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이야기 II] 가을 깊어지기 전에 놓치지 말아야 할 우리 식물
[2010. 8. 23]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의 곡식이 줄어든다”는 속담을 생각나게 하는 처서 아침입니다. 그저 속담일 뿐이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리 얄궂게 꼭 처서에 맞춰서 비가 내리는지요. 그래도 무더위 끝에 내리는 비여서 꽤나 반가운 비입니다. 게다가 이 비 그치면, 무더위도 한 풀 꺾인다니, 더 그렇네요. 폭염 끝에 맞는 빗방울은 곡식이 줄어든다는 속담 있지만, 그래도 이 비는 반갑기만 합니다.
‘참 더웠던 여름’이라고 과거형으로만 쓰고 싶은 여름도 이렇게 흘러갑니다. 비 온다는 소식으로 지난 밤부터 비에 젖은 연꽃 송이가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일찌감치 행장을 꾸려 들고 나서면서부터 벌써 빗 속의 숲이 그리워집니다. 토독 토독 토도독! 널찍한 연잎 위에 듣는 빗방울 소리 따라 오늘도 수목원 숲 속 조붓한 길 위에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가만히 내려놓으렵니다.
누구에게 으스댈 생각 없이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듬성듬성 피어난 연꽃 곁으로 가시연꽃(Euryale ferox)이 하나 둘 꽃봉오리를 피워올리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해를 사랑하는 가시연꽃이어서,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보랏빛 꽃잎을 오므리고 하루를 납니다. 맑은 날이라 해도 이른 아침에 꽃대를 삐쭉 내밀고 햇살을 탐색하다가 햇살 충분해져야 가만히 꽃잎을 열지요. 그러나 그것도 잠깐입니다. 다시 동산에 해 걸릴 즈음이면 수줍게 꽃잎을 오므립니다.
물 위에 점잖게 떠있는 가시연꽃의 잎사귀는 널찍해서 시원스럽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잎사귀 표면이 쭈글쭈글하여 조금은 징그럽다는 느낌도 들지요. 가시연꽃의 다 자란 잎은 둥그런 원형이지만, 처음에는 타원형으로 납니다. 자라면서 차츰 콤파스를 대고 그린 듯한 동그랗게 커지는 겁니다. 크게 자란 잎은 한 장의 지름이 2미터에 이를 만큼 큽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식물 가운데에 큰 잎을 가진 식물에 속합니다.
잎사귀의 양면에 선명한 잎맥에 가시가 돋아있는 것도 가시연꽃 잎사귀의 특징입니다. 물 속에 감추고 있는 아랫 면에는 가시가 더 많습니다. 아직 덜 펼쳐진 잎사귀가 그 속내를 드러냈네요. 촘촘히 돋아난 가시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가시연꽃의 꽃송이는 일쑤 이 성난 가시로 무장한 잎사귀를 뚫고 올라옵니다. 꽃대가 올라와야 할 자리까지 넓은 잎으로 덮은 까닭이지요. 어떤 분은 가시연꽃의 이같은 생명력이 지나치게 탐욕스럽거나 전투적이어서 정이 안 간다고도 하십니다. 꽃송이에까지 억센 가시로 중무장한 채이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수련과에 속하는 가시연꽃은 중국 대만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만 자라는 한해살이 수생식물입니다. 개체 수가 줄어들어 현재 환경부에서 멸종위기식물 2급으로 지정해 보호하는 식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중남부의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이지요. 요즘은 자연 상태에서 저절로 자라는 가시연꽃을 보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 됐습니다. 우리 수목원처럼 보존을 위해 심어 키우는 곳에서 볼 수 있는 게 대부분이지요.
빗방울을 잔뜩 머금은 오구나무(Sapium sebiferum)의 잎사귀는 잎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반짝입니다. 연두 빛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오구나무 잎을 그냥 초록의 잎이라고 하기에는 좀 여린 빛깔입니다. 여느 나무의 초록 잎에 비해 더 얇아 보이기도 하고요. ‘투명한 초록’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맑은 날에도 오구나무의 여린 잎은 눈길을 끕니다.
