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인들의 사랑 이야기 "임제와 한우"
'밤 비에 새 잎 나거든'
조선의 풍류남아 임제, 詩·퉁소 가락으로 평양 기생 ‘한우(寒雨’) 녹이다.
‘북천(北天)이 맑다 해서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섰더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판에는 찬 비로다.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조선의 풍류 남아 백호(白湖) 임제(1549~87)가 기생 한우(寒雨)에게 지어 준 시다.
‘찬 비’는 기생의 이름 ‘한우(寒雨)’를 동시에 의미하는 표현이다.
한우에 대한 마음을 담아 멋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임제는 당대의 대표적 한량(閑良)이었다. 40세를 채우지 못한 채 요절한 그였지만,
여인들과 많은 염문과 정화(情話)를 뿌리고 간 주인공이다.
그는 시문(詩文)에 능하여 주옥같은 작품 700여 수를 남겼다.
한시(漢詩)뿐만 아니라, 시조도 6 수(首)를 남겼는데 모두가 여인들과의 사랑 노래다.
◆ 기생 한우와 동침 하게 된 사연
임제가 관서도사(關西都事)로 근무할 당시 평양에 ‘한우(寒雨)’라는 기생이 있었다.
그녀는 미모에다 시문에도 능했다. 거문고와 가야금에도 뛰어나고, 노래 또한 명창이었다.
재색을 겸비한 그녀에게 접근하려는 한량이 많았지만 언제나 차갑게 만 대해
‘한우(寒雨)’라는 이름이 주어졌다고 한다.
한량인 임제가 한우를 모르고 지낼 리는 없었다.
여러 번 연회에서 그녀를 보게 되면서 호감을 갖게 되었다.
하루는 두 사람이 술자리에서 제대로 어울리게 되었다.
시를 논하고 세상을 개탄 하면서 술잔이 여러 순배 돌았다.
한우가 거문고를 타면 임제는 퉁소를 불며 화답했다.
임제는 항상 품에 옥 퉁소를 지니고 다녔다.
취기에다 서로에 대한 호감으로 두 사람의 기분이 도도해지는 가운데 임제가 즉흥적으로
위의 시조를 읊었다.
그대가 ‘찬비’를 뿌리면 얼어 잘 수밖에 없는데,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지 떠보는 것이었다.
노래를 들으며 머리를 숙이고 있던 한우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 같은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거문고를 타며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임제의 ‘한우가(寒雨歌)’에 화답한 이 시조에는 그녀의 뜨겁고도 은근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임제가 ‘오늘 그리던 한우 너를 맞아 함께 몸을 녹이며 자고 싶은데 혼자 외롭게 자야 하겠는가’라며
마음을 떠본 것인데, 이에 대한 한우가 기발한 시로 화답을 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찬 이불 속에서 혼자서 주무시렵니까. 저와 같이 따뜻하게 주무시지요’라고 한 것이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임제는 금성인(錦城人)이다. 선조 때 과거에 급제, 벼슬은 예조 정랑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타며, 노래를 잘 부르는 호방한 선비였다.
이름난 기생 한우를 보고 한우 가를 불렀다. 그날 밤 한우와 동침하였다.’
‘해동가요’에도 비슷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 임제와 일지매
임제가 콧대 높기로 유명했던 평양 기생 일지매를 꺾은 일화도 전한다.
당시 평양에는 재색을 겸비한 명기 일지매(一枝梅)가 유명했다.
절개가 굳고 자긍심이 유달리 강해 웬만한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평안 감사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무반(武班) 출신의 평안 감사가 위협적으로 수청을 강요해도
‘지음(知音)’을 만날 때까지는 수절을 하겠다며 거절했다.
그 후임 감사로 임제와 친한 김계충이 부임하게 되었다.
그가 한양을 떠날 때 서대문 천연정(天然亭)에서 환송연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임제가 일지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평양에 가면 수청 안 들기로 유명한 일지매란 기생이 있다는데
만약 자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나한테 알리게.
그러면 내가 가서 내 것으로 만들어보겠네.”
