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05
7월1일[연중 제1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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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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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6z0InHGdYZw
[한국외방선교회 이성규 대견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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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 마지막 대목이 계속 제 마음 안에서 메아리 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치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치르도록 내버려 두라니! 이런 얼토당토않은 궤변이 다 있나? 대체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가? 죽은 이들은 더 이상 육체도 없는데 염은 누가 하고, 상여는 누가 들고? 조문객 접대는 누가 하고, 음식은 누가 만들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죽은 이 안에는 육체적으로 죽은 이도 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이도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죽은 이도 있고 심리적으로 죽은 이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니 빛이요 진리이신 예수님,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요 구원의 보루로 오신 예수님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역시 죽은 이들입니다. 생명과 구원의 길을 뒤로 하고 어둠과 죽음의 길을 선택한 이들 역시 죽은 이들입니다.
돌아보니 저도 한때 죽은 이처럼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숨은 쉬고 있었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면 영락없이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영혼 없는 얼굴, 총기가 사라진 눈동자,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느끼지 못하던 죽은 이의 나날이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은 붙어 있지만 죽은 이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위안이 되는 것은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기자단과의 인터뷰에서 당신도 죽은 이처럼 존재하던 순간이 있었노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저에게도 대단히 황폐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저도 매우 황폐한 시기, 어둠의 때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미 제가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저는 고해 사제였습니다. 그러나 패배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토록 견디기 쉽지 않았던 시기에 저는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기도는 출구를 일러줍니다.”
죽음 전문가셨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여사께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지금 이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그리 길지 않은 우리네 삶이기에 매일 되풀이해야 할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삶의 질에 대한 지속적 반성과 성찰입니다. 오늘 나는 참으로 살아 있었는가? 열심히 숨 쉬고 삼시 세끼 제때 밥 먹으며, 분명히 살아있었지만, 이미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이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육체는 버젓이 살아있지만, 영혼이나 정신이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욱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들의 육체는 점점 노쇠해지고 소멸되겠지만, 우리들의 영혼과 정신은 더욱 견고해지고 강건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아무리 열악하고 비호의적이라 할지라도, 또 일어서고 또 넘어서겠노라고.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정신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주님 안에, 그분의 성령 안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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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HtxN1ME4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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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는 게 좋은가, 하지 않는 게 좋은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들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에게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십니다. 편안함이나 돈, 명예 따위를 보고 당신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장례를 먼저 치르게 해 달라는 다른 사람에게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십니다. 세상 애착을 끊고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이 절대 쉽지 않다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기도 사실 쉽지는 않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며 십일조도 내야 한다고 예비자에게 미리 말을 하면 그들은 주저할 수도 있습니다. 차근차근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지만, 오늘 복음은 아예 처음부터 말해주는 게 낫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정원 씨의 일가족이 유영철에게 몰살당한 후 고정원 씨는 아내가 다니던 성당에서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 범인이 잡히면 자살하겠다는 그에게 예비자 교리를 받아서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해주는 게 쉬울까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어서 고정원 씨는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고 유영철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체조 유망주였던 이승복 박사가 척추가 망가져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때 어떤 선교사가 와서 이것도 다 하느님의 계획 일부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움직일 수 있었으면 주먹이 날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해주었습니다. 이승복 박사는 그 말을 믿고 운동을 포기하고 의사가 되기로 하여 유명한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용기 있게 주님을 따르는 법을 알려준 은인들이 없었다면 그들이 자기 힘만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저도 어떤 이야기들은 주저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의 반대와 비판에 직면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결국엔 말을 합니다. 그때는 욕을 먹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 말해주는 편이 더 후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백종원 씨가 진행하는 골목상권 살리기 프로그램을 보면 가끔 전문가로서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가게들을 만나게 됩니다. 전문가들 처지에서는 100% 망할 수밖에 없는 가게들입니다. 그리고 백종원 씨는 욕먹을 각오하고 그렇게 할 거면 장사 집어치우라고 합니다. 자신이 처음 장사를 할 때는 명확한 기본규정을 알려준 사람이 주위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해서 그 규정들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백종원 대표는 그들에게서 자기 사진이나 이름을 지우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자기 이미지가 그렇게 보이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전문가일수록 자신을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합니다.
