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현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도 국물이 되어버린
그 뼉다귀를 핥기위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지요.
날품팔이지게꾼,
부랑자쪼록꾼,
뚜쟁이시라이꾼,
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뼉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 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
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지금은 힐튼 호텔의 휘황한
불빛이 머큐롬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크레인이 환부를 긁어내고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
----------
■1988년 김신용 시인의 등장은 문단에서도 작은 충격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열여섯 나이에 부랑을 시작하여 서울역 지하도와 대합실이 숙소이자 놀이터였던 그는 동냥은 물론 끼니를 해결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매혈과 각종 '치기' 범죄도 불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감방과 양동을 오가면서 별을 5개나 달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장르불문 그가 감옥에서 읽어치운 엄청난 독서량은 놀라울 정도였고,
그 독서와 사유를 바탕으로 마흔넷에 '양동시편
(陽洞詩篇)'을 발표하며 시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시는 지금은 도려내진 서울의 환부 '양동' 에서 불처럼 살았던 지게꾼 출신이 문학계에 섬광 같은 작품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양동(陽洞)' 은 과거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 가려진 슬럼가를 말합니다.
바깥에서 보면 치부이지만 도시의 부랑자, 일용잡부, 마약중독자 등 밑바닥 인생의 총집결지이며 본산이었습니다.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 하루하루가 고단한 인생들에게 그곳 뼈다귀 국물은 거의 유일한 보양식이었을 것 입니다.
여기에서 문학은 선택된 재능을 지녔거나 가방끈 긴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돈 벌고 출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한 물음만 있으면 누구라도 진입할 수 있는 장르입니다.
사람과 자연,
사물과 현상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성찰의 자세만 가진다면...
불우하고 험한 생을 살았던 시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다만 그들의 공통점은 세상을 흐물흐물 순응만하지 않고 뜨겁게 살았다는 점입니다.
김신용 시인 역시 둘레의 삶을 뜨겁게 연민하고 처절하게 번민하였으리란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렇게 빚어진 시이기에 시인의 체험 공간을 한번도 가보지 않고,
'뼉다귀집' 국물을 마셔보지 않아도 그 연민을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