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7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가
21,20-28)
When these signs begin to
happen, stand erect and raise your heads because your redemption is at
hand.”
말씀의 초대
큰 권한을 지닌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바빌론이 무너졌다고 큰소리로 외친다. 그리고 하늘의 많은 이가, 대탕녀를 심판하시고 당신 종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찬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무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나 이는 속량의 날이
다가왔다는 뜻이므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격려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싸늘한 이 늦가을
밤, 죽음과 종말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그저 무기력하게 지속되는 것만 같은 일상 속에서 생생하고
빛나는 순간들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고 있다는 것이 가슴 벅차게 느껴질,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은 과연 언제 오는 것일까요?
근래에 나온
철학서들 가운데 미국의 유명한 두 철학자가 함께 쓴 『모든 것은 빛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룬 이 책은, 무기력과
탈진의 이 시대에 인생을 바꿀 거창한 계기를 헛되이 기다리거나 자괴감만 남길 자극적 쾌락에 탐닉하는 대신에, 자신의 일상을 감사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그런 눈을 가진 이들은 평범한 일상이 품은 ‘빛나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의 한
이야기가 깨우쳐 줍니다. 어느 지혜로운
스승이 자신의 두 제자를 하산시키며, ‘세상의 모든 것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그들의 인생은 참으로 복될 것이라 이릅니다. 산에서
내려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제자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만났습니다. 한 제자는 동료에게 세상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다 겪으며 결국은
모든 것이 빛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쓸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다른 제자는 행복한 모습의 얼굴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든 것이 빛나는 것은 아니라네. 다만 빛나는 모든 것이 존재할 뿐이지.” 우리는 평범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며, 또한 그러한 존재들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랑으로 완성하실 주님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기에 각자가
‘빛나는 순간’을 담고 있는 작은 조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소리 없이 가을이 사라져 가는 이 밤에, 사랑의 눈으로 모든 것이
빛나고 있는 장관을 가만히 바라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어떤 젊은
부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부부는 결혼한 지 5년 만에 아기를 갖게 되었답니다. 아기를 처음부터 원했지만 이상하게 아기가 생기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도 가보고 약도 꽤 많이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드디어 아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부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요즘에 이 부부는
그토록 기다렸던 아기였기 때문에 아기 용품 사는데 모든 관심을 들이는 것 같습니다. 아기 옷, 아기 신발, 아기 장난감 등등.... 그리고
아기를 보기 위해 왜 열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지 그 시간이 정말로 길다고 이야기합니다.
며칠 전에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본당신부를 하고 있는 후배 신부님과 대화를 하다가 본당의 어떤 꼬마 아이가 교통사고로 인해 주님 곁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그것도 허망한 죽음에 아이의 부모가 얼마나 큰 슬퍼하는지 장례 미사를 하면서 자신도 무척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두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태어나기 전에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최소한 열 달을 준비하게 하지만, 죽을 때에는 아무런 준비도 시키지 않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성인성녀들께서는 삶 전체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말씀하셨지요. 죽음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시키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삶 전체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갓난아기를 맞이하기 위해 10달을 잘 준비하는 것처럼, 주님 앞에 설 그날을
위해서 우리는 내 삶 전체를 잘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사람들이 표징들을 보면 구름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준비를 했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오시는 속량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들은 허둥대며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할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
사실은 너무나도 먼 일로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잘 생각한다면 그리 먼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어렸을 때의 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시간으로 치면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개인적인 느낌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생각되지 않습니까? 올 한 해만 생각해봐도 이런
느낌은 분명합니다. 엊그제 2014년 새해를 맞이했던 것 같은데, 이제 2014년의 마무리에 서 있습니다.
죽음은 먼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의 삶이 죽음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치유는 과거를 흔적
없이 잊거나 고통을 완전히 삭제해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함께 사는 법을 아는 것이다(정목).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가?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왕이 종에게
물고기를 사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종은 물고기를 사왔는데 글쎄 악취가 나는 썩은 물고기인 것입니다. 왕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지요.
