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동쪽에 송동이라 불린 마을이 있었습니다.
송시열이 살던 마을로 유명하지만, 이곳에 조선시대 말에 북관묘, 즉 북쪽에 있던 관우 사당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관우를 모신 남묘와 동묘가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883년에 진령군의 요청으로 만들어집니다.
진령군은 임오군란으로 인해 충주로 도망쳐온 민왕후의 미래를 맞춘 것을 계기로
민왕후의 총애를 받으며 당당히 궁궐로 들어가 정치를 좌지우지 합니다.
게다가 1884년 갑신정변에서 청군을 피해 도망친 홍영식, 박영교 등 급진개화파는 고종의 요구로
북관묘로 도망치다가 그곳에서 청군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진령군의 영험에 의해 자신이 급진개화파로 부터 살아났다고 여긴 고종은 더욱
진령군을 총애하게 됩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겪은 고종과 민왕후는 진령군의
말에 따라, 민왕후는 자신의 아버지 민치록의 무덤을 무려 4번이나 옮겨 버립니다.
그리고 온갖 굿을 하게 되면서, 민왕후는 엄청난 돈을 낭비하게 됩니다.
경제를 살여야 하는 너무도 중요한 시기에, 진령군의 황당한 말에 의해 조선의 국력은 크게 낭비됩니다.
뿐만 아니라 진령군은 조병식, 이유인 등 악질적인 탐관오리들에게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국정은 더욱 어지러워집니다.
그녀가 천거한 이유인은 조선을 말아먹은 주역으로 등장하지요.
고종, 민왕후, 진령군, 이유인....
요즘 자꾸 저들의 데자뷰를 보는 것 같아서, 정치판이 너무 꼴보기 싫어집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늘 갑갑한 것은
간신들의 천국이었던 중국이나, 매국노 간신배들이 활개찬 조선이나
분탕질한 악당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동안,
그 피해는 모두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늘 입어왔으며,
나라를 다시 살린 것도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노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나라 살림이 나아지면 또 다시 나라를 분탕질한 간신 악당들이
나타나 다시금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입니다.
왜 무당, 간신배들은 끊이지 않고 나타나는 것인지, 이들을 단죄할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첫댓글 저도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글 좀 공유하겠습니다.
네. 공유해도 좋습니다.
고종 부부가 아니라도 조선은 이미 그 이전 세도정치때부터 쇠퇴하는 상황이었고 흥선 대원군의 개혁이 쇠퇴 속도를 늦추기도 해도 서구 근대화에 거스르는등 근본적인 개혁 해결책이 아니었지요 게다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일 양국이 조선의 내정에 개입하면서 특히 청의 간섭과 거기에 부화뇌동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민씨 정권때문에 조선의 쇠망은 예견될수밖에 없다고 보여집니다 흥선 대원군도 보수적인 정치적 자세로 시대 변화를 방해하는 행위로 근대적인 국가발전에 장애를 끼쳤고 나중에 청과 일본을 끌어들여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려고 망국적인 외세의존 정치를 펼친게 흥선 대원군이었지요 조선의 말아먹은건 외세를 자신들의 정치에 끌어들이는 풍조가 크게 작용한 것이지요 구한말 친일파들은 그런 정치적인 풍토에서 자라난 세력들이고 일본은 그 풍토를 이용하여 승자가 되어 식민지배를 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