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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글 | 월간조선
49. KAL 858기 폭파(1987년)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는 1987년 12월 15일 서울로 압송됐다. 그는 KAL기 폭파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김정일의 지시로 이루어졌다고 자백했다. |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KE858 여객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2인조 북한 특수 공작원에 의해 공중 폭파됐다. 승객 95명, 승무원 20명 전원이 사망했다. 현지 경찰은 사고 직전, 비행기 승객 중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 공항에 내린 일본 여권 소지 2인이 있었던 사실을 인지하고 즉각 공항에서 환승 대기 중이던 두 사람을 체포했다. 검거된 남자의 신원은 여권상 하치야 신이치, 여성은 하치야 마유미였다. 부녀지간으로 되어 있는 이들은 검거 직후 청산가리 앰풀을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다. 남자는 현장에서 즉사했으나 여자는 앰풀을 깨물기는 했지만, 자살에 실패했다. 현지에 급파된 국가안전기획부 수사관들은 아랍에미리트 정부에 “청산가리 앰풀 자살은 북한 공작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설득, 하치야 마유미의 신병을 넘겨받았다.
한국으로 압송된 하치야 마유미를 심문한 결과 그녀는 김현희, 자살한 하치야 신이치는 김승일이라는 이름의 북한 조선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공작원으로 밝혀졌다. 북한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방해·저지하기 위해 이러한 테러를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에 부쳐진 김현희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북한의 테러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특별사면을 받았다.
사건 직후 북한은 이 사건이 안기부의 조작극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주사파 운동권도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조작설을 주장했다. 노무현 정권 시절 이 사건을 다룬 과거사위원회는, 이 사건이 북한의 공작임을 다시 확인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심재환 변호사(이정희 통진당 대표의 남편), 정의구현사제단 등은 조작설을 주장하고 있다.
KAL 858기 사건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북한은 테러국으로 지목을 받게 됐고,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리스트에 올려놨다. 북한은 공식적으로는 자신들의 소행임을 현재까지 부인하고 있다.
50. 88올림픽(1988년)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통해 그 이전 30여년간의 성취를 세계에 알렸다. |
1988년 9월 17일~10월 2일에 서울에서 열린 올림픽에는 159개국, 선수 8291명이 참가했다. 우리나라는 477명의 선수를 참가시켜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종합 4위를 차지했다.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우리나라는 전쟁의 폐허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각인시켰다.
88올림픽을 개최하기까지 국내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 이후 국제올림픽연맹(IOC)에 유치 신청을 하려 했으나, 개최 도시였던 서울시가 재정 적자를 우려해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이 유치 신청을 강행하고 1981년 2월에 IOC 본부에 유치 신청서를 제출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유치위원장을 맡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 사장 등 기업인들이 나서서 유치전에 가세했다. 1981년 9월 18일, 한국 대표단은 독일 바덴바덴을 향해 떠나고, 9월 30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세울(Seoul)’이라는 말에 부둥켜안고 울었다. 경쟁도시인 나고야를 52대 27로 꺾고 유치에 성공했다.
서울올림픽은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남겼다. 올림픽을 위해 사회기반시설들을 현대식으로 개량하는 등 국가의 기반시설을 업그레이드했다. 도로의 가로수, 상점의 간판에 이르기까지 현대식 개조가 이뤄졌다. 올림픽 행사를 통해 생긴 3000억원의 잉여금은 국민체육진흥기금으로 적립해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에 쓰고 있다. 올림픽은 국민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국내 컬러TV와 가전제품의 수요를 촉진하고, 철강과 자동차, 조선 등 전 산업 영역에서 국제신뢰도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가장 큰 성과는 남북이 대치하는 분단국가이자 개발도상국임에도 올림픽을 훌륭하게 치러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올림픽 이후 공산국가인 헝가리와 수교를 맺고, 소련, 중국, 동유럽 국가들과도 경제교류와 문화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서울올림픽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래 12년 만에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선수단이 모두 참가한 대회였다. TV로 방송된 서울의 발전한 모습은 동유럽 국가 국민들에게 자극이 됐고, 이는 1989년 이후 동구 공산권 붕괴의 한 요인이 됐다.
51. 5공 청산(1988년)
5공 청산 국회청문회 마지막 날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회에 나가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 후 강원도 백담사로 ‘유배’를 갔다. |
노태우 정부는 1988년 3월 31일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비리와 관련해 전두환의 친동생 전경환이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6월 13일 전두환 일가 비리 조사에 착수했다. 이후 5공 청산작업이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국회 증언에 이르기까지 약 2년간 계속됐다.
1988년 6월 27일에 구성된 국회 ‘5공 비리 특별위원회’는 7월 23일 4당 간사회의를 열고 산하에 4개의 소위원회를 둬 분야별 비리를 조사했다. ‘일해재단 청문회’는 1988년 11월 4일부터 5차례에 걸쳐 진행됐는데 장세동 전(前) 안기부장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을 증인으로 소환해 기금모금의 강제성과 정경유착의 실태를 폭로했다.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는 11월 18일부터 광주학살 피해자를 비롯한 김대중, 이희성, 정호용 등 65명의 증인을 출석시켜 6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청문회는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의 불법성,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등은 입증했으나, 공수부대 지휘책임과 발포책임자 등은 밝히지 못했다. ‘언론청문회’는 11월 21일부터 5차례에 걸쳐 진행됐는데 언론인 숙청, 언론통폐합 등 신군부의 언론 장악 음모에서 비롯된 것임이 뚜렷이 드러났다.
