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신데렐라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누군가가 나타나 그의 운명을 바꾸어 주기엔 그가 가진 자아가 퍽 단단하다. '박찬욱이 선택한 배우'라는 후광을 입고 〈아가씨〉로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부터 김태리는 만만치 않았다. 제작보고회나 시사회, 칸 영화제 시상식처럼 이목이 쏠리는 자리에서는 낯을 가렸지만 스크린 안에서는 누구보다 활기찼다.
묘령의 아가씨와 함께 체제의 전복을 꿈꾸는 〈아가씨〉의 숙희도, 동시대의 민중과 함께 광장에 선 〈1987〉의 연희도 그렇게 탄생했다. 이들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 인생을 단박에 바꾼다는 면에서 '신데렐라'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동시에 신데렐라 스토리를 배반한다. 숙희도, 연희도 이들이 삶을 향해 돌진하게 되는 계기는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김태리는 자신이 연기한 숙희나 연희가 자기와 닮았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함부로 휘둘리진 않지만 한번 결정하면 무섭게 돌진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1987〉의 연희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느냐'고 비관하는 인물이다. 길에서 시위가 있으면 일부러 돌아가는 학생이고, 저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가족은 어떡하느냐'고 되묻는 인물이다. 〈1987〉은 작게는 '87학번 연희가 1987년을 살면서 겪은 이야기'다. 그리고 연희는 결국, 달라진다.
"세상을 보는 관점은 저도 연희처럼 비관적이었어요. 세상이 달라질까에 대한 회의를 넘어서,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리라는 어두운 생각을 하고 있었죠. 2016년에 저는 촛불이 켜진 광장에 있었어요. 뭔가를 해보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답답함' 때문이었어요. 〈1987〉을 촬영하면서 '어쩌면 세상은 더 좋아질 수도 있다'는 조그만 희망이 생겼어요. 아마 그런 희망이 없었던 게 아니라 마음 한구석에 미뤄 놨었나 봐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연희가 버스 위에서 올라서서 느낀 마음도 다르지 않을 거예요."
〈1987〉을 만든 장준환 감독과의 첫 만남을 복기해달라고 하니 특별할 것이 없었다고 했다. 장준환 감독은 김태리라는 사람에 대해 많이 물었고, 김태리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고 한다. 김태리에게는 '무언가 단단한 고집이 있어 보였다. 그게 연희와 잘 맞았다'고, 훗날 장준환 감독은 말했다.
연희의 만화 동아리 vs 김태리의 연극 동아리
대학에 입학하면 누구나 그렇듯 동아리에 기웃댄다. 87학번 연희도, 08학번 김태리도 마찬가지였다. 연희는 시위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선배의 권유로 만화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다. 김태리 역시 우연히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 우연한 만남은 두 사람의 인생에 분기점이 된다.
"연희만큼 드라마틱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저 역시 동아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결국 제가 연기하게 된 것도 연극 동아리에 들어간 게 계기가 됐으니까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것만큼이나 연출을 하고 스태프를 하는 과정도 재밌었어요."
대학교 졸업 후 극단에 들어간 김태리는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이때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도 병행했는데, 도넛 가게부터 편의점, 신문사까지 가리지 않았다.
"그때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걸 배웠죠.(웃음) 제가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아서 기본적인 예의범절과 눈치는 있는 것 같아요. 어른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아르바이트의 영역은 신인 가수의 뮤직비디오 출연, CF 출연으로까지 확장됐다. 그러던 중, 〈아가씨〉의 오디션 공고가 났다. 1500:1의 경쟁률을 뚫고 김태리가 발탁됐다. 당시 박찬욱 감독은 김태리를 두고 '기존에 없던 방식으로 연기를 한다'고 했다.
"〈아가씨〉를 할 때 그렇게 긴장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저는 처음이고, 신인이니까 부족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부족한 걸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모르는 건 물어봐야 한다고 여겼고요. 부담이라는 게 생긴 건 오히려 〈아가씨〉 이후예요. 이제는 모른다고 해서도 안 되고, 실수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1987〉은 그에게 고마운 기회였다.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강동원 등 내로라하는 선배들이 함께하는 자리였고, 이들이 쌓아 올린 하모니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 되는 역할이었다.
"강동원 선배와 호흡을 맞추면서 정말 놀랐어요. 특별 출연인데도 엄청난 준비를 해 오더라고요. 그 시대와 관련된 책은 다 독파하신 것 같아요. 말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정말 학구파라고 느꼈죠."
강동원이 맡은 이한열은 연희의 삶 안에 들어와 그를 각성으로 이끄는 인물이다. 연희는 그를 만나고 그의 마지막을 알게 된 후로, 이전처럼 '연희네 슈퍼'에서 신문을 정리하고 양초를 꽂는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됐다.
"연희가 골목길을 달려서 광장으로 향하는 장면은 '사랑'이나 '각성'이라기보다는 나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었을 거예요. 제가 2년 전에 느꼈던 그런 마음이겠죠."
하고 싶은 일 vs 해야 하는 일
평소의 김태리는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듣고 팟캐스트를 듣는다. 게임에 열중하기도 하고, 얼마 전부터 데려다 키우고 있는 유기묘를 온종일 보기도 한다. 사람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고양이들도 제각기 다른 걸 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며 그는 눈을 반짝였다.
"누군가에게 주목받고, 관심받는 일을 썩 즐기는 편은 아니에요. 그런 자리에 서면 몸이 굳죠. 친한 분들은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제가 또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랑, 해야 하는 일을 할 때랑 표정이 완전 다르거든요.(웃음)"
김태리는 원하지 않았지만, 그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례적인 주목을 받았다. '충무로의 신데렐라'라고 불릴 정도로 드라마틱한 등장이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신데렐라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다. 누가 가져다주는 유리구두를 신고,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기보다는 등산화를 질끈 묶고 산에 가기를 즐기는 인물이다.
〈1987〉에서 신발을 한 짝 잃어버려 난감한 상황에 빠진 한열(강동원)에게 신발을 선물하는 게 연희라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하나의 작품이 마치면 거기에 빠져 있기보다는 '끝나면 끝난 것'이라 생각하고 쿨하게 돌아서는 인물이기도 하다. 〈1987〉을 지나 이제 그의 차기작인 영화 〈리틀 포레스트〉와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기다리고 있다. 이 단단하고 씩씩한 배우가 들려줄 다음 이야기가 무엇이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영화 <1987> 메인 예고편. /CJ Entertainment Official 유튜브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