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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27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음란이나 부정 사욕 그리고 악한 정욕과 탐심 등 우리 안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하셨는데 나는 이런 지체들을 모시고 사는 자입니다.
더욱이 탐심은 우상 숭배라 하셨건만 겉으로는 우상 숭배를 지독히도 싫어하면서 이를 공공연히 즐기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이런 나는 주의 공의로 심판 받아 마땅히 죽어야 할 자입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나를 살려두신 것은 주님의 지극하신 사랑이요 은혜임을 믿사오니 내가 여기서 돌아서게 하소서.
나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긍휼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옵소서.
오늘 이 시간, 나는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기 원하오니 나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게 하소서.
나는 연약합니다.
약할 때 강함되시는 주님을 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고전 9:11-18
제목 :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일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 나의 묵상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과 주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일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써의 권위가 있어야 복음을 당당하고 자신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린도 교회에 전한 복음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됨을 확증해준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가 되는 것이 곧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 곧 복음의 열매가 바로 너희들이라고 천명하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임에도 그는 신령한 것을 뿌리고 육적인 것을 대가로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자비량으로 사역을 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성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제단을 섬기는 이들은 제단에서 거두어진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상식이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눅 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바울이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렇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하고 급기야 눈물을 보이며 말끝을 흐린다.
그러다가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의 이러한 자랑이 사탄의 손에 빼앗기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더구나 내가 복음을 전하는데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은 내가 전하는 일이면 나의 자랑이 되겠지만 이 복음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오히려 내게 화가 미칠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내가 내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이 복음을 전하면 내가 세상에서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자의로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이 복음전도자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받을 상이 무엇이겠느냐? 내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값없이 전한 것과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주어진 권리를 다 쓰지 않은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2,000년도에 늦깎이 전도사가 되어 사역을 처음 시작하고 심방을 갔을 때 심방을 받는 가정에서 봉투를 하나 준비해서 나에게 주었다.
봉투를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때 집사님께서 하는 말이 전도사님 책이라도 사서 보세요, 하는 것이다.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아, 심방을 다니면 이런 부수입?이 생기는 구나.
부목사 때는 외부로 나가서 설교를 할 기회가 가끔씩 생긴다.
그럴 때면 의례히 얼마나 줄까? 하는 탐욕이 내 마음에 슬며시 고개를 들면서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일수를 받으러 간다는 생각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돈을 받고 파는 장사치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런 일이 양심의 가책도 없이 지속되다가 어느 날 나에게 커다란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넌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사례를 받으면서 왜 헌신예배 한다고 따로 돈을 받고 또 외부에 나가서도 돈을 받느냐는 성령님의 책망스런 음성이 내 심령을 때렸다.
나는 그 후로 어디에 가더라도 설교의 대가로 주는 사례는 절대로 받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받는 것보다 안 받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주는 봉투를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넣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주는 봉투를 극구 사양하기까지는 그야말로 피를 흘리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때는 사례비를 안 받으려고 몰래 도망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웬걸 한참 오다보니까 전화 한 통이 걸려와서 받으니까 지금 어디냐고 따라가고 있다고 하는 것 아닌가?
돈봉투를 주기 위해서 도망나온 나를 끝까지 추격해서 주고 가는 그런 열성파도 보았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나는 복음을 전하면서 담임목사로서 교회로부터 전적으로 사례를 받아 생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는 사례를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내가 부득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눅 17:7-10)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설교도 무엇을 전하느냐가 정말 중요하다.
청중이 듣기 원하는 설교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전하기 원하시는 복음을 전할 것인가?
물론 그 결정은 설교를 하는 목사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도나 청중이 원하는 은혜가 되는 설교, 감미로운 설교, 위로 설교, 감동을 주는 설교를 통해서 청중의 마음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면서 자신의 설교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한다.
내가 복음을 알기 전에는 내가 바로 그런 자였었다.
이 책 저 책을 섭렵해서 이건 성도들에게 좀 들려주면 은혜 받겠다고 생각되면 스크랩을 해서 그걸 전한다.
