합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은 1958년에, 장면 정권은 1961년에 경제계획을 작성했다. 군사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를 많이 참고했다. 하지만 노쇠한 대통령 아래서 장기 집권의 피로감이 더해가던 자유당 정권이나 9개월 동안 3번이나 개각을 할 정도로 흔들리던 민주당 정권과는 달리 군사정권은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10년간 1인당 국민소득을 두 배로 증가시킨다는 목표를 먼저 설정한 후 지수방정식을 통해 경제성장률 7.1%를 산정할 정도로 엉성한 ‘종이계획’에 불과했다. 이를 뒷받침할 자원이나 기술도 부족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미래의 비전을 그려 보였다는 의미는 작지 않았다.
당초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수입대체공업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내포적 공업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이었고, 국내 경제학자들도 추천하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그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1963년부터 예상 밖으로 수출이 잘되기 시작했다. 이해의 수출 실적은 8600만 달러로 전년도 5480만 달러보다 1.6배 성장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육성해 온 철강(양철)·합판·섬유 분야의 기업들이 내수가 한계에 부딪히자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수출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박정희 정부는 경공업 육성과 수출 제일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1965년에는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은 이때부터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15. 제3공화국 출범(1963년)
![]() |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 발족과 제5대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광화문 네거리에는 경축 아치가 세워졌다. |
1963년 1월 1일을 기해 군사정부는 모든 정당·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금했던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제4호’를 폐기했다. 앞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962년 3월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해 기성 정치인 4100명의 정치활동을 막았었다.
박정희 의장은 1963년 2월 18일 “나는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며칠 뒤인 2월 27일 재야 정치 지도자, 정당대표 등이 모여 ‘정국 수습 공동 선언’을 내놓았다.
박 의장의 “민정 불참” 선언 이후 사회불안이 계속됐다. 그해 3월 11일 중앙정보부는 “김동하 최고위원, 박임항 건설장관, 박창암 혁명검찰부장 등 20명이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이른바 ‘군부 쿠데타 음모사건’을 발표해 정국을 뒤흔들었다. 이들은 한때 5·16 쿠데타 주역들이었다. 3월 15일에는 수도경비사령부 장교와 부사관이 “군정 연장”을 주장하며 군인데모를 벌였다. 그즈음 박 의장의 민정 참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결국 8월 31일 박정희는 공화당 총재 겸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해 8월 14일 군사정부는 “대통령 선거는 10월 15일, 국회의원 선거는 11월 26일 치르겠다”고 밝혔다. 당시 대선은 박정희·윤보선·허정 3파전으로 좁혀지는 분위기였다. 허정·송요찬 후보가 윤보선을 지지한다며 대선 후보직을 사퇴, 막판 판세가 박정희·윤보선 양강으로 굳어졌다.
운명의 10월 15일. 대선 투표를 마친 윤보선은 미국 정보기관원의 집으로 피신했다. 박정희는 경주 불국사 근처에서 국민의 심판을 기다렸다.
10월 17일 오후 3시 중앙선관위 발표에 따르면 박정희는 470만2640표(46.7%)를 얻어 454만6614표(45.1%)를 획득한 윤보선을 15만여 표 차로 따돌리며 신승했다.
박정희는 그해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제3공화국이 출범했다.
16. 6·3사태와 계엄령 선포(1964년)
![]() |
박정희 정권은 ‘한일굴욕외교’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지자 1964년 6월 3일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
1964년 3월 23일 김종필 공화당 의장과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가 한일회담 일정에 합의했다. 전국 곳곳에서 반대집회와 가두시위가 일어났다. 교수와 학생들은 “제2의 을사조약” “구걸·굴욕 외교”라고 외쳤다. 야당 역시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시위를 부추겼다.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은 3월 28일 김종필 의장을 일본에서 소환했다. 전국 32개 대학생 대표 57명을 청와대로 불러 ‘김종필·오히라 메모’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그해 5월 9일 정일권을 총리로 한 내각을 발족시켜 학생들의 시위에 대응했다. 학생들 역시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서울대생들은 5월 20일 문리대 교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가졌다. 이틀 뒤인 22일에는 서울시내 30여 개 대학이 연합한 ‘대일 굴욕외교 반대 학생 총연합회’가 발족했다.
