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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묵상글 ( 연중 제31주일. - 지혜롭다면 사랑하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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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03 04:00
- 지혜롭다면 사랑하라!
십계명을 하느님께 받을 때 돌판에 새겨 받은 모세가
가장 중요한 두 계명에 대해서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심하라고 곧 마음에 새기라고 두 번에 걸쳐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비망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닐 비(非)자의 비망록(非忘錄)인 줄 옛날에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정확히 알아보니 비망록(備忘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잊지 않도록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잊을 것을 대비하여 기록한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잊게 되어 있는 존재이고,
기억할 것을 기억하고 잊을 건 잊어야지 다 기억하고 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은 잊어야 할 것과 기억할 것을 잘 아는 사람이고,
알 뿐 아니라 잊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기억할 것은 꼭 기억하는 사람인데,
만일 그 반대가 된다면 다시 말해서 잊어서 버려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꼭 기억해서 간직해야 할 중요한 것을 잊는다면, 그는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도 그렇고 주님도 모든 계명 가운데서 명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계명이 바로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라는 것과 여기애인(如己愛人)
곧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가 비망록이나 돌판이 아니라 마음에 계명을 새기라고 한 것이나,
주님께서 그것을 첫째가고 둘째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하느님을 위해서겠습니까?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웃을 위해서겠습니까?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가 행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죽으며 자녀들에게 이것 꼭 명심하며 살라고 할 때
사랑하기에 그 말을 하는 것이고 행복하라고 그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제일 중요하다고 하시고 모세가 마음에 새기라고 한 계명들이
우리 안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 안에 있습니까? 마음 밖에 있습니까?
저는 요즘 세상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함께 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없고 그래서 영혼도 심장도 없는,
그래서 껍데기만 있고 속은 텅 빈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마음 안이 텅 빈 것이 아닙니다.
마음 안에 욕심이 가득하거나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사랑이 없기에 욕심과 두려움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마음은 가득하면서도 허한 것입니다.
진정 사랑 없이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
사랑 없이 행복할 수 있고,
그렇게 사는 것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결론처럼 말합니다.
지혜롭다면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씀을 명심합시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라고 하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도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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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사 마치고 복사들과 함께 제의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대복사를 선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오늘 너무 긴장해서 몇 군데 틀렸다는 것입니다. 전례 때 종종 틀렸다면서 찾아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례는 ‘맞다, 틀리다’의 관점이 아닙니다. 바른 자세와 바른 순서에 따라 바른 전례 예식이 거행되는 것은 우리의 일치와 정성스러움이 드러나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전례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 10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례에서, 특히 성찬례에서, 마치 샘에서처럼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들고, 또한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이 그 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 성화와 하느님 찬양이 가장 커다란 효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엇이 맞는지 틀리는지의 관점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서 우리 존재가 진정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되고 있는지 그리고 참되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만 기억한다면 틀린 것이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만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판단도 맞는지 틀리는지였습니다. 이 판단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이루어지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틀렸다’라고 말했고,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은 오로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분명히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오히려 그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종교적인 민족이었고 그들은 모세의 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계명을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248개의 조항, 금기의 조항 361개 조항, 모두 합해서 613개의 조항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힘들었고, 이 조항들을 지키느라 다른 것들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613개의 조항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단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생활하는 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이 무엇이냐는 종교적인 질문을 예수님께 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 계명의 핵심이고,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맞다, 틀렸다’라는 말로 상대에게 때로는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 전에 사랑의 기준으로 따져보았으면 합니다. 사랑만이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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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끊임없이 노력하라. 체력이나 지능이 아니라 노력이야말로 잠재력의 자물쇠를 푸는 열쇠다(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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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31주일, 11월의 첫 주일, 늦가을입니다. 가을도 아름답게 익어가고, 단풍도 아름답게 익어가고, 사랑도 아름답게 익어갑니다.
“가을처럼 아름답고 싶습니다”(이채)
가을에 오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의 등불 하나 켜 두고 싶습니다/
가을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진실한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을엔/ 그리움이라 이름하는 것들을/
깊은 가슴으로 섬기고 또 섬기며/ 거룩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싶습니다//
오고 가는 인연의 옷깃이/ 쓸쓸한 바람으로 불어와/
가을이 올 때마다/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세월//
꽃으로 만나/ 낙엽으로 헤어지는/
이 가을을 걷노라면/ 경건한 그 빛깔로 나도 물들고 싶습니다//
그대여!/ 잘 익으면 이렇듯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가을뿐이겠습니까/
그대와 나의 사랑이 그러하고/ 그대와 나의 삶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불리는 ‘셰마 이스라일’을 들려줍니다. 유다인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바로 이 “셰마”라는 신앙고백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이 기도를 정해놓고 드린다고 합니다. 또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경구갑을 부적처럼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37-39).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십계명에 6백 조항이 넘게 보태어져 실천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지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도 이 질문을 예수님께 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었던 계명으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 29)
이 말씀은 먼저, ‘하느님의 존재’ 와 ‘우리의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곧 ‘한 분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과 ‘그분의 것, 곧 그분의 소유’의 관계를 드러내며, 바로 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요 바탕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요 이유입니다.
