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점(店)이라 함은 단어의 뒤에 붙을 때는 상점이나 가게를 말하지만 단어 앞에 붙은 것은 '그릇을 굽던 지역'을 뜻하는 것이다. 점마란 우리가 웃마을 할 때 웃마 하듯이 도자기를 굽던 마을 이란 뜻으로 점마가 되었다가 나중에 점촌이 된 것이다. '옹그'는 옹기를 말 한다.'사기'나 '사그'는 분청사기를 말하는 것이거나 조선 말기에 구워져 막백자로 불린 연질백자를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나 청자나 백자 모두 사기라 불러 틀린 말은 아니다.
백자를 굽든 분청사기를 굽든 아니면 옹기를 구웠든 우리고장엔 이렇듯 도자기에 관련된 지명이 많다.
그 것은 문경이 여주 이천 못지않은 도자기의 고장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경의 찻사발 재현 작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으나 문경도자기의 역사는 현재 체계적으로 복원된 것이 없어 아쉽다.
지금까지의 문헌 조사에서, 어느 역사책에서도 문경에서 도자기가 제작된 것에 대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으며 옛 가마터의 발굴 작업도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2000년 10월의 전대익(문경새재관리소장), 2001년의 박보현(대전보건대학박물관교수)에 의해 실시된 두 차례의 조사에 의해 인곡요(仁谷窯, 동로면 인곡리)에서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를 구운 흔적과 그 도편을 발견했으며 관음리에서 조선중기의 가마터와 생달리의 후기 가마흔적을 발견한 정도이다. 또 문경문화원에서 1995년에 '聞慶의 陶窯史' 를 발간했고 위의 1차, 2차의 조사 보고서를 그 후에 펴낸 것이 전부이다. 또 학계에서조차 이렇다할 논문이 발표된 것이 없다. 다만 문경대학에 도자기학과가 생겼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하겠다.
사서에 언급이 없는 것은 문경에는 대규모의 관요가 없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유적의 흔적이 미약한 것은 아직 제대로 체계적으로 발굴하지 못하고 지표조사에 그쳤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좀 더 대상을 압축하여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상식적으로 조선의 가마는 광주 분원의 유적으로 미루어 볼 때 연료의 공급 문제로 평균 10년 단위로 그 터를 옮겼던 바 가마가 한 두 군데 발견되었다면 그 인근에서 가마의 흔적이 잇달아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도다완의 제작지로 현재는 진주 사천 부근의 남해안 지역을 주목하고 있으나 아직 뚜렷한 증거가 없는 바 문경이라 하여 이도다완의 가마터에서 배제될 수는 없다 하겠다.
문경도자기에도 이도다완의 특징 중 하나인, 청자나 백자를 만들기에는 저급한 태토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다고 생각된다.
문경의 도토 역시 그 질이 좋은 편이 아니라고 평가되고 있고 현재 그런 흙을 사용하여서도 훌륭한 다완을 재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현재 주목받지 못하고 있으며 논거 또한 부족하나 당시의 시대 상황은 눈 여겨 볼만 하다.
고려의 청자는 주로 전라도 지역의 강진, 부안등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 제작되어 해상통로를 이용하여 개경으로 옮겨졌다.
고려 말에 이르러 국운이 쇠약해져 해안가에는 왜구들이 준동하였고 또 청자의 수요량이 급격히 줄어 그 지역의 도공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상감청자를 만들만큼 훌륭한 기술을 갖춘 그들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해 내륙 깊숙이 들어갔다.
그 한 줄기는 계룡산으로 들어가 오늘 날 계룡산자기하면 '분청사기철화문'으로 일컬어질 만큼 독특한 형식의 자기를 완성시켰다.
