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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묵상글 (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우리의 기도가 더 필요한 죽은 영혼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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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02 04:15
- 우리의 기도가 더 필요한 죽은 영혼들
잘 아시다시피 어제 모든 성인의 날과 오늘 위령의 날은
죽어 우리를 떠난 영혼들에 관한 축일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그래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같은 복음 곧 행복 선언을 듣습니다.
그런데 차이점도 있고 그래서 구분하여 축일을 지내는데
그것은 모든 성인은 천당에 가 주님을 직접 뵈옵는 영혼들인 데 비해
위령의 날에 기도하는 영혼들은 아직 천당에 가지 못한 영혼들,
그래서 아직 주님을 직접 뵙지 못한 영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성인보다는 아직 덜 행복한 영혼들이고,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위로가 더 필요한 영혼들입니다.
그래서일까 모든 성인의 날은 대축일로 지내고 대영광송도 하는 데 비해
위령의 날은 대축일로 지내지 않지만, 하루에 세 번 미사를 봉헌하고,
그것으로 모자란다고 생각되어서인지 11월 한 달을 위령성월로 보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영원한 행복 안으로 들어간 성인들은 현양을 할지언정
성인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성인들의 전구를 우리가 청해야 하고,
아직 영원한 행복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선 우리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전에도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요즘 우리 신자들은 위령기도를 전보다 덜 바칩니다.
이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생미사보다 연미사가 훨씬 적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 몇 가지 이유가 겹쳐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에게 효도보다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큰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상당수의 생미사가 자녀들을 위한 미사라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사랑이 본래 내리사랑의 측면이 있지만
아무튼 요즘 우리의 사랑이 치사랑보다 내리사랑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산 이들은 가까이 있고 눈에 보이는 데 비해
죽은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멀리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서양 격언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가 여기에도 적용되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떠났으니 하느님께 맡긴다는 우리의 믿음 말입니다.
여러 번 제가 말씀드렸듯이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어머니가 저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돌아가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를 제가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맡겨야 하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나 죄책감이나 허무감에 매이지 말고
하느님께 어머니를 돌려보내 드려야 한다고 저의 믿음을 산뜻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것이 산뜻하게 ‘정 떼기’하고 ‘사랑 떼기’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통공의 교리와 믿음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은 산이든 죽은 이든 경계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산이와 죽은 이의 경계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고,
사랑이 진실하면 할수록 또 크면 클수록 경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는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저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의 청원기도 지향을 보면
죽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는 소수에 그치고 산 이들을 위한 기도가 대부분이며,
그러다가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모든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뭉뚱그려 바칩니다.
그러므로 위령의 날인 오늘 저는 두 가지를 다짐하며 기도합니다.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하고
말한 욥처럼 저도 하느님을 기어코 뵈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저를 위해 기도하고
위령기도 또한 더 잘하기로 다짐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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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난달은 너무나 바쁜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무엇인가에 집중할 일이 생겨서 통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두통도 있고, 피곤함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제 집무실에 있는 너저분한 많은 것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사실 제 집무실에 많은 사람이 오거든요. 그 사람들이 이 지저분한 모습을 모두 보았을 테니까요. 곧바로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지저분한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자주 사용하는 것은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었습니다. 1~2시간의 정리 끝에 제 마음에 드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계속 가지고 있었던 두통과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병의 원인이 ‘스트레스’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스트레스 대처법의 첫 번째가 ‘방을 치워라!’라고 하더군요. 집이든 직장이든 어수선한 상태가 불안 증대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정리 정돈을 하지 않으니, 불안이 생기고 이것이 스트레스가 된다는 말에 공감됩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기에 힘듦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도 당연히 우리가 따라야 할 것들입니다. 이를 하지 못하니 평화가 없고, 고통과 시련만 가득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일의 우선순위는 즉시 처리해야 할 중요하고 급한 일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냥 삭제하고 무시해야 할 중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일에 온 힘을 기울여 스트레스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이 분명히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무시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죽음 이후 힘듦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 없이 살면, 주님과 함께할 수 없기에 평화 대신 불안과 좌절만 가득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날, 우리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이 세상 안에서 스트레스 없이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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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실수하는 것은 인간적이지만, 실수를 고치지 않는 것은 악마적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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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뭇잎들 내내 달려와, 단풍이 되었습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입니다. 사라져 없어져가는 아름다움입니다. ‘죽음’의 아름다움입니다.
