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약한 시대 험한 口舌을 만나
암흑과 위험과 고독에 둘러싸여…』
흥얼거리는 동안 그의 얼굴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마치 청교도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 자신의 이상과 권세를 잃고 사면의 敵들 속에서 고독과 빈궁에 빠진 채 「실락원」을 썼던 밀턴의 암담한 처지와 자신을 병렬에 놓고 비교하는 듯했다.
당시 밀턴은 1640년대 영국의 왕실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만들려고 일으킨 내란에 크롬웰과 함께 뛰어들어 투쟁했으나 20년 뒤 결국 王政(왕정)은 복고되고 자신은 목숨만 간신히 부지한 상태였다.
─현대 한국문단에서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분이 왜 이리 비관적이고 암울한 소회를 토로하십니까.
『나는 지난 20년간 문학을 하면서 피해의식을 더 많이 느꼈습니다. 돈을 벌고 성취를 이루면서 승승장구했는지는 몰라도…. 대중과의 관계에선 성공했지만 1980년대 「이념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이른바 진보적 이념의 사람들, 左派 운동권 쪽에선 한 번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때 이미 문단을 장악했지만 지금은 정치·권력까지 잡고 있습니다』
소설가 李文烈(이문열·57)씨는 이미 1992년 「시대와의 불화」란 산문집을 통해 비슷한 의견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운동권으로부터 反動(반동)으로 지목됐을 때의 심경, 극단주의와 획일감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 민중문학에 대한 거리감, 월북한 공산주의자 아버지에서 연유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신 등을 설명했었는데 이후 그 불화는 십수 년이 지나도록 사그라지긴커녕 더욱 간극이 커지는 것 같았다.
『1984년부터 그들은 할퀴기 시작했어요. 1987년부턴 아주 심하게…. 저쪽은 사람들로 꽉 차 있고 이쪽은 나 혼자였죠』

─어떻게 할퀴던가요.
『음… 처음에는 월북한 아버지를 걸고 넘어지면서 「李文烈이가 아버지 때문에 어린 시절 혼나고 겁 먹어서 이념적 허무주의자니, 반공이 됐다느니 하다가 그 다음에는 제 작품세계를 대중·통속 소설류로 격하했어요. 1990년대 중반부턴 이른바 左派 논객들을 시켜 참으로 「야마리 까진(염치 없고 浮薄(부박)한 정도의 뜻을 가진 안동 지방 사투리)」 논리를 동원해 조지더군요. 그리곤 여러분도 잘 아는 「李文烈 책 반환 장례식」 사건들이 이어졌죠』
李씨는 2001년 7월 당시 金大中 정권에 의한 언론사 세무조사가 시작되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와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 등의 비판 기고문을 실었고, 이는 일파만파의 논란을 불러일으켜 급기야 일부 시민단체와 운동권 세력들에 의한 집중공격과 「책 반납운동」 등이 벌어졌다.
『당시 명계남 등이 주도해 저희 집 앞은 물론 충청도 등지에서도 「장례식」이 벌어졌는데 제 책들을 棺의 형태로 묶어 운구하는가 하면, 나무에 매달아 새들이 뜯어먹게 한다는, 소위 風葬(풍장)을 치렀어요. 심지어 책들을 마당에 깔아 馬·소가 밟고 지나가게 한 뒤 불쏘시개로 태워 버리는 식들의 퍼포먼스를 해댔죠. 또 안티 조선, 인물과 사상 등과 급조된 「안티 李文烈」 등 100여 개 단체들이 연대해 나를 명예훼손죄로 민·형사 訴를 제기하고 법원에서 기각되면 또 다른 지역에서 訴를 제기하는 등 끊임없이 괴롭히데요』
그때 충격으로 그는 멀쩡하던 혈압이 올라가고 당뇨병이 생기는 등 상당한 內傷(내상)을 입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현 시대의 부박한 세태에 대한 독설과 비판, 전투의지를 나타내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한국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이른바 진보·左派 계열의 이념과 풍조에서 떨어져 나와 고독하고 회의하며 방황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감도 감추지 않았다. 과연 지금껏 자신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한 갈등,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 말이다.


『상실감, 억압감이 더 많이 자리 잡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도 많습니다. 내 가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부인을 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진실의 힘이나 역사의 힘이 과연 (잘못된) 현실을 깨뜨리고 복권시킬 수 있는지 말입니다 』
1980년대 가장 성공한 작가로 손꼽히는 李文烈의 실패담은 어쩌면 어제의 낡은 일기장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실 그 자체에서 생성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도 『지금이 내 생애에 있어 가장 어려운 시기일지 모른다』고 했다.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그가 겪는 고초나 고뇌는 결코 개인적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 상당수가 지금 치열하게 체험하는 시대적 「공약수」라는 데 있다. 그 귀추에 따라 대한민국의 판도나 노선의 대변화도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린 계속 잔을 비우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술은 맥주와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폭탄주」였다. 李씨는 대단한 好酒家(호주가)였다. 서서히 술기운이 퍼지면서 그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고 활기와 힘이 솟는 듯한 모습이었다.
인생은 종전의 잿빛에서 다시 장밋빛으로 바뀌면서 우린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고 술기운에 두서 없는 얘기들을 마구 지껄였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알코올은 인간을 단순하게 만든다. 취재수첩의 기록은 밤 11시38분에 끝나 있었다.
「술 많이 먹다. 술 마시면서 본인(李씨)이 너무 happy해하고 있다. 술을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기자의 기억도 그 시점에서 끊기고 말았다.

「우리 시대 최고들의 실패담」 주인공으로 李文烈씨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1980년대 숱한 화제작과 걸작을 양산해 낸 최고의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문단의 누구보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드라마틱한 상황 변화가 주목되어서다.