그러니 이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히:아헤브, 희:아가페오)은 본능적 호감과는 구별되는 ‘신실함’과 ‘충성’을 드러냅니다. 곧 ‘온 마음과 온 목숨과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모세가 말한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구약>에서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동포로 한정하거나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시킬 뿐입니다(레위 19,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태 5,44-48).
또한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또한, 나아가서,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신명 6,4-5)과 ‘이웃 사랑’(레위 19,18)을 한데 묶으시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사랑의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이요,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인 셈이 됩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먼저 ‘형제의 일부’가 되어주는 일로 이루어져 갑니다. 마찬가지로, 좀 더 확장해서 표현해본다면, 내가 형제의 일부가 되고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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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7). 오늘 이 시간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사랑이 살아있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많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한 자와 곤궁한 자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비극에 처한 자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사랑에는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만일 수고를 느낀다면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마라스머스’ 라는 병을 아십니까? 이 병은 외롭게 자란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병입니다. 증상은 신체 발육이 부진하고 온몸에 힘이 빠져 시름시름 앓는 증세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영양결핍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사랑을 한창 공급받아야 할 아이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표현하지 못할 때 이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이병에 대한 의사의 처방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무엇일까요? 예, “매일 사랑을 고백하세요!”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좋은 약이랍니다. 사실 매일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부간, 부자간에 고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서로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질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당신이 저를 사랑하듯“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도 “여보 사랑해!”라는 표현을 자주 하시길 바랍니다. 남자들은 대개 ‘그냥 눈빛만 봐도 알지, 그것을 꼭 표현 해야 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꼭, 그리고 자주 듣고 싶어합니다. 사실 남자들도 “사랑한다”는 말에 무덤덤해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기뻐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자녀와 듣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들로부터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게 될 때 모든 피곤이 풀립니다.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줄 때 삶의 활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을 자주 하시길 권합니다.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 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사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써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행위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테레사 효과를 아시지요?
미국 하버드 의대생들을 봉사 활동에 참여시킨 후 체내 면역 기능을 측정해 보았더니 면역 기능이 크게 증강되었답니다. 또한 마더 테레사의 전기를 읽게 한 다음 인체 변화를 조사했더니 그것만으로도 생명 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인체에 도움이 되는 항체가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진은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거나 봉사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면역 기능이 높아지는 것을 두고 마더 테레사 효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을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주님을 차지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선언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요한복음13장34절 이하에서 주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사랑의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나의 벗이 된다”(요한15,13)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5,46) 하시며 끼리끼리의 사랑을 경계하셨습니다.
1요한 3,14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하고 있고 1요한4장20절에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적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8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사랑은 손발에서 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에 대해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루카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골인한 것과 골을 넣을 뻔한 것은 분명 다릅니다. 홈런과 파울은 같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있는 사랑을 가슴으로 끌어내리고 가슴에 담긴 사랑을 마침내 손발로 행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지식의 앎이 아니라 사랑의 구체적 삶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아들아, 사랑한다!”“딸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한다는 이 한마디가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려움 안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여전히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언제나 주님을 향한 희망 안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에덴 동산에 사는 하와가 아담에게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아담에게 “자기 나 사랑해!” 하고 물었지요. 그러자 아담이 “그럼”하고 대답했어요. 하와가 다시 “정말 나를 제일 사랑하는 거지?” 물으니, 아담이 “그렇다니까?”하고 대답했어요. “내가 제일 이뻐?”하와가 묻자 “야! 여기 너 밖에 다른 사람이 더 있니?” 아담이 대답했답니다.
