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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글 | 월간조선
25. 백제 무령왕릉과 신라 천마총의 발굴(1971년·1973년)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었다. 백제 25대 무령왕의 이름을 밝힌 지석, 금은동 장신구, 부장품 등 88종 2561점이 출토됐다. |
‘한국 고고학 사상 이보다 더 위대한 발견은 없다!’
1971년 7월 충남 공주시 왕릉로 37(옛 주소는 웅진동 57-1)에서 우연히 백제 무령왕릉이 발견됐다. 삼국시대의 왕릉 중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확인된 유일한 고분이다. 인근의 ‘송산리 무덤군’은 백제 왕족의 무덤이 모여 있던 곳으로 이 무덤군 부근의 배수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왕릉이 발견됐다.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무령왕릉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특히 왕릉 입구 벽돌을 뜯자 하얀 수증기가 흘러나왔는데 1450년간 밀폐된 공기였다는 후일담이 오래 회자됐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미궁과도 같았던 백제 문화의 참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 고고학사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2년 뒤에는 경주에서 천마총을 발견, 또다시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 경북 경주시 황남동 고분군에 속하는 제155호 고분인 천마총은 1973년 4월 16일 발굴이 시작됐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전형적인 단곽식 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이 무덤의 높이는 12.7m, 밑둘레는 157m에 달했다.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말다래란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가죽 같은 것을 말한다.
이 말다래는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신라인의 그림 솜씨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목곽 안에서 금은 보옥으로 된 장신구류, 천마를 그린 말다래, 장식화, 토기, 청동제, 유리제품 등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 등 모두 1만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고분의 주인공은 신라 제21대 소지마립간 또는 제22대 지증마립간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26. 7·4 남북공동성명(1972년)
7·4남북공동성명 후인 1972년 11월 3일 제2차 남북조절위원장회의에 참석차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과 악수하고 있다. |
1972년 7월 4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자청, 이렇게 말했다.
“서울의 이후락 정보부장은 72년 5월 2일부터 5일간 평양을 방문했다. 김일성과 두 차례 회담했다. 평양의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대리해 박성철 부수상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에 왔다. 박성철은 이 부장과 두 차례, 박정희 대통령과 한 차례 회담했다.”
7·4 남북공동성명서의 내용은 총 3가지다. 첫째, “민족 통일은 외세에 의존 혹은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돼야 한다”, 둘째 “통일은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등이다.
이 3가지 원칙은 바로 자주·평화·대단결로 집약될 수 있다. 이 외에도 남북은 상대방에 대한 중상과 비방 중지, 무장도발 중단,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 강구, 남북 간 제반 교류 등에 합의했다.
7·4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미국 국무성은 즉각 환영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과 관계 개선을 타진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해 11월 4일에는 남북공동성명의 합의사항을 추진하고 남북 사이의 관계를 개선, 발전시키기 위해 남북조절위원회의 설치에 합의했다. 그러나 북한의 도발은 계속됐다. 1974년 8월 15일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 대통령을 저격,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목숨을 잃었다. 같은 해 11월 남침땅굴이 발견됐다.
비록 7·4 공동성명은 남북 간 신뢰 구축에 실패했지만 남북이 서로 머리를 맞댄 체제상의 대변화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 당국 간 대화의 첫걸음이 됐다.
27. 10월 유신(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10·17비상조치를 보도한 《조선일보》. |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선언’을 발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헌정(憲政) 중단 선언이었다. 박 대통령은 ‘중대 결심’이 담긴 선언의 요지를 발표했는데 다음과 같은 문장이 담겼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할 그 개혁은 내용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오히려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계엄령이 선포되자 탱크가 중앙청 앞에 등장했으며 비상국무회의가 국회의 기능을 대신했다. 대학은 폐쇄됐고 집회는 금지됐다. 언론과 출판, 방송은 검열을 받아야 했다.
10월 유신은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등 국내외에서 발생했던 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잇따른 북한의 무장 게릴라 도발, 미국 닉슨 대통령의 독트린 선언, 1970년 6월 주한미군의 3분의 1 감축안 발표가 터져 나왔다. 박정희 정부는 더는 미국의 안보공약에 의지할 수 없었고 스스로 대북 억지력을 확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다 주요 수출국인 선진국의 경기침체와 수출 감소, 경제성장률 하락(1969년 13.8%, 70년 7.6%, 71년 8.8%, 72년 5.2%), 야당의 공세적 투쟁, 대학가 시위가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박 대통령은 11월 21일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투표율 91.9%에 찬성률이 91%였다. 그해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박정희를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위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개최됐다. 그리고 12월 27일 대통령 취임식이 치러졌다.
유신은 건국 이후 점진적으로 전진했던 의회민주주의와 선거에 의한 정당과 지도자의 선택권을 축소시키고 말았다. 또한 유신체제의 수호를 위해 긴급조치가 줄줄이 동원됐고 인권탄압, 노동운동의 말살이 강제됐다.
그러나 정치비용의 최소화와 국력의 극대화, 남북 대결구도에서 국가안보를 담보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특히 국력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했던 경제 효율성의 증대는 중화학공업의 본격 추진으로 표출됐다.
28. 중화학공업화 선언(1973년)
1974년 6월 28일 현대조선이 건조한 대형 유조선 어틀랜틱 바론호 명명식(命名式)에 참석해 치사를 하는 박정희 대통령. 뒤에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 보인다. |
박정희의 5·16 군사정부가 1962년 발표한 제1차 5개년 계획에는 제철소, 비료공장, 정유공장 건설 계획이 담겨 있으나 비료공장(울산과 진해)과 정유공장(울산)만 건설할 수 있었다. 이후 한일국교 정상화와 월남파병으로 외환 사정이 호전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진흥에 나섰다.