때로는 본문과 전혀 맞지 않는데도 그저 은혜가 된다는 이유로 그 이야기를 해서, 우리 목사님 정말 설교 잘 한다는 말 한 번 듣는 것이 설교자로써 작은 소망 아니던가?
나 역시 복음을 온전히 모를 때는 끊임없이 이런 유혹을 받았고 또한 그것을 이겨내지 못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람의 평가와 그들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일희일비했던 자가 바로 내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복음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어떤 경우도 성도들 곧 청중들이 원하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주님이 전하기 원하시는 복음만 전할 뿐이다.
주님이 창세전에 하신 약속인 생명의 약속과 창세전 언약인 영생에 대하여 전한다.
생명과 영생은 같은 말이다.
이 생명은 육신의 생명 곧 아담의 생명이 아니라 아들 안에 있는 생명 곧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을 얻는 방법은 멋지고 화려한 미사여구로 잘 짜여진 그런 질이 좋은 설교가 아니다.
좀 투박하고 거칠며 정제되지 않았을지라도 온전한 복음, 나아가 원색적인 복음만이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사망 곧 십자가와 장사와 같은 무덤복음을 통하여 승리를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우리에게 새 생명인 아들의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3A(Appearance 보란듯한 모습, Achivement 성공, Affluence 윤택 부요함)는 세상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보란듯하고 성공해야하며 그것을 통해서 부요하고 윤택한 삶을 살기 원하는 것을 곧 3A라 한다.
이것은 신앙 안에도 나아가 목회자 안에도 얼마나 많은 유혹의 손길이 뻗치는지 모른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남들 보기에 보란듯한 직장과 자녀들, 예수 믿으니까 남들보다 더 멋지고 잘 살아야 된다는 생각, 예수 믿으니까 내가 하는 사업은 반드시 성공해야 된다는 것, 예수 믿으니까 사업에 성공해서 부자로 살아야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3A이다.
또한 나와 같은 목회자들은 어떤가?
목회가 보란듯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배당이 작고 성도의 숫자가 적으면 그것은 목회에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남들 보기에 부끄러워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교인 숫자를 늘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일단 교회의 교인이 많아야 남들 보기에 보란 듯 하기 때문이다.
교인이 많으면 재정도 튼튼하게 될 것이고 재정이 튼튼하면 작은 예배당도 크게 지을 수 있어서 그런 사람은 보란듯하고 목회에 성공하며 그 성공으로 부요와 윤택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목회적 삶이 거의 대부분 목회자들의 로망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주님은 갈릴리 시골출신 제자들이 모처럼 예루살렘에 와서 어마어마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자랑할 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이 성전이 무너져서 돌들이 돌들 위에 하나도 첩 놓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이미 그때부터 주님은 건물 성전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성전이요 또한 성령님이 거하시는 우리의 몸이 성전이며 이런 공동체가 성전임을 천명하셨다.
(마 24:1-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
(요 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후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 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이나 보란 듯한 것이 아니라 속사람의 건강함이다.
곧 아들의 생명이 거하는 그 자리가 곧 성전이요 건물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상 예배당을 크게 지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목회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 하는 기준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기준은 오직 주님께만 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로써의 사명을 가지고 아들의 생명을 얻도록 하는 그 자리가 바로 성전임을 깨닫게 하는 이 아침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 비록 육신의 정욕으로 넘어지고 또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은 내 안에 당신의 생명 곧 아들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한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으려 하지만 이제는 그것에 넘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보혈의 능력이 그것보다 더 크고 강하며 담대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사요 선교사로써 무엇을 하든 오직 주님의 뜻을 전하는 복음선포자가 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시며 복음의 교사로써 넉넉히 영혼을 주님께 올려드리는 그 일에 매진하게 하소서.
나의 힘이 되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곳 베트남 하이퐁에서 아주 작은 한인 목회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자랑하려면 부끄럽기 짝이 없고 위축되지만, 좀전에 고백했던 것처럼 참된 복음은 겉으로 드러나는 3A가 아님을 아오니 작은 목회여서 오히려 감사합니다.
나의 약함이 오히려 주님의 강함이 되게 하소서.
주님을 송축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