단풍! 이토록 아름다운 변색! 그런데 사실, 잎들은 가슴 속 이미 단풍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있었던 것이 드러나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 단풍을 본 것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도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었던 것이 드러나게 되는 일일 뿐일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그 죽음을 마주치게 되면, 마치 새로운 사실을 맞은 듯이 죽으면 안 되는 것처럼 반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일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은 당하기 전에는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러나 우리가 눈 감고 지낸다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절대극명의 현실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 우리는 바로 이 현실 앞에서, 이미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죽음’과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봅니다.
‘죽음’은 참으로 하나의 진정한 만남일 것입니다. 다름 아닌 그분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다가, 마침내 그 희망하던 분과 만나는 바로 그 일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죽음’은 그분과 만나는 통로요, 그분께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욥기>는 바로 이러한 만남의 희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내 살갗이 이처럼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기 19,25-27)
욥은 ‘죽음’에서 하느님을 뵙고 체험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만남의 희망을 보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수도규칙 4,47)
이 가을, 떨어지는 단풍 잎새 하나에서 희망을 봅니다. ‘만남’을 봅니다. 그것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내안에 이미 있는 ‘죽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미 내 안에 계시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결국 우리는 죽으면서 그분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슬픔을 넘어 아름다운 희망입니다.
사실, 우리는 ‘영원’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래 영원불멸한 존재인 우리의 영혼이 영원하면서도 영원한 줄을 모르기에 이 세상의 한계와 제한을 통하여 영원한 존재임을 배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악을 보면서야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오늘도 우리는 ‘죽음’을 몸에 달고 다닙니다. 하루하루 죽으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새싹처럼, 내 몸 안에서 단풍을, 곧 ‘죽음’을 성숙시켜갑니다. 아니, 영원의 향하여 달려갑니다.
마지막 교부 철학자인 보에티우스(470~524)는 말합니다.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이익보다 손해 볼 줄을, 자신보다 타인을 존중할 줄을,
옳기보다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지고,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지고,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어 지게 하소서!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임을 깨닫게 하소서.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고,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홀로 고독할 줄을 알게 하고,
진정 당신이 주님 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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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며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고 오늘을 이미 영원으로 알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 살면 마침내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시어 몸소 인간의 죽음을 겪으셨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서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과정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그리스도 덕분에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 안에서 그분과 완전히 한 몸이 되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누리게 됩니다’
교회는 ‘은총 가운데에서 죽은 이는 더 이상 정화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곧바로 하느님의 품인 천국에 들어가고, 은총의 상태에서 죽었으나 정화가 필요한 이는 그 정화가 끝난 뒤에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믿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지상을 순례하는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념하는 성찬례를 봉헌하며 기도를 바칩니다. 서로 통공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 사이에서 다른 지체에 영신적 도움을 주는 기도는 다른 지체에 희망과 위로를 줍니다’(죽은 이를 위한 올바른 기도).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 안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이미 천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엘리지오 성인은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 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기회들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편히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심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요, 희망입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성 안눈시아따). 우리는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으니 죽음은 부활의 문을 여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을 기뻐합시다. 오늘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면서도 나의 죽음을 통해 주어질 천상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이 새롭습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드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해 지는 곳과 해 뜨는 곳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며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숨죽인 듯 고요한 아침에 깨면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말 없는 새이며
밤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어느 인디언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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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컴퓨터와 인터넷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10년이 넘은 컴퓨터는 배터리가 부풀어 올라서 터질 뻔했다고 합니다. 컴퓨터를 잘하는 형제님이 배터리를 새로 주문하였고, 컴퓨터 내부를 새롭게 업그레이드해 주었습니다. 예전의 프로그램과 조금 달랐지만 금세 익숙해졌습니다. 사제관 인터넷도 파란불과 빨간불이 번갈아 들어왔습니다. 파란불일 때는 인터넷이 잘 되는데 빨간불일 때는 인터넷 사용이 어려웠습니다. 인터넷 회사에서 직원을 보내 주었고,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파란불이 들어오니 막힌 길이 뚫린 것처럼 시원했습니다. 나무를 옮겨 심으면 뿌리를 내릴 때까지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나무도, 토양도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거기에서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졌던 나쁜 습관들, 이 세상에서 가졌던 죄의 습성을 버려야 할 겁니다. 시기, 질투, 욕망, 나태, 편견, 분노, 탐식과 같은 걸 버려야 할 겁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입니다. 모두가 축하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배가 아팠는지 다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노벨상 위원회에 로비’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그건 노벨 평화상의 권위를 훼손하는 발언이었습니다. 작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이 새롭게 조명되었고, 모두가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문인 중에 배가 아팠는지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강 작가에 대한 한림원의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문학상 후보 중에 한강보다 뛰어난 작가가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림원은 한강이 여자라서 노벨상을 준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림원 심사위원들이 후보 작가들의 서류를 놓고 선풍기를 돌린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건 같은 민족으로서 축하해 주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의 발언이었습니다.