문경 동로면의 인곡리 분청사기터도 이 때에 시작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참고로 문경에서 멀리 떨어진 진도 아리랑의 첫 머리에
'문경 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다'
라는 귀절이 나오는 것은 새재의 험준함을 빗대어 인생살이가 힘듦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지역민들도 새재를 통하여 한양에 갔었기 때문에 새재가 등장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 생각하면 문경이 전라도에서 동 떨어진 곳이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청자를 굽던 도공들은 문경에 들어와 무한정으로 많은 소나무 장작을 이용하여 도자기를 구웠고 비록 질이 떨어지기는 하나 가마 옆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사토를 水飛하여 그 흙의 성질에 맞게 독특한 기법으로 사발을 빚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도다완은 고르지 못한 도토의 영향으로 그 울이 불규칙하나 이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움으로 평가되어 그 진가가 돋보이는 것이 아닌가.
혹여 문경에서 이도다완을 빚었다는 근거가 발견된다면 그 상징적인 가치만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럴듯하나 그 근거의 부족으로 현재 누구도 공식적으로 제기하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안다. 그 것은 절대적인 발굴 자료의 부족함으로 비슷한 도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본격적 발굴이 필요한 것이다.
현대의 세계 생활자기의 흐름은 단연 본차이나(bone china)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흐름을 일본과 영국의 도자기 산업이 이끌어 가고 있다. 본차이나는 영국의 스콘(Cresscon Co.)과, 일본의 상고 차이나(Sango China), 노리다께(Noritake M/C)를 일류로 친다.
일본 도자의 원류는 한국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현재 영국의 본차이나의 기술을 베껴와 생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 어느 민족이나 제작 방법과 그 미적 감각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공통적으로 도자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리고 그 도자기의 발전과정은 대동소이하다.
그 흐름은 크게 보아 토기 -> 도기 -> 자기(유색) ->자기(백색)로 발전해 왔다. 도기와 자기 사이에 석기를 넣기도 하나 그릇의 발전사에 한정하여 임의로 제외하였다.
인간은 원시시대에 주거를 이룸으로써 무엇인가 담을 용기가 필요하여 흙으로 토기를 빚었으며 그 토기가 물이 스며들거나 강도가 약하여 불로 굽기 시작했고 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온도는 대체로 800도 부근으로 보아진다. 굽다보니 더 높은 온도에서 구울 때 표면이 더 단단한 경질도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300도에서 구워 얻어지는 자기는 도토에 포함된 규사나 장석 등이 용융하여 조직이 치밀해졌으며 불에 의해 다양한 빛을 띠게 되었다. 또 가마의 천정이나 벽에 붙어있던 재와 그을음이 도자기의 표면에 떨어져 높은 온도에서 녹아 입혀지는 현상을 보고 유약이 발명되었다. 전통 자기에서 사용하는 유약을 잿물에서 얻게 된 이유이다. 여기서 초기 청자의 모습이 탄생됐다.
그릇이란 대체로 음식을 담는 것이 그 용도인 바 음식물을 담기에는 그 색이 백색일 때 담겨진 음식물이 깨끗해 보이며 시각으로도 맛이 느껴져, 청자가 백자로 이어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대량의 양질 백토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대체재로 동물의 뼈가 첨가되어 단단하고 가벼운 오늘의 본차이나(bone china)가 태어난 것이다.
(여기서 차이나라 함은 도자기의 뜻으로 물론 중국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요즘 시중의 주부들 사이에서는 원두커피를 갈아 머그 잔에 마시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커피를 물처럼 자주 많이 마시는 미국식으로 연한 커피를 마시다보니 한 번에 마시는 양이 오히려 증가했고 그래서 큰 커피 잔이 필요해 진 것이다.
나는 여기에 착안하여 문경의 도예인 들을 만나 제대로 된 품격 높은 머그 커피잔의 생산을 권하려 한다.
청자나 백자가 아닌 분청사기의 커피 잔을 만들자는 것이다.
찻사발의 고유한 특징이 살아 있는 새로운 형태의 사발을 만들자는 것이다.
잔의 디자인은 꼭 커피잔 모양을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양식 커피 잔은 본차이나의 얇은 용기로 인해 쉽게 뜨거워지는 관계로 손잡이가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문경의 도토는 백자나 청자를 만들기에는 수비(水飛)에 너무 많은 공력이 들고 질 좋은 백토를 첨가해야 하는 관계로 수지를 맞출 수 있는 생활자기를 만들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문경에 흔한 사토를 그대로 사용하여 우리가 재현해 낸 사발의 빛깔대로 자연스러운 찻잔을 만들자는 것이다.