5공 비리 사건은 수사를 통해 전경환을 비롯해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 10명과 장세동 전 안기부장, 이학봉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등 모두 47명이 구속되고 29명이 불구속되는 것으로 종결됐다. 여론이 극도로 악화하자, 전두환은 11월 23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 정치자금 139억원과 연희동 사저 등을 국가에 헌납한다고 밝히고 백담사에 은둔했다.
52. 임수경 밀입북 사건(1989년)
1989년 6월 30일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 참석차 밀입북했던 임수경이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 나와 구호를 외치고 있다. |
1989년 6월 30일,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이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 대표로 밀입북했다. 애초 평양축전 참가를 허용할 것처럼 보이던 정부가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1989년 3월 25일) 이후 태도를 바꾸자, 전대협은 극비리에 임수경을 제3국을 통해 평양축전에 파견키로 했다. 임수경은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해 도쿄에 도착하고 1주일간 머무르다가, 6월 28일 서독(독일)을 거쳐 6월 30일 평양에 도착했다.
임수경은 평양에 도착해 북한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평양축전에 참가하는 동안 북한학생위원회의 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1995년까지 조국통일 위업을 달성하기 위한 공동투쟁’ 등 8개 항의 ‘남북 청년 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후 백두산을 출발, 한라산을 향해 국토를 종단하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평화 대행진’에 참가했다.
축전이 끝나고 임수경은 8월 15일 분단 이래 최초로 판문점을 걸어서 귀환했다. 임수경은 이 사건과 관련해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조사를 받고, 1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구형받았다. 계속된 재판 끝에 같은 해 12월 18일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2년 특별 가석방되고, 1999년 복권됐다.
53. 3당 합당(1990년)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3당 합당을 발표하는 노태우 대통령(민주정의당). 일본 자유민주당을 본떠 ‘보수대연합’을 추진했지만, 5년 만에 와해되고 말았다. |
1990년 여당인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 야당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했다.
여당인 민정당은 1988년 총선에서 125석을 확보해 과반수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할 방안을 모색하던 중 노태우 대통령은 이를 수습할 묘책으로 ‘보수 대연합’ 카드를 꺼냈다. 일부 야당과의 합당을 구상한 것이다.
노태우는 처음에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평민당)에 합당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노태우는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에 접근했다. 통일민주당은 당시 의석수 59석으로 원내 3당이었다. 김영삼은 민정당과 합당을 하면 대선에 도전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으로 판단해 합당에 동의했다. 김영삼과 김종필 총재는 1989년 10월 골프 회동에서 합당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의 합당 논의가 실무 차원에서 진행됐다.
김영삼은 1990년 1월 22일 ‘구국의 결단’이라고 말하며 3당 합당을 선언했다. 청와대에 모인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기자회견을 갖고 3당 통합이 이뤄졌음을 공식 선포하며 새 통합정당의 이름을 민주자유당이라고 발표했다. 3당 합당으로 생긴 민자당은 전체 의석의 3분의 2가 넘는 218석을 확보했다. 민자당은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면서 다시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계 간의 반목이 깊어져 탈당 사태가 이어졌다. 민자당은 이후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꾼다.
54.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1991년)
1991년 12월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악수를 나누는 정원식 총리와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왼쪽). 이들은 마라톤회담 끝에 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했다. |
1991년 9월 18일 열린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각기 별개의 의석을 가진 회원국으로 유엔에 가입했다. 이로써 남북한은 분단 46년, 유엔 창설 46년 만에 각기 독립된 국가의 자격으로 유엔 회원국이 됐다.
남북은 본래 유엔 가입에 대해 큰 입장 차를 보였다. 국가만을 가입 대상으로 하는 유엔의 조건에 마주쳐 한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논리로 단독으로라도 유엔에 가입하고자 했다. 북한은 동시 가입이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의도라며 단독 가입이 아닌 한 유엔 가입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한국이 남북의 유엔 가입 문제에 대해 북한 측 입장을 지지했던 소련, 중국 등과 외교 관계를 확대하자 북한은 태도를 갑자기 바꾸어 동시 가입을 받아들였다.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은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해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1990년 9월 제1차 고위급 회담을 시작한 이후 15개월 만에 채택된 합의서다. 서문 4장 25조로 이뤄져 있는데, 서문에는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조국통일 3개 원칙의 재확인, 민족화해 이룩, 무력 침략과 충돌 방지, 긴장 완화와 평화 보장, 교류를 통한 민족 공동의 번영 도모,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 등을 규정하고 있다. 제1장은 남북 화해, 2장은 남북 불가침, 3장은 남북 교류 협력, 4장은 수정 및 발효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이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합의서 내용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55. 김영삼 정권 출범과 하나회 숙청 등(1993년)
1993년 취임 직후 하나회를 숙정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말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군사반란 등의 죄목으로 재판정에 세웠다. |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개혁과 ‘역사 바로 세우기’를 표방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군부독재 청산에 나서는 한편, 4·19, 5·18, 12·12 등 현대사의 각종 사건을 재평가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첫 번째는 육사 내부 파벌로 군부 독재의 중심에 선 ‘하나회’ 숙청 작업이었다. 김영삼 취임 직후 일주일 사이에 40개의 별이 떨어졌다.
