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할 것 없네요. 그냥 인쇄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디자이너에게서 데이터를 받아 출력을 진행하고 서둘러 용지를 발주했다. 어째 너무 쉽게 끝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도 보고 클라이언트도 됐다고 했으니까 내가 디자이너에게 수정하라고 한 부분만 확인하고 그냥 진행했다.
1년에 두 번, 학기마다 진행하는 대학원 수첩. 아는 사람이 인맥을 만들려고 들어갔다가 내게 일을 연결해 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 당시 행정실장이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며 다른 대학원으로 옮겨가서 기존 업체를 물리치고 나를 불러주었다. 사실 기존 업체는 나보다 단가는 쌌지만 디자인은 꽝이었다.
그 뒤로부터 5년째 이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 번 학기도 늘 하듯 인쇄하고 제본하고 비닐커버(고주파) 끼워서 납품했다. 오늘쯤에는 제작비가 입금될 것이라 생각했다. 돈이 궁하던 차에 푼돈이지만 가뭄에 단비가 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침에 전화가 왔다. 직감적으로 그 대학원이라 믿었다. 역시나 그 대학원 행정실장이었다. 그런데 수첩에 잘 못된 게 많단다.
‘엥?’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몇 쪽 몇 쪽 불러준다. 인쇄물을 확인해보았다. 역시나 잘 못 된 게 사실이다. 스티커 작업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얼굴사진이 바뀐 것이다. 김CC와 김XC 이름 옆에 같은 사진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명은 휴대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가 잘못 기재 되어있었다. 디자이너의 실수였다. 이름이 비슷하다 보니 같은 사람을 두 번이나 넣었고 전화번호와 이메일은 기존 데이터를 바꾸지 않거나 엉뚱한 곳에서 옮겨온 것이었다. 타이핑 실수(오타)를 없애기 위해 프린트물과 한글데이터도 같이 받아 작업하니 틀릴 이유가 없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디자이너가 초안을 만들면 1차적으로 내가 한 번 보고 수정할 것을 체크해서 고친 다음에 클라이언트에게 넘겨 다시 확인을 받았는데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피드백이 늦게 오면서도 클라이언트가 고칠 것이 없다고 했다. 늘 수정사항이 몇 가지는 나오고 교정도 여러 번 봤는데 이번엔 1교로 끝났다. 속으로 ‘이번에는 새로운 교수도 들어오고, 없던 자리도 만들어 지고, 휴학생, 복학생, 자퇴생들이 많아 다소 복잡했는데 디자이너가 실수 없이 잘했구나’ 생각하고 칭찬까지 했다.
그런데 납품한지 3일이 지난 뒤에 오류가 있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디자이너의 실수를 나도 그렇고 대학원측도 교정볼 때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닐커버 외에는 다 재제작을 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잘못된 페이지가 대첩(하리꼬미) 상태에서 같은 대수 같은 면에 몰려 있어 재출력과 오려 붙이는 작업은 어렵지 않다. 제본이 사철이라 특정 대수만 찍는 것도 용이하지 않다. 혹시나 면지와 마닐라지(SC)는 다시 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제본소에 물어보니 그것도 안 된단다. 고로 인쇄, 제본은 완전 다시다. 용지도 재발주. 누구의 잘못이든 결과물은 제대로 만들어내야 된다는 게 내 소견이기 때문이다.
또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비록 이윤은 많지 않지만 정기적으로 해오던 일이고 처음에 우리 디자이너가 만든 포맷에서 업데이트만 하면 되는 정도라 그냥 군소리 없이 해왔는데 이런 사고가 터지니 난감하다. 수정할 것 없다고 해놓고선 왜 이제 와서 딴소리냐,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큰 소리 치기도 그렇고, 대학원 반 우리 반 부담하자고 해도 그렇고, 내가 다 뒤집어쓰자니 손해가 크고... 이래저래 좋은 일은 아니다.
어쩐지 쉽게 끝난다 했다. 그래서 찜찜했다. 쉽게 잘 풀릴 땐 항상 경계를 해야 한다. 분명 뭐가 잘못되어도 잘못되어 있다. 이번에도 그랬다. 나도 보고 행정실장도 꼼꼼한 사람이니까 문제없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이래서 편집이나 출판이 어려운 것이다. 교정은 봐도 봐도 끝이 없으니 말이다. 희한한건 책이 나오기 전에는 오탈자 같은 오류가 보이지 않다가도 인쇄가 되어 나오면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글을 쓰고 보니 장황하게 늘어졌다. 오늘의 교훈은 일이 쉽게 잘 풀릴수록 방심하지 말고 조심하자는 것이다. 일이 잘 된다고 마냥 좋아만 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경우를 예측해서 미리 대비를 해야겠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요즘 쉽게 되는 일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 할거나.
첫댓글 인쇄 끝나고 나면 틀린게 더 잘 보인다는 말에 동감입니다. 저희 거래처 중 **협회 수첩을 제작하는데 거래처에서 필림까지 다 뽑아놓고 100부만 샘플인쇄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후 수정도 많이 했지만 일이 좀 많이 나오는 협회일이기 때문에 비용보다도 꼼끔하게 보겠다는 생각이였겠지만, 인쇄 기장은 훈련되기 전 까지는 입이 쭉 튀어나오기 마련이지요. 지금은 좀 훈련이 되어서 세 번은 기본으로 안답니다. ㅋㅋㅋ
수업료 비싸기도 하다. 이젠 수업료 받아가면서 일해야 할 텐데... 주말에 산에서 속 풉시다..
수업료는 새로운 상황이거나, 반복되는 상황이거나 항상 낼 준비를 해야 하지요. 수업료는 내는데 사고 대책 및 예방이라는 교재는 왜 없을까요? ㅋㅋㅋ
학습지 편집을 하다보면(특히 영어)교정을 5교 까지 보고 책 나와도 또 틀린곳이 나오더라구요. 교정은 아무리 꼼꼼히 봐도 항상 부족하더라구요. 부족한 부분은 서로 합의해서 그냥 가지만요~ㅎ
합의를 할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
몇일전에 저의 회사에도 편집사고 건이 있었습니다. 3교까지 보고 출력 후 필름 교정, 인쇄 후 가제본까지 확인했는데 책이 다 나온다음에야 알았습니다. 당연히 다시 만들었죠..정말 가슴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만든다는 것은 너무 가슴 아픔 일이지요!
얼마나 큰 사고이길래, 제 작업 까정.....
교정을 보고 또 봐도 오탈자가 생기는 걸 보면 역시 편집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네요 휴우~
그러게요. 공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