6월 3일 박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를 꺼내 들었다. 1만여 명의 대학생이 “박정희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경찰과 충돌을 벌였다. 박 대통령은 그날 밤 9시40분쯤 “비상계엄령을 서울시 일원에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계엄령에 따라 일체의 집회가 금지되고 언론·출판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서울시내 각급 학교 역시 무기휴교에 들어갔다. 통행금지 시간은 자정에서 밤 9시로 앞당겨지고 3개 사단 병력이 서울시내에 진주했다.
계엄령 선포로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5개월 동안 수세에 몰렸던 정치적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켰다.
계엄령은 그해 7월 29일 해제됐는데 1120명이 검거되고 348명이 구속됐다. 그중에는 이명박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을 비롯 최장집,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재오 등도 포함됐다. 이들을 6·3세대라고 부르는데, 훗날 한국 정치사에서 굵직한 역할을 했다.
한편 김종필은 6·3사태를 촉발한 책임을 지고 공화당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17. 베트남 파병(1964년)
![]() |
1965년 2월 9일 월남파견장병환송국민대회 후 종로 시가를 행진하는 파월장병들. 박정희 정권은 월남파병으로 주한미군이 월남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
케네디 피살(1963년 11월 22일) 후 대통령에 오른 린든 존슨이 1964년 5월 미국의 우방 25개국에 베트남전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고 6·25 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며 파병에 동의했다.
1964년 7월 31일 ‘월남공화국 지원을 위한 국군부대의 해외 파병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고 그해 9월 22일 비전투병이 먼저 월남으로 떠났다. 이들은 130명의 이동외과병원 장병과 10명의 태권도 교관이었다.
공병대 및 자체 방위를 책임질 경비대·수송대 등을 파견하는 내용의 파병안은 이듬해인 1965년 1월 26일 국회를 통과했다.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선발대는 2월 14일 베트남을 향했다.
1만5000명 규모의 1개 사단을 파견하는 전투병 파병안은 그해 8월 13일 야당 의원들의 불참 속에 여당 의원들만의 투표로 재석의원 104명 중 찬성 101표, 반대 1표, 기권 2표로 통과됐다. 이에 따라 수도사단(맹호부대)과 해병대 제2여단(청룡부대)이 주축이 된 주월 한국군사령부가 창설됐다. 초대 사령관은 채명신 소장이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완전 철수한 것은 1973년이다. 8년6개월 동안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인을 파병했다(연인원 31만2853명).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6000회의 소규모 단위 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5099명이 전사하고 1만1232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이 참전대가로 벌어들인 달러는 모두 10억3600만 달러였다. 장병들이 9년(1965~73) 동안 받은 해외근무 수당이 2억3556만 달러였다. 수당 중 82.8%에 달하는 1억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됐다. 이들의 희생과 눈물이 한국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됐음은 물론이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1965~1973년 군사원조 증가분 10억 달러, 미국의 한국군 파월경비 10억 달러, 베트남 특수 10억 달러, 기술 이전 및 수출진흥 지원 20억 달러 등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총 50억 달러의 외화 획득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18. 동백림 사건(1967년)
![]() |
동백림 사건 공판 모습. 맨 앞줄이 작곡가 윤이상이다. |
동백림 사건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1967년 7월 8일 “대학교수와 의사, 예술인 등 194명이 1958년 9월부터 67년 5월 사이에 동백림(동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이나 북한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적발해 수사 중”이라는 기자회견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사건의 발단은 임석진 당시 명지대 교수가 1961년 7월 서독의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철학박사를 받고 그곳에 머무르면서 1961년 9월과 66년 6월 두 차례 북한을 찾았던 사실을 고백하면서부터다.
