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통 ‘룸살롱 원정대’ 왜 생겼나…높으신 분들의 깊은 뜻 있었네 [사-연]
한주형 기자 moment@mk.co.kr
입력 : 2023-10-18 19:00:00 수정 : 2023-10-23 14:34:23
강남 개발사를 따라 걷다 (3) [사-연]
‘강남 아파트 공화국’의 기원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 그 중에서도 가장 고가의 아파트가 빽빽하게 밀집해 있는 곳이 서울의 강남입니다. 이곳에 처음으로 지어진 아파트는 무엇이었을까요.
강남에 최초로 등장한 아파트는 영동 공무원아파트였습니다. 1971년 논현동에 12·15평의 소형아파트 12동 360여 가구를 지어 무주택자였던 서울시와 교육위원회, 서울시경 직원들 중 희망자에게 분양했습니다.
논현동 언덕배기에 지어진 5층의 신식 아파트는 인기가 많았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파트를 먼저 지어놓고 개발을 시작했기 때문에, 주변은 상점 하나 없이 모래바람만 날리는 황무지였습니다. 그 시대의 사진을 보면, 허허벌판에 아파트 단지만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한강을 건너고 남산을 지나는 고된 출퇴근길에 지친 공무원들은 불편을 못 이겨 아파트를 되팔고 강북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1960년대 들어 서울로 밀려든 상경민들과 도시빈민들의 주거를 위해 대규모로 시민아파트 건설이 시작됩니다. 평수도 좁고 하층민들이 거주한다는 점에서 아파트는 일반 시민들이 선호하지 않는 주거형태였습니다.
1970년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사건으로 아파트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인식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이 인식을 일순간에 뒤바꾼 것이 이듬해 최고급으로 지어진 여의도 시범아파트였습니다.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며 아파트는 어느덧 중산층이 거주하는 주택의 상징이 되었고, 모두가 꿈꾸는 주거공간의 표상으로 거듭났습니다. (시범아파트와 관련한 내용은 지난 여의도 편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단독주택만으로는 주택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어려웠습니다. 반면 좁은 면적에 많은 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아파트는 당시 증가하는 서울 인구를 수용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주거형태였습니다. 이에 더해 아파트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선호도 증가는 서울의 ‘아파트 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75년 구자춘 서울시장의 제안으로 도입된 아파트지구는 강남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설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지구로 제정되는 곳에는 아파트와 부속 건물만 건립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제도였습니다.
그해 8월 발표된 아파트지구 11개소 중 6곳은 반포·강남·압구정 등 강남에 집중되었습니다. 아파트지구는 영동지구 전체 면적의 약 1/4인 780만㎡(약 236만 평)에 달했습니다. 강남은 대부분이 논밭이었던 만큼 필지가 컸고, 이는 곧 엄청난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아파트지구는 해당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군소 지주들에게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소유한 땅에 아파트밖에 지을 수 없게 되었으니, 소유권을 포기하거나 건설사에 부지를 매각하는 방법뿐이었습니다. 정당하게 땅의 가치를 매겨 대우해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토착 지주들은 울면서 겨자 먹기로 땅을 팔았습니다. 반대로 민간 건설사들은 각종 법적, 제도적 지원을 등에 업고 토지를 염가에 사들이며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건설사가 아니었던 기업들도 이에 뛰어들 정도로 당시 아파트 건설업은 활황을 이뤘습니다.
1970년대 후반 부동산 경기의 과열과 맞물려 논밭이었던 영동지구는 순식간에 고층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합니다. 그 과정이 채 십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강남에 지어진 아파트는 17,108가구였습니다. 이중 압구정동에 4,760여 가구, 대치동에 6,140여 가구가 건설되었습니다.