서산대사는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이라는 시를 남겨주었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신중히 하여라. 오늘 내가 가는 길은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세상을 떠난 모든 분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떤 분들은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았을 것입니다. 욕망의 바벨탑에 묻혀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영혼들의 전구를 구하며 우리들 또한 부활의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4년 위령의 달입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것이었다면 내려와서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뒷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의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위령 감사송’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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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 둘째 미사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다 이곳에서의 삶을 마친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인 것입니다.
한참 전의 이야기입니다. 미사 봉헌을 위해 시작 성가를 들으며 입당했습니다. 성가가 끝나고 성호경으로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 그날의 미사 지향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던 중 제 눈을 의심하게 된 상황을 만났습니다. 연미사 지향에 아주 예전에 돌아가신 유명한 작곡가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작곡가의 이름은 ‘베토벤’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향으로 올라온 분은 분명 이곳에서 사셨고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연미사는 돌아가신 모든 사람을 위해 봉헌될 수 있는 미사이니 언제 돌아가셨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태연히 ‘베토벤’의 이름을 연미사 지향으로 읽었습니다. 같은 날은 아니지만 베토벤의 연미사가 봉헌됐다는 소문이 났는지 그다음에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미사도 들어왔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겠지만 사실 오늘은 이름을 남길 만한 큰 업적은 없으나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큰 가치였을 모든 사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죽은 모든 이들과 기억 속엔 없지만 하늘의 별이 되어 있는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합시다.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열렬히 사랑하고 살았을 그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합시다.
언젠가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가겠지만 우리의 기도는 우리 후대 사람들에 의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죽은 모든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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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당했다면....
사기당한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책망합니다.
‘난 참 바보 같아.’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바보 같아.’
‘이런 멍청이는 살 가치가 없어.’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저 사람을 믿었을 뿐입니다.
그대는 멍청이가 아닙니다.
그대에게 사기 친 그 사람이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책망하며 앞으로의 삶을 망치지 마세요.
다만….
그대가 사기당했다면….
그대의 욕심을 한번 바라봐주세요.
욕심에 눈멀었던게 아니었는지 자신을 한번 바라봐주세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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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슬기로운 삶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삶”
11월 위령성월 첫날 11월1일 우리는 '모든 성인(All Saints)'의 대축일을 기념했고, 오늘은 '죽은 모든 이(All Souls)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교회는 종종 세례받은 모든 사람을 ‘성인의 통공(The Communion of Saints)’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사도신경중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가 이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성도(saints)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세례받은 모든 구성원을 지칭합니다.