흰 접시에 요리를 담는 것은 깨끗한 이미지로 음식을 먹기 위함이고 와인을 글라스에 부어 마시는 것은 투명한 유리를 통해 그 빛깔을 보기 위함이다. 그러나 커피는 그 향과 맛을 음미하는 것이지 빛깔은 중요치 않다. 커피를 마실 때 눈으로는 그 잔을 감상할 수 있게하자는 것이다.
여기 틈새에 우리의 문경 찻사발이 설 곳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 도예인 들의 장인기질에는 생활자기 제작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과거의 도자기에 집착할 것인가.
청자의 명인 해강선생이 앞에서 말한 '미래의 도자기의 화두'란 말을 나는 훗날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평생을 과거의 도자기를 빚는데 시간을 보냈지만 후대의 도예가 들은 이제 미래의 도자기를 빚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기장 들은 자신의 작품이 놓일 자리와 쓰여 질 곳을 올바로 자리매김해야 할 시점에 온 것이다. 놓일 곳도 쓰일 곳도 마뜩치 않은 애매한 도자기를 만드는 것을 이제는 과감히 접어야 한다.
현재의 그들이 만드는 도자기는 예술품으로는 형편없이 값 싸고 생활용품으로는 터무니없이 비싼 것이다.
그들이 이 상황을 탈피하지 못하는 것이 나는 안타깝다.
일본인들을 고객으로 하는 애매한 가격의 찻사발을 만들게 아니라 값으로 칠 수 없는 최고 품격의 도자기를 추구하되 한편으로는 실생활에 쓰여 질 수 있는 생활자기를 병행하여 만들어야 한다.
사실 이도다완의 재현품만 해도, 그 것이 재현품 임을 인정한다 하여도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부족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 것을 도공 스스로가 예술품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묻고 싶다.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그 만족의 정도를 따져 200만원이니 100만원이니 값을 붙일 수는 없다.
자동차 메이커에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미래의 자동차인 컨셉트카와 실제로 팔리는 자동차를 따로 만들듯이....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그들이 평생을 추구하는 자신 만의 작품을 퐁피두센터에서 발표하지만 아울러 지하철 역사나 광장에서 실생활의 옷을 뿌렛타뽀르테를 통해 알리고 판매하듯이....
우리의 문경 도예인 들도 자신만의 평생을 통하여 추구하는 작품을 만들되, 병행하여 自己流의 감각이 드러나는 생활자기를 창조해 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남의 도자기도 배우며 현대 도자기의 흐름도 알아야 한다.
일본의 15대 심수관은 한국에 건너와서 우리가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옹기를 배워갔으며 이태리로 유학하여 디자인 공부도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도 이제 일본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유명한 '볼로냐 아트페어' 나 '이탈리아 국제 도자기비엔날레' 에 과감히 출품하여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우리다운 것에서 경쟁력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 문경찻사발이 사기장들의 노력으로 한 걸음 더 정진하여 세계무대에서 제대로 평가 받을 날이 오기를 바란다.
세계적으로도 커피 잔 하면 한국의 문경에서 우리 고향의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최고이고 누구나가 문경의 전통 사발의 제작 기법으로 만들어진 용기에 커피를 마시고 싶어하는, 그런 미래가 결코 헛된 꿈만은 아니다.
시대를 넘어서고 동서양을 아우르는 독특한 품격의 문경찻사발의 새로운 명품 탄생을 꿈꿔본다.
글을 쓰면서 명칭 표현에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어려운 경우가 서로 섞여 더욱 난감했다.
한글 마춤법 표준안에는 외국의 지명 인명 등 고유명사는 그 나라에서 부르는 대로 적는게 바르다했다. 그래서 요즘은 로스엔젤리스를 羅城이라하지 않고, 香港 대신 홍콩이라 표기하는 것이 바르고 鄧小平의 독음은 등소평이 아니라 덩샤오핑으로 써야 맞다.
