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70주년 되는 해
2015년은 우리민족에 있어서 매우 뜻있는 해이다. 일제치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한 지 딱 70년 되는 해이다. 비록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면서 얻어진 광복이지만 자력으로 나라를 되찾고자 국내외 수많은 독립투사들은 망명 정부하에서 독립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다. 만주와 연해주, 미주 등지에서 교육사업과 더불어 항일운동에 필수조건인 독립군 양성 등에 힘쓰며 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8월 15일 광복절을 즈음하여 서울과 부산 등 전국 지자체에서 ‘광복 70주년 기념 특집’으로 광복절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다. 수원시 역시 7천명 대합창 등과 함께 수원의 독립운동가를 찾아내 헌창에 나섰다. 그동안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 등 한정적인 범위에 머물러 있던 수원독립사에서 우리가 그간 잘 알지 못했던 김세환, 임면수, 조문기, 나혜석, 이선경 등 독립운동가들이 역사전문가에 의해 새롭게 발굴· 조명되고 있다. 이제 시작단계에 불가하지만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수원의 독립운동가, 현창 나서
지난1일 오후3시 수원문화원 부설 수원화성향토문화연구소 주관으로 수원의 독립운동가 중 필동 임면수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을 되새기고자 수원문화재단 홍보관 영상실에서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수원의 대표적 사립학교인 삼일학교를 세우고, 1907년 수원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으며, 나아가 1912년 만주로 그 범위를 넓히어 국외항일 무장투쟁운동을 펼친 선각자의 궤적을 따라가는 시간이 마련됐다. 그러나 여전히 발굴 단계인 선생의 자료 수집 등을 통해 총체적으로 다시 묶을 필요성과 이견이 있는 흐름의 관계망이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주제발표로는 한동민 수원박물관 학예팀장이 ‘필동 임면수의 국내활동을 통해 본 자강운동’을, 박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만주지역에서의 필동 임면수의 민족운동’, 그리고 ‘임면수 선생에 대한 추모 활동’을 염상균 수원화성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장이 발표했다.
토론자로는 조형기(수원화성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최형국(중앙대학교 강사), 한준택(르네상스포럼 상임이사)이, 좌장으론 양훈도 한벗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이 나섰다.
3시간 동안 진행된 세미나, 요점만 모아서 소개한다.
‘필동 임면수’는 누구인가!
그동안 수원의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필동 임면수(1874~1930)’ 선생의 이름은 생소할 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1964년 4월 삼일학교 탄생 90주년을 맞아 묘비가 건립되고,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국립 현충원 안장 등 일련의 과정속에서 63년 건국훈장은 국내 교육활동을 인정받아 수여됐다.
그러다가 국외 항일운동을 이끈 이들에게 주는 독립유공자 표창 선정에 있어서 ‘임필동’이란 이가 올라오기도 했는데 ‘임면수’와 동일인물(한자 표기가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나고, 호를 이름으로 표기하는 등의 이유는 독립운동 활동 시 일제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또 자신만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이란 점이 확인되면서 연구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됐다.
한문공부와 더불어 근대적 학문에 눈을 뜬 그는 교육에 역점을 두고 국내 자강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이후 일제병탄 하에서 국내 독립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1912년 식솔(자녀들이 매우 어렸음에도 불구하고)들을 이끌고 만주로 진출해 양성중학교(신흥무관학교의 다른 이름) 에서 교장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양성에 기여했다. 박환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수원 삼일학교에서 활동한 경험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독립군의 어머니’라 칭송받는 부인 전현석 여사는 혁명투사의 아내로서 독립운동의 거점지인 객주업을 하며 손수 지은 밥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제공하고 빨래도 해줬다. 왜경의 추적과 한파적설 등 엄혹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희생과 헌신으로 부창부수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1920년 일본군이 간도로 출병하면서 21년 밀정의 고발로 길림영사관에 체포된 후 고문에 의한 반신불수가 되어 1922년 수원으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아담스기념관(1923)을 건축하고, 24년 수원최초 수원유치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수원소작인상조회 조직을 이끄는 등 열정을 불살랐지만 안타깝게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0년 11월 29일 56세로 순국했다.
그의 업적 발굴 왜 늦었나!
수원의 독립운동가로는 최초로 오는 8월15일 수원 88올림픽 공원 내에 필동 임면수 선생 동상이 건립된다. 2015년 2월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시작된 모금(1억-시민들 자발적 순수 모금)운동이 활발히 이어지면서 건립을 앞두고 있다. 세미나 주제 발표에 이은 토론에 앞서 영상실 현장에서도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함에 뜻을 모아 객석의 뜨거운 박수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수원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헌창에 나선 것일까. 2000년 수원시정신문 늘푸른수원에 ‘ 애국지사 임면수 선생, 일제 항거 독립투사, 교육선각자의 삶’이란 일대기가 김우영 주간의 기사로 보도되고, 극단 성(단장 김성렬)에서 2003년과 2004년 청소년극 ‘임면수’를 올리는 등 그간 몇 차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2015년 들어서야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토론자로 나선 최형국 박사의 질문처럼 선양사업이 근현대 사학계의 한계점일까.
이에 박환 교수는 “뒤늦게 자료 발굴이 된 점 때문이다. 이를 테면 만주 활동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국내 것만 가지고 초기 포상을 받았다. 3년 전 기록과 사진이 단서가 되는 자료가 새롭게 발굴되면서 선생에 대한 조명이 다시 시작됐다. 이제 시작 단계다. 한동민 박사의 발표처럼 그의 본적이 수원 매향동이든 북수동이든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 외가에 혹은 본가가 기록됐던 간에 진실을 찾기 위한 재검토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신흥강습소로 시작된 신흥무관학교와 양성중학교의 관계 등 모든 것들이 신중히 정리되어 혼란방지를 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수원의 독립운동가 더 발굴되기를!
‘필동 선생에게 영향을 주었던 독립운동가의 교류는 어떠했는가!’
‘필동 이외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독립투사들은 없는가!’
‘더 상세한, 수원에서의 국채보상운동과 자강운동 알고 싶다!’
‘삼일학교를 세운 종로교회사의 역사 알고 싶다.’
필동 선생에 대한 세미나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다. 이는 수원독립운동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아서였지 선생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와의 관계부터 만주 통화현, 유하현, 해룡현, 환인현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과 꾸준한 교류를 통해 독립을 위해 온 가족이 희생했다. 이번에 처음 밝혀졌지만 그의 집안은 옛 보시동(현 북수동 일대) 팔부자 거리에 있었다. 편안한 부(富)의 생활을 걷어차고 가시밭길인 형극의 길을 택한 셈이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의미 있게 진행된 이번 세미나를 시작으로 더 많은 독립운동 유공자들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기념사업회에서 유족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체험사업으로 업그레이드 시켜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정부의 역할이 더 절실해졌다.”
세미나를 이끈 좌장 양훈도 한벗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의 말이다. 참여한 학자들의 공통된 바람도 이와 진배없을 터, 다만 실체를 벗어난 해석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제 시작단계인 만큼 수원을 빛낸 독립운동가들이 더 발굴되어 긍지의 수원시가 되기를 기원한다.
*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뜻에 함께하고 싶다면?
전화: 031-246-4111 전송: 031-273-2799
후원계좌: 기업은행 168-024406-01-011
첫댓글 기사 아주 좋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