검찰은 1995년 11~12월 전두환, 노태우를 각각 거액 수뢰 혐의와 반란 주도 혐의로 구속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한 국민의 진상 규명 요구가 거세지면서 김영삼 정부는 1995년 말 5·18 특별법을 제정했다. 1980년 당시 신군부 핵심 인사들을 군형법상 반란수괴죄를 적용해 구속 기소했다. 한편 김영삼 대통령은 ‘친일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중앙청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일본 강점기 조선총독부 건물을 완전히 철거했다.
56. 성수대교 붕괴(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 어이없는 대형 참사가 잇달아 발생했다. |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38분경,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 48m가 붕괴해 32명이 사망했다. 사고 부분을 달리던 승합차 1대와 승용차 4대가 한강으로 추락했다. 한성운수 소속 16번 시내버스는 통과 도중 뒷바퀴가 붕괴 지점에 걸쳐 있다가 차체가 뒤집혀 추락해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과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 서울교육대학교 여대생 1명 등이 사망했다. 성수대교는 건설될 당시 트러스식 다리로 설계됐다. 트러스식 공법은 이음매가 잘못되면 무너지기 쉬운 공법이었다. 성수대교 건설 당시 다리 밑 부분을 이루는 트러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고, 연결 부분도 심하게 녹슬었을 뿐 아니라 다리 위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키는 이음매에도 결함이 있었다. 사고의 책임을 물어 이원종 서울특별시장이 경질됐고, 개원 중이던 국회가 일절 중지됐다. 김영삼 대통령이 대국민 특별담화문을 전국 TV를 통해 발표하고 국민에게 사과했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52분경 서울 서초구 서초동 소재 삼풍백화점이 일순간에 붕괴했다. 사망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이라는 인명 피해를 낳아, 6·25전쟁 이후에 가장 큰 인적 재해로 기록됐다. 부실 설계, 부실 공사, 유지관리 부실 등이 총망라된 사건이었다. 지상 5층, 지하 4층, 옥상 부대시설이 있는 2개 건물로 이뤄진 삼풍백화점은 1989년 말에 완공됐다. 애초 종합상가 용도로 설계됐으나 전문가의 정확한 진단 없이 백화점 용도로 변경했다. 완공 후에도 무리하게 증축 공사가 계속됐는데, 사건이 발생하기 몇 달 전부터 건물 균열 등 붕괴 조짐이 있었다. 사건 발생 당일인 1995년 6월 29일 오전에 5층에서 심각한 붕괴의 조짐이 나타났지만, 경영진은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 공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1000명 이상의 고객과 종업원들이 건물 내에 있었다. 건물은 당일 오후 5시52분경 5층부터 무너지기 시작해 20여 초 만에 2개 동 중 북쪽 건물이 완전히 붕괴했다.
정부는 1995년 7월 19일 당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건물에 대한 안전 평가가 시행됐고, 119중앙구조대가 서울, 부산, 광주에 설치됐다. 삼풍백화점 이준 회장 등 백화점 관계자와 공무원 25명이 기소됐다.
57. IMF 사태(1997년)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중)과 미셸 캉드쉬 IMF 총재(우)는 1997년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IMF) 긴급자금지원 최종 협상결과를 발표했다. |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다고 발표했다. 발표 20여 일 전,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Fundamental)이 튼튼하다고 장담했던 말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때였다. 이렇게 시작된 IMF 구제금융 체제는 30대 재벌 중 17개 퇴출, 은행 26곳 가운데 16곳의 퇴출 등 한국 경제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세계화를 목표로 경제개발이 한창이었던 1990년대, 일부 기업은 금융기관에서 무리하게 돈을 빌려 사업을 확장했다. 투자는 마구 늘렸지만, 일본의 엔화 약세와 중국의 위안화 평가절하로 수출은 부진하니 한국 경상수지는 지속해서 적자를 이루고 있었다. 금융기관도 정부 보증만으로 정확한 평가 없이 기업에 돈을 빌려주었고, 금융기관과 기업은 단기적으로 늘어난 채무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 상황에서 1997년 초 부실 덩어리 한보철강이 부도나고 이후 11월 초까지 삼미, 진로, 대농, 한신, 기아, 해태, 뉴코아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특히 7월에 발생한 기아그룹 도산은 10조원에 육박하는 부채를 남겼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외국에 갚아야 할 돈은 1500억 달러가 넘었는데, 우리나라가 가진 외국 돈은 40억 달러에도 못 미쳐서 나라가 파산 직전이었다. 결국 빚을 갚지 못한 기업들이 무너지고 나라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에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IMF는 우리나라 정부에 구제금융을 지원해 주면서 정부의 예산을 줄이고, 은행의 이자를 높이고, 은행과 기업의 개혁과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IMF 사태로 국민들은 낙담하기보다 어려운 나라를 살리자며 집에 있는 금을 내다 파는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이는 등 자발적인 희생을 감수하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수많은 실업자가 생기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증가하고, 빈부 격차가 심해지는 등의 고통도 동시에 겪었다.