이 잎사귀가 새의 부리, 새 중에서도 까마귀의 부리를 닮았다 해서 까마귀 오(烏)자와 입 (口)자를 써서 오구나무라고 합니다만, 비슷해서 자주 혼동하는 새 조(鳥)자를 써서 조구나무라고도 부릅니다. 절구를 뜻하는 구(臼)자를 쓴 우리 옛 문헌도 있지만,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이름이지요. 많은 분들이 오구나무라고 부르기는데,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조구나무’로 돼 있어서 헷갈립니다. 바로잡았으면 싶은 식물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의 식물을 놓고 지방마다 부르는 다른 이름을 여럿 가지고 있는 경우가 드문 게 아니어서, 그냥 오구나무의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로 가벼이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비슷한 한자를 잘못 본 실수로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찜찜한 느낌이 들어요. 우리 수목원의 표찰에는 오구나무로 표기했고, 또 제가 가진 도감 가운데 기준으로 보는 이창복 선생님의 도감에도 오구나무로 돼 있습니다.
저 역시 자주 헷갈립니다만 대개는 오구나무로 부릅니다. 오구나무를 영어 문화권에서는 Chinese Tallow Tree, Vegetable-tallow라고 부릅니다. 그건 오구나무의 열매의 특징에 기대어 지은 이름이지요. Chinese Tallow Tree라고 한 것은 이 열매의 과육에 식물성 수지를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구나무의 열매로는 양초와 비누를 만든다는 거지요. 거기에 오구나무의 고향인 중국을 표기하기 위해 Chinese Tallow Tree 라고 한 겁니다. Vegetable-tallow 도 같은 이유겠지요. 식물에서 나온 tallow 임을 강조하자는 뜻에서 Vegetable-tallow 라고 한 것입니다.
가을 깊어지면 붉게 물드는 뾰족한 잎은 오구나무를 좋아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노란 꽃이 조롱조롱 매달린 모습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늠름한 줄기가 쭉 뻗어오른 뒤에 넓게 펼친 가지에 무성한 잎사귀들 바깥으로 샛노란 색의 작은 꽃들을 무수히 피어낼 때에는 마치 하늘에서 노란 색 물감이 쏟아져 내린 듯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 노란 꽃이 떨어지고 나면 조그마한 열매가 맺힙니다. 위의 사진은 제 사진 창고에서 끄집어낸 겨울 사진입니다. 양초나 비누를 만드는 데 썼다는 바로 그 열매이지요. 겨우 1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작은 크기의 열매는 잎사귀를 닮아 끝이 뾰족하지만, 얼핏 보면 조그마한 구슬 모양입니다. 열매의 껍질은 밝은 회색 쯤 되지만, 다 익어서 껍질이 벌어지면 그 안에서 하얀 씨앗이 드러납니다. 낙엽 진 뒤 앙상해진 가지에 동글동글 남아있는 열매는 늦가을에 오구나무를 바라보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구나무의 줄기 모습입니다. 줄기는 처음에 평평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사진에서처럼 세로로 골이 생깁니다. 오구나무는 약재로도 요긴하게 쓰이는 나무입니다. 저 줄기 껍질과 뿌리 껍질을 한방에서는 오구목근피(烏口木根皮)라고 부르는데, 특히 살충과 해독이 뛰어난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전신부종을 내리고 옴에 옮았을 때에나 버짐을 치료하는 것처럼 피부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줄기 껍질 뿐 아니라, 오구자(烏口子)라고 부르는 씨앗이나, 오구엽(烏口葉)이라고 부르는 잎도 약재로 많이 씁니다. 씨앗은 기생충을 구제하고 오줌이 잘 나오게 하기 위해서나 피부 질환 치료에 효과가 좋다고 하네요. 또 잎사귀는 피부질환이나 소화를 촉진시키는 데에 요긴하게 쓰인답니다. 특히 오구나무 잎은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 등 고기를 먹고 체했을 때에는 특효라 합니다.
쓰임새가 좋아서 많은 곳에서 키우고 있다고 하지만, 오구나무는 관상수로 많이 심어 키우는 나무입니다. 전체적인 생김새가 좋을 뿐 아니라, 꽃 필 때, 열매 맺혓을 때의 아름다운 풍경에 더 큰 가치를 둔 것이지요. 우리 수목원의 오구나무는 큰 연못과 작은 연못 사이의 길 모롱이에 서서 스쳐 지나는 사람들이 한번 쯤 쉬어 가게 하는 노릇을 하는 듬직한 나무입니다.