성인의 통공, 즉 성도의 교제는 세 그룹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는 성도라고 적절하게 불릴 수 있는 사람들, 즉 죽어서 지금은 영원토록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보며 관계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바로 어제 기념한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를 천국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장소라기 보다는 관계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지상에 살고 있는, 바로 하느님과 궁극적인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교회에 속한 우리들입니다. 세 번째 그룹은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죽은 모든 이들입니다. 아직 하느님을 직접 만날 준비는 되어있지 않은, 하느님의 현존에 들어가기 전에 여전히 어떤 정화과정을 거치는 분들로 우리는 이들을 연옥 영혼들이라 지칭하는데 그 과정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추측할 일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 안에서 세 그룹이 이루는 친교를 성인들의 통공이라 하는 것이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세 그룹의 영혼들이 주님 안에서 만나는 미사전례시간입니다. 그러니 첫째 그룹의 천상성인들과 둘째 그룹의 지상영혼들인 우리가 ‘죽은 모든 이들’에 해당되는 세 번째 그룹인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바로 오늘에 적절합니다. 이래서 우리는 생미사와 연미사를 봉헌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는 가족과 좋은 친지들을 기억할 것이지만, 기억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 역시 우리를 위한 이웃의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는 위령의 날은 우리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기에 참 좋은 날이기도 합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병고요 늙음이요 죽음입니다. 대구시 남산동 대구교구청 내 성직자묘지 입구 기둥에 새겨진 라틴어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는 두 글귀가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 것을 가르칩니다.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가르침,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 역시 대동소이합니다. 예전 무려 26년 전 써놨던 죽음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땅위를 덮고 있는 고운 단풍잎들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은 귀환이다, 해후다, 화해다, 구원이다.
‘수고하였다, 내 안에서 편히 쉬어라’
들려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음성이다”<1998.11.10.>
언젠가 갑작스런 이런 선종의 죽음은 없습니다. 죽음은 삶의 반영입니다. 하루하루하루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본질적 깊이의 하루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선물같은 하루를 기쁘게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순간의 방심으로 마음을 놓치면 오만가지 욕심에 사로잡힌다. 악마는 마음을 놓친 찰나에 들어온다.”<다산>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사사로운 욕심이 만 갈래로 일어나 불이 없어도 뜨거워지고, 얼음이 없어도 차가워진다.”<송나라 진덕수의 심경>
그러니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새로운,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의 삶의 질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이 얼마나 보다 어떻게 삶에 우리를 집중케 합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되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영혼들을 돌보신다.”
늘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슬기로운 삶이 제일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영원히 기다릴 수 있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주님없이 막연히 깨어 준비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이의 모범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한밤중 외침소리에 환히 빛나는 영혼의 등불을 들고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하늘나라 잔치를 상징하는 혼인잔치에 입장했지만, 후에 기름을 마련하여 돌아왔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좌절되었습니다. 바로 위 말씀을 임종어로 바치며 선종의 복된 죽음을 맞이한 성녀 젤투르다입니다.
문은 닫혔고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문을 열어달라 호소하지만 주인의 대답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아주 냉엄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언제 죽음이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삶뿐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며 언젠가의 주님과 반가운 만남의 죽음도 선물처럼 주어질 것입니다.
날마다 깨어 있다 주님을 맞이하는 이 거룩한 매일미사전례 수행보다 선종의 죽음 준비에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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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안식을 맞이하기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잊히고 버려진 벗들
찾아 사랑하다
터질 듯 뜨거운 심장으로
안식을 맞이하기를
상처투성이 벗들
품어 어르다
찢기고 쓰라린 마음으로
안식을 맞이하기를
짓밟힌 벗들 보며
피눈물 쏟아
붉게 물든 부은 눈으로
안식을 맞이하기를
목소리 빼앗긴 벗들의
소리가 되어 외치다
거칠게 부르튼 입술로
안식을 맞이하기를
작고 힘없는 벗들 내리치는
불의한 폭력에 맞서다
검붉게 피멍든 몸으로
안식을 맞이하기를
쓰러져 뒤쳐진 벗들
일으켜 더불어 가다
더 이상 힘쓸 수 없는 손발로
안식을 맞이하기를
함께 하는 착한 벗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다
빈 마음 빈 몸으로