1970년대 들어 중후장대(重厚長大)형 공업국으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했고 그해 6월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 공업의 6대 전략 업종을 육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동의하는 이코노미스트는 국내외에 별로 없었다. 박 대통령은 오원철 등 기술관료(Technocrats)들에게 이 사업을 맡겨 밀어붙였다.
당시 발표된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에 따르면, 1973년부터 1981년까지 2조9800억원을 투자해 1972년 8340억원이던 중화학공업 생산액을 1981년에는 4조8810억원으로 5.9배 늘리고 같은 기간 수출액도 16.8배(66억6700만 달러)로 늘리도록 했다.
포항종합제철은 1970년 착공해 1973년 7월 3일 완공됐다. 조강기준 연산(年産) 103만 톤 규모였다. 포철 건설을 지휘했던 박태준 당시 포철 회장은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 일이 없는 직원들과 함께 제철소 건설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성공 아니면 죽음’이라는 각오로 일했다”고 회고했다. 지금은 포스코로 명칭을 바꾼 포철은 철강제품을 품질 좋고 값싸게 국내 산업체에 공급, 자동차와 조선·가전·기계·건설 등 관련 산업 발전을 선도했다. 또 울산석유화학단지는 1968년 착공하여 1972년 준공됐다.
울산 현대조선소에서의 30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 건조, 현대차의 고유 모델 승용차 포니 개발 등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대표적 성과다.
그러나 중화학공업 정책이 정치적 목표에 따라 추진되면서 국민경제 내부의 연관성을 높이지 못하고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과 대외 의존성을 심화시킨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도 있다.
29. 포항종합제철 1고로 준공(1973년)
1973년 포철 제1고로가 준공된 지 3년 후인 1976년 5월 31일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포철 사장은 포항제철 2고로 화입식(火入式)을 했다. |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취임 후 종합제철 건설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 철강산업이란 전무한 상태였다. 박태준은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으로 종합제철회사를 만드는 안을 제안했고, 정부는 일본과 한일각료회담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차관과 기술을 제공받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1967년 연 300만 톤의 제철소를 건설하기로 결정 후 해당 지역으로 포항을 낙점했다. 10개월 후인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현 포스코)가 34명의 임직원으로 출범했다.
포항제철의 설립구호는 ‘제철보국(製鐵報國·철을 생산해 국가 산업발전에 기여한다)’이다.
포항제철은 1970년 4월부터 1기 설비 착공에 들어갔다. 당시 박태준 회장은 “이 제철소는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피값으로 짓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을 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1973년 6월 9일 우리나라의 첫 현대식 용광로인 포항 1고로는 첫 쇳물을 생산했다. 포항제철소 모든 임직원은 만세를 불렀다. 대한철강협회는 이날을 한국 철강산업의 기념비적인 날로 보고 지난 2000년에 ‘철의 날’로 제정했다.
포항제철은 이후 확장사업을 통해 2고로, 3고로를 건설해 1983년 910만 톤 체제의 포항제철소를 완공했고, 1985년 광양 1고로 착공을 시작으로 광양에 최신 제철소를 건설했다. 1998년에는 조강생산 기준으로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로 발돋움했다.
포스코는 원래 가동 44년으로 노후된 1고로를 올 연말께 폐쇄할지 검토하고 이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2017년 들어 철강업 업황이 전 세계적으로 살아나고 제품가격이 치솟고 있어 1고로 폐쇄 계획은 당분간 잠잠해질 전망이다. 현재 1고로는 13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고 있다.
30. 김대중 납치사건(1973년)
유신 이후 일본 등지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김대중씨는 1973년 8월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서울로 강제 귀환했다. |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김대중은 유신체제 선포 당시 지병 치료차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다. 유신이 선포되자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反)유신 활동을 벌일 것을 결심했다.
그는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적극적인 반체제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1973년 7월 6일에는 재미교포들의 반정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해 명예회장이 됐다.
일본에서도 8월 13일 도쿄 한민통을 결성할 예정이었다. 도쿄 한민통 결성 전인 8월 8일 김대중은 민주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양일동의 숙소인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갔다. 양일동과 통일당 국회의원 김경인과 만나 담화를 마치고 일본 국회의원과 약속했던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던 김대중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괴한 5명에게 납치당한다.
김대중은 납치된 후 선박 용금호에 감금된 채 동해로 압송됐다가 부산을 거쳐 사건 발생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서울의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김대중의 활동이 박정희 정권과 대치되고 있었다는 이유로 한국 중앙정보부가 납치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주장이 불거졌고, 비난여론이 집중됐다.
한국 정부는 정부 공권력 개입설을 완강히 거부했다. 일본 경시청이 사건현장에서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 관련자의 출두를 한국에 요구하자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국권 침해라는 비난여론이 대두됐다.
한일정기각료회의 연기,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교섭 취소, 경제협력 중단 등 한일관계가 갑자기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후 한일 간 막후 관계 정상화 시도 끝에 한국 측은 납치사건에 대해 유감의 뜻을 담은 대통령의 친서를 일본에 전달하고 일본 측도 납치사건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고 답신을 보내 사건은 정치적으로 마무리됐다.