임석진은 1961년 첫 방북 후에는 자신을 따라 서독으로 유학 온 남동생 임석훈과 여동생을 포함해 20여 명의 유학생들을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에 소개하고 자신은 1963년 노동당 입당원서를 썼다.
일정한 제약이 있었지만 당시 동독과 서독 간 교류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또 반공교육이 몸에 밴 한국인은 공산권 지역을 출입하는 데 따른 심리적 부담이 있었지만 절차는 까다롭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은 그 점을 노려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접촉, 북한체제를 선전하거나 북한 방문을 권유, 주선했다.
1966년 두 번째 방북에서 돌아온 임석진이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홍세표를 찾아가 자신의 방북 사실을 털어놨다. 중앙정보부는 임석진의 증언을 토대로 유학생들을 식사 초대나 국내 초청 방식으로 유인해 검거했다. 이들 중에는 유럽에서 명성을 얻고 있던 재독 음악가 윤이상과 재불 미술가 이응노도 포함돼 있었다. 1967년 12월 13일의 1심 선거공판에서 재판부는 34명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40년 뒤인 2006년 1월 26일 국정원 진실위는 “‘실정법 위반사건’을 ‘간첩사건’으로 확대·과장했다”고 밝혔다. 또 “당시 중정이 이 사건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적극 조사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독일과 프랑스, 미국, 오스트리아 등 외국에서 30여 명을 강제·불법적인 방법으로 연행한 것은 국가의 주권과 국제법을 무시한 불법행위”라고 평가했다.
19. 통혁당 사건(1968년)
![]() |
법정에 선 통혁당 사건 관계자들. 맨 왼쪽이 당시 육군 중위로 육사 교관이던 신영복 교수다. |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은 남파간첩에게 포섭된 김종태(金鍾泰)가 네 차례 북한을 왕래한 뒤 국내에 잠입, 통혁당을 만들어 학원, 노동, 종교 등 서클 형태의 소(小)조직과 서울시내에 여러 개의 학사주점을 운영하면서 선전·선동활동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에 적발된 사건이다.
1968년 8월 적발된 이 사건으로 서울시당 책임자 김근태, 민족해방전선 책임비서 김질락, 전남도당 창당준비위원장 최영도, 청맥사 편집장 이문규 등 총 158명이 검거됐고 이들 중 50명이 구속됐다. 김종태 등 세 명은 사형당했고, 신영복 등은 무기징역 등을 선고받고 복역 중 전향서를 쓰고 석방됐다.
신영복은 훗날 계간지 《이론》 1992년 겨울호에서 “통혁당은 (북한) 조선노동당과는 무관한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통혁당 조직이 “다양한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소위 통일전선체를 건설하기 위한 전위 조직으로 구상된 것”이며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론에 근거한 전술”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았다. 또 한홍구와의 인터뷰에서 “통혁당 주범 김질락이 혁명을 지지하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인 박성준은 13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박성준은 “통혁당에 가입한 것도 아니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으로부터 책을 빌려 본 것이 전부”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한 전 총리는 중정 발표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남편이 연루돼 있었기 때문에 아내로서 옥바라지한 것뿐이다. 알지도 못하고, 평가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통혁당 사건에 함께 연루됐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2011년 펴낸 《보수가 이끌다》에서 “통혁당은 자생적 조직이 아니라 북한의 지령에 따라 한국에서 결성된 혁명조직”이라고 밝혔다. 또 “북한에 혁명기지를 두고 북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상당한 규모를 갖고 출발할 수 있었고 《청맥》이라는 기관지 발행이 그 증거”라고 했다.
20. 1·21사태(1968년)
![]() |
1·21사태 당시 군경에게 체포된 북한 124군 부대원 김신조. 그는 “박정희 목을 따러 왔다”고 말해 충격을 주었다. |
1968년 1월 16일, 북한의 124군 부대 요원 31명이 배낭 한 개씩을 짊어지고 북한 땅에 속해 있는 경기도 연산을 출발했다. 임무는 청와대를 습격,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택한 코스는 국군 25사단과 미군 2사단의 경계 지역이었다.