거듭거듭 확인하려는 하와나 그렇게 멋없이 대답하는 아담이나…
천생연분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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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레바논에 ‘UN 평화유지군’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평화유지군은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군대라고 합니다. 절대적인 강자인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함부로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최근에 이스라엘은 평화유지군을 향해서 공격했고, 탱크로 진격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평화유지군이 부상했다고 합니다. 유엔은 이스라엘에 강력하게 경고했고, 평화유지군에게 속했던 나라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레바논에서 철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군인들은 평화유지군에 남아서 끝까지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위험할지라도,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을지라도 레바논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유엔에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아일랜드 군인들이 레바논에 남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아일랜드도 영국으로부터 침략받았던 약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가정 방문 중에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년은 3년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청년은 우크라이나로 가서 봉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말렸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년은 우크라이나로 떠났고, 안타깝게도 청년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한 후에 사망했습니다. 무엇이 청년을 우크라이나로 떠나게 했을까요? 미국에 있으면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죽음의 덫이 놓여있는 우크라이나로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더 높이 날아오르려는 갈매기의 꿈과 같은 겁니다. 그것은 벗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부모님도 이제는 슬픔을 딛고, 아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은 목숨을 바쳐서 이웃을 돕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랑을 받는 단계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들숨이 있어야 날숨이 있습니다. 한동안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셨습니다. 흙 속에 있는 씨앗은 물과 햇빛을 받아야 싹이 나옵니다. 사랑받는 아이는 면역력도 강해지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생깁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가 남을 생각하며 감동할 수 있고, 자신의 애정을 특별한 존재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느낌은 사랑받는 것보다 한결 흐뭇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것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도, 역경도, 굶주림도, 죽음까지도 이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자신의 애정을 남에게 투사하고 나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쏟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단계의 사랑은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과 비교할 때 한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든, 받기 위해서든, 남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주거나 받는 존재에게 실망하거나 배신당할 염려도 없습니다. 네 번째 보편적인 사랑의 단계입니다. 이는 무제한의 사랑입니다. 애정을 받고, 남에게 투사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면, 사랑을 자기 주위의 사방팔방으로 전파하기 시작하기도 하고 사방팔방에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 보편적인 사랑을 부르는 이름은 생명, 자연, 대지, 우주, 기, 하느님처럼 문화와 민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합니다. 지금 나의 사랑은 어떤 단계의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식어 하느님 아버지를 잠시 외면한다고 해도 끝내 우리를 버리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면 기다리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식어 버리면 그들 역시 사랑이 식어 버리곤 합니다. 2024년도 이제 2달 남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미워한 이웃을, 나를 미워한 이웃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고, 우리의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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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말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을 때마다 자문하게 됩니다.
정말 우리는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 사랑하고 있나?’
아니면 남는 시간과 남는 정성과 남는 힘으로 사랑하는 척하며 이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혹은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주님께 질문 던진 율법 학자처럼 ‘스승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주님의 말씀처럼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쉽게 흔들리고 쉽게 지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모습을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늘 우리를 다독이고, 기도 안에서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복음을 통해, 여러 교회의 전승을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분명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넘어졌을 때, 그리고 주저앉았을 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여정에서 쉼은 청하되 포기는 없는 모습이 바로 우리 사랑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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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할수록 더 아픈 것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불평이나 불만이 생기게 됩니다. 직장이나 교회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도 불평불만은 쉬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불평과 불만은 하면 할수록 더 큰 아픔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상대방과의 비교로 연결될 때 불평불만은 극대화됩니다. 비교란 것은 하면 할수록 우리 마음을 더 깊고 어두운 구렁에 가두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그대 존재만으로 특별합니다.
그대는 그대 존재만으로 귀합니다.
그리고 그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특별하고 귀합니다.
불평과 불만은 이제 접으세요.
오히려 감사와 만족을 마음에 채워보세요.
하면 할수록 행복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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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키엣 대주교님.
우리에게 최상의 법은
유대인만큼 열정적으로 법을 만들고 글자 그대로 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는 민족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법을 만들었고 어렸을 때부터 법을 배우고, 철저히 지키는 것이 삶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법 자체에만 얽매이다 보니 어떻게 법을 지켜야 할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아닌 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설명하셨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 그분께서는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 누구 와도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시다. 그 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생명의 원천이시므로 우주는 오직 그분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 먼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진리를 우리는 종종 잊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무관심하고 때로는 그분의 사랑을 배반하기도 합니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계명’을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연결하셨습니다. 즉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인간, 특히 사회에서 가장 작은 이들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아닌 나약한 인간인 우리가 ‘나 자신처럼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이런 계명을 내려 주셨을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계명 중 가장 중요한 계명이며 모든 법의 토대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지키는 것은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사랑의 법은 그 어떤 법보다 간단하고 무겁지 않은 아주 가벼운 법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곧 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법을 지키는 것이 더 이상 어렵지 않고 오히려 법을 지키는 데 있어 달콤한 행복을 줄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직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사회에는 많은 불의와 불공정이 있습니다. 아직도 주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 서로 사랑한다면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지고, 사랑을 품고 사는 나의 삶은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 모든 것보다 주님을 먼저 사랑하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내가 지금 바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3. 모든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지키는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세상은 어떨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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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하라
“하느님 중심의 삶”
요즘 단풍으로 울긋불긋 타오르는 한국 만추(晩秋)의 가을은 어디나 아름다워 지상 천국같습니다. 가을 노년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 좋은 사랑 공부의 계절입니다. 10월 내내 저를 행복하게 한 두 시가 실감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요즘 아름다운 자연에 에워싸여 있는 제 집무실 문을 열 때 마다 단풍 장엄하게 물든 가을 산야(山野)를 바라보며 수없이 외워보는 두 짧은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단풍 불타오르는 만추의 가을산앞에 서면 아름다운 사랑의 하느님앞에 서듯 참 행복을 느낍니다.