“그래? 자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할 텐가.”
“그렇게 되면 자네를 아버지라 부르겠네. 그 대신 내가 성공하면 뭘 해줄 텐가.”
“그때는 두 사람을 위해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겠네.”
김계충이 평안 감사로 부임한 후 일지매를 불러 놓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수청을 들게 하려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문대로 특별한 기생임을 확인한 김계충은 임제에게 자신은 실패했음을 알렸다.
연락을 받은 임제는 바로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곳저곳 명소를 둘러본 뒤 남루한 옷의 생선 장수로 변장해 일지매 집을 찾아갔다.
생선 몇 마리를 사서 지게에 지고 일지매 집 문 앞에서 “생선 사려~”를 외쳤다.
계집 종이 나와 몇 마리를 사주자, 임제는 해가 저물었으니 하룻밤 묵고 가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다.
몇 번이고 조른 끝에 헛간에 머물 수 있게 됐다.
임제는 헛간에서 멍석 위에 팔 베개를 하고 누웠다. 마침 보름 달빛이 교교한 초여름 밤이었다.
잠시 후 항상 가지고 다니던 옥 퉁소를 꺼내 한 곡조 뽑으려고 하는데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안채의 일지매가 적적한 마음을 달래려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절창이었다.
임제는 거문고 연주가 끝나자 바로 퉁소를 불며 화답했다.
쉽게 들을 수 없는 멋진 소리였음은 물론이다.
일지매는 마당으로 나와 퉁소 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보았으나 헛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생선 장수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일지매는 시험 삼아 헛간 쪽을 향해 “창가에는 복희 씨 적 달이 밝구나(窓白羲皇月)”라고 읊었다.
그러자 바로 “마루에는 태고의 바람이 맑도다(軒淸太古風)”라는 대구(對句)의 화답이 들려왔다.
놀란 일지매는 생선 장수의 음성임이 분명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다시 “비단 이불은 누구와 덮을까(錦衾誰與共)”라고 읊자
헛간에서 다시 “나그네 베갯머리 한 편이 비어있네(客枕一隅空)”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지음’을 확인한 일지매는 바로 헛간으로 들어가 임제 앞에 절을 한 뒤
“제가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고백하며 임제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그 뒤의 일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임제의 풍류와 파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밤 비에 새 잎 나거든'
이 은상이 소동파보다 높이 평가한 천재 시인… 임제 가는 곳엔 詩· 술· 여인이 함께 했다.
임제는 어떤 인물
자유분방해 예법에 구속받지 않고, 편 가르고 질시하는 관직에 환멸을 느꼈다.
곳곳 유람 하다 39세에 세상 하직하고, 中 사대주의 비판 ‘물곡사’ 유언을 남기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는가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임제가 황진이 무덤 앞에서 지은 시다.
‘해동가요’에 ‘송도의 명기 황진이의 무덤을 보고 이 노래를 지어 조문하다
(見松都名妓 黃眞伊塚上 作詞弔之)’라는 기록이 있는 작품이다.
임제가 1583년 평안도 도사(都事)로 부임해 가던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잔을 올리고
이렇게 시를 읊으며 넋을 달랬던 것이다.
황진이가 살아있을 때 임제와 만났다면 어떤 이야기를 남겼을까 궁금해진다.
임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중용을 800번 읽은 임제
조선 중기 문신이자 시인인 임제의 호는 백호(白湖), 풍강(楓江), 소치(嘯痴), 겸재(謙齋) 등이다.
1549년 나주에서 태어난 임제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하다가 20세에 이르러 학문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 과거 시험 위주의 글에는 흥미가 없던 그는 22세 때 속리산에 있던 재야 학자
성운(成運)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스승은 격정적이고 분방한 임제의 성격을 바꿔보고자 중용을 1천 번 읽을 것을 주문했다.
임제는 지리산의 한 암자에서 중용을 800번 읽는다. 6년 동안 이렇게 공부하다가 속리산을 떠나면서
다음의 시를 읊었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 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 만 속세는 산을 멀리하네(山不離俗俗離山).’