안식을 맞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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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하늘 나라는 덕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곳이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늘 나라는 덕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어울린다는 뜻 아닙니까? 지옥으로 가는 길이 온갖 악덕, 특히 교만으로 칠해져 있듯이,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은 모든 덕, 특히 겸손이 인도합니다. 모든 악의 뿌리는 교만이고 모든 선의 뿌리는 겸손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4,11 참조)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하느님은 좋은 분이다라고 내가 말한다면, 나는 잘못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지만 하느님은 좋은 분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은 좋은 분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결국 내 가 하느님보다 더 좋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것은 더 좋게 될 수 있고, 더 좋은 것은 가장 좋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좋은 분이 아니기에 더 좋은 분이 될 수 없고, 더 좋은 분이 아니기에 가장 좋은 분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이 세 마디 – 좋은, 더 좋은, 가장 좋은 - 는 하느님의 실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내가 하느님은 지혜로운 분이다라고 말하면. 그것도 잘못된 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하느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은 존재다라고 말하면, 그것도 틀린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 존재 너머에 계신 무이기 때문입니다. (271)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인연생기법은 그러므로 다양한 불교 종파와 전통을 그 밑바탕에서 아우르는 주춧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줄여서 ‘연기법'(緣起法)이라고 부르는 이 근본적인 실재관은 삼라만유, 곧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자연계 안에 있는 것이나 초자연계에 속하는 것이나, 정신적 인 것이나 물질적 인 것이나 무엇을 막론하고 그 자체가 홀로 불변하는 실체로서 자존하는 것은 없고 직간접적인 인과 관계와 구조적 함수 관계를 통해 ‘지금 여기' 그렇게 현성(現成)할 뿐이 라고 말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인류 정신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식론적 전회'인 것이다. 싯다르타가 보았고 깨닫고 그래서 마침내 해탈하여 '절대 자유인'이 된 실질 내용은 흔히 동서 종교사에서 말하는 천계의 비밀도 신들의 구원 계획도 아니다. 이 근본적인 ‘인연생기'의 법을 바로 본 자가 곧 진리를 본 자요 해탈자요 깨달은 자이다. 문제는 단순한 인식론적 관점의 변화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전존재를 들어 이 ‘연기법'을 확철히는가 아닌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원시 불교의 가르침을 압축 요약한 ‘네 가지 진리의가르침'인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이란, 흔히 불교의 기초를 모르는 일반인이 오해하듯이 허무주의를 주창하거나 개인의 책임을 소홀히 하거나 삶을 고통으로만 보는 비관주의를 설파하거나 행동 없는 정적주의를 선호하는 그런 가르침이 아니다.(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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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모든 성인의 대축일’과 같은 ‘참 행복’ 선언입니다. 예전 베트남에서 돌아온 그해 관구 총회 중, 죽은 도밍고 수사가 자기 나눔의 시간 동안 두서 번에 걸쳐 반복해서 ‘죽고 싶다.’는 표현을 들을 때 참으로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고 싶은 심정’을 들게 했었던 것일까라고 생각해 보았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는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더니만 일찍 외롭게 세상을 떠나 하느님 곁으로 귀천했습니다. 사실 생사生死는, 곧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삶을 싫어하여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버리려고 한다면 곧 하느님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 또한 하느님의 생명을 온전히 깨닫고 사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현세의 삶은 그저 지나가 버리면 그만인 임시 거처가 아니며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인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다.”고 성 이레네오는 말합니다. 결국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이라면, 살고 있는 곳이 이승이든 저승이든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며 그 곳에서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친정 엄마 돌아가신 다음, 꿈속에서 엄마를 만났고 그래서 엄마에게 물었죠. “엄마 거긴 어때?”라고, 그러자 제 엄마 대답이, “신부, 피양 마찬가지여!” 이는 곧 이승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저승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제 엄마가 제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부터 행복을 누릴 줄 알아야 만이 하늘에서도 행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내 마음먹기에 달려 있고, 즉 一切唯心造이기에 주어진 모든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행복이란 만족滿足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지금 힘들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갈 것이기에, 온갖 불행을 다 겪었음에도 행복했던 욥의 신앙을 본받아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존재와 행복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자고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해인 수녀님의 「1% 의 행복」 이란 시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묻습니다. 