그러나 일본에 한해서는 아직 예외가 많아 꼭 이렇다할 바른 표기가 없다. 우리가 일본이라 부르듯 그들도 우리 국호를 아직 '광고꾸'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식 표기법을 허용하는 것이다.
나는 부분적으로 사람 이름이나 지명은 표준안에 따랐다.
또 하나는 다완의 이름으로 그 것은 일본이 독자적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예를 들면 기자에몬이도(喜左衛門井戶)의 경우에 현재 우리학자나 사기장이 따로 이름 붙여 부르는 이름이 없다.
단순히 이도(井戶)라 하기에는 이도의 종류가 워낙 많고 몇 몇 서책은 우리말 독음인 '정호'라고 부르나 많이 쓰이지는 않는다. 현재 이도란 말은 그 말의 유래에 아직 많은 의문이 있는바 정설이 없다.
그 중 하나로 한국의 지명이라는 설이다. 정호는 진주 근처의 새미골이란 곳의 지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정호란 말을 붙혔다는 설이고 정호라 불러야 한다는 것인데 공인된 정설도 아니고 정호 또한 어차피 일본식 표기이다.
나는 앞에 올린 글의 中편에서, 글 머리에 올라 있는 다완 사진을 '분청사기인화문다완'이라 호칭했다. 일본에서는 미시마(三島茶碗)라 불리우는 것을 내가 그리 표기해 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도 다완의 대부분이 우리 이름이 없어 일본의 이름으로 표기할 수 밖에 없었다. '희좌위문정호'라고 불러봐야 어차피 그 들의 이름이어서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했다.
마지막은 茶를 '차'와 '다'중 어느 것으로 읽는냐 는 어려움이었다.
茶란 아시다시피 중국에서 들어온 말로 중국에서도 두 가지로 발음되는 것으로 茶는 푸젠성(福建省) 아모이(厦門)와 광뚱성(廣東省)의 광저우(廣州)를 통해 세계 각국으로 수출됨에 따라 차의 발음도 푸젠성 말인 'te' , 'tay'에서 유래된 '다'와 광뚱성 발음인 'cha'에서 유래된 '차'의 두 가지 발음이 있다. 영어 티(tea)'는 푸젠성 발음에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나라서는 '다'와 '차'를 혼용하나 일본은 '차'로 발음한다.
현재 우리의 많은 책에서 茶碗을 차완으로 표기한 것도 볼 수 있으며 그 쓰임은 현재 반반이라 하겠다.
한글학회에서 정한 아래의 용례에 충실했으며 또 차완이라 함이 혹자는 일본식이라하나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다완으로 통일했다.
단 일부가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차가 茶의 순우리말은 아니다.
1.'다'로 읽히는 경우-옛부터 사용해 온 말들. 불교 용어. 한자와 어울릴 경우
다과(茶菓), 다식(茶食), 다성(茶聖,) 조주청다(趙州淸茶)
2.'다'와 '차',두 가지 모두 읽히는 경우-대개 차를 끓이거나 마시는 데 사용되는 도구나 풍습
다관 ,차관 (茶罐) 다례, 차례 (茶禮)
3.'차'로 읽히는 경우-차, 그 자체나 재료를 가리키는 말들 .토박이말과 붙어서 새 말을 만든 경우
작설차(雀舌茶), 설록차(雪綠茶), 유차(孺茶), 녹차(綠茶), 죽로차(竹露茶)
분청사기 인터넷박물관...분청사기인터넷 미술관, 분청사기에 관한 좋은 글이 많고 대체로 정확하여 신뢰도가 높다. 이도다완에 관한 인터뷰...부산일보에서는 인용 처도
밝히지 않은 채 인터뷰 형식으로 쓴 기사이나 여기 올려진 글이 참고문헌에 소개한 책,'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 에 나오는 저자(정동주)와 다이도쿠샤 주지 고호리(小屈)와 나눈 대화이다. 기자에몬이도에 관한 10쪽 분량의 글을 축약한 글이다. 부족하나마 일독을 권하며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