“세 가지 벌 중에
하나를 받아라. 만일 안 받겠다면, 네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악취가 나는 썩은 물고기를 먹든지, 곤장 100대를 맞든지, 물고기
값을 물어내든지 이 중 한 가지를 택하라.”
종은 물고기를
먹겠다고 했습니다. 아프지도 않고 돈도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은 물고기를 먹다가 포기했습니다. 구역질이 나서 계속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곤장을 맞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곤장 50대 정도 맞고 나니 더 이상 맞다가는 죽을 것 같은 것입니다. 이 또한
견딜 수 없었던 그는 큰 소리를 외쳤습니다.
“물고기 값을
내겠습니다.”
처음부터 물고기
값을 내겠다고 결정하면 썩은 물고기를 억지로 먹는 일도, 또 몸의 아픔도 겪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물질적인 손해만을 생각하다보니 결국은 썩은
물고기도 먹고 곤장도 맞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있을까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어리석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계시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실천하는 것, 결국 이것이 바로 죽음을 위한 우리의 가장 큰 준비가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인류의
역사에서 자서전을 쓴 최초의 사람은 아우구스티노라고 합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였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여정을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에게
하느님 없는 개인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태양이 없는
지구는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자서전을 쓴 최초의 사람은 루소라고 합니다.
루소는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정리했습니다.
누구에 의한
평가가 아니라,
자신이
존재함으로 인해 세상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래된
본당은 본당의 역사를 기록하곤 합니다.
본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역대
사목자들은 누구였는지,
신앙
공동체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기록합니다.
지나온
날들을 감사드리고,
현재의 삶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한 시간과
공간에서는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온 삶의 씨줄과 날줄을 돌아보면 온전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욕심과
욕망으로 채워진 날들,
회개의
반성으로 그려진 날들,
상처를 받고
상처를 준 날들,
나를
영적으로 자라게 해 준 소중한 인연들이 있을 것입니다.
1964년 저는
태어난 지 1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살던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371번지입니다.
저는 오래된
교우 촌에서 신앙의 씨앗을 품고서 태어났습니다.
물론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1974년 저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한국사회는
10월 유신의
격변기에 있었습니다.
가족계획의
열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밥장사를 하였고,
저는
어머니를 도와서 배달을 했습니다.
성당엘
다녔고,
동화책을
많이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소년중앙,
어깨동무와
같은 잡지도 읽었습니다.
5학년
어린이는 주체적으로 나는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1984년 저는
신학과 3학년이었습니다.
신학은
실천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회는 늘
쇄신되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인 선택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외쳤습니다.
교황님의
방한이 있었고,
2014년처럼 제게
큰 울림은 주지 않았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청춘의 시기였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영혼을 보기 보다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994년 저는
사제생활 4년차였습니다.
사제 생활의
중심은 동창 신부였습니다.
매주
만났고,
함께 휴가도
다녔습니다.
사목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저
청년들과 함께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면서 지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씀이 부족했던 시기였습니다.
영혼의 샘이
깊지 않아서 늘 갈증이 났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동료들이
없었다면 참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2004년 저는
교구 사목국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늘 혼자
하던 사목에서 함께 연대하는 사목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본당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교구라는 자리에서 보다 큰 비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교구는
‘시노드’를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못자리에서 나온 사제들도 서로의 입장,
성격,
생각이 무척
다르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도 함께
해서 즐거웠고,
보람
있었습니다.
사제로서
가장 열정적인 시간들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14년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일은 성소를 보존하고,
키워가는
일입니다.
예비
신학생들이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성소후원회를
도와 드리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일은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의 일이었습니다.
새천년
복음화 사도회의 일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교구청에서
두 번째 일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의 성향은
내적으로 무엇인가를 채우기 보다는 외부의 일을 통해서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2014년 좀 더
영적인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이렇게
전체를 돌아보면 하느님께서 늘 저와 함께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친구의 모습으로,
우연인 것
같은 인연의 모습으로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앞으로
10년은 어떻게
지나갈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묵시록의 예언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멸망하는 것도 무섭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
충실하게 살 수 있다면 됩니다.