임제는 1577년 1월 속리산에서 하산한 후 그해 9월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興陽縣監), 서북도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 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을 거쳐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 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후에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서 1587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여러 아들에게 “주변 오랑캐 나라들이 다 제왕이라 칭했는데도,
유독 우리 조선은 중국을 섬기는 나라이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의 내가 살아간들 무엇을 할 것이며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울 일이 아니니 곡을 하지 마라.
(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는 유언을 남겼다.
임제의 ‘임종계자물곡사(臨終誡子勿哭辭)’다.
“임백호(林白湖) 제(悌)는 기개가 호방하여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그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여러 아들들이 슬피 우니 그가 말하기를
‘사해(四海)의 모든 나라가 제(帝)를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우리만이 예부터 그러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누방(陋邦)에 사는 신세로서 그 죽음을 애석히 여길 것이 있겠느냐. 곡하지 마라
(四海諸國 未有不稱帝者 獨我邦終古不能 生於若此 陋邦 其死何足借命 勿哭)’고 하였다.
그는 또 항상 희롱조로 ‘내가 만약 오대(五代)나 육조(六朝)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돌려가면서 하는 천자(天子)쯤은 의당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임제, 조선의 가장 뛰어난 천재시인
임제는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추모 시조를 읊고 술잔을 올리는 등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기이한 인물’이라고 평했으며, 또 한편에서는 ‘법도 밖의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이런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됐다.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 소설을 남겼으며,
문집으로는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고집이 있어 벼슬에 높이 오르지 못하였으며,
선비들은 그를 법도 밖의 사람이라 하여 사귀기를 꺼려하였으나, 그의 시와 문장은 서로 취하였다.’
검(劍)과 퉁소, 거문고를 항상 지니고 다녔던 임제는 풍류남아이고, 자유분방한 시인이었다.
가는 곳마다 여인이 있고, 술이 있고, 시가 있었다. 모르는 기생이 없고, 발길이 가지 않은 명승이 없었다.
천재 시인으로 불리던 임제에 대해 노산(鷺山) 이은상(1903~82)은
“구금(拘禁)을 미워하고 방종(放縱)을 즐겨했던 사람은 소동파 보다는 오히려 시인 임백호 선생을
더 높이 평가한다”면서 “조선 왕조 500년에 가장 뛰어난 천재 시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는 백호 임제 선생으로 대답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무어별(無語別)’에도 그런 기질과 재능이 잘 나타나 있다.
‘열다섯 갓 넘은 어여쁜 아가씨(十五越溪女)
수줍어 말 못 하며 임을 보내고(羞人無語別)
돌아와 겹겹이 문 닫아걸고는(歸來掩重門)
달빛 가득한 배꽃 보며 눈물짓누나(泣向梨花月)’
임제가 나이 어린 기생에게 부채에 써준 다음 시도 멋지다.
이 기생은 평생토록 임제를 그리며 항상 그 부채를 품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한겨울에 부채를 준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마라(莫怪隆冬贈扇枝)
이 마음을 너는 아직 어리니 어찌 그 뜻을 알랴마는(爾今年少豈能知)
그리움으로 한밤에 가슴에서 불이 일어나면(相思半夜胸生火)
한여름 염천의 무더위가 비길 바 아니니라(獨勝炎蒸六月時)’
현재 백호 임제 선생 기념비(1979년 건립)와 임제 시비, 물곡 사비 등이
그가 태어난 나주시 다시면 회진(會津) 마을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그 뒤쪽 위에는 임제가 선비들과 시를 짓고 하던, 임제의 할아버지인 귀래정(歸來亭)
임붕(1486~1553)을 기려 1556년에 지은 영모정(永慕亭)이 자리하고 있다.
영모정 앞으로는 영산강이 펼쳐진다. 백호 문학관과 나주 임 씨 대종가도 근처에 있다.
출처:영남 일보
[출처 : 늘찬국어학원]옛 선인들의 사랑이야기 "임제와 한우"
🦋|작성자 스토리디자이너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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