31. 중동 진출 시작(1973년)
1970년대 중반 중동 진출은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
1973년 오일쇼크 이후 한국 기업들이 중동(middle east)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당시 전 세계적인 오일쇼크로 중동 국가들은 오일머니가 넘쳐나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중동 국가들은 그 돈으로 사회기반시설을 지으려 했지만 더위와 가뭄 등 악조건 때문에 선뜻 나서는 해외 건설사들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1970년대 초반 월남전이 끝나 월남 특수가 없어진 상황에서 오일쇼크까지 맞아 경상수지 적자가 큰 폭으로 늘어나고 부도 위기를 맞을 정도로 경제 상황이 심각했던 한국은 중동에서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동 국가들이 어렵게 건설사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중동 진출에 착안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가장 먼저 나섰다. 당시 사람들은 중동이 한낮에 섭씨 50도를 넘는 살인적인 더위, 모래뿐인 땅, 식수 부족 등으로 건설 공사에 악조건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중동 측으로부터 건설사를 보내달라는 제안을 받았던 박정희 대통령조차도 불가능하지 않겠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더운 낮엔 자고 밤에 일하면 된다. 시멘트에 필수인 모래가 지천이다. 비가 안 오니 공치는 날이 없다. 물은 유조선 빈 탱크에 담아 갔다가 기름을 채워 오면 된다”고 말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적극 지원해 ‘중동 신화’가 시작됐다.
현대건설이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한 것이 중동 진출의 하이라이트였다. 수주액 9억3114만 달러는 한국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외환이 바닥났던 시점 선수금으로 받은 2억 달러는 국가 경제의 숨통을 틔웠다.
현대건설을 시작으로 한국 기업들의 중동 진출이 이어졌다. 1970년대 중동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100억 달러, 당시 국가 예산의 25% 정도라 할 수 있는 금액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중동 특수는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됐고, 또 중동 건설의 호황으로 벌어들인 오일머니는 한국 중화학공업 성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32. 육영수 여사 피살(1974년)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 육영수 여사가 서거했다. |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사건은 전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대통령 부인으로 11년간 내조했던 육 여사는 사회복지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 국민의 사랑을 받았으며, 여야를 막론하고 여론을 수렴해 대통령에게 건의해 ‘청와대 내의 야당’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남산에 어린이회관 건립, 구의동 어린이대공원 건립,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창간, 정신박약아돕기운동, 나환자촌 방문 등 사회복지사업에 기여했으며, 양지회 명예회장과 자연보존협회 총재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74년 8월 15일 서울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육 여사는 단상 위 대형 태극기 앞에 앉아 있다가 재일교포 출신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머리를 맞았다.
문세광은 총 일곱 발을 쐈는데, 첫 발은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자신의 허벅지를 쏘았다. 두 번째 총알로 박정희 대통령을 겨누었으나 총알은 박 대통령이 서 있던 연단에 박혔다. 박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몸을 숨겼다. 세 번째는 불발탄이었다. 네 번째 총알이 육 여사의 머리 오른쪽에 명중했다. 불과 5~6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육 여사는 앰뷸런스에 실려 인근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돼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오후 7시 결국 숨을 거뒀다.
현장에서 체포된 문세광은 재판에 회부돼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2월 2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문세광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곧 육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의 희생양이 된 격이어서 애도 인파가 청와대에 연일 쇄도했다. 8월 19일 중앙청(현 경복궁) 광장에서 국민장 영결식이 각국의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975년에는 육영수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육영수 여사는 자선, 구호, 복지 등 국민을 위한 사업에 힘을 쏟아 지금까지도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영부인, 국모(國母)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33. 남침땅굴 발견(1974년)
1974년 11월 15일 서부전선 고랑포에서 북한의 남침땅굴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
1974년 11월 15일 오전 경기도 연천군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땅굴이 발견됐다. 이날 오전 7시35분 국군 민정 경찰 9명이 임진강 고랑포 지역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남쪽을 순찰하던 중 지하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의심스러워 파헤친 결과 지표에서 약 46m 아래에 터널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군은 그 실체를 밝히기 위해 땅을 파는 작업을 계속했고, 북한이 남침을 목적으로 구축한 땅굴(제1땅굴)을 발견했다.
이날 발견된 땅굴은 너비 90cm, 높이 1.2m, 길이 약 3.5km에 달하는 콘크리트 구조물로, 전술 능력은 1시간에 1개 연대의 무장병력이 통과할 수 있고, 궤도차를 이용하면 중화기와 포신(砲身)도 운반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땅굴 굴토작업이 시작되자 북한초소에서 기관총 사격을 가해 교전이 벌어졌다. 땅굴 수색 중 북한의 방해 매설물이 폭발했다. 한미군 장교 2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했다.
땅굴 내부에는 220v 전선에 60w 전구가 가설돼 있었으며 작업용 협궤 레일이 깔려 있었다. 땅굴 곳곳에는 운반용 수레차와 배수시설 등이 있었다.
이 같은 수색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날 우리 정부는 북한이 남침을 위한 목적으로 이 땅굴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 땅굴의 착공 시기는 1972년 남북 간 대화 교섭이 이뤄졌던 시기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후 철원, 판문점, 양구에서 추가로 발견된 3개의 땅굴은 그 규모가 제1땅굴보다 더 컸다.
발견 당시 유엔군사령부는 북한 측에 땅굴 현장을 공동 조사하자고 제의했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면서 “땅굴은 조작된 것이며 미국과 한국이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땅굴 속에서 발견된 소련제 다이너마이트와 북한제 전화기, 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의 작업진척 일정을 기록한 흔적 등이 북한에서 파내려 온 땅굴임을 분명히 입증했다. 제1땅굴은 비무장지대 내에 있고 외부에 개방되지 않고 있다.