행복하냐고 낯선 모습으로 낯선 곳에서 사는 제가 자꾸 걱정이 되나봅니다. 저울에 행복을 달면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불행 49% 행복 51%면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엔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단 1%만 더 가지면 행복한 겁니다. 어느 상품명처럼 2%가 부족하면 그건 엄청난 기울기입니다. 아마....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2%라는 수치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모양입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1%가 빠져나가 불행하다 느낄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수치가 기울기 전에 약간의 좋은 것으로 얼른 채워 넣어 다시 행복의 무게를 무겁게 해 놓곤 합니다. 약간의 좋은 것 1% 우리 삶에서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소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할 때의 평화로움, 따뜻한 아랫목 친구의 편지 감미로운 음악 숲과 하늘과 안개와 별, 그리고 잔잔한 그리움까지 팽팽한 무게 싸움에서는 아주 미미한 무게라도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단 1%가 우리를 행복하게 또 불행하게 합니다. 나는 오늘 그 1%를 행복의 저울 쪽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행복하다고. 』
오늘 독서에서 욥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19,25~27) 저는 아직 천국에 가보지 못해서 제 엄마가 이 곳에 사실 때 보다 그 곳에서 더 행복하게 사시고 계시는지 확실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욥의 신앙고백을 들으면서 전 마음의 위로를 느끼고 행복해 집니다. 제가 사랑했던 엄마가 이젠 눈물도 고통도 없는 그 곳에서 하느님을 뵈옵고, 생명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행복 안에서 잘 살고 계시다고 느끼고 알게 되어서 마음이 참으로 편안해지고 행복해 집니다. 전 천국에서 제 엄마가 많이 아주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엄마가 행복하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엄마가 행복하시다고 느끼기에 저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끔 이 곳에 엄마가 아니 계시기에 많이 슬프기도 하지만, 언제가 때가 되어 제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엄마를 다시 만나고 뵈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행복해 집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엄마가 저의 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고, 엄마 또한 저의 간절한 소망처럼 엄마가 저를 기다리시면서 행복했으면 참 좋겠네요. 그래서 오늘은 엄마를 위해 열심히 기도(=위령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사실 엄마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기 보단, 살아 있는 제가 엄마처럼 신앙 안에서 죽음의 순간을 잘 받아들이고 거룩하게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고 봅니다. 저는 아버지와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엄마와 아버지가 당신들을 만날 때까지 제가 이 곳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다시 만나도록 기도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 모두 하느님의 영원한 자비 안에서 영원히 참된 안식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저를 이 수도회로 초대해주고 인도해 주었던 마 레이몬드신부님과 박 도세 유스티노 신부님도, 비오와 도밍고 수사도,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영혼들 또한 기도하고 기억합니다.
<주님, 이미 세상을 떠난 돌아가신 저희 모두의 부모님들과 형제자매들 그리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은 불쌍한 연옥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베풀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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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우리는/ 둘째 미사 /
박윤식 [big-llight] 241101 19:54 ㅣNo.177250
죽은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 대의 미사를 봉헌하는데 이는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단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기도할 것을 권장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사실 죽음은 삶과 맞닿는단다. 그것은 죽음이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탈출하거나 인생무상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표징이 아니기에. 어쩌면 죽음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결과요 열매이니까. 더 나아가 죽음의 순간과 그 결과 따라오는 하느님 만남은 거꾸로 우리 삶을 비추는 참된 빛이리라. 그리고 우리는 늘 이 순간을 기준으로 해, 내 삶을 반추하는 거울이다.
그 빛은 우리가 겉으로만 보이는 인생의 외적 가치를 넘어서는, 내면의 진리를 드러낼게다. 주님은 이 땅에 보내신 당신의 자녀가 비록 이승에서 저 못난 삶을 살고 돌아왔다고 해서, 그분은 당신 자녀에게 분노하시고 섭섭해 하실 리가 과연 가지시겠는가? 설령 온통 죄스럽게만 보일지라도 우리는 다른 이를 주님 마음이 되어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게 참 중요할 게다.
비록 우리 눈에는 부족해 보이고 결점 투성이로 보이는 이도, 비록 연약함의 한계에서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으리라. 이런 주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면 빛 속에서 사는 삶이 된다. 곧 우리 인생의 멍에는 그만큼 가벼워질 것이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되는 것도, 우리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달릴 길을 다 달리고 눈을 감는 순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이도 죽음 앞에서는 불안해져 그의 믿음이 다소 흔들리기도 한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과 병고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가지셨다.