지금까지 팔린 책은 약 2700만 부로 양적인 측면에선 한국 어느 소설가도 따라오기 힘들다. 여기에는 대중소설격인 「삼국지」 평역 10권이 대략 1500만 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나머지는 180만 부가 팔린 「사람의 아들」을 비롯 「젊은 날의 초상」, 「레테의 연가」, 「황제를 위하여」,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 문학성과 중량감으로 주목받은 秀作(수작)들이 대부분이다.
한때 문단의 굵직한 상을 휩쓸었고 대학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대학생들이 가장 즐겨 읽는 책의 저자로 수년 연속 꼽혔었다. 예술성과 대중성이 결합된 폭넓은 문학성은 세계 각국을 통해 다투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던 그였지만 한국사회의 아킬레스腱(건) 같은 이데올로기(이념) 문제에서 침묵하지 않고 확실한 右(우)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그는 반대 진영으로부터 숱한 공격을 받고 갖은 구설에 오르내린다.
한편에선 그를 「보수·반동」 심지어 「수구꼴통」의 대명사라고 비난하면서 그의 문학에 弔鐘(조종)을 치고 장례식을 거행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선 소신과 시대정신, 행동주의를 겸비한 문학 지사로 치켜세우는 등 그는 최근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민족·자주·통일·反美·분배·평등·과거청산·부패추방·개혁·진보로 요약되는 이 시대 主流 코드와의 불화는 결국 문단 안팎에서 그를 「왕따」로 내몰아 그의 소설은 최근 화제작이 없을 정도로 뜸해지고, 한때 가장 넓은 독자층을 자랑하던 그의 소설을 외면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대와의 불화는 또 그가 퇴계 李滉(이황) 선생의 陶山書院(도산서원)을 본떠 야심만만하게 만든 「負岳文院(부악문원)」을 사실상 개점 휴업케 했고,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추진하려던 계획도 아직은 미완에 그치고 있다. 지난해 봄 「한국의 보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下에 제17代 총선의 한나라당 공천심사에 뛰어들었으나 어쨌든 열린당이 총선에서 이기는 바람에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승승장구하던 그의 초년 문학 인생과 대조적으로, 성공 이후 계속되는 어려움과 실패에 대해 지금 그가 느끼는 소회는 어떤 것일까.
李씨를 처음 만나기로 한 날은 늦겨울 햇살이 눈부신 지난 2월2일 오후였다. 중부고속도로 西이천 톨게이트 초입에 있는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자택은 오종종한 시골 집들 사이로 마치 작은 성채처럼 눈에 들어왔다. 우선 바깥채 격인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서구식 건물은 그가 후배 문인들을 양성키 위해 건립한 부악문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안에서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텅빈 사무실, 도서실을 지나 2층 출입문으로 나가니 넓은 정원과 함께 아담한 집 두 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초인종을 눌렀으나 역시 응답은 없고…. 두 채를 번갈아 가며 문을 두드리고 외쳤으나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잘못 왔나?」 생각하며 일단 집 밖으로 나오려는데 안채 문이 열리면서 부스스한 모습의 李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고 죄송합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하고 대취해 여태껏 자다 보니 문도 못열어 드렸습니다. 이리 들어오시죠』
말 그대로 자다가 일어났는지 허름한 차림에 맨발, 얼굴은 어젯밤 「격전」을 말해주듯 부석부석했고 머리카락은 일부 뻗쳐 있었다. 『글쎄 포도주를 세 병이나 했는데… 참 고약하데요』하면서 술탓으로 돌렸다.


도대체 무엇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인 李文烈을 술 취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는 최근 본인 문학의 세계화가 여의치 않다는 사실을 먼저 꺼내면서 실패담의 화두를 열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문화계 主流는 진보·左派가 잡았습니다. 1987년에 첫 번째 위기가 내게 찾아왔죠. 대학 인기작가 1위 순위가 삽시간에 22위까지 밀려나더군요. 1994년에 다시 회복이 되었지만 그때 「국내만으로 안 되겠다. 세계로 나가자」고 생각했어요. 1989년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 등 지금까지 15개 나라에 45권의 제 책이 번역 소개됐죠. 그중 프랑스에서 책이 8권 나와 5만 권 팔린 것이 최고 성적이에요. 문제는 미국인데 시장이 전혀 열리지 않아요. 출판대행사를 미국 최고의 와일리(Wylie)社로 바꿔 6년째 됐는데 2000년에 「일그러진 영웅」 딱 한 권만 출간됐을 뿐입니다. 지난여름 번역이 완료된 「사람의 아들」을 출간하려는데 지금까지 메이저 출판사 세 곳으로부터 모두 거절됐습니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이념 공방이 본격화된 1990년대 초반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왔다. 외국어로 번역하기 쉬운 문체로 소설을 써 한국문학의 세계 수출을 이루고 이를 통해 세계적 공감대를 확산시키겠다는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라 「우물 밖의 개구리」가 되겠다는 야심찬 포부였다. 그러나 세계 시장의 벽은 아직 높았다. 외국 독자들에게 李文烈은 아직 낯선 존재였다.
李文烈은 우리 시대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사실 많은 돈을 벌었다. 정확한 액수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팔린 책들의 인세만 줄잡아도 요즘 시세로 수백억원은 될 것이다. 1990년대 그의 명망은 절정에 달해 대학 1년 중퇴의 학력임에도 불구하고 1994년 그는 세종大 국문과 정교수로 초빙돼 3년간 강의를 했다.


그는 그 여세를 몰아 1998년 이천 자신의 자택에 「부악문원」이란 자신의 문학 私塾(사숙)을 열었다. 연건평 500평에 강당 2개, 방 15개, 도서관, 사무실, 식당 등을 갖춘 규모로 개인 문인 양성소로는 사실상 최초다.