58. 김대중 대통령 당선(1997년)
김대중 후보는 대선 4수 끝에 김종필·박태준 등 일부 보수세력과 손잡고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
사람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동초(忍冬草)’라 불렀다. 1971년 7대 대선 출마는 향후 30여년 동안 그를 한국 정치권의 핵(核)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대권 4수(修)의 시작이기도 했다. 2차 대선 도전은 1987년에 치러진 13대 대선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YS)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뒤 평화민주당까지 만들어 대선에 나섰지만 노태우·YS에 이어 3위에 머물렀다. 한동안 김 전 대통령은 민주진영으로부터 지역주의에 기댄 야권 분열의 책임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그는 대선 3수에 나섰지만 역시 패배했다. 숙적인 YS에게 지자 그는 선거 다음 날인 12월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40년 파란 많은 정치생활의 종막을 고하고 오늘로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다”며 야인으로 돌아가 1993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6개월간 머물면서 독일 통일 문제를 연구했고, 1993년 7월 귀국했다. 정계에서 떠났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정치인 김대중’이었다. 1995년 6월 지방선거 지원유세에 나서면서 정계복귀의 가능성을 열고, 7월엔 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국민회의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개헌저지선(100석)에도 못 미치는 의석(79석)을 얻어 사실상 ‘패배’했다. 하지만 다음 해인 1997년 대선에서 ‘정치 9단’다운 묘수를 고안해 승리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DJP 연대’를 성사시킨 것이다. 이념적으로 보면 진보(DJ)와 보수(JP)의 불편한 동거였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4수 끝에 1997년 12월 1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건국 이후 최초의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였다.
59. 박세리, 미 US여자오픈 우승(1998년)
박세리가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비탈에 걸린 공을 쳐 내는 모습은 IMF사태로 고통받던 국민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
박세리는 1998년 5월 17일 미 LPGA(미국여자프로골프)투어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에서 첫 승을 올렸다. 그해는 박세리가 미국에 진출한 첫해였다. 박세리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 우승에 대해 “당시 미국 투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성적은 중하위권에 맴돌았고, 스폰서 측이나 주위 사람들은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심지어 ‘국내로 돌아오라’는 비아냥도 들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박세리는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 승리의 여세를 몰아 LPGA 투어 메이저 대회 가운데서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US여자오픈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US여자오픈 마지막 홀에서 박세리는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비탈에 걸린 공을 쳐 내는 투혼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당시 IMF 사태로 고통받던 국민은 그를 보며 용기를 얻었다.
박세리는 대전 유성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 박준철씨 권유로 골프채를 처음 잡았다. 육상선수였던 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골프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뛰어난 체력에 골프에 남다른 감각을 타고난 그는 아마추어 시절 ‘프로 잡는 아마’로 명성을 떨쳤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92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첫 승을 올렸고 여고 졸업반이던 1995년에는 KLPGA투어 12개 대회에서 4승을 올렸다. 이때 한밤 공동묘지에서 담력 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의 훈련은 지독했다.
그는 1996년 KLPGA투어 상금왕에 오르며 한국 최고가 되자 세계 최고가 되겠다며 미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1998년에만 4승을 기록한 박세리는 다른 선수들과의 압도적인 차이로 LPGA 투어 신인왕을 차지했다. 이후 18년간 LPGA투어에서 메이저 5승에 총 25승을 쌓았다. 2016년 10월 KB하나은행 LPGA챔피언십 첫 라운드에서 은퇴경기를 가졌다. KLPGA 14승에 LPGA 25승을 더해 통산 39승을 거두었다. 2007년 한국 선수 중에는 처음으로 ‘골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60. 6·15 공동선언(2000년)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하는 김정일. 후일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대북비밀송금을 한 것이 문제가 됐다. |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은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회담을 가졌다. 분단 이후 첫 정상회담에서 양 정상은 ‘자주적 통일 추진’ ‘이산가족·장기수 해결’ ‘당국간 대화’ 등 5개항의 6·15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①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②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③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④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⑤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 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간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두 차례의 이산가족 교환 방문을 비롯, 국방장관 회담 등 교류협력 행사가 이어졌으나 우리 내부의 이념 갈등도 깊어졌다. 특히 현대상선의 4000억원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더욱 그랬다. 대북송금 사건은 2002년 《월간조선》 5월호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당시 엄호성 한나라당 의원은 기사를 근거로 의혹을 제기했다. 사건의 요지는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의 소개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김정일과 만나기 위해 막후 흥정을 하는 과정에서 북한에 4억5000만 달러를 보내기로 약속하는데, 자금은 산업은행으로 하여금 현대상선을 거쳐 현대아산으로 대출하도록 하고 이를 달러로 환전, 국가정보원 등을 시켜 해외의 김정일 비자금 계좌로 불법 송금하고 나서 평양회담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61. 한·일 월드컵(2002년)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국민들은 붉은 티셔츠를 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하나가 됐다. |
한·일 월드컵이 열린 2002년 6월 한 달 동안 대한민국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네덜란드 출신의 감독 거스 히딩크가 이끈 한국팀은 6월 4일 폴란드전 승리를 시작으로 4강 진출이라는 믿을 수 없는 ‘신화’를 창조해 냈다.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4강 신화는 ‘설욕전 시리즈’였다. 16강 진출의 제물이 된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16강전 상대 이탈리아, 8강전 상대 스페인은 모두 설욕의 대상이었다. 먼저 포르투갈전은 북녘 동포의 응어리를 대신 풀어 준 한 판.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전에서 북한이 포르투갈을 상대로 먼저 3골을 넣고도 3대5로 역전패한 것을 앙갚음했다. 이탈리아전과 스페인전은 한국이 당한 패배를 분풀이한 것. 이탈리아는 86년 멕시코 대회 조별리그 A조 경기에서 한국에 2대3으로 패배를 안겼고, 스페인은 90년 이탈리아 대회서 한국을 3대1로 완파했다.