김유신 장군은 18세 때 이미 삼국통일의 꿈을 꿉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그 꿈을 퍼뜨립니다. 어머니는 기생집에 드나들며 무슨 통일을 이루겠느냐고 나무랍니다. 이에 김유신은 다시는 기생집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술을 마시고 말에서 잠을 자다가 깨어난 곳이 기생집이었을 때 김유신은 자기가 이끼는 말의 목을 칩니다.
‘중간 정도만 해도 도움이 되겠지’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중간 정도는 해를 입힙니다. 명화에 일반인이 덧칠하면 명화를 망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결심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광야에서 인간적인 면을 완전히 죽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도 신앙을 가지려는 이들에게 돈과 육욕과 교만을 끊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아예 미리 포기하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정쩡하고 이도 저도 아니고 미지근한 신자가 많이 생기는 것보다 적더라도 신자다운 신자들이 있는 교회가 건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완전한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을 미리부터 알려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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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꾸르실료 봉사자들을 만나려고 휴스턴에 다녀왔습니다. 댈러스에서 왕복 10시간 걸립니다. 지난번 꾸르실료 교육 때에 휴스턴 봉사자들이 댈러스로 올라왔고, 꾸르실료 교육이 잘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저도 한번 내려가 보고 싶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접 가보니 오고 가는 길이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어머니들이 불평불만이 많았던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너도 너 닮은 자식 한번 낳아서 키워 보아라.” 직접 내려가서 봉사자들을 만나니 모두 좋아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이 절대 쉽지만은 않습니다. 발품도 팔아야 하고, 시간도 내야하고, 장거리 운전에 허리도 아프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이 보람 있기 때문입니다. 보람 있는 일은 더불어 사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보람 있는 일은 하느님께 축복받습니다.
매일 아침 산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는데 제가 가는 길에 저를 보는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출근길에 제가 지나가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고 합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신독(愼獨)은 대학 6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군자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던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충실하게 가는 것입니다. 남이 볼 때면 선을 행하고, 혼자 있을 때는 악을 행한다면 이는 군자의 길이 아닙니다. 시편 139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제가 새벽 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고 해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 하느님, 저를 살펴보시어 제 마음을 알아주소서. 저를 꿰뚫어 보시어 제 생각을 알아주소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모를 거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공기가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었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몰라서 용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용서를 청하면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용서를 청하면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슨 명예나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십니다.
둘째,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시급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는 가운데 2024년도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이 긴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죽은 것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미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생계유지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리며 7월의 첫날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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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18-22: 제자 됨의 본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신다.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속된 것에서 거룩한 것으로,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건너가라고 명령하신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끝없는 탈출이다. 그때 율법 학자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율법 학자는 그분이 가시는 곳을 알지 못했다. 막연한 짐작뿐이었다. 예수님은 최후의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고 계셨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20절) 그분은 차림새도 수수했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 나라에 대해 알고 계셨지만, 임금이 되기를 마다하셨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주십시오.”(21절) 이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려면,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다른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카인처럼 둘째가는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는 이들을 위하여“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어머니다.”(마태 12,50)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가족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22절) 이 말씀은 죽은 것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콜로 3,5) 이런 것들은 죽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던져버려야 한다. 몸 전체에 병이 옮지 않도록 베어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신 분이다. 당신이 하느님이심까지도 모두 버리시고 당신을 낮추신 분이시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곳에 즉 아버지의 뜻 안에 당신의 거처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도 주님을 따른다고 할 때, 철저히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뜻 안에 머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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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아버지의 장례조차 허락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따르라는 이 말씀이 너무하게 여겨지지는 않나요?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세워지기 마련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자녀에게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많은 신앙인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믿음보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가치들을 좇으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저마다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가치와 예수님의 말씀이 서로 부딪치게 될 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가 너무 어려운 말씀’이라고 하며 그분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여 버리기도 합니다. 신앙보다 자식들에 대한 기대가, 정치적인 의견이, 물질에 대한 욕심이 더욱 앞섭니다. 체면과 자존심, 다른 이들의 평가가 더욱 앞섭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신앙을 먼저 선택하고, 예수님을 따르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마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과 타협하면 안 되는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함께 계시고, 그 길의 마지막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이 약속이 모든 이에게 소중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이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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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영적으로 죽은 이가 되지 마라.>