매년 5명 가량의 문인 지망생을 뽑아 2~3년간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동·서양 고전을 가르쳐 주는 프로그램이다. 비용 일체는 李씨가 부담한다. 당시 문단 안팎에선 李씨가 파벌을 만든다, 또 일을 저지른다며 부러움과 시샘이 교차된 반응을 나타냈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죠. 학생들은 어디 갔습니까.
『2년 전부터 사실상 중단했습니다. 지금은 단지 먹고 자고 시설만 이용하는 客員(객원) 학생만 3명 있을 뿐입니다』
─왜 잘 안 되던가요.
『예. 당초 부악문원을 만들 때는, 첫째는 과거 도산서원을 만들어 젊은이들과 18년간 부대끼면서 가장 득을 많이 본 사람이 퇴계 이황 선생이었던 것처럼 나도 충전을 하고 싶었는데 달성 안 됐고, 둘째는 내 경험으로는 방 한 칸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기만 해도 큰 기여로 생각했는데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의식주 문제가 그리 절실한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고, 셋째는 학생들을 위해선 나도 한 주에 이틀을 전부 투자해야 하는데 창작활동에 무리가 됐어요. 마지막으로 학생들 스스로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몇 년 공부해야 석사학위도 없고 취업보장도 없으니…』
이에 따라 문원 지망생은 해마다 줄어들고 질적 저하는 불가피했다. 더구나 스승인 李씨가 때마침 적대 세력들로부터 「수구·반동주의자」로 찍혀 연일 싸움으로 에너지를 소모한 것도 학생들의 발걸음을 돌리게 한 계기가 됐다. 李씨가 쏟아 부은 열정과 경제적 부담이 무색할 정도다.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문학으로 돌아왔죠. 지난 몇 년간 정치에 과도한 관심을 가졌는데 이제 시간도 별로 없고 또 내 전공도 아니라서…』 (그러면서도 이후 그의 화제는 계속 현실 정치 세계를 넘나들었다)
─취미는?
『별로 없어요. 술 마시는 것이 취미랄까. 건강한 편이라 운동 등 다른 것은 없습니다』

─요즘 가장 골치 아픈 일은.
『바로 정치적인 이슈죠. 이상한 新세력의 집권…. 관심과 불안이 아울러 있는데 이들의 인터넷 문화와 한국적 포퓰리즘 외에 우리가 모르는 무엇이 또 있는 것 같습디다. 즉 현재 한국의 보수파는 「이상한 덫」에 걸려 있는 듯해요. 무지 내지 심각한 정보 부재의 「덫」이 아닌가 해요.
특히 對北관계에 관한 정보는 완전히 官邊(관변: 정부·여당) 실세들이 쥐고 있고, 우리 정보는 50년 전 것이나 미국의 과장·왜곡된 것들이 고작이니, 현실적으로 큰 착각을 할 수도 있어요』
─큰 착각이라면 도대체 무엇일까요.
『야당(한나라당) 공격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 과연 북한 커넥션 左派가 있을까하는 점인데, 여기엔 솔직히 나도 의심이 듭니다. 북한은 적화할 능력이나 의도도 없고 현상유지에 급급할 뿐이며, 단지 그들의 호전적 태도는 자기들 내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보수파들은 정보 부재란 「덫」에 걸려 이런 현실과 점점 멀어져 가고 있으며 이런 모습이 동족과 민족을 우선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꼴통 우파」로 비쳐지는 것 같아 우울해집니다』
이 대목에선 그의 평소 논리나 식견과는 다소 배치되는 듯했다. 그는 현존 작가 중 누구보다 북한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위 「빨갱이」 아버지를 둔 덕에 어린 시절 일가족이 수없이 떠돌아다녔으며 이로 인한 궁핍, 혼란, 방황의 추억은 동시대인들의 고난의 궤적을 추월한다.
두 살 때 월북한 아버지의 사진을 성인이 되도록 본 적이 없으며, 가족 5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도, 가구도, 심지어 김칫독 마저 가져본 적이 없다. 관헌의 추적을 당하면 언제든지 뜰 수 있도록 냄비, 양은 그릇, 옷, 트렁크로 세간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李文烈은 어려서부터 「공산주의」라고 하면 驚氣(경기)를 일으켰고 그런 공산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아버지가 이북에서 숙청당하고 고초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훗날 듣고서는 더욱 진저리를 쳤었다. 그런 그가 공산주의에 대해 「유연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인지, 아니면 헷갈리고 있는 것인지….
─자신에 대해 요즘 느끼는 감정은 무엇입니까. 불만스럽다거나 좋다든가….
『속된 말로 「고약한 패」를 잡았다는 느낌입니다. 더 나은 패를 잡을 수도 있었고, 그 패가 굉장히 유리할 것이라는 것도 미리 알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알다시피 문학은 이미 1980년대에 거의가 그리로 넘어갔죠. 나 외에 다 그쪽 「패」를 골라 잡았습니다』
─후회되십니까.
『그건 아직 몰라요. 그러나 「내가 왜 이 패를 고집했을까」 생각해 보면 어떤 근거도 없어요. 아버지 문제도 그렇고…. 촌스럽고 손해 보는 고약한 고집 때문이랄까. 나는 사람들의 浮薄함을 싫어합니다. 예를 들어 배를 타고 가다 경치 좋은 곳이 나오면 다 그리로 몰려가 구경하는 경우 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나는 홀로 반대편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라고 할까요. 나마저 그리로 간다면 배가 기우뚱해 침몰할 수 있다는 「공정하고 어른스런 걱정」 때문이랄까요(그러면서 허탈해하고 씁쓸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李文烈씨는 1948년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그해에는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수립됐고 左·右 간 싸움이 치열하던 시기였다. 그는 집안을 風飛雹散(풍비박산)으로 몰고 간 분단과 左·右 대립의 비극을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체험하면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李元喆(이원철)씨는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남로당 지하조직원이었다. 당시 李씨를 임신한 어머니 曺南鉉(조남현)씨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시내에서 「불온 삐라」를 뿌리다 경찰에 잡혀 유치장 신세를 진 뒤 석방됐다. 당시 아버지는 이를 두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사내라면 열렬한 혁명투사가 되라』는 의미에서 「세찰 열(烈)」자를 이름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돼서 李씨의 본명은 李烈(이열)이 됐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아버지의 염원과 달리 李씨는 공산주의와 혁명노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인물로 성장했다.