대표팀의 화끈한 설욕은 ‘붉은악마’ 수백만 명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했다.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민국”을 외친 그들은 놀라운 에너지를 발산해 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은 ‘붉은색’과 ‘엄숙하기만 한 태극기’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유롭고 열광적이면서도 질서정연한 축제” “생동하는 대한민국의 힘을 젊은이들이 분출시켰다”는 찬사가 잇따랐다.
15년이 지난 지금 한국 대표팀은 우여곡절 끝에 9회 연속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은 우즈베크와의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0대0으로 비기며 A조 2위(승점 15)로 조 1·2위에 주어지는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한국은 브라질·독일·이탈리아·아르헨티나·스페인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로 ‘9회 이상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간 국가’가 됐지만 팬들 반응은 싸늘했다. 한국이 잘해서가 아니라 이란이 시리아와 비긴 덕분에 올라가게 됐다는 것이다. 2017년 12월 1일 자정(한국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Kremlin)궁 콘서트홀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조 추첨식에서 한국은 독일, 멕시코, 스웨덴과 함께 F조에 속했다.
62. 제2차 연평해전(2002년)
1999년 6월 제1차 연평해전. 이때 패한 북한은 2002년 6월 제2차 연평해전을 일으켜 참수리 357정을 공격해왔다. |
제2연평해전이 터진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 폐막 전날(6월 29일)이었다. 오전 10시25분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넘은 북한 경비정 2척이 아군에게 선제 기습포격을 가했다. 경고사격에 앞서 몸으로 막는 것이 당시 아군의 작전개념이었다.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소령 윤영하, 중사 한상국·조천형·황도현·서후원, 병장 박동혁 등 6명이 전사했으며 18명이 부상당했다. 우리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반격했고, 북 경비정은 뒤에서 이 전투를 지켜본 다른 북한 경비정에 끌려갈 만큼 파괴됐다. 인명 피해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의 대북 감청 부대는 교전 발발 2주일 전쯤 북이 우리 배를 향해 ‘발포’하려 한다는 징후를 포착했고, 이틀 전에는 ‘발포 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는 SI(Special Intelligence·특수정보)를 입수했다. 하지만 당시 군 수뇌부는 이를 예하부대에 알리지 않았다. 다음 날인 6월 30일,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 결승전 참관을 위해 일본 도쿄로 날아갔다. 7월 1일의 합동영결식에 대통령·국무총리·국방부장관·합참의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해해전의 추모 행사는 2008년 3월에야 비로소 정부 주관으로 격상됐다.
그보다 3년 전인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이 있었다. 북한군 함대가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자 우리 해군이 고속정으로 부딪쳐 북 어뢰정 1척을 침몰시키고 경비정 5척을 대파한 전투였다. 그러나 6·25 후 최초의 정규전이었던 제1연평해전은 그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당시 2함대 사령관이었던 박정성 예비역 소장은 “제1연평해전 승리가 해군의 큰 자랑임에도 햇볕정책 때문에 마치 죄지은 것처럼 돼 버렸다”고 말했다. 2004년 해군이 인천 월미공원에 승전기념탑을 세우려다 시민단체 반대로 취소한 일도 있었다. 더구나 군은 제1연평해전 이후 NLL을 침범한 북한군 함정에 대해 ‘몸으로 막는’ 차단기동→ 경고방송과 퇴각요구→ 경고사격→ 위협사격을 거친 뒤에야 조준사격을 허용하는 교전규칙을 만들었다.
63. 노무현 대통령 당선(2002년)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자 노란풍선을 흔들며 환호하는 지지자들. 노무현 대통령은 탈권위주의를 요구하는 대중들을 대변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끄는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에서 당선돼 정치에 입문한 이후 줄곧 기성 정치권과 제도에 강하게 맞서 온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의 벽을 넘겠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당(黨)의 간판으로 계속 출마했으나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노 전 대통령이 2000년 총선에서 부산에서 또 낙선하자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탄생했고, 이것을 토대로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당내 강력한 경쟁자들을 꺾으며, 영남 출신으로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됐다. 이어 대선에서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2002년 대선에서 등장한 노사모와 촛불, 그리고 인터넷 정치는 ‘노무현 정치’의 상징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5년간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강도 높은 변화를 추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그 변화를 주도하며, 논란의 한복판에 서곤 했다. 국내 정치를 뒤흔들었던 대북송금 특검, 대통령 탄핵과 역풍,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은 모두 노 전 대통령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대북송금 특검 수사는 집권당 전통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쓴 결정이었고, 검찰의 대선 자금 수사는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에 ‘차떼기당’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노 전 대통령 자신과 측근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노 전 대통령은 최도술 전 청와대 비서관의 수뢰사건이 터지자 ‘재신임’이라는 승부수를 걸었다. 2004년 말에는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법, 신문법 등 쟁점입법을 추진했고, 정치권과 사회는 이 문제를 두고 5년 내내 대립과 반목을 거듭했다.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으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이유다.