“그때에 한 율법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8,19-22)
1)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뜻인데, ‘어디로 가시든지’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훌륭한 일’이고, 어떤 어려움이든지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는 ‘좋은 일’인데, 그는 예수님을 따를 때 겪게 될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는 말씀은, “나를 따르려면 대단히 고달픈 생활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는 “잠시 앉아서 쉴 곳도 없다.”, 즉 안락한 생활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힘든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16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포함됩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왜 따르는가? 그 목적과 이유는 무엇인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온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고, 더 귀한 것입니다.(마태 16,26) 그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온 세상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습니다. 가장 큰 것을 차지하려고, 작은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따르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오해하고서 따른다면, 금방 실망하고 떠날 것입니다. 희망이 잘못되어 있으면, ‘따르는 일’도 빗나가게 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도 당연히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만날 수도 있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강요당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원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2)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가지 마라.”, 또는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마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지 마라.”, 즉 “세속 일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마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루카 10,4) 이 말씀에 대해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 말씀은, 세속의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복음 선포를 하려고 떠난 사람은 복음 선포에만 집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는 말씀도 같은 가르침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원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만 집중해야 하고, 세속 일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말고, 한눈팔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집에 가지 마라.”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마라.”도 아닙니다. 집에 가서도, 또 아버지의 장사를 지낼 때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고, 제자로서(신앙인으로서) 그런 일들을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3) 전승에 의하면, 그 제자는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필리포스’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였는데, 아마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마음이, 또는 믿음이 흔들려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집에 ‘잠깐’ 다녀오겠다는 요청이 아니라, 예수님을 떠나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이고, 언제 예수님에게로 돌아오게 될지는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너는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 즉 집에 가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라, 제자의 삶을 포기하지도 말고 중단하지도 말라는 권고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못 가게 해서, 집에 가지 못하고 억지로 예수님 곁에 남아 있다면, 그것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몸이 남아 있어도 마음이 떠나 있으면, 그것은 떠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떠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는 분이 아닙니다.>
필리포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집에 가서, 장사를 지낸 다음에 다시 예수님에게로 돌아와, 제자로서 충실하게 예수님을 따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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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말씀과 행동으로 그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는 ‘스승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께 배우기를 바랍니다.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표현은, 온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던 예수님의 일상을 떠오르게 합니다.(마태 4,23; 9,35 참조)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미 ‘주님’이십니다. 그런 그에게 당장 해야 할 중대한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라는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인륜대사의 중요한 의무마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시며 당신을 따르라고 명하시는 이 분은 도대체 누구이십니까?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머물러야 할 ‘집’이며 궁극적으로 우리 ‘구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주님이시며 또한 생명의 주님이시기에 죽음과 삶은 오직 그분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알고 믿으며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을 기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스승’이시며 ‘영원한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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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율법 학자 가운에 한 사람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제자의 길로 나서겠다고 합니다. 명성이 높은 율법 학자들을 찾아가 함께 머물면서 제자의 삶을 살던 것이 당대의 전통인 점을 생각하면, 이 율법 학자도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따라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당혹스럽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세상 그 어떤 곳에도 예수님께서 편히 쉬시며 머리를 기대실 보금자리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당신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머무르실 영원한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떠나 자신을 숨기고 살아갈 수 있는 어떤 곳도 없다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나의 죽음 이후에도 세상은 그대로이겠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이 우리가 머무를 마지막 장소는 아닙니다.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숨을 곳을 찾으며, 그곳에서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인생이지만, 마침내 우리가 돌아갈 곳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혹독하게 질책하는 이스라엘의 네 가지 죄, 곧 부정한 재산의 축적과 횡포, 가난한 이에 대한 착취, 권력에 의한 성폭력, 종교의 세속화로 말미암은 타락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지배하는 힘입니다. 세상에 심취하여 욕망의 늪에 빠진 이들에게 울려 퍼지는 시편 저자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입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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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군중으로부터 떼어놓으신 일로 시작됩니다. 곧 소문이 퍼지고, 많은 병자와 마귀 들린 자 등 군중이 몰려들자 제자들을 그들로부터 떼어놓으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아직 제자교육을 받지 못한지라 군중에 휘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네 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마태 8,18).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두 인물의 대조되는 태도가 나옵니다. 율법학자는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데, 막상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 중의 어떤 이는 집안일로 장례를 치르러 가겠다고 나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자세를 요청하십니다.