그것이 모인
것이 지난날들이고,
그것이
모이면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찬미
공동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이수철신부-
새벽
독서기도 후 계응송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의 말씀에 의탁하나이다.“
"내
영혼이 주님께 희망을 두나이다.“
영혼과
주님이 한 세트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과 일치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아름다운 영혼에 기쁨입니다.
주님과
영혼의 일치에 하느님 찬미보다 더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찬미기도 시간입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사는 수도자들입니다.
특히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자들에겐 더욱 그러합니다.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미사전례시간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하느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1독서의 묵시록 찬미가가 참 좋습니다.
'그
뒤에 나는 하늘에 있는 많은 무리가 내는 큰 목소리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이고,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공정하시도다,"'(묵시19,2).
오늘
위 찬미에 이어 계속되는 찬미가(묵시19,3-7)는
매주
주일 제2저녁 성무일도 때마다 수도공동체가
우렁차게 바치는 찬미기도입니다.
성서와
전례가 얼마나 긴밀한 관계에 있는지, 새삼 전례영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묵시록 역시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를 노래합니다.
하늘에
있는 천상성인공동체와 함께 하느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우리 교회공동체입니다.
이런
찬미공동전례의 은총이 온갖 일상의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내며,
공동체
형제들의 믿음을 북돋우고 기쁨을 확산시키며 깨어 있게 합니다.
'그래서'
찬미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고 또 지나갑니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
만이 영원하십니다.
바로
찬미의 은총이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이런
하느님의 섭리를 보게 하며 시련과 역경을 이겨낼 힘을 줍니다.
그러니
영적전쟁의 삶에 하느님 찬미보다 더 좋은 무기는 없습니다.
"내
마음은 주님 안에 기뻐 춤추며, 나의 힘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높혀 지는도다."(사무상2,1)“
하느님의
힘을 끌어 들이는, 또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찬미의 은총입니다.
결국
하느님 찬미의 예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하느님 찬미입니다.
'찬미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요,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인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이는(루카21,25)' 위태한 상황에서도
찬미의
사람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승리를 믿기에 깨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바로
다음 복음의 묘사 그대로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7-28).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 깨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오늘
묵시록의 마지막 구절은
그대로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두고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이들은 행복하여라."(묵시록19,9ㄴ).
아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반영억신부-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합니다. 겨울엔 휴식을 취하며 새로운 생명을 준비합니다.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희망하는 만큼 뿌리고
가꾸며 하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수고와 땀이 큰 만큼 결실도 풍요롭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이라는 추수를 거쳐 약속된 새 삶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성장의 과정 안에서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면 그만큼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사용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죽음이라는 마지막은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는 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마지막에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 온 삶과 세상에 매여 산 삶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 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 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생명과 죽음은 하느님의 심판 이전에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 심판을 맞이하지만 믿는
이들은 절망 속에서도 주님의 구원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맡기는 행복한 삶
-기경호신부-
온갖
생명체들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되돌리며 생명을 이어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적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고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예루살렘을 정복하리라는 아주 끔찍한 사실들을 선포하신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21,24-25) 실제로 성전 파괴의 결과 무려
110만 명이 죽고 9만 7천명이 포로가 되었다.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근이
널리 확대되어 모든 집과 식구들에게 덮쳤다. 다락에는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찼고, 거리의 길이란 길은 모두 늙은이의
시체로 채워져 있었으며, 어린 아이들도 젊은이들도 굶주림으로 퉁퉁 부어서 망령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쓰러졌다. 이들을 땅에 묻으려 해도 병자에게는
힘이 없고 튼튼한 사람들은 시체가 너무 많아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들 역시 죽을지 몰랐다. 이런 재난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고 슬프게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중략) 로마 군인이 집들을 약탈하기 위해 들어갔을 때, 그들은 전 가족이 다 죽어 있고 다락에는 죽은 시체가 가득
차 있는 이 무서운 광경을 보고 어떤 물건에도 손을 대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우리는
이런 파멸의 경고 앞에 두려움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주의깊게 보면 이는 예수님의 사랑의 배려임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징벌이
내려졌을까? 그토록 사랑받고 중요했던 성전이 파괴된 것은 유대인들의 마음자세 때문이었다. 서기 66-70년 사이에 일어난 로마와의 독립 전쟁에서
유다인들은 인간의 힘에 의존한 결과 미움, 분노, 증오, 교만, 거짓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은 처참한 파멸을 불렀던 것이다.