64. 북한 제1차 핵실험(2006년)
북한은 2017년 11월 29일 발사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탄도미사일을 발사, 핵무장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다. |
북한은 지난 2006년 노동당 창건일 하루 전인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했다. 당시 리히터 지진 규모 3.9에 파괴력은 1킬로톤(kt) 이하로 추정됐다. 플루토늄을 이용한 초보적 실험으로 사실상 ‘핵장치 시험’ 정도로 평가됐다. 플루토늄 원자 핵분열을 직접 일으킨 게 아니라 원자 분열을 촉발시키는 재래식 고폭탄을 폭발시킨 것으로 분석됐기 때문이다.
2차 핵실험은 2009년 5월 25일 시행됐다. 지진 규모가 4.5로 늘었고 파괴력도 2~6kt으로 높아졌다. 플루토늄 원자 핵분열을 이용한 핵무기 실험이 진행된 것으로 파악됐다. 2013년 2월 12일 시행된 3차 핵실험의 지진 규모는 4.9였고, 위력은 추정 기관마다 다르지만 6~7kt으로 커졌다. 당시 북한은 “다종화한 핵 억제력의 우수한 성능이 물리적으로 과시됐다”고 주장, ‘고농축 우라늄탄’을 시사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2016년 1월 6일에는 4차 핵실험이 있었다. 북한은 “첫 수소탄 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고 주장했다. 동년 공화국 창건일(9·9)에는 5차 핵실험이 이뤄졌다.
북한은 ‘핵실험’ 또는 ‘수소탄실험’이라고 했던 지난 1~4차 때와 달리 이번에는 ‘핵탄두(彈頭) 실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미 발사에 성공한 노동·무수단·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등 각종 미사일에 장착할 핵탄두를 실제로 만들어 폭발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날 핵탄두 개발 성공을 넘어 ‘표준화’ ‘규격화’했다면서, “각종 핵탄두를 마음먹은 대로 생산할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 국가정보원도 “북한은 스커드미사일에 장착할 정도로 탄두를 소형화하는 것이 목표인데 당초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고 했다. 2017년 9월 3일 낮 북한은 6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한·미·일 측정 규모가 다르지만 대체로 10만t 안팎의 폭발 위력이다. 단 한 발로 서울을 초토화할 수 있는 수소폭탄이 김정은 손에 들어간 것이다.
65. 광우병 사태(2008년)
출범한 지 3개월여 만에 시작된 광우병사태로 이명박 정권은 집권 초 정책을 추진할 동력을 잃어버렸다. |
이명박 제17대 대통령이 2008년 2월 25일 취임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좌파정권을 10년 만에 종식시킨 우파정권이 탄생했다. 여당이 된 한나라당은 4·9 총선에서 299석 중 과반(過半)인 153석을 획득했다. 민주당 81, 자유선진당 18, 친박(親朴)연대 14, 민주노동당 5, 창조한국당 3, 무소속 25석이었다. 한나라당은 이후 무소속과 친박연대 의원 상당수를 영입해 172석으로 몸집을 불렸다. 이명박 정권은 이로써 행정·의회·지방(시·도지사 16명 중 12명) 등 ‘트리플 권력’을 모두 차지했다.
국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이명박 정부는 4월 18일 미국과 쇠고기 수입 협상을 타결지었다. 그런데 열흘 후 MBC ‘PD수첩’이 광우병 위험을 과장한 프로그램을 내보냈고, 좌파 성향 인터넷매체와 시민단체 등이 비과학적 괴담을 부풀리며 가세해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광풍(狂風)을 불러일으켰다. 5월 2일부터 촛불집회가 열려 98만여 명(경찰집계)이 참여하고 106일간 계속됐다. 초기에는 국민건강을 우려한 비폭력 시위였으나 곧 광화문 일대를 무법천지로 만드는 반(反) 정부·반 이명박 불법·폭력시위로 변질됐다.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 노래 아침이슬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6월 말 추가협상을 통해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이 금지된 후 촛불은 사그라졌다.
2008년 MBC PD수첩 제작진은 ‘광우병 보도’에 대한 형사적 책임문제(명예훼손)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정확한 보도를 했다고 무죄가 된 것이 아니었다. 명예훼손에 대한 고의(故意)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죄가 된 것뿐이다. 그들이 보도했던 핵심 내용은 모두 ‘허위’로 판결됐다. 주저앉는 소가 ‘광우병에 걸린 소’라고 보도한 것, 미국인 아레사 빈슨의 사망 원인이 인간광우병이라고 단정한 것,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를 먹으면 한국인이 인간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94%라고 보도한 것 모두가 허위라는 것이다.
66.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2009년)
비리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후 자살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 문재인·이병완 전 비서실장이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盧武鉉·63)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40분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 뒤편 봉화산을 산책하던 중 30m 높이의 바위에서 투신해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오전 9시30분쯤 운명했다. 당시 경찰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투신에 앞서 이날 오전 5시45분쯤 경호원 1명과 함께 사저를 나서 봉화산에 올랐고, 오전 6시40분쯤 봉화산 7부 능선에 있는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다. 부엉이바위는 높이 45m의 거대한 바위다. 부엉이들이 자주 앉아 있어 오래전부터 부엉이바위로 불려 왔다.