34. 고교 평준화, 중학교 평준화(1974년·1968년)
고등학교 배정 프로그램이 입력된 컴퓨터 단추를 누르는 민관식 문교부 장관. 추첨에 의해 고교 진학이 결정되면서 ‘뺑뺑이’라는 말이 나왔다. |
1960년대 중학교 입시경쟁이 치열해지자 정부는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진학 제도를 실시한다. 그 결과 초등학교 입시교육은 사라졌지만 중학교 학생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고교 진학을 위한 중학생들의 입시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특히 무시험 중학 입학생들의 졸업연도인 1972년에는 고등학교 입시가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됐다. 과도한 사교육비와 과외수업, 학교 간 심한 격차, 재수생 양산 등 각종 문제와 부작용을 낳았다.
정부는 1972년 입시제도위원회를 구성해 대책 마련에 나섰다. 1974년 암기식, 주입식 입시 위주 교육의 폐단을 개선하고 고등학교 간 학력 차를 줄이기 위해 고교평준화 제도를 도입했다. 비평준화로 인한 중학생들의 과중한 학습 부담을 줄이고 대도시 명문고로 집중되는 입시과열과 그로 인한 학생들의 부담감과 인구의 도시집중 등을 막겠다는 것이 취지였다.
이 제도에 따라 지역별로 일정한 방식의 추첨을 통해 학생들을 해당 지역에 있는 모든 일반계 고등학교에 나누어 배정하게 됐다. 1974년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1975년 대구, 인천, 광주 지역 고교가 평준화됐지만 여러 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확대가 보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8년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에서 이 제도가 긍정적으로 평가되자 1979~1980년에 전국 대부분의 지역 고교가 평준화됐다. 그중 울산, 과천, 여수, 김해, 포항, 용인 등 일부 도시는 평준화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최근(2013년 광명, 2015년 용인 등) 대부분 평준화됐다.
제도 도입 취지처럼 고교 입시를 위한 과열 경쟁 해소, 평균 학력의 증가, 학교 시설의 향상, 재수생 감소를 비롯, 지방 학생의 대도시 집중을 막고 실업 교육을 진흥시켰다는 점 등 사회적 병폐를 해결한 점이 장점으로 나타났다. 반면 고교 교육의 하향 평준화, 교육의 질적 저하, 경쟁원리 말살, 우수 학생들의 학습의욕 상실 등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교육 당사자인 학생의 교육선택권과 학교의 학생선발권을 무시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35. 긴급조치 9호(1975년)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이어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개정 주장 자체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
1975년 4월 11일 서울농대생 김상진이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항거하며 할복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서울농대 교정에서 오전 11시부터 유신헌법 철폐와 박정희 정권 퇴진 등의 구호 아래 자유성토대회가 진행되던 중 3번째 연사로 등장한 김상진은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뒤 할복,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튿날 아침 끝내 숨을 거두었다. 김상진의 자살을 계기로 유신헌법 철폐와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정부는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그 내용은 ▲유언비어의 날조·유포 및 사실의 왜곡·전파행위 금지 ▲집회·시위 또는 신문·방송 기타 통신에 의해 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선포하는 행위 금지 ▲수업·연구 또는 사전에 허가받은 것을 제외한 일체의 집회·시위·정치관여 행위 금지 ▲이 조치에 대한 비방행위 금지 ▲금지위반 내용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소지하는 행위 금지 ▲주무장관에게 이 조치의 위반 당사자와 소속학교·단체·사업체 등에 대해 제적·해임·휴교·폐간·면허취소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 부여 ▲이런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다는 조치였다.
긴급조치는 1972년 개헌된 유신헌법에 근거한 국가긴급권의 일종으로, 대통령이 내릴 수 있는 특별조치이다. 9호는 1974년 1호부터 9차례 시행됐던 긴급조치 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8호의 내용을 집대성한 긴급조치 9호는 보도의 자유를 상당히 억압했던 조치로 평가된다. 긴급조치 9호는 1979년 12월 7일 해제돼 4년여 동안 ‘긴급조치 9호 시대’가 계속됐다. 1980년 대한민국 헌법이 개정되면서 긴급조치는 비상조치권으로 바뀌었다. 이는 긴급조치와는 달리 입법부의 사후 의결을 받아야 하고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비상조치를 해제할 수 있는 온전한 권한이 국회에 부여됐다. 이후 1987년 개헌을 통해 이 같은 조치도 사라졌다.
36. 최초 국산 모델 승용차 포니 등장(1975년)
1975년 등장한 첫 고유 모델 승용차인 현대자동차의 포니는 이듬해 에콰도르 등으로 수출되기 시작했다. |
1975년 12월 1일 현대자동차가 울산공장에서 포니 승용차 양산을 시작했다. 포니는 대한민국 최초 고유 모델이며 대한민국 자동차 공업의 자립을 열게 한 모델이다.
포니는 당시 현대자동차가 미국 포드와 기술제휴 관계를 청산하고 미쓰비시로부터 기술제휴를 받은 후 나온 첫 작품이다. 1세대 미쓰비시 랜서의 후륜구동 플랫폼에 미쓰비시 새턴 엔진을 장착한 파워트레인을 도입하고,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인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의뢰해 받은 차체 디자인으로 설계했다. 포니는 1974년 처음으로 토리노 모터쇼에서 선보인 후 1975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양산이 시작됐다. 1238cc의 저배기량 모델과 1439cc짜리 모델이 있었으며, 당시 승용차의 대세였던 세단형이 아닌 패스트백 형태의 모델로 출시됐다.