성전
파괴와 갖가지 징벌은 내 밖에서 나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육과 영의 긴장과 갈등, 선과 악의 선택, 세상
삶과 신앙생활 사이에서, 실제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늘 갈등을 겪고 괴리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이 갈림길에서 하느님의 길을 걷지 않고
내가 원하는 길을 선택할 때 일어나는 불편함, 혼란, 수치심, 후회, 다른 이들과의 관계 단절, 거짓, 폐쇄와 같은 것들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인
나의 파멸의 표지이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선택하고 따를 때 오는 것은 자기파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간절한 사랑으로 우리가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경고 앞에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먼저 파멸의
징후나 빌미가 될 만한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21,20). 이 ‘알아차림’은 멈추어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그 눈길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볼 때 가능해진다. 현대인은 어쩌면 이런 알아차림이 무디어질 대로 무뎌져 있는 것 같다. 자기 일에 바쁘고 움직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또한 파멸이 아닌 삶의 길로 가려면 예루살렘에서 빠져나가고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21,21 참조). 곧 하느님이 아닌 인간의 증오와 폭력, 분노, 교만, 애착이 난무하는 그곳은 이미 하느님께서 계시는 성전이 아니기에
피해야 한다.
나는
어떤가?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고 양심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아니오’라 말하지 못하고, 불의와 부조리가 저질러지는 그 현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묵인하며 있을 때는 없었는가? 바로 그런 상황은 하느님의 성전 예루살렘인 자신을 파멸로 내모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오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21,28) 하고 말씀하신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것은
얼굴을 하느님께로 돌리라는 것, 곧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이다. 회개란 나를 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내 힘의 원천에로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다. 오늘도 당신 사랑 안에 머물며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와 자비에 감사하며, 하느님의 힘에 의존하여
기쁘게 살아가는 예루살렘이 되도록 하자!
◆ 신앙의 길로요.
-이기정신부-
음양설 이원론 극과 극의 특성인 물질계가 곧 지구상의 세상입니다. 선과 악, 최저와 최고, 발전과
퇴보, 성장과 멸망 같은 현상들 말입니다.
이런 게 있어 세상이고 세상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기는
겁니다.
적극 면에선 기쁨, 부정 면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강도 따라 더 합니다. 공개적으로는 적극과 부정이
공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부정 면에 말려들지 않게 노력해야지요. 신앙의
길로요.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21,26)”
옛
것과 새 것
-인영균신부-
무너져야
할 것은 무너져야 합니다. 견고한 것일수록 한번 무너지면 손쓸 틈도 없이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사람이 만든 견고한 성은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옛 예루살렘이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세운 이 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느님이 세우신 새 예루살렘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천상
에루살렘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계신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과 영광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권능과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옛 예루살렘은 매일 무너져야 하고 새 예루살렘은 매일 다시 세워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삶 안에 주님이 진정 우리의 왕으로 계실 때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 세우는 일꾼이 됩니다. 나의 하루가 새 도성을 세우는 벽돌 한 장이 됩니다. 오늘 하루가 옛 것은 무너지고 새 것이
세워지는 출발점이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루카21,26) -김대열신부-
연일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복음 구절로 선택되고 있습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매일 읽다 보면 지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대림 시기를 전후로 종말에 관한 내용을 복음 구절로서 반복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종말에 관한 바른 인식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더없이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이며, 종말에 관한 메시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개인의
죽음이 아닌, 세상 종말이라는 관점에서 간단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늘 사이비 종교는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 집단
대부분이 외치는 것이 종말론(終末論) 혹은 세말론(世末論)이었지요. 즉, 세상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하는 말을 따라서 세말로부터 구원되어야 한다는 논조를 가지고 떠들어댑니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며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구원이 아닌 파멸의 길로 인도합니다. 요즘도 어렵지 않게
이런 사이비 집단들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어쩌면 현재를
포함한 인류의 역사는 안정된 세상을 구현하지 못하고, 늘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왔고, 만들어 갈 것이라는 것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세상은 늘
어수선했다는 말이 되겠지요.
