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문 명문고, 벌판으로 옮겨라”…박정희 결단에 시위까지 했다는데 [사-연]
한주형 기자 moment@mk.co.kr
입력 : 2023-10-25 13:00:00 수정 : 2023-10-29 11:35:13
강남 개발사를 따라 걷다 (4) [사-연]
부동산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강남불패’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강남 부동산에 투자하면 절대 망할 일은 없다는 말인데요. 마치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최근 부동산 하락세에도 강남권만큼은 다른 지역보다 빠른 가격 회복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말의 기원은 명확하게 찾을 수는 없지만, 아마 강남이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비싼 주택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것과 수십 년 사이 가장 토지 가격이 수십 배 뛴 곳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강남 부동산은 왜 비쌀까요? 많은 일자리와 주거의 편의성, 편리한 교통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다른 지역과 가장 차별화되는 점은 명문 학군과 교육열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은 강남 학군지의 시작과 형성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사대문 안 명문고를 강남으로 옮겨라
다시 1970년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자원 하나 없는 좁은 땅에 많은 인구, 이 시기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더 배우고 알아야’ 했습니다. 먹고살기 넉넉한 시대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진학률은 70%, 대학 진학률은 26%로 그 비율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일류 대학을 졸업하는 것은 인생의 성공가도를 달리는 시발점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인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했기 때문에 시골 농부도 자식의 대학등록금을 위해 소도 팔고 논도 팔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최상위권 대학에 가려면 그 전 단계로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5대 공립·5대 사립 명문고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경기·서울·경복·용산·경동이 5대 공립 고교였고, 중앙·양정·배재·휘문·보성이 5대 사립 고교였습니다. 여고의 경우 경기·창덕과 이화·숙명·진명·정신이 각각 명문 공립·사립 고교로 꼽혔습니다. 그리고 남녀 가릴 것 없이 이 모든 고교들은 서울 종로구와 중구에 밀집해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종로와 중구의 대중교통이 등교하는 고등학생들로 마비가 될 정도였습니다.
당시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사회 기득권과 고위직, 정재계 인사들은 명문대학 졸업생들이었고, 그 이전에 명문고 출신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같은 고교 동문들끼리는 교정에서의 추억을 공유하며 깊은 동질감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 아래, 1972년 10월 문교부가 사대문 안의 명문 고등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하겠다는 발표는 많은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앞선 연재에서 알아보았듯 이 시기 강남은 황량한 벌판에 아파트와 주택만 덜렁 들어서 있었습니다. 대중교통이라 할 만한 것들은 전무했고 관공서, 시장 등 각종 편의시설도 부족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시급한 문제 중 하나가 학교시설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목표로 하는 인구분산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생활편의시설을 건설하는 것 뿐 아니라 강북에 있는 학교를 이전하고 새 학교를 신설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1976년 명문고교의 수장이라 할 수 있었던 경기고가 현재 위치인 영동 2지구(삼성동 일대)로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사대문 내 명문고교의 대대적인 이전이 시작됩니다. 이전보다 세배나 넓은 학교 부지와 근대식 시설을 갖춘 교사를 국고보조까지 해서 지원했지만, 경기고 출신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습니다. 재학생과 졸업생, 심지어 외국에 있는 재외동문들까지 합심하여 학교의 이전을 반대했습니다. 