사실,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치유능력과 군중들이 몰려든 화려한 것에 마음이 끌려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곧 화려한 보금자리에 대한 갈망이 속에 감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막상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런 것으로부터 떼어놓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은 그러한 화려하고 드러난 보금자리를 얻는 길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 20)
바로 여기에, 참된 제자 됨의 본질이 있습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을 따르는 삶은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임을 말합니다.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곧 당신을 따르는 제자 됨의 길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게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이미 당신을 따라나선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 22)
이는 당신을 따르는 것은 죽음의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게 하늘나라를 앞세우는 삶임을 말합니다. 그것은 거처할 곳이 묻혀 썩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과 더불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집에 가서 장례를 지내기를 청하는 제자에게, 대체 무엇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 지를 깨우쳐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또한, 오늘 우리에게도 에누리 없이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진정, 나는 오늘 대체 어디에 머리 기댈 곳을 찾고 있는가? 자기 자신인가 하느님인가? 무엇을 앞세우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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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8,19)
세례성사를 받고 6개월쯤 되던 때, 저에게 교리를 가르친 포항 예수성심회 프랑소와 수녀님께서 저에게 “아오스딩 로만칼라 차면 참 멋있겠다.”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축성식(1969. 4월)에 참석하고 다녀오신 ‘광주 화정동’ 소재의 예수고난회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수도자가 어떤 존재이며 수도 생활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나 정보도 없었습니다. 단지 로만칼라를 차면 멋있겠다는 수녀님의 권고와 추천의 소리를 듣고 아무런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이 ‘네, 수녀님 할 수 있다면 로만칼라를 차지요.’라고 서슴없이 응답하였습니다. 다음 달 5월, 제 동기들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떠났지만, 저는 광주 화정동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이 첫 방문에서 박도세 신부님과 만남이 인연이 되어 지금껏 이 수도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8,19)라는 고백은 어쩜 이미 제가 제 누이의 무덤가에서 ‘죽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누이에게 위안이 될까?’라고 생각하던 때부터 성소의 씨앗은 이미 제 영혼 속에 뿌려졌다고 봅니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따르다. 곧 추종’에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존재들이며 그 본보기가 바로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수도공동체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 머물면서 직접 몸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면서 자신을 버리고 과거의 시간과 장소로부터 떠나 새로운 삶의 자리로 건너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그 따름의 길은 단거리가 아닌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이며, 곧 생애를 통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아주 멀고 먼 영적 순례와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지금도 줄곧 스승이신 주님을 따르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보면 초기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일어나는 어려움이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에 어떤 조건이나 단서가 없이 무작정 좋아서 따랐다고 봅니다. 사랑의 눈멂처럼 아무 어려움은 보이지 않았고 모든 것이 마냥 좋았습니다. 물론 주님을 따라간 여정의 거리와 시간에 비례해서 성장하는 게 아니더군요.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따름의 속도도 느려지고 그에 따라 마음의 갈등도 일어났으며 내적 고통과 힘듦이 살며시 제 따름의 삶에 밀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무식하지만 용감하게 뒤돌아보지도 않고 따르다가 차츰 저 자신을 알아가면서 샛길로 빠지기도 하고 더디어지기도 하면서 점차 추종의 동기도 정화되고 세련되면서, 지금껏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의향을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실망스런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단지 그 율법 학자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무언가를 말씀하고 있다고 봅니다. 즉 인간의 겉모양을 보시지 않고 속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는 아마도 그 사람의 추종의 동기가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감상적이나 일시적 기분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분명한 추종의 동기는 물론 그 동기를 지속할 수 있는 성숙함과 굳건함이 있어야 따름에 수반되는 내-외적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되돌아보면 따름은 단지 열정만으로 부족하고 내적 의지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감정도 좋지만, 굳은 의지가 수반하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열정은 식기 마련입니다. 추종의 길은 결코 낭만적인 측면만이 있는 게 아니라 추종에 요구되는 내적 자신과의 싸움, 비우고 버리고 낮아지고 죽어야 하는 처절한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베트남에서 생활할 때, 성소 식별에 있어서 차이점은 영어권의 형제들은 일단 성소자들의 영어 이해와 구사 능력여부에 기준점을 두었지만, 저는 그들의 내적 성소 동기에 강조점을 두었기에 참 많은 갈등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8,20)하고 대답하신 예수님은 참으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고린 8,9) 그래서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고 강조하셨는지 모릅니다. 어쩜 그는 부유한 사람이었지 않을까 싶네요.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나선 삶도 마찬가지로 여우의 굴이나 새의 보금자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추종의 여정에서는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어려움이 생길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그 안에 삶의 행복이 있다고 믿기에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지금은 사제나 수도자들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이 살고 있지 않음을 여러분 알고 계시죠. 때론 부끄러울 때가 있을 만큼 크고 넓은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처럼 단지 외적 크기만을 보시지 말고 추종에 따른 내적 싸움이 더 어렵고 힘든 여정임을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이미 추종을 시작한 이들이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지금의 추종이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화답송 후렴/시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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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의 건강을 위해 유명 축구선수가 운영하는 축구교실에 등록시켰습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즐거워하며 볼을 차는데, 자기 아이는 구석에 쭈그려서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된장찌개도 처음 먹으면 맛이 없잖아. 그런데 자꾸 먹으니까 맛있어지지? 축구도 그래. 자꾸 하다 보면 좋아져.”