종말에 대한 복음적
이해는 어떤 것일까요?
첫째, 언제 어떻게
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정해진
날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습에 의해서 그 날이 당겨질 수도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둘째, 우리의 삶의
모습이란 종교적 교리나 사회규범을 떠나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성이 존중되고 유지되고 있느냐의 여부로 따져보는 삶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적어도
그리스도를 통해 삶의 바른 길을 알고 있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소명을 다할 때만이 세상의 죄가 상쇄되고 아름답게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죄가 만연하면 죄가
죄로서 보여지지 않습니다. 죄가 거듭되면 죄에
대한 반응은 무디어집니다. 종말이란 분명 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 없이 우리의
죄가 커졌을 때,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이 우리의 죄로 인해 더 이상 닿지 않게 되었을 때, 즉, 악마가 원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을 때, 그때가 바로 세상의
종말이 도래할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구 온난화,
지진을 비롯한 온갖 자연재해, 새롭게 창궐하는 역병들, 부당한 권력과 독재, 잔악한 범죄들, 전쟁들, 모두가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죄의
결과라는 것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열심히 보속하는
마음으로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선을 만들고 악과
싸워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답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세세손손 이 아름다운 지구를 물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만일 종말의 조짐이 보인다면, 교회는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줄 것입니다. 즉,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없는 한, 어느 누구의 말에도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 대탕녀
바빌론이 무엇인가? >
-전삼용신부-
1975년 신안앞바다에서
보물선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계기는
신안앞바다로 밀려오는 도자기 그릇들을 그 동네 어부들이 개밥그릇 등으로 사용하는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이 그 중 4개를 가져가 감정해
본 결과 하나에 4억
5천만 원의 감정가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바다를 이 잡듯이 뒤져 가라앉아 있던 보물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발견된
보물들은 박물관에 잘 보관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하다고 판단이 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찾아 당신 나라에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저 바다 속에 남아있게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지
못할 존재이지만 우리 가치를 안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시어 우리 가치를 높여주셔서 우리가 지옥불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맷돌처럼 바다에 던져져 영원히 수장되어버릴 ‘큰 도성
바빌론’이
등장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멸망의 땅이요 대탕녀로 상징되는 바빌론이 무엇일까 연구를 하였습니다.
미래의 타락한
나라일 것이다,
어떤 커다란 종교일
것이다,
혹은 경제를
휘어잡을 집단이나 군사정권일 것이다라는 식의 해석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건
우리는 그 속에 속하지 않아야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바빌론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개념을 잡지 못한다면 혹시 그 속에 속해있으면서도 알지 못한 채 영원한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오늘
독서에서 바빌론과 대조되는 도시가 등장합니다.
아직은 이름을
밝히지는 않지만 조금만 더 읽어 가면 그 도시가 ‘천상
예루살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저버렸을 때는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바빌론으로 유배가게 되었습니다.
바빌론은 어쨌건
하느님을 모시지 않는 죄를 상징하고 그 죄의 결과로 묶이게 된 사람들의 집단이나 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이
어떤 것인지 먼저 안다면 우리는 바빌론에 묶여있지 않고 천상예루살렘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빌론의 파멸을 계속 말하다가,
완전히 분위기를
바꾸어 예루살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이제 앞으로 나오게
되겠지만 ‘천상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어린양의
신부’로서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마치
그리스도 덕분으로 바다 속으로 빠져들지 않는 노아의 방주 속에 머물렀던 노아의 가족들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
속하지 않은 모든 이들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바빌론이 조금은 명확해집니다.
즉,
구원받지 못한 모든
백성들,
그리스도와 혼인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
즉 파멸로 향하고
있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지금 가라앉는 배처럼 심해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이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이 세상과 함께 영원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마치 천사의 말을
듣고 소돔을 빠져나온 이들만 살고 그 세상에 머물러 있었던 모든 이들이 유황불로 멸망을 당했듯이 이 세상은 어차피 모두 멸망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신
것처럼,
이 세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자캐오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그분을 받아들이면 그분의 영향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 세상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박해받고
가난해지고 멸시받고 순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삶을 사는 이들을 미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또한 돈과 권력과 쾌락의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참으로 교회에 속한 이들이 아닙니다.