경기고-서울대 진학이 너무 일반적이라 이를 칭하는 ‘KS 마크’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각계에 진출해 있는 경기고 동문들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정부는 이에 대한 타협안으로 기존의 경기고 교사와 교정을 허물지 않고 개축하여 도서관으로 사용하겠다고 제시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경기고가 있던 자리에 정독도서관이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1978년 종로구 계동에 위치해 있던 휘문고도 서울시의 알선을 통해 부지를 현대건설에 팔고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사합니다. 휘문고가 떠난 자리에는 지금 현대건설의 사옥이 들어서 있습니다. 경희궁 터에 있던 서울고의 경우 앞선 두 학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전 과정에서 동문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학교 이전이 결정되자 재학생 전원이 교문 밖으로 뛰어나와 가두시위를 벌였습니다. 동문 3000여 명은 친필 서명이 담긴 ‘이전 취소 건의서’를 청와대와 서울시, 서울교육청으로 송부합니다. 하지만 관악구 신림동으로 정해진 예정 부지가 서초구 서초동으로 변경되었을 뿐, 결정의 번복은 없었습니다. 이 이후에도 중동·세종·숙명여자·경기여자 등 총 15개의 명문고들이 속속들이 강남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대문 내 명문고의 이전 과정에서 잡음은 있었지만 이것이 유신시대 대통령의 권력과 의지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북 각급학교의 강남 이전‘을 대통령 지시사항으로 서울시에 전달합니다. 멀쩡한 학교를 하루아침에 옮기라고 통보할 만큼 당시 권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사실 명문고를 허허벌판이었던 한강 아래로 보낸 데에는 강남의 활성화와 강북의 인구분산 이외에도 숨은 목적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학생운동을 저지하기 위해서입니다. 4·19혁명 등 각종 민주화 운동에서 주축에 섰던 것은 대학생들과 서울 중심부에 있는 고교의 학생들이었습니다. 종로구와 중구의 학교를 되도록 사대문 도심에서 멀찍한 곳으로 이전시켜 학생운동의 구심점을 잃게 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교육 1번지 8학군의 형성
한편 1973년 2월 발표된 고교평준화 정책이 이듬해부터 시행되며 고등학교 입시가 폐지되고 추첨제가 도입됩니다. 중학교부터 대학 입학까지 시행되던 세 번의 입시를 대입 한 번으로 줄여 과열 경쟁과 입시지옥을 해소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럼 어떤 추첨 방식으로 고교를 배정했을까요. 서울 시내 학교를 다섯 학교군으로 나눈 후, 추첨을 통해 졸업한 중학교가 속한 학군 내의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게 했습니다.
고교평준화 정책의 시행은 강북 명문고들의 강남 이전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제 우수한 학생들을 시험을 통해 가려 뽑는 것도 불가능해졌으니, 차라리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받고 강남의 넓은 부지로 옮겨가 후의 발전을 도모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서울시는 시가 소유한 강남의 체비지 중 학교용지를 헐값에 넘겼습니다. 한 학교라도 더 옮기기 위해 ‘브로커’ 역할도 불사했는데, 시가 직접 나서 기존 학교 부지를 매입할 기업이나 단체를 알선해주기도 했습니다.
서울 내 각 지역이 점차 개발되고 인구가 증가하며 초기 5개였던 학군은 1976년 6개, 1977년 9개 학군으로 수가 늘었습니다. 그중 강남지역은 8학군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8학군 안에는 강북도심에서 이전한 명문고들이 대다수 속해 있었습니다. 추첨제 도입 이후 명문고의 위상은 과거의 빛바랜 명성으로 남았지만, 여전히 사회 각지에는 ‘명문고 출신’이라는 자긍심을 품고 사는 이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습니다.
1970~80년대 강남에는 대규모 아파트단지들이 속속 지어집니다. 강남을 향한 대규모 이주민들 중에는 자녀를 8학군 내 고교에 보내려는 부모들이 상당수였습니다. 고위 공무원, 대기업 임직원, 의사, 변호사 등 고학력 전문직으로 구성된 이들은 교육만이 이들의 지위와 계급을 자녀에게 세습해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여겼습니다. 그 결과 강남은 교육열이 어느 곳보다 뜨거운 곳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강남의 인구가 급증한 1980년대는 학생 수가 8학군 고교의 모집 정원을 초과할 정도였습니다.
8학군 내 고등학교들은 그 안에서 무한 경쟁을 펼쳤고, 그 성적은 매해 서울대 합격생 수로 증명되었습니다. 8학군 고교 교장들은 연합고사 성적이 우수한 신입생을 한 명이라도 더 받기 위해 서울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로비까지 펼치기도 했습니다.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사라진 듯 했던 고교서열은 결국 ‘강남 8학군’ 체제로 개편되었을 뿐이었습니다. 명문대 입학을 향한 강남의 뜨거운 교육열은 이후 위장전입, 집값 폭등, 사교육 과열 등 여러 사회적 병폐를 야기했습니다.
<참고자료>
ㅇ「강남 40년 영동에서 강남으로」, 서울역사박물관
ㅇ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 한울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