1980년부터 1985년 사이에도 압구정, 대치, 개포 등에 총 40,319 가구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섭니다. 1985년 서울의 주거형태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은 26.5%였으나, 강남지역은 72.7%나 되어 ‘아파트 공화국 강남’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공공기관과 터미널의 이전
강남 시가지 개발과 함께, 강북에 집중되었던 공공기관의 이주도 시작됩니다. 1975년 서울시는 강남의 도시기능 형성을 위한 각종 사회기반시설의 이전과 건설 계획을 발표합니다. 발표에는 서울시청과 법원·검찰청, 관세청·산림청·조달청 등 2차관서와 한국은행·산업은행·외환은행 등 8개 금융기관의 본점, 총 112개의 기관을 강남으로 이전하는 것이 담겼습니다. 청사가 낡아서 신축이 불가피했거나, 단독 청사 없이 다른 건물에 세 들어 있는 기관들이 계획에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중앙부처와 협의되지 않았던 발표였고, 이전 예산 등의 문제와 함께 관계 공무원들의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결국, 강남으로 이전이 성사된 것은 서소문과 정동 일대에 있던 대법원과 서울중앙지방법원, 검찰청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진행이 지지부진해 10년여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전이 완료되었습니다.
같은 해, 서울시는 강남종합버스터미널 설치계획을 발표합니다. 1970년대 초 서울에는 각종 버스터미널이 여기저기 난립해 있었습니다. 각각의 버스회사마다 터미널을 별도로 운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도심지 내 교통 혼잡의 원인으로 꼽혔고, 정부는 통합된 하나의 터미널을 구상하게 됩니다. 통합 터미널 건설을 위한 연구용역에서 전문가들은 후보지로 서울역 인근과 영등포, 그리고 영동지구 일대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 중 영동지구 개발지의 외곽이었던 반포동 일대가 낙점되었습니다.
부지가 확정된 후, 서울시는 개발이 한창이었던 영동1지구에 반포의 5만여 평을 포함하여 터미널 건설에 박차를 가합니다. 1976년 9월, 공사 시작 5개월 만에 문을 연 강남종합버스터미널은 터미널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상태였습니다. 본 건물 없이 3개의 승차장과 공동정비고만 갖추었고, 편의시설은 없다시피 했습니다. 열악한 시설에 터미널을 이용하려는 승객은 없었고, 정부는 급기야 강남종합버스터미널 이용 활성화를 위해 강북에 있는 터미널을 강제로 폐쇄합니다.
현재의 삼각형 모양 터미널 건물이 완공된 것은 1981년이었습니다. 반포 아파트지구와 터미널에 대해서는 이후 연재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밤마다 영동을 향하는 유흥 행렬
1970년대 서울시 행정의 최대과제는 강북지역의 인구 및 산업의 집중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강북에 모여 있는 인구와 기업체를 옮기고, 각종 시설의 신설을 막아야 했습니다. 1972년 2월, 양택식 서울시장은 기자회견에서 “사치와 낭비 풍조를 막고 도심지 인구의 과밀을 제어하기 위해 종로·중구·서대문 등 도심지에 바·카바레·나이트클럽·대형 술집 등 각종 유흥시설과 숙박업소의 신규이전, 장소이전을 불허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2개월 후 ‘특정시설제한구역’의 발표로 이어지는데, 이 제도에 따라 종로 및 중구 전역, 용산구·마포구의 기존 시가지, 성북구와 성동구의 일부지역까지 포함한 28㎢(840만여평)에서 백화점이나 도매시장, 공장 등의 신규설치가 일절 불허되었습니다.
큰 타격을 입은 강북의 유흥업소들은 재빠르게 발을 옮겼습니다. 중구 다동·무교동을 중심으로 한 유흥주점과 종로구 공평동·인사동 등을 중심으로 한 접객업소들은 강남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강남은 아무런 규제가 없을 뿐 아니라 취득세 등의 세금까지 감면혜주는 혜택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사동과 논현동, 역삼동 일대에 엄청나게 많은 접객업소가 입지하게 된 배경입니다.
순식간에 신흥 유흥가로 변한 영동 일대. 밤만 되면 이곳으로 이전한 단골집이나 신흥 업장을 찾는 ‘밤 문화 원정대’들이 강을 건너왔습니다. 이처럼 저녁 제3한강교(한남대교)에 행렬을 이루는 ‘원정 유흥’은 당시의 신흥 풍속도로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서울시 통계를 살펴보면 지금도 여전히 강남구는 서울 25개 구 중에서 유흥주점이나 단란주점 등 유흥업소의 수가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ㅇ「강남 40년 영동에서 강남으로」, 서울역사박물관
ㅇ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 한울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