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사회운동가 가가와 도요히코는 누구인가?
가가와 도요히코(1888∼1960). 그는 일본 고베 빈민촌에서 빈민 운동을 펼친 기독교 사회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혹자는 그를 일컬어 “우찌무라 간조와 더불어 일본 기독교를 대표하는 자”란 수식어를 달기도 하지만,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에 비해선 한국교회에 그리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일본에서 1백만권이 넘게 팔렸다는 베스트셀러 『사선(死線)을 넘어』란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을 뿐.
그도 그럴 것이 한 평생 빈민촌에서 빈민들과 함께했으며 간혹 강연 여행을 다니더라도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지역이 아닌 미국, 유럽에서 활동해온 터라 도요히코가 한국교회와 연이 닿을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시대 우찌무라 간조는 한국교회 무교회주의 운동가 김교신을 제자로 삼아 상당한 영향을 미친 바 있다.
▲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
철저한 기독교 사회주의자 도요히코는 자신의 이상을 고베의 빈민촌이란 주 활동 무대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빈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해 구제 사업을 하는가 하면,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반전 평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시대 양심의 목소리를 냈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이 같이 사회 선교사업에 뛰어든 지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이에 한국교회에선 우찌무라 간조에 못지 않게 일본 교회, 나아가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도요히코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며칠 전에는 그의 손자 가가와 도꾸아끼가 직접 방한을 해 할아버지 도요히코를 조명하는 발표를 맡기도 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이 어느때 보다 고조되고 있는 한국교회가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이상할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가가와 도요히코. 그는 누구인가?
사회 운동에 씨를 뿌린 가가와 도요히코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의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 일어난 모든 사회 운동에 씨를 뿌린 사람이다. 1909년 고베의 빈민가에 들어가면서 시작된 그의 빈민 운동은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 그리고 동경 대지진 때는 일본 최초로 볼런티어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소비자 생협을 비롯한 의료 생협 등의 모든 협동조합 운동과 탁아 운동 및 제국주의 전쟁 시대에는 반전·평화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한 일본 기독교 목사이자 사회 운동가였다.
일본 도구시마 상류층의 서자로 태어난 가가와 도요히코는 중학교 시절 영어를 배우기 위해 만나게 된 로건과 마이어스 선교사를 통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했지만, 병을 이기고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며 신앙을 쌓아갔고, 메이지 신학교로 진학해 신학 공부를 이어갔다.
대학시절부터 도요히코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하고 돕기를 자주했다. 빈민촌을 돌아다니며 허약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옷을 벗어주고, 집으로 데려와 재워주기도 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병약했던 그는 무리하게 노방전도를 하던 중 결국엔 과로로 쓰러져 의사로부터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당시로선 치료제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폐결핵 진단은 사망 선고와 다르지 않았다. 기도로 기적적으로 회생한 가가와는 요한 웨슬레 등의 전기를 읽으며 삶에 깊은 감명을 받고, 평생을 헌신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 그가 맨 처음 찾아 들어간 곳이 바로 고베의 빈민가였다. 그곳은 가난과 질병, 범죄가 들끓는 곳이었다. 가가와는 그곳에서 살면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등 그 마을 사람들의 어려운 형편을 돌봐줬다. 또 나누는 일에도 도요히코는 열심이었다.
‘한벌 옷의 제자도’의 가르침을 따라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웃들에게 나눴다. 빈민가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천국옥’이라는 밥집을 열어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되지 않아 쌓여가는 외상으로 문을 닫고 말았지만, 절망 속에서 가가와는 일생의 반려자 ‘하루’를 만나게 된다.
그러던 중 미국인 독지가로부터의 후원금이 중단되자 빈민촌 활동이 어려워졌고, 이 기회에 신학적 지식과 경험을 더 얻고자 학문의 길을 택하려고 마음 먹고 도요히코는 미국 프린스턴으로, 하루는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로 떠났다. 유학을 마치고, 다시 고베의 빈민촌으로 돌아온 그는 빈민촌 구제 사업이나 전도에 대한 의미를 재부여하고, 생각 끝에 가난을 없애기 위해 노동자 자주관리 공장의 일환으로 칫솔공장을 열었다. 빈민촌에 일자리를 마련해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주고, 그 이익을 노동자들에게 환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경험 부족과 소비자들의 외면으로 1년 만에 파산한다.
노동·농민 운동에 뛰어들어 농민복음학교 설립
그후로부터 도요히코는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폭력과 계급간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고 책임적인 주체로서의 노동자를 세우는 노동 운동을 해 나갔는데 이 때문에 과격한 노동 운동가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 도요히코는 농민들에게도 관심을 가졌고, 부채 때문에 마치 노예생활을 하듯 어려운 생계를 유지하는 농민들을 위해 전국적 농민 조직을 만들었다.