아버지는 당초 광복 후 중도좌파인 몽양 呂運亨(여운형) 선생이 주도한 建準(건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다 노선을 左로 더 틀어 남조선노동당 총책인 朴憲永(박헌영) 계열로 옮겨갔다. 1947년 朴憲永이 美 군정의 지명수배를 받고 도피생활을 하다가 월북 전 1주일 가량 李씨의 혜화동 집에서 은신한 적이 있다는데, 당시 어머니는 『중키에, 중절모에 안경을 쓰고 굉장히 차가운 인상의 소유자』로 기억했다.
1949년 소위 남로당 국회 프락치사건이 터지면서 이에 연루된 아버지와 가족들은 경기도 양주군 하계리(지금의 서울 노원구 하계동)로 도피, 농부로 위장하고 지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破竹之勢(파죽지세)로 내려온 인민군들 앞에서 아버지는 숨겨 두었던 당원증을 꺼내 보였고, 그 길로 아버지는 지금 서울로 가 북측 권력기관에서 일하게 된다.
이후 수원농대(서울大 농생대 전신)로 내려가 북한 당국이 임명한 「학장」으로 있다가 9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자 단신으로 이북으로 넘어갔다.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세 살배기 李씨만이 이북으로 향하다 11월 경기도 연천 부근에서 남한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
『전쟁통이라 빨갱이 연루자들은 다 죽일 때였죠. 할머니께서는 저를 때려 밖으로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나가 고아로서라도 살아남아 씨를 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임무를 인계받은 국군 장교가 『빨갱이면 몰라도 빨갱이 가족은 풀어 주라』고 명령해 그들 가족은 九死一生(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李씨는 『그때 경험에서 그런지 어머니께서 생전에 국군에 대한 인상은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에 대한 인상은 나쁠 수밖에 없었다. 휴전 후 李씨를 비롯 3남2녀의 아이들과 어머니는 「월북한 빨갱이 아버지」를 둔 탓에 늘 수사기관에 쫓겨 다녔고 그 덕에 李씨네는 집도 절도 없이 거의 「東家食西家宿(동가식서가숙)」 수준으로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세간살이라야 방 한 칸에 사과궤짝으로 만든 책상 겸 상에 오래된 고리짝, 식기·수저가 전부였다.
『1960년대 주민등록증이 생기기 전만해도 한 마을에서 2~3년간은 지낼 수 있었어요. 그러다가 아버지의 존재가 학교나 이웃에 어렴풋이라도 알려지게 되면 우리는 그날로 동네를 떠나 어디론지 먼 곳으로 가야만 했죠.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어머니가 늘 그러신 것은 언젠가 전쟁이 터져 아버지가 돌아오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혹독한 생활이었다. 李씨와 동갑내기 소설가 金薰(김훈)은 20년 전 李씨의 가족사를 그린 소설 「영웅시대」가 화제가 됐을 때 이렇게 취재기를 썼다.
『6·25와 국토분단은 소설가 李文烈의 「원죄」다. 자신이 행위하지 않은 행위의 죄악성에 대해 그의 생애는 문학적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없다. 그 원죄는 李文烈뿐 아니라 동시대 전체가 어쨌든 짊어지고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정신의 쓰라린 상처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모든 사진과 기록들은 불태워졌고, 소년 시절의 그에게 「아버지」는 「비밀스럽고 불길한 것들」의 상징이었다. 載寧(재령) 李氏 가문이 유서깊은 가문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경북 영양군 석보면의 기름진 농토 위에 이룩했던 400년 역사는 그의 「아버지」의 사라짐에 의해 쇠락의 길로 치닫게 됐다. 유년 시절 여린 마음의 李씨에게 「아버지」는 늘 죄악의 개념과 일치했다.
『제법 나이가 든 뒤 외가에 마지막으로 한 장 남아 있던 빛 바랜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30代 남자의 얼굴이었는데 나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어요. 단지 내 큰형을 닮았다는 사실만이 기막힐 뿐이었죠』
李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물론 없다. 단지 일가친척과 아버지의 친지들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아버지는 대략 1915년경 5대 독자로 태어났고 일곱 살 때 서울로 유학왔다. 수백석꾼의 넉넉한 집안 살림 덕분이다.
그는 종로구 교동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거쳐 당시 최고 명문교로 치던 경성제1고보(지금의 경기고교)를 다니다 1929년 6·10 만세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퇴학을 당했다. 이후 사립명문인 휘문고보에 편입해 졸업하고는 일본 東京농대로 유학가 농업경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아마 이때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좌익에 심취돼 공산주의자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戰後 한국인들의 생활은 엉망이었지만 시골 천석꾼의 부잣집 딸로 자라난 李씨의 어머니 曺씨에겐 더욱 가혹했다. 曺씨는 어린 시절(1920년대) 화신백화점에서 파는 간탄후크(원피스 종류)를 입고 자라 씀씀이가 크고 사치에 익숙한 터라 당초 살림이나 물정엔 어두웠다.