대한민국의 첫 독자 생산 모델 승용차인 포니에 대한 반응은 엄청났다. 출시 첫해인 1976년 판매량이 1만여 대에 달해 그해 대한민국 자동차 판매량의 약 40%를 차지했다. 이는 당시 경쟁자였던 기아산업의 브리사를 멀리 뒤로하는 수준이었다. 첫 생산될 당시 판매가는 75만원 선이었고 1980년대 초반 판매가는 약 100만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수출된 국산 승용차 모델이기도 하다. 포니는 1976년 7월 에콰도르행 선박에 5대가 선적되면서 수출이 시작됐다. 같은 해 바레인에 40대가 수출됐다. 꾸준한 판매량을 보이며 현대자동차의 대표 차량으로 자리를 잡아가다가 1982년에 포니2가 출시됐다. 포니2가 나온 후에도 포니는 영업용으로 1985년까지 병행 생산됐다. 포니2는 1990년까지 생산됐다. 포니는 뒷자리를 없애고 화물칸을 놓은 픽업트럭, 트렁크 용량을 늘린 스테이션 왜건형 등 다양한 파생형 모델을 내놓았고, 자동변속기도 추가했다. 정세영 전 현대자동차 회장의 별명이 ‘포니 정’이었을 정도로 포니는 국내 자동차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이 됐다.
37. 8·18 도끼만행사건(1976년)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은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절단 작업 현장을 습격,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를 살해했다. |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전쟁 일촉즉발의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판문점은 별다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단어 그대로의 공동경비구역이었는데, 한국군 측 3초소가 북한군 초소 3개소에 포위당한 지점에 있어 항상 위협에 노출돼 있었다. 그래서 한국군은 고지대에 위치한 5초소 측에서 3초소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는데, 미루나무가 5초소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주한 UN군은 3초소의 안전을 위해 미루나무의 벌목을 했다. 북한 측이 절단에 이의를 제기하자 가지치기만 하기로 하고 18일 오전 노무자와 육군 장교, 경비병 등이 동원돼 가지치기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북한 육군 중위가 나타나 위협을 시작했고 북한 경비병 30여 명이 나타났다. 북한군들은 작업 중이던 UN군 경비중대장인 아서 보니파스 미 육군 대위를 도끼로 살해했다. 여러 병사가 부상을 입었으며 소대장 마크 배럿 미 육군 중위도 현장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북한 측은 자신들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UN군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UN군은 물론 미국 정부도 사태에 경악하며 반응에 나섰다. 포드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데프콘 등급을 상향하고 북한 측의 추가 도발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UN군은 사과 및 배상을 요구했지만 북한의 억지 주장으로 협상은 결렬됐고 준전시체제에 해당하는 ‘데프콘 3’이 발령됐다.
이로 인해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주한 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준전시체제에 돌입했으며, 북한군도 이에 맞서 북풍 1호(준전시체제)를 발동, 전군 완전무장을 지시했다. 미국은 북한이 다시 도발에 나서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김일성이 직접 유감을 표했고 미국은 하루가 지난 후 이를 수락했다. 사건은 미루나무를 자르는 선에서 마무리됐고 판문점 경비초소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확실한 경계가 세워졌다. 벌목된 미루나무의 일부는 JSA 안보견학관에 전시해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미루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희생된 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38. 수출 100억 달러 달성(1977년)
서울 광화문 거리에 세워진 수출 100억 불 달성 기념 아치. ‘수출 100억 불, 1인당 국민소득 1000불’은 1970년대 국가적 꿈이었다. |
광복 직후 한국의 수출 대상국은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연간 수출액은 몇백만 달러에 불과했다. 1960년 수출 또한 2000만 달러에 불과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후 국가 산업화는 물론, 수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인 1961년 수출액은 4100만 달러였고 대부분이 농산물과 광산물이었다.
박 대통령은 농산물과 광산물 외에 합판 등으로 수출품목을 다변화하고 “수출 아니면 죽음” “수출만이 살길”이라며 수출을 강조했다. 1964년 11월 30일 수출이 1억 달러를 넘어서자 정부는 1964년 12월 5일을 ‘수출의날’로 제정했다. 경제부처 관료들과 수출업체 대표들을 모아 수출진흥회의를 열어 수출목표를 정했다. 이듬해인 1965년부터 대한민국 수출 정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다. 1965년 신년사에 ‘증산 수출 건설’이라는 구호를 내건 박 대통령은 합판, 가발, 섬유 등 다양한 품목의 수출을 지원했다.
박 대통령은 1972년 제9회 수출의날 인사에서 “1980년대 초까지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겠다”고 밝히고 이를 정부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결국 당초 계획보다 4년 빠른 1977년 12월 21일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였으며, 세계적으로도 22번째라는 기록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2월 22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수출 100억 달러 달성 기념식에서 “이날은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는 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고 난 후 대한민국은 중화학공업 위주로 산업구조를 개편했고, 1980~1990년대에는 반도체와 자동차, 휴대전화, 선박 등이 주요 수출품으로 자리 잡았다. 1995년에는 수출이 100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2006년 3000억 달러를 달성했고 2010년대에는 5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현재 대한민국은 수출과 수입을 합해 연간 1조 달러의 무역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39. 부가가치세법 시행(1977년)
1978년 재무부 연두순시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김용환 재무부 장관. 김 장관은 부가가치세제 도입에 앞장섰다. |
부가가치세 도입은 우리나라 세제사에 큰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54년 프랑스에서 최초로 시행된 부가가치세를 대한민국은 1977년에 도입했는데, 아시아에서는 최초다. 당시 유럽국가 위주로 27개국만이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상태였다. 부가가치세는 세금계산서를 발행함으로써 사업자 간 상호 감시가 가능하고, 이것이 세수 창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업자의 매출이 순차로 노출되고 국가 세수 확보로 이어진다.