이 말에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약 먹으면 쓰지? 그런데 계속 먹으면 달아? 나에게는 축구가 그래.”
그날로 축구를 그만두게 했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축구는 쓴 약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노력을 통해 얻는 것이 있는 반면,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각자의 몫이 있는 것입니다. 각자의 몫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남들처럼 살려는 마음에서 우리는 즐거운 된장찌개 대신 쓴 약을 힘들어도 선택합니다. 즐겁지 않은 노력만을 기울이면서 말이지요.
故 이어령 선생님께서 생전에 강의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천재로 태어났고,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예요. 360명이 한 방향으로 경주하면 1등부터 360등까지 있겠지만, 내가 뛰고 싶은 방향으로 각자가 뛰면 360명이 다 1등이 될 수 있어요. 베스트 원이 될 생각을 말고, 온리 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세요.”
하나밖에 없는 ‘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두 다르게 창조하신 이유는 자기의 삶을 살라는 것이지,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명성 높은 율법 학자를 찾아가 함께 머물면서 제자로 사는 것이 그 시대의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고, 동시에 당신께서 머무시는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어떤 이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청을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시지요. 즉, 세상의 관습과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나만의 길을 살라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사는 삶보다, 주님과 함께하는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만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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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를 따라라>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십니다. 가정이라는 보금자리와 편안함을 포기한 헌신적인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제자 한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말하자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불효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데 그만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나를 따라라.”는 부름은 지체 없이 따라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잠시도 헛되이 시간을 보낼 수 없고, 타협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깨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유혹이 많습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 의 갈림길에서 갈등합니다. 하느님을 따르자니 세상 것이 아쉽고, 고달프기도 합니다. 세상 것을 추구하자니 왠지 마음이 걸립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었더라면 마음이 편안했을 텐데....하는 생각도 합니다. 가정의 여러 문제, 자녀의 결혼, 출산, 재물이나 교육 문제, 공동체의 문제해결 방법에 있어서 매번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다리 걸치기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결혼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당에서 주님의 축복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예식장의 화려한 곳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혼인의 참된 의미는 사라지고 보여주기 위한 행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자녀 출산과 교육의 관심도 소홀합니다. 시험 때가 되면 주일학교 미사 참례자 수가 부쩍 줄어듭니다. 시험이 먼저입니다. 공부가 하느님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입니다. 부모님마저 그 행동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실 먼저 기도하고 공부하면 꼭 필요한 것을 공부하게 되는데 …… 재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기뻐해야 하지만 나를 위한 것에 우선하고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생색내기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대접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 하느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채워주십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인데 내 것인 양 사용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빈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것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참 스승은 상대방에 따라 다르게 말씀하신다. ”자로(子路)가 여쭈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곧장 하다니?’ 염유(冉有)가 여쭈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들었으면 곧장 해야지.’ 이에 공서화(公西華)가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는 까닭을 묻자, 공자 대답하시되. ‘염유는 물러서는 사람이라서 나가게 했고, 자로는 나서는 사람이라서 물러서게 하였다.’”(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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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래 쉼 없이 걷는 거야>
마태오 8,18-22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래 쉼 없이 걷는 거야>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22)
그곳에 이를 때까지
그래 쉼 없이 걷는 거야
비록 그 길의 끝 모르지만
지금여기 그 끝이 아니니
잠시 머물던 자리 훌훌 털어내고
힘차게 또 한 걸음 내딛는 거야
지금 함께 하는 벗들의 환호와
지금 누리는 모든 기쁨을
먼 길 쉼 없이 내딛어야 할
힘겨운 발걸음에 밑거름 삼아
모든 것 미련 없이 내려놓고
빈 몸 빈 마음으로 또 한 걸음
끝 모를 그 곳에 이를 때까지