몸만 성당에
다닌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잉태하면 아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완전히 변화됩니다.
아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인이
남편을 얻으면 또한 이전에 살던 대로 절대 살 수 없게 됩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상대의 영향을 받아 완전히 변화됨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한 이들도 그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뜻을 온전히
따르고 있다면 천상 예루살렘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뜻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원수를 사랑하고 낮아지기를 원하며 남을 위해 희생을 즐기는 이들이 되는 것,
이것이 교회에 속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빌론은 이
세상입니다.
교회는 그 반대의
세상입니다.
우리가 어느 세상에
속해 사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삶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구원은 이 세상과
반대방향으로 향해야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멸망으로
가고 있는 대탕녀 바빌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양승국신부-
잠잠하다가도 획을
긋는 연도만 되면 들고 일어나는 사이비 교주들이 있습니다. 어린 자녀와 함께
종말 이단에 빠진 한 자매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종말 이단에 빠져
가정은 완전 뒷전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가족들의 생계비마저 사이비 교주에게 다 갖다 바쳐 가정경제가 완전히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아이가 취학할
나이인데도 ‘지금 이 절박한
순간에 학교가 무슨 소용이냐?’며 아이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우중충한 교회로 출석시켰습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종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종말과 관련해서
우선적으로 기억할 진리 한 가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그날이 온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종말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성경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이 세상 종말은 무시무시한 끝입니다. 사실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축복 중에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직면한 현실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 한 국가의 미래는 ‘출산율’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녀 각각 따로
따로 결혼해서 적어도 두 명의 자녀는 출산해야 현재의 추세가 유지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출산율이
거의 1에 가까우니 둘이
만나 결과는 한명의 자녀뿐입니다. 노령화와 더불어
진행되는 젊은 층 인구의 감소로 인해 우리나라의 미래가 참으로 어둡습니다. 국력과 국가
경쟁력의 급격한 쇠퇴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이런 면에서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이고 칭송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 딸린 여자들이 불행하다고 선언하십니다.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로 인해 감내해야할 고통이 너무나 극심할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입니다.
기원후 66년에서 70년 사이에 벌어진
유대 전쟁을 통해서 예수님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이 전쟁 중에 백만
명도 넘는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구만칠천명이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거룩한 도읍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화려하던 성전은 흔적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정복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인내가 한계점에 도달해서 드디어 폭발하고 만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오히려 메시아를 십자가형에 처한 유대인들의 완고함이 제대로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경직되고 완고한 마음이 아니라 살처럼 부드러운 따뜻한 마음인 것입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온유한 예수님의 성심 같은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 두려운 것이지만
사실 그것은 오직 원수들에게만 두려운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린 사람들, 낮과 밤 가리지
않고 주님 오심을 기도와 자선으로 준비한 사람들, 다시 말해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종말을 기쁨의 날이자 해방의 날이며 결국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닥쳐오고 이러저러한 징표가 일어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은
달릴 길을 열심히 달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환희의 날, 기쁨과 감사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날이 되겠지만 잘 준비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날이 다시없는 축복과 은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꼭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두려움뿐이지만 그분과 함께라면 언제나 희망과 기쁨,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상우신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올 한
해도 참으로 많은
아름다움을
만났습니다.
마음을
나누었던 아름다웠던
일들과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들로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아름다움을 얼마나
자주 바라보았는지를 다시금 묻게
됩니다.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새삼
죽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산다는
건 서로에게 무언가를
건네주는 일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 땅 위에서
아름다움을 나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가장 큰
위안을 얻게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를
바라보면 허무속에서도 두려움과
공포속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뜨거운 삶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속량으로 우리가
다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수고와
노력없이는 결코 그 어떤
마음의 예루살렘도 다시
아름다워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가야 할
길은 주저앉은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기쁨과 희망의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하루
아름답게 살기 위해
다시금 주님께로
옮겨가는 우리의
삶이기를 기도드립니다.
모든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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