아. 참. 지난 편지에서 작은 꽃 이야기를 하다가 닭의장풀(Commelina communis) 이야기를 오늘로 미뤄놓고 아직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네요. 작지만 볼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물입니다. 청초한 푸른 색 꽃이 더 없이 예쁘지만, 지천으로 깔린 탓인지, 돌아보는 이 별로 없는 풀입니다. 닭의장풀 꽃이 흔하다 했지만, 꽃이 피어있는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피었다 싶으면 곧 지고 마는 그야말로 순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식물입니다.
그래서 닭의장풀 꽃을 하루살이 꽃, 영어로도 Dayflower 라고 부르지만, 하루는커녕 고작해야 해 드는 낮 몇 시간이 그 꽃이 살아있는 전 생애입니다. 그리 ?F은 순간만 꽃을 피우는 건, 이 꽃이 자가수분을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꽃봉오리 상태에서 이미 꽃가루받이를 마치기까지 한답니다. 그러니 꽃을 피우고 나서 할 일이 없는 거지요. 할 일을 다 마친 꽃인데다 돌보는 이 없는 닭의장풀 꽃은 미련없이 피어나자마자 곧 시들어 떨어지는 겁니다.
그리 허무하게 지는 꽃이 왜 이리 화려하게 피어나는지요. 꽃 중에 가장 드믈다 싶은 파란 색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이 파란 색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인터넷 업체에서 실제로 조사한 결과라고 합니다. 실제로 초록이 짙은 숲 속의 길섶에 피어난 닭의장풀 꽃의 푸른 색은 언제라도 그 화려함에 눈길을 모으게 됩니다.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자라는 닭의장풀을 옛날에는 나물로 무쳐 먹기도 했습니다. 또 여느 풀들처럼 약재로도 쓰였지요. 푸른 색깔 때문에 천연염색의 재료로 쓰이기도 합니다. 닭의장풀이라는 이름보다는 ‘달개비’라는 이름으로 더 친근한 풀이지 싶습니다. 닭의 벼슬을 닮아서 달개비고, 닭장 근처에서 자라기 때문에 닭의장풀이라고 부른다지만, 닭장 없는 곳이어도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지천으로 피어나는 우리 토종식물입니다.
꽃 모양이 특이합니다만, 내용을 알고 보면 더 재미있습니다. 이 꽃은 꽃받침과 꽃잎이 나눠지지 않아, 그냥 꽃덮이 혹은 화피라고 부르는 부분 가운데 우리 눈에 들어오는 건 두 장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석 장입니다. 파란 색으로 피어난 두 장의 꽃덮이 아래 쪽으로는 흰 색 혹은 반투명한 꽃덮이가 한 장 더 있습니다. 굳이 있어야 할 까닭을 찾기 어려운 한 장의 꽃덮이가 있는 거지요.
이 꽃에 학명을 처음 붙인 린네도 이런 특징을 학명에 반영했습니다. 옛날에 Commelin 이라는 이름을 가진 식물학자가 세 명이 있었다 합니다. 그들 가운데 두 명은 활동과 업적이 뛰어났지만 같은 이름을 가진 한 명은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없었다는 겁니다. 린네는 닭의장풀 꽃의 꽃덮이 석 장을 보면서 그들을 떠올리고 학명을 Commelina 라고 했다는 겁니다.
중국의 옛 시인 두보는 닭의장풀을 ‘꽃이 피는 대나무’라 하며 아꼈다는 이야기는 이 풀과 관련해 잘 알려진 이야기지요. 작은 꽃 속내에 담아둔 이야기는 많고 많습니다. 가만히 고개를 수그리고 쪼그려 앉아 파랗게 피어난 닭의장풀 꽃을 들여다보면 그 많은 이야기가 하나 둘 살갑게 들려올 겁니다. 가을 깊어지기 전에 우리 곁에서 피어난 닭의장풀, 달개비 꽃 다시 한번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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