그래 쉼 없이 걷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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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추종의 자세>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제의 끝은 오늘의 시작입니다. 삶은 늘 끝이자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늘 깨어 새롭게 시작함이 영성생활의 요체입니다. 7월 달력을 펼치는 순간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가 떠올랐고 나눕니다. 7월이 되면 늘 떠오르는, 모두가 애송하는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빡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흡사 오매불망 스승을 기다리는 제자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만일 애국시인 이육사(1904-1944)가 주님을 만났더라도 훌륭한 제자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육사 시인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평생을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옥사한 분입니다. 의열단에 소속된 시인은 갖가지 사건으로 대구와 북경의 감옥에서 무려 17회나 징역을 살았고 마침내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합니다.
육사의 시로서는 드물게 세련되고 아름다운 이 시에서는 ‘초인’은, ‘내가 바라는 손님’으로 모습을 달리해 있고, 백마를 타고 오는 대신 ‘청포를 입고’ 찾아옵니다. 여기서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많은 이들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킬 사람으로 추론하기도 합니다.
7월을 맞이하여 우리의 신앙시로 읽어도 손색이 없는 신선한 감동을 주는 맑고 깨끗한,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주님은 7월 첫날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처럼 우리를 죄와 내외적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키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찾아 오시고,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청포도의 시인처럼 주님을 환대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추종의 자세를 배웁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직의 엄중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어제 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눈부신 치유이적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하면 민중들에게는 최고의 인기스타였을 것이며 제자가 되려는 열망도 지녔을 법 합니다. 아마도 이런 영향을 받았을 한 율법학자가 주님을 찾아 제자가 될 것을 청합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율법학자의 감상이나 허영을, 환상을 일거에 거둬 버리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무소유의 정신과 삶으로 세상과 철저히 결별하고 주님을 따르겠는지 묻습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철저히 모두를 버린 하느님의 제자였음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율법학자가 주님을 따라나섰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독자인 우리에게 주님을 추종하는 자세의 엄중함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 중심의 삶을 살려면 세상 재물 욕심에 초연해야 하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옛 어른 다산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고난은 마음의 근육을 키워준다. 어른이 단단한 까닭은 겪어온 무수한 고난을 주름에 갈무리 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제자의 길은 꽃길이 아닌 산전수전, 무수한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통해 정화되어가는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자승자강(自勝者强),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 진정 강한 사람입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는 이런 사람이겠습니다. 이어 주님의 제자들중 하나의 청원과 주님의 답변도 우리에게는 깊은 묵상감입니다. 역시 제자직의 엄중함을 환기시킵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자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제자직에 관한, 이해하기 힘든 참 난해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앞서 말씀이 소유와의 단절을 말한다면 이 말씀은 세인들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인정이 많으면 도가 성글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학자들은 주님의 말씀임에 동의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는 충격요법의 과장법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죽은 이들을 장사지내는 엄중한 의무도 참된 제자직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사지내는 것에 대한 거부라기 보다는 제자직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장례의 의무까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만큼 우선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길을 찾지 못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 말씀대로라면 세상에는 살아있다 하나 죽은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주님은 이 말씀후에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주 예전 법정 스님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불자 수도승으로서 할머니의 장례식까지 참석 못했던 풋열심의 젊은 시절의 행태에 대한 반성입니다. 까짓 수도생활이 뭐라고 사랑했던 할머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자신의 편협했던 생각을 크게 뉘우치는 스님의 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충실한 제자로서 평생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에 온힘을 다했던 분으로 하느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가 잘 드러나는 말씀이요,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해이해진 자세에 경종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 예수님에 앞서 하느님의 참 훌륭한 제자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철저하기로도 예수님과 막상막하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었던 백성이 주님의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하게도 사랑과 정의를 유린한 행태들에 열화와 같은 분노와 더불어 가차없는 심판을 선언하는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짓눌러 버리리라...활을 든 자도 버틸 수 없고, 발 빠른 자도 자신을 구하지 못하며, 말 탄자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용사들 가운데 심장이 강한 자도, 그날에는 알몸으로 도망치리라.”