1월 18일 새벽 남방한계선을 넘어 계속 이동, 파주군 법원리 파평산에 도착한 것은 1월 19일 오전 5시였다. 이들은 우철제·우성제 형제에게 발각됐고 우씨 형제와 사촌까지 붙잡았다. 그러나 공비들은 위협만 했을 뿐 이들을 살려주었다. 풀려난 우씨 형제는 그날 밤 파출소에 신고했다.
공비들은 1월 20일 오전 6시경 북한산 비봉에 도착했다. 비봉 남쪽 승가사 부근에서 은신하다 21일 밤 8시가 되자 군복을 벗고 민간복으로 갈아입었다. 산길을 타고 현재의 상명대 앞 세검정 삼거리 검문소를 지나 자하문 고개에 다다르자 경찰이 “누구냐”고 물었고 이들은 “CIC 방첩대”라고 했다. 당시 CIC 방첩대의 위세는 경찰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래도 미심쩍게 생각한 경찰관 2명이 그들 뒤를 따라갔다. 밤 10시 무렵 공비들이 자하문 고갯길을 넘어 지금의 경복고 후문 근처에 이르렀을 때 지프 한 대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었다. 최 서장이 권총을 빼 들고 “소속을 밝혀라”고 요구할 무렵, 최 서장 뒤로 시내버스 한 대가 올라오다 지프 뒤에 멈춰 섰다.
공비들은 버스를 국군 지원병력으로 착각, 최 서장을 향해 총을 쐈고 최 서장은 가슴에 총알 3발을 맞고 절명했다.
청와대 외곽을 경비하던 수경사 30대대 병력이 달려왔고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31명의 공비 가운데 김신조를 제외한 28명이 죽고 2명은 행적이 묘연했다. 당시 행적이 묘연했던 공비 가운데 1명은 2000년 9월 남한을 방문해 송이버섯을 전달하고 돌아간 박재경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이라고 김신조는 증언했다.
21. 3선 개헌(1969년)
![]() |
1969년 7월 17일 제헌절에 열린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발기인대회. 야당인 신민당과 각계 인사들이 다수 참여했다. |
1967년 5월 3일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51.4%의 득표율로 윤보선(41%)을 누르고 다시 당선됐다. 그해 6월 8일 제7대 총선에서도 공화당이 개헌선인 117석을 13석이나 초과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문제는 공화당 내부에 있었다. 박정희 후계를 둘러싼 공화당 내의 파벌과 갈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김종필이 있었다. 김종필은 내심 ‘포스트 박정희’를 노리고 있었다.
반면 공화당과 정부에는 김종필에 맞서는 2개의 세력이 있었다. 공화당에는 이효상, 백남억, 김성곤, 김진만 등 영남 출신의 자유당계 구정치인들이 있었고 정부 쪽에는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있었다.
1969년 4월 초 야당인 신민당이 국회에서의 폭언 등을 이유로 권오병 장관 해임건의안을 냈을 때 일부 공화당 의원이 당명을 어기고 신민당에 동조한 사건이 일어났다. 박 대통령은 분통을 터뜨렸다. 공화당 내 김종필계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은 1969년 7월 25일 “3선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1969년 8월 7일 공화당 의원 108명과 신민당 의원 3명을 비롯, 총 122명이 대통령의 3기 연임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3선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9월 9일 본회의에 회부됐다. 야당 의원들은 개헌안 저지를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서 취침농성을 벌였지만 공화당 의원 122명은 9월 14일 새벽 2시 반, 국회 제3별관에서 5분 만에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국회의장은 의사봉 대신 주전자 뚜껑을 두드렸다. 그해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는 개헌안이 65.1%의 찬성표를 얻었다. 투표율은 77.1%. 당시 “압도적 지지는 아니다”라는 분석이 많았다. 3선 개헌이 한국 정치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박정희 정권의 연장뿐 아니라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실종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3선 개헌은 1972년 유신헌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22. 새마을운동과 경부고속도로 개통(1970년)
![]() |
근면·자조·협동의 정신 아래 진행된 새마을운동은 우리 국민들이 해방 이후 이룩한 가장 큰 성취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 |
박정희 대통령은 막대한 재원과 건설 기술이 필요한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1967년 4월에 발표했다. 당시는 제2차 경제계획이 수립되는 과정으로 고속도로 건설계획은 포함조차 되지 않았다. 자금 소요액, 재원조달 방법 등이 마련되지 않아 불확실성이 매우 높았다.