『고향에 어머니 명의로 전답도 있고 재산도 있었는데 전혀 관리를 못 했어요. 예컨대 쌀이 떨어지면 남의 이목을 피해 밤중에 몰래 고향을 찾아가 당신의 소작인에게 사정을 해 식량을 구하든가, 아니면 아예 땅을 일부분 팔아 생활비로 충당하는 식이었죠』
땅을 팔아 오면 몇 개월간 李씨네 3남2녀 식구들의 생활은 윤택해졌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거의 하루 끼니를 때우기 어려울 정도의 「냉탕」·「온탕」 생활의 반복을 거듭했다. 주거지는 외가 영천에서 친가 영양, 다시 안동, 서울, 밀양, 영양, 부산 등으로 계속 바뀌었다.
李씨는 밀양초등학교를 졸업했다. 6학년 때 당시 1등이며 급장을 했던 친구가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낸 朴奉欽(박봉흠) 前 청와대 정책실장이다.
『요즘 동창들을 만나면 내가 공부를 잘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실 10등 안에 겨우 들 정도의 실력이었을 거예요』
그는 평범한 어린이였다. 유리창도 깨고 장난도 심한 악동이었지만 당시로선 거액인 1만환을 주워서 경찰서에 신고하는 선행도 했다. 밀양中에 진학했는데 5개월 다니고 그만뒀다. 생활고에다 또다시 이삿짐을 싸야 했기 때문이다. 안동으로 갔는데 정규 중학교가 없어 고등공민학교에 다녔다. 당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친척 형(항렬은 낮지만 나이가 위라서)인 李在五(이재오) 現 한나라당 의원이 보던 책들을 빌려 공부하곤 했다.
이때부터 일본소설을 비롯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카뮈의 「이방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등 세계 명작을 본격적으로 독파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다 힘든 시절이고 워낙 험하게 산 경험이 있어 특히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친구들과 떨어져 있다는 외로움은 컸죠』
검정고시를 통과해 그는 안동高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 후 그만뒀다. 집도 부산으로 간데다 결석이 워낙 많아 퇴학처리 된 것이다. 학교 수업도 재미없었던 걸로 회고한다. 어머니가 땅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이사를 해 정착한 부산 하단에서의 생활은 훗날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재현된다.
1968년경 그는 서울大 사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1년 다니고는 그만둔다. 이미 중학 시절부터 정상적 학업활동에서 벗어나 지내왔었고 실제로 재미도 느끼지 못해서이다. 그의 문학수업은 이처럼 계속된 방황과 일탈, 고독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대학 친구들 기억에는 제가 「시골 대지주 아들로 호탕하게 돈을 쓴 것」으로 남아 있다는 거예요. 참 가난했는데 아마 아르바이트로 벌은 돈으로 한잔 산 기억이 확대 해석된 것 같아요』


대학을 중퇴하고 그는 엉뚱하게 고시공부에 몰입했다.
아마도 월북자 아버지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출세하기 위해서였던 것같다. 정치와 권력에 대한 정서가 유난히 강한 고향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인연이 없었는지 1973년 군대 갈 때까지 내리 네 번 낙방을 했다.
이쯤 되면서부터 그 「음산하고 불길한 죄악」으로서의 아버지는 어느덧 「생명으로서의 그리움」으로 내부에 자리 잡아 가면서 서서히 그와 아버지는 화해를 하게 된다.
『글쎄 뭐랄까, 그리움이랄까 궁금증이랄까, 그런 감정에 휩싸이게 됐을 때 나는 그것을 글로 쓰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소설을 만들겠다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궁금증을 어떻게 해서든지 토로해 보고 싶은, 막연하지만 강렬한 충동을 느꼈죠』
훗날 그의 「영웅시대」는 이렇게 해서 태어나게 된다.

그는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새하곡」이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이때부터 1984년까지 초반 5년간은 작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문단의 主流 세력들도 신인 李文烈의 등장에 너그러웠다. 李씨 표현에 따르면 「밀월기」였다.
神과 인간의 관계를 그린 문제작 「사람의 아들」이 1979년 출간되면서 일약 李씨는 문단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주목의 대상이 됐다. 이후 한두 달 건너서 주옥같은 중·단편들이 쏟아져 나왔다. 훗날 베스트셀러나 秀作으로 꼽히는 「젊은 날의 초상」(1980년), 「금시조」(1981년), 「황제를 위하여」(1982년), 「레테의 연가」(1983년), 「영웅시대」(1984년) 등도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상복이 터져 제3회 오늘의 작가상(1979년), 제15회 동인문학상(1982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83년), 제4회 대한민국문학상(신인상) 등을 연달아 수상했다. 매스컴으로부터도 각광받아 1984년 한 일간지는 李씨 가족이 대구에서 서울 서초동으로 이사하자 지면의 절반을 할애해 그의 서울살이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돌연 1984년 말부터 1987년까지 절필에 들어갔다. 이른바 「시대와의 불화」의 시작이었다. 『이념의 시대였던 1980년대 운동권들의 나에 대한 비판은 절필의 유혹마저 느낄 만큼 작가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비록 新군부 독재정권下의 파쇼정치에 대한 반발이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실천·민중 문학계열의 노선과 운동은, 그에게는 일방의 잣대로 매겨진 진리나 양심, 정의만을 강요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 같은 극단주의와 획일성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이 생명인 소설가에는 독약으로 인식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절필의 동기가 된, 비판세력의 그에 대한 공격은 장편 「영웅시대」에 먼저 집중됐다. 월북한 그의 아버지를 포함, 李씨네 불행한 가족사를 소재로 다룬 이 소설은 1982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발표됐으나 대중에 알려진 것은 1984년 민음사에서 출간되면서부터였다.