특히 인간의 마지막 고통인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셨을 뿐 아니라 눈물까지 흘리셨고 당신 친히 인간의 죽음에 동참하시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이들에게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주님 안에서 철부지가 된 이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평화의 시작이다.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배워라. 그러면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말씀 하신다. 죄로 찌든 우리 모습을 그분 멍에에 드릴 수만 있어도, 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될게다. 그것은 질수록 편하고 그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힘든 삶을 사는 이는, 가야 할 제 길이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연옥의 단련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연옥의 단련을 면하는 이들도 있을게다.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이들, 곧 벗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는 이들이다. 그들은 고통 가득한 연옥의 단련 대신, 이미 이 땅에서 단련을 받은 이들이리라. 흔히 이런 이들을 우리는 성인이라 일컫는다. 곧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다. 그분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을 얻고자 그분 멍에와 무거운 짐을 꼭 안아야만 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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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까지 깨어 있어야 할 우리는 / 셋째 미사/
박윤식 [big-llight] 241101. 19:55 ㅣNo.177251
죽은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 대의 미사를 봉헌하는데 이는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단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기도할 것을 권장한다. “등만 가진 처녀들이 기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왔다. 기름까지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그 후 처녀들이 돌아와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은 삶과 맞닿는단다. 그것은 죽음이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탈출하거나 인생무상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표징이 아니기에. 어쩌면 죽음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결과요 열매이니까. 더 나아가 죽음의 순간과 그 결과 따라오는 하느님 만남은 거꾸로 우리 삶을 비추는 참된 빛이리라. 그리고 우리는 늘 이 순간을 기준으로 해, 내 삶을 반추하는 거울이다.
그 빛은 우리가 겉으로만 보이는 인생의 외적 가치를 넘어서는, 내면의 진리를 드러낼게다. 주님은 이 땅에 보내신 당신의 자녀가 비록 이승에서 저 못난 삶을 살고 돌아왔다고 해서, 그분은 당신 자녀에게 분노하시고 섭섭해 하실 리가 과연 가지시겠는가? 설령 온통 죄스럽게만 보일지라도 우리는 다른 이를 주님 마음이 되어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게 참 중요할 게다.
비록 우리 눈에는 부족해 보이고 결점 투성이로 보이는 이도, 비록 연약함의 한계에서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으리라. 이런 주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면 빛 속에서 사는 삶이 된다. 곧 우리 인생의 멍에는 그만큼 가벼워질 것이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되는 것도, 우리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달릴 길을 다 달리고 눈을 감는 순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이도 죽음 앞에서는 불안해져 그의 믿음이 다소 흔들리기도 한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과 병고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가지셨다.
특히 인간의 마지막 고통인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셨을 뿐 아니라 눈물까지 흘리셨고 당신 친히 인간의 죽음에 동참하시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이들에게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주님 안에서 철부지가 된 이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평화의 시작이다.
사실 우리는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연옥의 단련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연옥의 단련을 면하는 이들도 있을게다.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이들, 곧 벗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는 이들이다. 그들은 고통 가득한 연옥의 단련 대신, 이미 이 땅에서 단련을 받은 이들이리라. 흔히 이런 이들을 우리는 성인이라 일컫는다. 곧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너희는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늘 마지막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 죄로 찌든 우리 모습을 그분 자비에 맡겨드릴 수만 있어도, 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게다. 그것은 그분 말씀에 충실하면서 영원한 삶을 위한 회개의 삶이어야 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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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어제 천상 교회의 성인들에게 지상의 나그네인 우리 구원을 위하여 전구를 청하였으며, 오늘 위령의 날에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연옥 영혼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어제와 오늘, 이 두 날에 걸쳐 우리는 천상 교회와 지상 교회 그리고 연옥에 있는 이들이 하나임을 기억하며, 서로 기도해 주고 영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을 온전히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그 안에서 서로 온갖 것을 주고받습니다.
죽음 이후의 생명을 믿고 희망하는 교회는 이러한 관계가 세상을 떠난 이들과도 지속된다고 믿습니다.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교리는 이처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이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거룩함을 나누고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나아가고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을 떠나보내고 세상에 남은 이들은 그리움과 더불어, 살아생전에 더 잘해 주지 못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통공의 교리는 우리가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들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맞아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영혼을 기억하며 그들이 평안한 쉼을 얻도록 기도하는 하루로 보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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