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6일(화)
* 시작 기도
주님...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나이다.
내게 하늘의 생수를 부어주옵소서.
빈들에 마른 풀들이 비를 갈급해 하듯, 내 영혼이 주의 은혜의 소낙비를 갈망하오니 오늘도 주의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옵소서.
내 안에 작은 죄, 털끝만한 죄성이라도 주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주시고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하소서.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공의 앞에서는 살아날 자가 없음을 압니다.
허나 그 공의로 인하여 임하는 심판은 결코 나를 죽이는 진멸이 아니라 살리는 징계이오니 그 안에서 아들의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하소서.
날마다 주의 날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연합하는 주의 날이 되게 하소서.
모든 주의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말씀으로 기쁨을 누리는 영생의 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고전 9:1-10
제목 : 내가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 나의 묵상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사도권에 대하여 공격을 받고 있다.
원래 사도란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로써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당시뿐 아니라 요즘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팽배하게 퍼져 있는 사도권에 대한 생각은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을 함께 지낸 제자들을 사도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사역은커녕 오히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방해하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등 예수님과 반대되는 행동만 했을 뿐이다.
이런 연유로 바울은 가는 곳마다 대부분 이 사도권에 대해서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사도라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표현하였다.
비록 육신으로는 예수님을 만나거나 함께 일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만나고 보았다.
(행 9:3-5)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리고 그로부터 직접 복음의 계시를 받기도 하였다.
(갈 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는 내가 사도가 아니란 말이냐? 예수 우리 주님을 보지 못하였단 말이냐? 그런 소리를 하지 말 것은 내가 주안에서 복음을 전하여 얻은 복음의 열매가 바로 너희들이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2절에서는 내가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너희들에게만큼은 분명히 사도인 것은 나의 사도됨을 주안에 있는 너희가 인정해 주지 않았느냐고 강변하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먹고 마실 권리가 있으며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 곧 예수님의 동생들이나 베드로와 같이 믿음을 가진 여인과 결혼할 권리도 있다.
어찌하여 바울 자신과 바나바만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가?
우리도 일하지 않을 권리뿐 아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렸으므로 대신에 너희가 가진 육신의 것을 얻을 권리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군인은 자기 돈을 내고 복무를 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에서 그 비용을 다 대준다.
또한 어떤 사람이 포도를 심어놓고 그 포도를 따먹지 않겠으며 누가 양 떼를 기르면서 그 젖을 먹지 않는단 말이냐?
내가 이것을 말하는 것은 사회의 법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도 기록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 25: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소를 위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가는 사람은 소망(hope)을 가지고 갈 것이며 곡식을 떠는 자 역시 곡식을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떨 것이다.
너희들과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너희들에게 이런 사도권을 가졌다면 우리야말로 너희들에게 이런 권리가 있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는가?
그 이유는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스승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본문 1b)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않는 이유가 있다.
혹여 이 권리를 쓰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이 복음전도를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하였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사도됨은 창세전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의한 것임을 천명한다(딤후 1:1, 11).
사도는 다른 것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왜냐하면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요,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반드시 보내신 이가 있다는 말인데 그 보내신 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하면서 첫 인사를 한다.
이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사도권에 대한 공격을 받은 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득이 된 셈이다.
그것은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상식선 안에서는 육신의 예수님과 함께 사역하지 않은 바울은 사도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았기에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도권을 변호하기 위하여 그것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대변할 수 있는 자료를 모아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할 수 있는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사도에 대한 일반적인 사고는 육신의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 3년을 함께했던 제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하면 "저 사람은 이단 아냐?" 하면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굉장히 컸었다.
자기가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어?
예수님 시대에 살지도 않았으면서 말야, 하면서 그 사람을 판단하고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난도질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무식한 자임을 나 스스로 떠들고 다닌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음을 나중에 복음을 알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사도는 분명 ‘보냄을 받은 자’로써 아포스톨로스이다.
또한 사도는 예수님을 본 자여야 한다.
바울은 12명의 제자들처럼 직접 육성으로 파송을 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육신의 눈으로 직접 예수님을 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계시를 통하여 복음을 직접 들었고 소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할 때 소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로 가라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유럽으로 그 방향을 틀기도 했었다.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행 9:3-6절).
그러니 누구라서 그를 가리켜 감히 사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나 바울은...’ 하면서 자신의 사도됨을 천명하였다.
이와 동일하게 오늘을 사는 나 역시 사도임이 분명하다.
물론 이런 신학적인 변론에서 살짝 비켜가기 위해서 이전에는 '사도적 사명을 가진 자'라고 했었다.
물론 이 말도 맞다.
그렇다고 나를 사도라고 하는 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이유는 나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주님의 보냄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육신의 예수를 직접 뵈옵지는 못했지만, 오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만나서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함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만큼 깊은 만남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나도 역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선포자요 사도요 교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이런 것을 가지고 신학적인 변론을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내가 사도이든, 사도적 사명을 가진 자이든 상관없이 나는 주님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이 땅에 사는 것이 나의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창세전 언약에 의해서 생명의 약속대로 아들의 생명을 받은 자이다.
그래서 내 안에 이 생명이 있기에 그 생명이 나를 이끌어감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육신의 연약함이 때때로 나를 넘어지게도 하지만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파레시아로 일어나 아버지 품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그리고 만나는 이들마다 전하는 십자가복음과 장사복음 그리고 부활복음이 생명이 되어 그들의 삶에서 새 생명으로 변화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가 되기를 바란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은혜는 과연 크고 놀랍습니다.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심은 곧 소를 위함이 아니요 오늘 나를 위함임을 믿습니다.
비록 불확실성의 미래로 인하여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씀으로 성령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면서 이 마음이 맑게 개이게 하심은 주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사도이든 사도적 사명을 가진 자이든 그런 사전적 의미에 얽매이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보내신 자답게 죽는 날까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손목골절 치료를 위하여 잠시 한국에 들어가 있는 신집사님을 붙들어 주시고 주의 은혜가 충만하게 하소서.
육신의 약함이 오히려 주님의 강하심을 경험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집사님의 큰아들 준혁이가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들이 눈에 보이는 결혼식에만 마음을 빼앗기는 자들이 아니라 결혼의 실체인 신랑 되신 예수님과의 교제와 사귐에 더욱 애쓰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