1960년대 당시 대한민국은 다양한 간접세를 도입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정부는 1970년대 초반부터 국제통화기금(IMF)의 조세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부가가치세 도입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76년 11월 17일 영업세, 물품세 등 8개의 간접세를 하나로 묶고 부가가치세를 도입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1977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비유럽국가인 우리나라의 부가가치세 도입은 당시 획기적인 것이었다. 부가가치세 도입 전에는 영업세, 물품세, 직물류세, 유흥음식세 등 복잡한 세목이 10가지가 넘었지만 부가가치세 도입 후 세목과 세율이 단순화되고 재정건전성이 확립됐으며 간접세 체계를 근대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탈세를 예방하고 물가상승 요인을 제거하며 수출 및 투자의 촉진을 가져오기도 했다.
국내 부가가치세 세수는 1978년 8000억원이었으나 2016년에는 61조원이 징수됐고, 현재 총 국세수입에서도 26.5%를 차지하고 있다. 부가가치세 도입 시 찬반양론이 거셌으나 성공적 정착을 넘어 세수견인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새로운 세금이 신설되거나 세금을 인상할 때면 국민의 반발이 심했는데, 국내에서 역사상 가장 반발이 심했던 세금이 바로 부가가치세이다. 도입 당시 세율 10%는 당시 기준으로는 파격적이었다. 부가가치세에 대한 반발은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겹쳐 증폭됐고, 민심이반이 진행되면서 1978년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패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40. 백곰미사일 발사(1978년)
1978년 9월 26일. 충남 안흥 시험장에서 백곰미사일 발사 장면을 지켜보는 박정희 대통령.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7번째로 유도탄 개발에 성공했다. |
1978년 9월 26일 충남 안흥종합시험장에서 첫 국산 유도탄인 ‘백곰’이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백곰 미사일(NHK-1)은 대한민국의 첫 국산 단거리 지대지 탄도미사일로 NHK-1은 Nike Hercules Korea-1의 약자다.
백곰 개발은 박정희 대통령의 극비 지시로 이뤄졌다. 1971년 12월 박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에 “즉시 지대지 유도탄 개발 계획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단·중거리 미사일은 수입해서 쓰고 장거리 미사일은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부가 미사일 독자 개발에 나선 배경에는 미국과의 관계가 있었다. 1970년대 우리 정부는 미국에 사정거리 120km 미사일 판매를 요청했지만 미 카터 행정부는 이를 거절한다. 또 미국은 한국이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도 반대했다. 핵탄두 운반체 역할을 할 수 있고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용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에 정부는 미국이 우리나라에서 운용 중인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모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 미사일을 국산화하면서 지대지 성능을 좀 더 개량하는 사업이 백곰 미사일 개발사업이었다. 1974년 시작된 국산 유도탄 개발사업은 1978년 시험발사 성공으로 그 결실을 맺었고 한국은 세계 7번째 미사일 개발국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시험발사장을 직접 찾아 참관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백곰은 외관은 나이키 허큘리스 유도탄을 모방했지만, 소프트웨어, 유도조종장치 등 90% 이상이 국산품으로 구성된 국산 유도탄이었다. 시험발사에 성공한 ‘백곰’은 사정거리가 180km로 유사시 군사분계선(MDL)에서 150km 내에 있는 평양 타격이 가능했다.
발사시험 성공으로 미사일사업이 진척돼 갔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사업의 속도는 늦춰졌고 결정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백곰 사업은 완전히 취소됐다. 국산 유도탄 1호 백곰은 실전에 배치되지 못했지만 현무 개발의 밑거름이 됐다.
41. 《해방전후사의 인식》 출간(1979년)
1979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1980년대 이후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
1979년 10월 첫 출간된 역사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해전사)은 지식인과 학생 사이에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 책은 해방 전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일어난 사건들, 친일군상과 반민특위, 미 군정, 분단 등의 사건을 비판적으로 진단하는 동시에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서술하고 있다. 초판은 엄청난 기세로 판매됐다. 2쇄, 3쇄를 원하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계엄령 아래서 이 책은 군 당국의 검열을 받으며 출간 11일 만에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가 1980년 서울의 봄으로 해금됐다.
《해전사》는 10년에 걸쳐 전 6권으로 출간됐는데,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 ‘바이블’로 불릴 정도로 대학생의 좌경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등 386세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1989년 《한겨레신문》을 창립한 송건호, 재야 민주화 운동가이자 시인인 백기완, 한국근현대사학계의 거목이자 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인 강만길, 정치학자인 최장집 등이 있으며, 젊은 대학원생들이 쓴 논문도 많이 실렸다. 1, 2, 3권은 해방 3년사(1948년 정부 수립)를 다뤘고, 4권은 해방 8년사(한국전쟁 종전까지), 5권은 북한현대사, 6권은 ‘쟁점과 과제’를 다뤘다. 2004년 출간 25주년을 맞아 재출간했다.