「낭만주의」, 「허무주의」 또는 「전망 결여와 이념 혐오」, 「민중 불신과 궁극적 체제 옹호」, 「고급 부르주아 문학의 기수」 등으로 몰아붙이는 비판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훗날 어느 평론가는 『유년 시절 월북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적의, 그리고 「영웅시대」 이후의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결국 脫이념·脫역사로 가는 한 허무주의자로서의 李文烈 문학의 근원』이라며 李씨를 「사상적 無정부주의자」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1980년대 어느 날 60代 노인 부부가 李씨를 찾아왔다.
그중 부인은 李씨의 아버지가 서울 유학 시절 하숙하던 집의 딸이었다. 이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월북했으며 1953년 4월 부부 간첩으로 남파 직전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났었다고 전했다.
당시 아버지는 남파 간첩들의 최전진 기지인 해주 초대소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남파된 두 사람은 이후 모두 잡혀 부인은 전향하고 남편은 非전향장기수로 오랫동안 복역해 오다 출소했다(이들의 이야기는 소설가 박영한의 「장강」이란 소설에서 소개된다).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어떻게 아버지를 팔아 「영웅시대」 같은 반동소설을 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비록 이때는 인간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아버지」와 화해한 지 오래됐지만 『아비까지 팔아먹느냐』는 말은 오랫동안 비수처럼 그의 마음을 찔렀다.
이후 여러 사람들의 傳言(전언)을 종합해 보면 그의 아버지는 종전 후 金日成에 의한 대대적인 朴憲永 계열 숙청 때 함경도로 쫓겨가 1999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불우하게 지냈다고 한다.
李씨에 대한 더욱 본격적인 공격은 1987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문학사상에 발표되면서 시작됐다. 당시는 역사적인 6월항쟁을 통해 6·29 선언이 나오고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막 실현되기 시작하던 시점이다.
이 소설은 자유당 정권 말기를 시대 배경으로 해 시골 초등학교 상급반 교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권력과 그 주변 인물의 속성을 그린 단편이다. 「엄석대」라는 급장으로 典型化(전형화)된 권력, 그리고 그 주변에서 쉽게 달아오르고 무섭게 변절하는 반 아이들의 기회주의 근성을 그려 나가면서 권력의 무상함과 거기에 기생하는 변절적 순응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는 내용이다.
『외국에선 이 소설을 보고 「한국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호평을 하는 데, 국내 비판세력은 그 소설에서 주인공인 「나」가 「엄석대」의 폭력 위압 비행에 대항하지 않고 방관하다가 나중에는 굴복 동조하는 자세를 놓고 비판하고 있어요.
나는 그런 부조리한 현실 그 자체를 보여 준 것인데, 그들은 「왜 주인공을 기회주의적이고 체제옹호적으로 그렸는가」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가 혁명적인 인물이나 투사를 주인공으로 해 이들의 「영웅적」 행동을 그리는 소설을 쓴다면 그것이 뛰어난 문학성이나 예술성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그는 이때 이미 문단內 主流 권력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쪽 문인들과 교제를 끊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私的으론 친합니다. 그래도 문인들은 선한 편입니다. 나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친구를 모임에서 만나면 그 친구는 살살 나를 피하죠. 일종의 미안해하는 표시죠. 우리 문단엔 아직 그런 것이 살아 있어요』

─李선생 편은 얼마나 됩니까.
『내 편은 없어요. 있으면 박살내니까(웃음)』
진보·좌파계열의 논객 강준만(전북大 교수), 진중권씨 등의 「독한」 공격도 일조를 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이들은 그를 수구·반동주의자로 몰아 계속 공격했다. 그러나 李씨는 그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려했다. 2001년 7월 李씨가 당시 DJ 정권에 의한 언론사 세무조사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시발된 李文烈 책 반환 「장례식」 사건들과 각종 소송은 이른바 「李文烈 때리기」의 절정판이었다.
―비판에 대해 너그럽지 못한 측면은 없을까요.
『내 견해에 누구나 반대를 표시할 수 있으나 표시하는 「양식」이 문제입니다. 설령 원인 제공을 내가 했다손 치더라도 말입니다. 현대소설은 서구에서 긴 역사를 갖고 있지만 살아 있는 작가의 책을 불태우고 장례식을 치른 사례는 독재자 히틀러의 경우를 제외하면 없을 겁니다. 책 내용이 싫다면 안 보면 되지 않습니까. 결국 내가 인류사에 유례없는 악질 작가라든지 아니면 그들이 악질이겠죠 』
―李선생님도 惡이 아니지만 그들도 惡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습니까.
『惡과 無知는 거의 동의어입니다. 잘 몰라서 저지르는 일이나 경박한 태도도 엄청나게 해악을 끼칩니다. 세계사를 보면 無知로 인해 얼빵하게 당하고 부화뇌동해 더 큰 惡을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李선생 역시 너무 善惡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닐까요.
『惡은 있습니다. 본질에서 나오기보다는 표현하는 양식이나 태도에서 나오는데… 左·右 이념은 인류 역사의 두 축입니다. 左를 선택한 것이 「惡」이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右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에겐 역시 「장례식」 사건 등에서 느낀 앙금과 상처가 많이 남아 있는 듯했다. 비판을 해도 正道와 품위가 있는 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 1월 중앙일보가 한국사회의 「품격」에 대해 여론조사를 한 결과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품격 점수」는 100점 만점에 불과 36.6점을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정치인의 언어(28점), 지도층을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29점) 등의 품격점수가 밑바닥을 차지했다.
『요즘 「톨레랑스(프랑스어로 「관용」이란 뜻)」를 얘기하며 「관용」, 「토론문화」를 주장하는 이가 많습니다. 지역감정을 타파하자는 소리도 높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야말로 관용이 부족하고 지역감정에 휩싸인 경우를 많이 봐요. 그러니까 「나는 옳으니 네가 고쳐라」는 뜻이죠』


李씨는 지난해 KBS와 1시간짜리 특집방송을 위해 나흘간 제작진과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나와 홍세화(「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저자로 대표적 좌파 논객)씨가 등장해 한국사회를 논하는 프로그램인데 정작 홍씨와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나는 대담장소에 나가려고 했는데 홍씨가 어떤 연유인지 오지 않은 모양이에요.