경찰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투신에 앞서 사저에서 평소 사용하던 컴퓨터에 14줄 분량의 유서를 작성했다. 유서는 아래아한글 파일로 작성됐으며 파일명은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였다. 최종 저장 시간은 이날 오전 5시21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면서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고 썼다. 유서는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는 당부로 이어졌다.
투신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의 시발점은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로 불렸던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와 국세청의 고발로 시작된 대검 중수부의 수사였다. 2008년 2월 퇴임한 뒤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사저를 짓고 머물러 온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을 받은 혐의로 2009년 3월 30일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세 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이후 딸 정연씨가 2007년 9월 박 전 회장의 돈 40만 달러를 송금받아 미국 뉴저지주의 아파트를 사는 데 사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는 등 가족들과 측근들에 대한 수사가 이어지면서 정신적 고통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67.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2010년)
2010년 4월 24일 인양되는 천안함.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46명의 해군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
2010년 3월 26일 밤 9시15분, 북한 연어급 잠수정(130t) 정장은 백령도 서남방 4.8km 지점에서 은밀하게 잠망경을 올렸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흘렀다. 주변 상황은 어뢰를 발사하기에 너무나 완벽했다. 보름을 며칠 앞둔 밝은 밤, 3km 밖 천안함의 함 번호 ‘772’가 선명하게 보였다. 잠수함은 통상 어뢰 발사 전 잠망경으로 목표물을 확인한다. 이때가 수상함에 발견될 가능성이 제일 크다. 그러나 이날은 그럴 걱정이 없었다. 백령도 근해에 2m 내외의 파도가 일고 있어 잠망경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안함을 확인한 잠수정은 급히 잠항하여 중어뢰를 발사했다. 그리고 잠망경으로 천안함이 어뢰에 맞고 침몰하는 광경을 확인 후 NLL 북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천안함이 두 동강 나면서 기관실 뒤쪽에 있던 장병 46명은 이렇게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천안함 폭침(爆沈) 사건이 발생했던 3월 26일 오전 군 문자 통신망을 통해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과 모선(母船)이 전날 항구에서 사라진 사실이 해군 2함대로부터 천안함에 전파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터무니없는 의혹을 제기하는 괴담(怪談)이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더구나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일부 정치세력이 어떤 의도를 갖고 괴담을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천안함 46용사와 부상자들의 희생과 고통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천안함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천안함 폭침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10년 11월 23일 북한은 연평도 포격을 감행했다. 이날 북한은 대낮에 포탄 170발을 인천 옹진군 연평도에 쏟아부었다. 졸지에 포격을 당한 연평도는 해병대원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이 전사하였으며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가 생겼다. 가옥도 많이 파괴됐다. 연평도는 섬 전체가 불타고 주민들은 연평도를 탈출하는 엑소더스의 현장이 됐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6·25전쟁 이후 우리 영토에 북한이 포를 쏜 첫 사건이었다.
68. 삼성전자, 세계 최대 전자회사 등극 (매출액 기준)(2010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제품박람회(CES2010)를 둘러보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삼성전자는 2010년 매출액 기준 세계최대의 전자회사로 등극했다. |
삼성전자는 2010년 1월 29일 2009년 4분기에 국내외 사업장을 합한 글로벌 연결기준으로 39조2400억원의 매출에 3조70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의 2009년 매출은 기말환율(1164.5원)로 환산하면 1170억 달러로, 2009회계연도의 독일 지멘스(1098억 달러)와 미국 휴렛패커드(HP·1146억 달러) 실적을 넘어선 것이다.
삼성전자의 독주는 7년이 지난 현재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는 2017년 3분기에만 매출 62조원, 영업이익 14조5000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에서만 전체 영업이익의 3분의 2가 넘는 10조원 내외를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제조업체로서 차원이 다른 수익을 냈다”고 평가했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삼성전자가 정치 스캔들과 제품 안정성 논란을 겪고도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까지 기업 실적에 대해 이례적으로 ‘세계 최고 제조업체가 된 삼성전자 파이팅’이라는 제목의 격려 논평을 냈다. 2017년 7월 28일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기업인 간 두 번째 간담회에서 문 대통령은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현 삼성종합기술원 회장)에게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의 실적을 냈고, 반도체 라인이나 디스플레이에서 대규모 투자도 하고 있다”며 “항상 삼성이 우리 경제 성장을 이끌어 주셔서 아주 감사하다”고 말했다.
좋은 경영 실적에도 삼성 내부는 대규모 M&A(인수합병)와 반도체 선행 투자 등을 결정했던 이재용 부회장의 부재(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 관련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구속 기소)로 마냥 축제 분위기만은 아니다. 2017년 11월 1일 창립 48주년 행사도 조용히 치렀다. 권오현 삼성종합기술원 회장은 “반도체 호황으로 사상 최고의 실적을 올리는 지금이 오히려 삼성전자의 위기”라고 했다.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은 이 부회장은 항소했다.