이어 협동조합과 농민복음학교 설립에 정열을 쏟은 그는 자신의 출세작 『사선을 넘어서』 1권을, 1백만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를 내놨다. 도요히코는 인세를 거의 대부분 노동 운동 그리고 생협 운동을 위해 사용했다.
구제 사업이 마무리 되어가던 1924년 3월 이후에도 도요히코는 동경에서 활동하면서, 단순히 자선사업이나 구제 사업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의 교육적 측면과 복음에 의한 마음의 회복을 중시했다. 이런 생각의 일환으로 도요히코는 생협, 신협, 기독교 산업청년회, 의료 생협 등을 만드는데 열심을 다하는 한편, ‘예수의 친구회’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백만인 구령운동 ‘예수의 친구회’ 결성
‘예수의 친구회’는 도요히코의 메이지 학원 시절의 친구들이 중심이 된 조직으로 ‘예수에게 경건하라, 가난한 자의 벗이 되고 노동을 사랑하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라, 순결한 생활을 존중하라, 사회봉사에 뜻을 두어라’를 강령으로 하는 신앙 운동체였다. 이 ‘예수의 친구회’에서 도요히코는 백만인 구령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사회 운동가이지만, 선교에도 열정적이었던 그의 단면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도요히코의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정신은 보다 더 뚜렷해졌다. 그는 지금까지 교조적, 강단 중심적이어서 실천력이 부족했던 종래의 기독교 전도 방법을 변혁시켜서, 사랑과 협동을 바탕으로 정열적인 실천을 쌓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이에 1927에는 자신의 오른 팔과 같았던 스기야마 겐지로가 이웃에 이사 온 것을 기회로 일본 농촌 전도단을 결성하고 자택에서 농민복음학교를 열었다.
이즈음에 미국에도 ‘거룩한 1달러 클럽’이라는 도요히코의 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그들의 도움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일본 기독교연맹의 이름으로 실천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백만인 구령 운동’이 발전한 것이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사회개량운동 △사회봉사사업 △매매춘 폐지 △금주 운동 등을 별였으나 신자 증가에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일본의 대륙 침략이 가시화 됐던 시절에는 도쿄에서 ‘전국 반전 동맹’을 결성하고, 도요히코는 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계속되는 일본의 대륙 침략에 상실감에 젖어든 도요히코는 그 와중에도 필리핀, 호주, 미국, 유럽 등을 돌아다니며 평화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1938년 12월에는 인도를 방문해 간디와 네루를 만났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이후 도요히코는 내각 참여에 대한 권고를 받았지만 거부하고, 오히려 ‘전국민 참회 운동’을 제창하면서 국제평화협회를 설립해 협동조합의 정신에 의거해 항구적인 평화의 수립과 인류의 상호부조와 우애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해 10월에는 사회당 창당 발기위원장을 맡으면서 쉴새 없이 3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과 직접 만나 농촌 복음 운동을 전개했다.
또, 11월에 처음으로 일본 협동조합동맹을 조직하고, 민간의 협동조합 보급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도 그가 창립하고 지원한 코프 고베는 고베 생협과 나다 생협이 합병한 것으로 조합원이 130만 명이 넘는 일본 최대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생협으로 발전했다.
마르크스 자본주의 비판 동의하나 유물론엔 “NO!”
1949년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성찰과 고뇌가 담긴 『기독교입문』이란 출간했는데, 이 책은 기독교 사회주의자 도요히코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 서적이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에는 동의했지만, 유몰론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물리적인 폭력에도 반대했다.
이 책에서 도요히코는 “유물론자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결정적이며 역사의 운행이 기계적으로 예정되어 있다면, 성장도 아무 것도 없으므로 무저항주의의 윤리가 성립될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죄인은 회개하지 않고, 자본가에게는 양심이 없고, 모든 문제가 투쟁과 유혈에 의해서만 해결된다고 하면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한 길은 회개와 재생이 있는 길이다. 성장력이 있는 정신이 폭발하여 회개하고 재생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 때야 말로 무저항의 태도를 취하고 참고 견디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무저항 사랑이라고 한다. 무저항은 비겁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고 전한다.
1958년부터 몸이 쇄약해진 도요히코는 병중에도 매년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간 도쿠시마에 전도 여행을 다니다 1960년 4월 23일 72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저서에는 1921년과 1922년 감옥에 있을 때 처음으로 발표하고,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사선(死線)을 넘어』 『태양을 쏘며』등이 있으며『새벽이 오기 전에』(1924) 등의 소설을 비롯해 사회학연구서, 종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저작의 번역물 등 150권 이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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