결국 각자가 한 이야기를 따로 편집해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는데 그 내용이 걸작입니다. 총 19시간 동안 제작진과 얘기를 나누면서 그중 일부분에 「나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 「한국의 보수주의도 비판받을 면이 있다」고 몇 마디했는데 정작 방영될 때는 다른 얘기들은 거두절미하고 문제의 「반성」, 「비판」 부분만 뽑아 방영된 거예요.
그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이 「李文烈이 그럴 수 있는 거냐」고 나중에 항의하고…. 더 웃기는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가 대담석 빈 두 자리를 비추면서 「두 사람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화해하지 않았다」는 말로 끝낸 것입니다. 나오지 않은 사람이 누군데 이런 식의 호도를 하는지… 그 다음부턴 정말 인터뷰하기가 겁나더군요』
―李선생이 이 사회를 보면서 걱정되는 점들은 무엇인가요.
『경박한 표피문화예요. 요즘 대학생들에게 李文烈은 수구·반동을 대변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죠. 내 책을 비판하는 것은 좋은데 기껏 평역한 「삼국지」 몇 권 정도 읽고 비판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냥 우리 사회에 떠돌아 다니는 시그널을 보고 따라 비판하는 거예요. 이런 표피문화는 결국 깊이 없는 세상 인식, 사회관으로 바뀌는 데 이것이 걱정입니다』
―왜 사회가 경박한 표피문화로 흘렀습니까.
『포퓰리즘의 위선적 술수 때문이죠. 포퓰리즘이야말로 세속적 권력추구 방식입니다. 1980년대 민주화 세력도, DJ 정권도 속성은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인간의 맹점 중 하나가 「평등」의식인데 이를 자극해 정치에 이용하려는 것은 영원한 유혹입니다. 「서울大 박살내자」고 하면 반대자보다 지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을 겁니다. 「우리 함께 나눠 같이 잘살자」는 이야기 얼마나 멋있습니까. 「북한은 동족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껴안고 통일을 이루자」는 말은 어떻고… 反美, 자주는 또 어떻습니까.
반면 「북한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대비하자」는 말은 얼마나 쪼잔하게 들립니까. 「미국이 超강대국이므로 親美를 하는 게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말도 그렇지요. 최근 위정자들은 이처럼 본질과 다른, 그러나 그럴듯하고 멋있어 보이는 말과 정책으로 승부를 하니 세상이 이렇게 된 거죠』

李씨의 언성은 점점 높아지고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고 있었다. 그러다 절정을 지났는지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고르다 지친 듯 허탈한 듯 낮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멋있다는 것이 전부이겠습니까. 만약 (그로 인해) 다수의 재앙이 온다면 자제해야지…, 설득해야지. 그것이 公人(공인)이 해야 될 일이 아닙니까?』
우린 이제 李文烈의 삶의 궤적을 음미하고 해석할 차례다. 종합해 보면 그의 삶은 훌륭한 성공사례다. 적어도 「시대와의 불화」가 생기기 전까지 말이다. 한국이 전쟁의 참화를 딛고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통해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융성해졌듯이 李씨도 훌륭한 一家를 이뤄냈다.
어쩌면 그는 한국인 성공신화의 전형일는지도 모른다. 대학도 안 나왔는데 오직 펜대 하나로 富와 명성을 동시에 성취했다. 반역자의 아들이란 굴레도 한국 최고의 작가로 질주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분단의 비극으로 비롯된 불행한 가족사지만 가난·학벌·사상의 장벽을 뛰어넘는 그의 분투로 「해피 엔딩」으로 매듭지어졌다. 어쩌면 李씨에게만 베푼 듯한 대한민국의 「예외적」 관용성이 동시대 같은 멍에를 지고 고통받아 온 수많은 사상범과 가족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일 수도 있다.
李씨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점은 그 힘든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콤플렉스나 상처의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난했지만 주눅 들지 않았고, 있는 자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부자가 돼도 사치스럽게 살지 않았으며, 부악문원을 건립할 정도로 베풀 줄도 알았다.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환경을 탓하지도, 배운 자를 시기하지도 않았다. 「빨갱이」 아버지를 둔 덕에 늘 쫓겨다니는 삶을 살았지만 의심 많고 침울한 부정적 성격이 아니라 솔직하고 당당한 긍정적 성격의 소유자가 됐다.
운동권 출신 인사들 중에는 과거의 투옥 경험이나 부정적 기억에 사로잡혀 대한민국 자체나 그 역사를 부정하는 이들도 있으나 李씨는 그 반대다.


李씨의 인생역정을 보고 있노라면 새삼 盧武鉉 대통령이 연상된다. 盧대통령도 李씨와 비슷한 인생 굴곡을 겪었고 극복했지만, 여러 면에서 두 사람은 대칭되는 관계다.
그러나 李씨가 「시대와의 불화」를 느끼며 산 지난 십수 년은 그에게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李씨 역시 실패의 나락으로 빠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실토한다. 지금이야말로 李씨의 全생애에서 絶體絶命(절체절명)의 위기의 시기일는지도 모른다.
그의 불안감의 요체는 그가 이른바 한국사회의 진보·左派 세력에 대해 말과 글을 통해 끊임없는 비판을 했고, 이들 세력은 이에 맞대응해 자신을 포위·공격하는 惡순환이 이어져 왔으며 이제 이들은 한국사회의 主流 세력으로 부상한 반면 자신은 「왕따」돼 單騎匹馬(단기필마)로 황량한 벌판에 서 있다는 것이다.