그 누구도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린 심판이기보다는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요 오늘날도 주변 곳곳에서 무지하고 무절제한 사람들이 자초한 심판의 징조가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을 사랑함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중산층화 되어가는 교회에 대한 경고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화답송 후렴처럼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해 초발심의 열정과 순수로 주님을 찾고 따르는 제자로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참 제자답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 95,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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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풋사랑에서 시작하여>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오늘 율법 학자는 당시 율법 학자들 가운데 보기 드문 존재입니다. 제자로 받아들이셨는지 알 수 없지만 훌륭한 제자의 본보기입니다.
우선 그는 다른 율법 학자들과 달리 주님을 스승으로 삼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율법 학자들은 자기들이 교사들이기에 늘 주님을 트집 잡았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의 저도 훈장 기질이 있어서 늘 남을 가르치려 들었고 지적질하기 바빴으며 교만하기 이를 데 없어, 그 누구를 진심으로 스승 삼은 적도 없고 삼으려고 들지도 않았었지요.
어쨌거나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는 주님을 스승 삼으려고 든 것만으로도 훌륭한 제자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하는 말도 훌륭함을 보여줍니다. “어디로 가시든지”라고 합니다.
의미를 굳이 가르자면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스승을 따르겠다는 것이고 스승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것이며, 그래서 생사고락을 같이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요한 가르침만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전부를 스승에게 거는 것이며 진정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분이 있는 곳에 늘 자기를 위치시키는 법이지요. 사랑하는 분이 있는 곳이 자기가 있을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보이니 주님께서도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렇다. 나를 따르는 것은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각오하여라.’ 뭐 이런 식으로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수도원 입회하려는 성소자에게 이렇게 충고하며 상당수가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습니다.
수도자의 경우 수도원은 천사들만 살 것 같은 환상이 있고, 연인들의 경우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달콤한 꿈만 있지, 같이 살아야 할 고달픈 삶은 생각지 못하고 기대 심리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도자이건 연인이건 풋사랑일 때는 이런 기대 심리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성소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누가 수도원에 들어오고 누가 시집 장가가겠습니까?
지금 많은 젊은이가 수도원도 들어오지 않고 시집 장가가지도 않는 것이 이런 풋사랑의 낭만이 없고 현실의 어려움을 너무 크게 보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주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며 십자가 지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고, 풋사랑에서 시작하여 수난의 사랑(Passio)으로 사랑이 성장해야만 완성할 수 있는 길임을 묵상하며 감히 따르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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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ㄷ)
<참 신앙인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 8,18-22)은 '예수님을 따르려면'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가 필요한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마태 8,19ㄴ)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ㄴ)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마태8,21ㄴ)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ㄴ)
"사람의 아들(예수님)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겠다고 약속한 이들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께 우선적인 마음을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한 부족함을 지적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치열한 삶의 자리에서 종종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다른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관련된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있을 수 없고, 복음 선포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임박한 종말론 신앙', 곧 '최후의 심판의 때인 그리스도의 재림(다시오심)이 언제일지 모르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신앙'입니다.
늘 깨어 준비하고 있는 참 신앙인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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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 20)
유월을
떠나보내고
칠월을 다시
맞이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외로움도
주님의 길을
막지 못합니다.
외로움이
주님을 따르는
망설임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삭제할 수 없는
외로움이
떼어낼 수 없는
외로움을
맞이합니다.
외롭기에
마주하게 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주님께
고개를 숙이는
선물의 시간은
성장을 이루는
따뜻한 마음이
됩니다.
외롭고
고독해야
잘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독을 믿고
따릅니다.
십자가의
고독이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놓게 합니다.
가장 큰 사랑을
만들어내는
고독입니다.
사람에게서
출발하지만
하느님께
이르게 되는
외로움과
고독입니다.
고독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의 길 위에
사람의 아들이
있습니다.
고독도
외로움도
넘치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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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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