착공은 1968년 2월 1일, 개통은 1970년 7월 7일이었다. 세계 최단시간인 2년5개월 만에 428km를 뚫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총칼만 없을 뿐 전쟁이었다. 저는 흑자를 포기, 명예를 선택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샴페인을 도로에 뿌리며 축하하는 박정희 대통령.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국민들에게 안겨주었다. |
1970년 4월 22일 한해(寒害)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마련한 지방장관 회의에서 불이 붙은 ‘새마을 가꾸기 운동’은 이듬해 본격화됐다. 정부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의 3만4000여 마을에 시멘트 335포대씩을 내려보냈다. 시멘트는 각 지역 마을마다 공동사업에 쓰였는데 그런 토대 위에 1972년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 개시를 선포했다. 이전 해의 실적을 기준으로 3만4000여 마을 중 1만6000여 마을에만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톤을 다시 내려보냈다. 잘하는 마을을 지원, 자발적 동기의식을 불어넣었다.
1964년 우리나라 농민들 가운데 전등 아래 살았던 사람은 약 12%에 불과했다. 새마을운동의 하나였던 농촌전화(電化) 사업이 확산되면서 1977년에 이르러 농민의 98%가 전등 아래서 생활할 수 있게 됐다. 우물에 의존하던 농민생활도 개혁됐다. 간이상수도 공사가 이뤄져 저수탱크에 계곡의 맑은 물을 끌어 저장했다가 개별 농가에 공급했다. 비위생적 식수로 인해 발생하던 전염병이 줄어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늘었다.
새마을운동은 ‘하면 된다’와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고 이것이 경제성장의 정신적 자산이 됐음은 물론이다.
23. 전태일 분신(1970년)
![]() |
전태일의 장례식에서 영정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어머니 이소선씨. 열악한 근로환경을 고발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죽음은 이후 대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1964년 봄, 당시 16세의 나이에 서울 평화시장 내에 있는 삼일사에서 견습공으로 일했다. 우연히 ‘근로기준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몇몇 동료와 모여 1969년 6월 ‘바보회’를 만들었다. “기계 취급을 받으며 바보처럼 찍소리 한 번 못 하고 살아왔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바보회’로 지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내 노동실태에 관한 설문지를 작성하고 《축조 근로기준법 해설》이란 책을 샀다. 전문적인 법 용어와 한자가 나올 때마다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어도 원이 없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1970년 10월 6일 전태일은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이것을 노동청 출입기자가 보고 이튿날 《경향신문》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기사 제목은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었다.
그해 11월 13일 오후 1시40분경,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전태일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그는 불타는 몸으로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고 외쳤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동료 노동자가 《근로기준법》 책을 불길 속에 던졌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하고자 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이 끝났다.
전태일 분신은 경제성장 뒤에 가려졌던 한국 사회의 그늘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11월 16일 서울법대생 100여 명이 전태일 시체를 인수해 학생장으로 거행하겠다고 했고 서울상대생 400여 명은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11월 20일엔 연세대, 고려대생들도 항의집회를 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듬해 1월 17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의 죽음을 의식하며 노동문제를 거론했다. 당시 신민당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은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했다. 이후 노동운동이 봇물 터지는 터져 나왔다.
1971년에 일어난 노동분규 사건은 모두 1656건으로 이는 전년도 165건의 10배가 넘는 것이었다.
24. 40대 기수론과 제7대 대통령 선거(1971년)
![]() |
1971년 제7대 대선 벽보를 바라보는 유권자들. 이 대선에서 김대중 신민당 후보는 박정희 정부의 실정을 맹공, 큰 인기를 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