자유당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의 문제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선 부조리한 권력의 허구성과 거기에 이기적으로 적응하는 소시민적 근성과 변절이 寓意的(우의적)으로 잘 표현돼 있다. 어쩌면 李씨는 이처럼 침묵하거나 적당한 타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군상이 과거 독재시대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주화 세력이 득세한 지금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라도 나서서 주장해야 된다는 사명감을 굳건히 갖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李씨를 비판하는 측에선 『왜 독재시대 때는 잠자코 있다가 지금 떠들지?』라고 비아냥거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李씨의 「성격」은 확실히 불리하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나 주장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직설적 성격의 소유자로 일상생활이나 對人관계에서 더러 손해를 보는 스타일이다. 더구나 본인이 앞장서서 하지 않아도 될 얘기, 일단 말해 버리면 논쟁거리가 될 주장 등을 눈치 안 보고 발설하는 바람에 큰 시비나 논쟁에 휘말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점들은 李씨 반대세력이 결집해 李씨를 갖가지 명분으로 비판하는 데 좋은 빌미를 주고 있다.
두 번째는 李씨의 「直觀(직관)」이다. 그는 동전의 앞뒷면이 다르다는 사실, 완벽한 인간·이념·제도는 없다는 현실, 만물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법칙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李씨의 이같은 직관은 新군부 독재 등장으로 삭막하기만 했던 1980년대 초 한국문단을 통해 빛을 발하지만 민주화 이후 진보·左派세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업보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李씨를 「불화」에 빠뜨린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시대」 탓이다. 李씨가 아무리 용의주도하게 대비한다고 해도 시대 자체가 李씨 같은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시대와의 불화, 주위로부터의 「왕따」에서 오는 울분·아픔·답답함을 풀기 위해 폭음을 한다.
李씨의 후반기 生이 성공담이 된다면, 이를 곧 대한민국의 성공담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요,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될 것이다. 물론 李씨가 시대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李씨를 결정짓겠지만….
아이로니컬한 것은 그의 후반기 삶의 궤적과 아버지의 그것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북한 공산주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북으로 갔으나 결국 왕따 당하고 숙청당했다. 반면 그의 아들은 남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목청을 높였으나 점차 왕따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아버지를 숙청한 북한의 主流 세력이 사실상 공산주의를 가장한 金日成 절대권력이라면 李씨를 공격하는 남한의 主流 세력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포퓰리즘 집단권력이라는 비유는 어떨까.
지금으로 봐서 소설가 李文烈은 열세다. 흔들리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부인 박필순(56)씨도 그의 생애에서 지금이 가장 어려울 때로 보고 있다.
『동감해요. 신혼 초 쌀이 떨어져도 괜찮았어요. 그땐 어쨌든 하루하루 생활이 점차 나아지던 때였고, 젊었고, 희망도 있었던 시절이죠. 그러나 지금은… 점점 술도 더 마시고…내가 도와줄 길이 없네요』
그러나 李씨는 타협하거나 투항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어깨동무? 그럴 생각 없다』고 잘라 말한다. 『고약한 패를 잡았다』는 그의 말이 생각나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같은 패를 잡겠느냐』고 질문하자, 빙그레 웃으며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다른 패를 잡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비록 독한 술로 자신을 달래고 가슴앓이를 겪고 있지만 그같이 스스로 흔들리고 불안해하며 미래가 불투명하게 느낀다는 점을 기자에게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의 氣(기)가 아직 살아 있고 건강한 사고를 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숨기지 않았다. 부악문원의 후학양성을 중단한 것도 『잠시 움츠린 것』이라고 표현했다.
『너무 상황을 투쟁적으로 인식하는 것인지 몰라도 「大반격」할 기회도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을 오게 할 유인 요인을 찾고, 이런 어려울 때일수록 더 확대 再생산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는 소설 「영웅시대」를 마치며 쓴 작가의 말 말미에서 이렇게 외친다.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앞날에 남았으리. 우리의 출발은 오직 그것을 위해 있었으리〉
과거 암담한 미래, 궁핍한 현실을 가졌던 시기 때부터 이처럼 근거 없는(?) 낙관을 그는 노래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 같은 낙관으로 또다시 무장하고 있는지도….
李씨가 즐겨 읊조리는 「실락원」의 저자 존 밀턴보다 2세기 늦게 태어난 존 러스킨은 밀턴처럼 부유한 환경에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목사를 꿈꾸다 문인의 길로 들어선 것도, 사회개혁을 위해 활동한 점도 비슷하다. 그가 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이것은 진실하고도 유익하다」 또는 「유익하고도 아름답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말해야 할 그 무엇을 가진다. 그가 알기로는, 과거에 아무도 그것을 말할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말할 사람이 없다. 그는 그것을 분명하고도 음악적으로, 적어도 분명하게 말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인생을 총결산하는 마당에서,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명백한 사실이라 함을 그는 자각한다〉●
첫댓글 베이커리님의 문열 사랑이 참으로 지극합니다. 이문열 님의 소설은 80년대 수반과 90년대 초반에 매우 열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의 작품들이 아마도 그의 문학 전성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애독자가 되어서 이 '영웅'의 작품을 읽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는 여기지 않으나 문학작품과 지은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문학에서 큰 논란거리 중의 하나인 친일문학 논쟁도 역시 작가와 작품 관계의 딜레마를 이야기 해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그가 우리들에게 '영웅'으로 남았으면 싶습니다. 근자에 혹시 그가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조심스려운 우려가 생깁니다.
무녀리는 입도 많고 코도 많고 귀도 참 많네요.
감사합니다. 노트님^^ 엠비씨 휴먼 다큐 [나의 길]에서 부악 방송편 나왔어요. ㅋㅋ 저도 나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