그러나 출간된 지 오래돼 이제는 비판받는 옛 학설들이 수록돼 있어 역사서로서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다. 《해전사》 출간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해전사》에 수록되었던 주장들이 이제는 정설이 된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완전히 폐기된 경우도 있다. 그 예로 6·25전쟁의 발발에 대해 남침유도설 같은 브루스 커밍스 유의 수정주의 관점이 대거 수록돼 있었으나, 공산권 붕괴 이후에 구소련 쪽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현재는 남침설이 완벽하게 정설이 됐다.
42. 부마사태(1979년)
부마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된 후 문을 닫은 부산 동아대 앞에 계엄군이 진주했다. |
1970년대 후반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으로 경공업이 중심인 부산, 마산 지역의 많은 중소업체가 자금난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민심이 악화됐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을 포함한 야권 세력이 크게 약진했다. 이듬해 5월 강경파였던 김영삼이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온건파였던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선출됐다. 같은 해 8월 YH무역 직원들이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8월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는 YH사건이 일어났다. 진압을 위해 신민당사에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했고, 김영삼이 이를 강하게 비난하자 국회에서는 국가체제를 모독했다며 10월 4일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다.
부산·경남 지역 민심은 급격히 나빠졌다. 10월 16일 부산대 도서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부산대 시위가 시작되자 순식간에 시위 인원이 늘어 5000여 명의 학생이 일제히 부산 중심가인 남포동과 부산시청 앞, 광복동에 집결해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부르짖었다. 동아대 학생들도 합류하며 시위가 커졌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로 단순한 학생 시위를 넘어 민중항쟁으로 전개됐다. 저녁에는 퇴근길 직장인과 하교한 고등학생, 상인과 노동자들까지 가세해 수만명이 시위에 나섰다. 다음날 시민들은 파출소, 경찰서, 부산일보사, 경남도청 등을 공격했고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부산에 육군 특전사의 2000여 명의 병력이 투입됐지만 시위는 오히려 부산을 넘어 마산으로까지 번졌다.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기동 경찰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다.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됐다. 마산의 항쟁이 수출 자유 지역 노동자와 고교생까지 합세,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10월 20일 0시를 기해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나흘간의 시위 결과 부산에서 1058명, 마산에서 505명 등 총 1563명이 연행됐다. 위수령 발동 후 6일 뒤에 10·26사건이 일어났다. 부마사태는 유신정권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 됐다.
43. 10·26 사태(1979년)
유신 말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알력은 10·26사태로 이어졌다. |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 부장인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1970년대 말 들어 박정희 정부 유신 체제의 부작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경제 상황이 악화했다. 중화학공업에의 중복·과잉투자로 효율성이 줄고 소비자 품목이 품귀 현상을 빚었다. 1979년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8%를 넘었다. 정치적으로는 박정희의 유신 체제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대학생이나 지식인들의 민주화 요구가 잇따랐고,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미군 철수 카드를 내밀어 한·미 간 갈등이 증폭됐다.
이즈음 1979년 10월 15일에 부산대학교에서 학생 시위가 시작됐다. 이날의 시위는 주동자들이 연행됨에 따라 확산하지 못했으나,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부산대 학생들 외에 동아대·고려신학대는 물론 일반 시민까지 시위에 가세했고, 정부는 18일 부산시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경남 마산으로 시위가 확산했다. 박정희 정부는 마산과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내렸고,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박정희의 퇴진을 요구한 ‘부마사태’는 강경 진압에 의해 해결됐으나, 시위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두고 권력층 안에서 갈등이 벌어졌다. 당시 대통령의 경호실장인 차지철은 민주화 운동을 강하게 진압할 것을 주장했고,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는 온건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의견이 강경책으로 기울자, 김재규가 10월 26일 박정희와 차지철을 총으로 살해했다. 이로써 박정희 정부의 유신 체제가 끝났다.
44. 12·12 사태(1979년)
12·12사태는 10·26사태 후 군부 내 노장파와 소장파 간의 갈등의 소산이었다. 사태 다음 날 중앙청 앞에 배치된 신군부측 병력. |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고 나서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당시 보안사령관 자격으로 10·26사태에 대한 수사를 전담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내 사조직 하나회 세력이 육군 지도부였던 정승화 세력과 대립하게 됐다.
전두환이 이끄는 세력은 정승화가 김재규의 범행을 방조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고, 정승화가 10·26사태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며 정승화를 강제 연행키로 했다(정승화가 10·26 사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후일 명백히 밝혀졌다).
전두환은 정승화의 연행을 실행하기 위해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접촉했다. 12월 12일을 거사 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도 사전 접촉했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전두환 합수부장의 지시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 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제33헌병대 병력 65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찾아가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정승화 연행과 군 병력 이동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뤄졌다. 신군부 세력은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을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신군부 세력은 노재현 국방장관을 체포해 그를 통해 대통령이 총장 연행을 허락도록 설득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결국 13일 새벽 정승화 연행을 재가했다. 그리고 같은 날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이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했다. 신군부 세력은 이후 1980년 5·17쿠데타까지 주도해 제5공화국의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45. 5·17조치와 광주사태(1980년)
1980년 광주사태 당시 발포명령자, 사망자 수 등을 둘러싼 논란과 사회적 갈등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
12·12사태로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속에,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 해제, 윤보선·김대중 등 유신 체제하의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제적 대학생 복학 등을 단행했다. 헌법 개정까지 약속하며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은 높아졌다.