69. 세월호 침몰(2014년)
2014년 4월 16일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 사고 당시 미흡한 대처와 설득력 있는 소통 부족 때문에 비난 받은 박근혜 정권은 남은 기간 내내 이로 인한 정치적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2014년 4월 16일, 단원고 학생들은 벚꽃 길 따라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벚꽃이 활짝 피고 졌어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몸짓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무수히 많은 “사랑해”라는 말들을 가슴에 묻고 컴컴한 물속에서 생을 지워야만 했다. 476명을 태운 연안 여객선이 통곡의 바다로 잠겨 드는 장면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면서 시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귀환을 기도했던 전 국민의 간절한 바람은 이 사회의 안전 불감증과 시스템 부재, 직업윤리 상실을 향한 격분으로 향했다. 무리한 선박 출항·증축·과적과 이를 초래한 관리 부실, 해경의 초기 대응 실패와 거짓 해명, 당국과 일부 언론의 ‘전원 구조’ 오보에 이어, 맨발에 팬티 바람으로 먼저 도피한 이준석 선장의 탈출 장면에서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종인 알파잠수공사 대표의 ‘다이빙벨’ 현혹과 민간 잠수부를 자처한 한 여성의 허위 인터뷰,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현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의 대리기사 폭행사건, 세월호의 실질적 선주(船主)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추적에 막대한 인력을 쏟고도 결국 시신이 된 그를, 그것도 주민 신고로 발견하는 등 유족과 시민 마음을 멍들인 장면이 속출했다.
절망 속 희망과 미담은 위안이 됐다. 제자들을 탈출시킨 남윤철·최혜정 교사, “선원은 맨 마지막”이라며 학생들을 대피시킨 박지영 승무원, 아내에게 “아이들 구하러 간다”던 양대홍 사무장은 숭엄한 인간애를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나갔다. 참사 후 100일간 자원봉사자 5만여 명이 실종자 가족을 묵묵히 도왔다. 7월 17일 광주에서 실종자 수색 지원 후 복귀 중 헬기 추락 사고로 소방관 5명이 사망했다. 수색 작업 중 숨진 민간 잠수부 고(故) 이광욱씨는 의사자로 인정됐다. 팽목항을 지키며 자신을 외면했던 희생자 가족과 끝내 악수한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은 진심 어린 소통의 힘을 증명했다. 세월호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295명이었다.
70. 박근혜 탄핵(2017년)
2016년 ‘최순실국정농단사태’는 전국적인 촛불집회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그리고 문재인 정권 등장으로 이어졌다. |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21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가 시작된 지 21분 만에 이정미 헌재 소장 권한대행이 이런 주문(主文·결론)을 읽자 심판정 여기저기서 ‘아’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박 대통령 측 이동흡(전 헌법재판관) 변호사와 채명성 변호사는 상기된 얼굴로 서류를 챙겨 심판정을 빠져나갔다. 이중환 변호사는 선고가 끝나고 나서도 3~4분간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다가 말없이 퇴정했다. 탄핵의 도화선은 ‘최순실 게이트’였다. 최순실 게이트는 최순실의 측근이었던 고영태가 그와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최씨의 국정 농단을 언론과 검찰에 폭로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10월 25일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과 관련해 제1차 대국민 사과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연설문 작성에서 최순실씨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분노한 여론과 정치권은 “박근혜 탄핵”을 외쳤다. 국회의 탄핵 소추는 검찰의 공소장에 바탕을 뒀다. 국회는 자신이 설치한 특검과 청문회의 조사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소추하는 비논리적 행태를 보였다. 그럼에도 탄핵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실망하고 분노한 여론의 힘이 컸다. 하지만 현재까지 진행된 상황을 보면 최씨 비리를 처음 언론에 폭로한 고영태는 사익(私益)을 노린 ‘기획 폭로자’일 가능성이 크다.
파면된 박 전 대통령은 2017년 4월 31일 새벽 4시45분 서울구치소에 구속·수감됐다. 이후 치러진 조기 대선(5월 9일)에서는 ‘적폐 대청소’를 부르짖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승리했다. 대선 기간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을 막는 것은 “부패 기득권 연장이자 촛불 민심 배신”이라고 했다. 친노(親盧) 좌장이라는 이해찬 공동선대위원장은 “극우 보수세력을 완전히 궤멸” “쭉 장기 집권”을 언급했다.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 과제 중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을 맨 위에 올렸다. 시대적으로 적폐청산은 필수긴 하지만 특정 세력에 대한 응징이나 보복이라는 지적도 있다.
첫댓글 조선이 역사를 감별하나요~
그러게나 말입니다..저분 보니까 시리즈로퍼오네요..부디 7편 8편까지는가지않기를...
거짓으로 그려진 역사가 너무 많네요 ㅜㅜㅜㅜ
김현희 북한사람 아닌 증거가 차고 넘치고,,,,,, 노태우 바로 당선됨,,,,,,,, 이걸 일본 기자가 너무 이상해서,, 취재, 그 기자 쫒겨나고,,, 니미,,,,,, KAL기에 탄 사람 다 죽고, 소련은 아니라고 하고, 미국은 다아는데 입에 자꾸 채우고, 정말 지옥이네,,,,,,,,,
세월호때 애들 구했으면 진짜로 박근해 편 들어 줫다 , 암만 국정농단 했어도,,,,,,,,, 미친 마녀 같으니라고,,,,,,,,,,, 우리나라 근대사 너무 처절하네요.
미국에 전문가들도 다 아니라고 하는 천안함 에효 지친다 지쳐,,,,,,,,,,, 제발 역사가 다시 정의를 찾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