1980년으로 넘어가면서 유신 체제하에서 억눌렸던 국민의 요구가 분출했다.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10만여 명의 학생이 집결해 계엄령 철폐, 연말까지 헌법 개정을 통한 새 정부로의 권력 이양, 신현확 국무총리와 전두환 장군 퇴진, 양심수 석방 등의 요구조건을 내세우며 5월 22일까지 답을 달라고 최후 통첩했다. 하지만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사회 불안을 진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했다.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쥐게 뒤 군부는 포고령 제10호를 발령해 국회와 각 정당을 해산시켰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했다.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을 체포하고, 김영삼을 자택에 연금했다.
5·17조치 다음 날 광주에서는 계엄군 공수부대와 대학생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시위 진압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를 골목, 다방까지 추적해 진압봉, 소총 개머리판 등으로 무차별 구타했다. 5월 19일에는 공수부대 장교의 위협 사격이 있었다.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한 첫 발포였다. 분노한 군중과 공수부대 간의 유혈 충돌은 점차 과격해져 갔다. 그런 가운데 공수부대원들이 시민을 무자비하게 다룬다는 뉴스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유언비어가 확산하면서 보다 많은 학생과 시민이 소요에 가담했다. 이후 계엄군과 치열한 공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가 발표한 ‘5·18 관련 사건 수사 결과’에 의하면, 5월 18일 이래 10일간의 유혈 사태로 민간인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이 사망했다.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대를 군이 유혈 진압한 사건은 당시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군 전투 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가진 상황에서 국군이 광주에 투입됐다는 사실 때문에 반미 감정이 확산하기 시작했다.
46. 아웅산 사건(1983년)
1983년 10월 9일 북한의 테러로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했던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등 17명이 사망했다. |
1983년 10월 9일, 현지에 특별 파견된 북한 특수공작원 3인이 미얀마(당시 국명은 버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을 겨냥해 폭탄테러를 저질렀다. 참배 예정지였던 미얀마 건국 영웅 아웅산의 묘지를 향해 가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은 가까스로 화를 모면했지만, 묘역에 먼저 가서 도열해 있던 대한민국의 정부 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목숨을 잃었다.
서석준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이하 당시 직책 기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 주 미얀마 한국대사,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옥 재무부 차관, 강인회 농림수산원,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 정태진·한경희 대통령 경호원 등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얀마 경찰의 추격을 받은 3인의 특수요원 가운데 신기철은 총격전 끝에 사살되었다, 나머지 강민철, 김진수 2인은 수류탄 공격을 위해 안전핀을 뽑는 순간 수류탄이 터져 버려서 중상을 입고 체포됐다. 그들이 소지한 수류탄은 애초 안전핀을 뽑자마자 터지게끔 작동 조작이 돼 있었다고 한다. 이는 애초 북한 당국이 특수 공작원 3인의 무사 귀환보다는 현지에서 사망케 해 영구 미제 사건화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갖게 했다.
1983년 11월 4일, 미얀마 정부는 이들 암살 테러범이 북한군 특수요원이라고 공표했다. 미얀마는 북한과의 외교 관계 단절과 북한 승인 취소를 결정했다. 강민철은 아웅산 사건이 북한의 테러임을 자백했고, 이후 사형집행 정지를 받고 수형 생활을 했다. 그는 김대중 정권 시절에 한국행 뜻을 표시했으나, 햇볕정책을 추진 중이던 당시 정권은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2008년 암으로 사망했다.
47. 2·12총선(1985년)
1985년 2·12총선 당시 옛 서울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유세에 참석한 시민들. 5년 동안 억눌렸던 민심이 이 선거를 계기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
5공 출범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야권의 핵심 인물이었지만 신군부 정권에 의해 제도권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김영삼은 가택연금 상태였고, 김대중은 미국에 망명 중이었다. 김영삼은 1983년 5월 23일간 단식 투쟁으로 저항했다. 양김(김영삼과 김대중)은 1984년 5월 신군부 독재에 저항하고 세력을 도모하기 위해 민주화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를 조직했다. 민추협은 각종 성명서와 기자회견을 통해 반정부 활동을 전개했고,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는 기반이 됐다. 기존 야당 민한당은 온건 노선을, 신민당은 강경 노선을 선택했다.
전두환 정부는 1984년 11월 총선을 석 달 앞두고 구(舊) 정치인들을 풀어 주며 출마의 길을 터 줬다. 이렇게 하면 야권 내 신민당과 민한당이 분열돼서 여당인 민정당이 압승할 것이라는 분석에서였다. 하지만 신민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뜨거웠다. 신민당이 낸 총선 후보들의 유세 현장에는 시민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여기에 힘을 보태려는 듯 야당의 한 축인 김대중이 1985년 2월 8일에 미국에서 서울로 귀국했다. 김대중은 공항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삼엄한 경비 속에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으로 이송돼 연금됐지만, 그가 몰고 온 민주화 바람은 거셌다.
총선 결과는 신민당의 압승이었다. 서울 전체 14개 지역구에서 강남구 1곳을 제외하고 신민당 후보 전원이 당선됐다. 득표율은 민정당 35.2%, 신민당 29.3%, 민한당 19.7%, 국민당 9.2%였다. 정통 야당이라고 볼 수 있는 신민당과 민한당을 합한 득표율이 집권 여당인 민정당보다 14%포인트 앞섰다. 선거 후에 민한당 의원들이 줄줄이 탈당해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민한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신민당의 실질적 운영 주체는 민추협이었지만, 김영삼이 신민당에 입당하고 민추협의 역할이 축소됐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둘러싼 양김의 분열로 해체됐다.
48. 6월 민주화 투쟁과 6·29선언(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민주화 투쟁은 결국 6·29선언을 이끌어 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