“가을엔
이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모두가 이쁘다
작은 풀잎들, 나뭇잎들, 들꽃들...
마침내
하늘 사랑으로 울긋불긋 타오르는 단풍되니
모두가 이쁘다
너도 이쁘고 나도 이쁘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에 그 마음이 불타오르면 누구나 다 예쁩니다. 너도 이쁘고 나도 이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사랑이 답임을 깨닫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비우는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마음은 떠나 보내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다산>
누구나의 무한한 마음을, 가슴을 채울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학문의 목적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데 있다.”<맹자>
그렇습니다. 모든 공부의 목적은 잃어버린 사랑을, 하느님 사랑을 찾는데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서도 하느님 사랑을 읽습니다. 11월 기도지향은 “아이를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부모나 배우자를 잃은 이들에게는 위로할 말이 있어도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들에게는 위로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또 위로의 성령으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제 위령의 날에는 아이들의 무덤들이 있는 로마의 “천사들의 정원’(Garden of Angels)”이라는 묘지에서 위령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앞서 모든 성인의 날 미사때는 “주님의 도움으로 거룩함에 대한 열망을 일깨우도록 하자”는 요지의 강론을 하셨는데, 거룩함 대신 사랑을 넣어 “사랑에 대한 열망을 일깨우도록 하자”해도 그대로 통하겠다 싶었습니다. 사랑할수록 거룩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평생사랑공부의 수행이 아름다운 인생을 만듭니다. 졸업이 없는 사랑의 인생학교요 죽어야 졸업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원은 평생사랑을 공부하는 평생 사랑의 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결코 사랑에 지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은 구체적 사랑 방법에 대해 나눕니다.
첫째, “하느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어제 위령의 날 미사중 화답송 후렴,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노래하는 순간, 주님이 없으면 누가 무엇이 우리의 빛이 구원이 되겠는가 생각하니 정신 아찔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도대체 우리 삶의 중심 자리에 하느님이 아닌 누구를 모실 수 있겠는지요! 이래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입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도대체 사랑의 하느님이 없으면 누구에게 이런 사랑을 고백할 수 있을런지요! 그러니 우선적인게 하느님 사랑입니다. 신명기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모세의 말씀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모세의 권고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예수님은 이 말마디 안에 “정신을 다하고”한 대목이 추가됩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 난민들이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하느님 중심을 잃은, 사랑에 굶주린 영적난민들은 곳곳에 널려 있으며, 수도원에도 끊임없이 찾는 영적난민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어 스스로 자초한 영적난민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에 정주하는 정주영성의 중요성이 날로 증대되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둘째,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입니다.
역시 하느님 사랑에 이어 이웃 사랑도 명령이자 의무입니다. 예수님께 호의적인 율법학자는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을 물었는데 예수님은 지체없이 이웃사랑을 추가합니다. 613개 율법을 요약한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습니다.
이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며 화답하는 율법학자에게 주님은 흡족해 하시며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로 오늘 이 자리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할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으로 검증되며 하느님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웃사랑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 뿐이 없습니다. 우선순위로 구별할 수는 있을지언정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모든 사랑이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빛나는, 영원한 모범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온맘으로 사랑했고 가난한 이웃을 온맘으로 사랑했던 사랑의 이중계명의 빛나는 모범이 예수님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사랑의 으뜸자리에 예수님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저절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뿐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표현하는 주님의 십자가이자, 수직의 하느님 사랑과 수평의 이웃사랑을 상징하는 주님의 사랑의 십자가요, 이 두 사랑이 만나는 중심 자리에 늘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넷째,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하라."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이중계명의 모범인 예수님을 사랑하며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합니다.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의 마르지 않는 샘이 바로 성체성사이며,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이자 가톨릭교회의 미사인 성체성사라 저는 단언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의 집전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가 소개하는 대사제 예수님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파스카의 주님이자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그 사랑으로 사랑하고,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으로 미사를 사랑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입니다.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대사제가 필요했습니다. 거룩하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 깊고 아름다운, 우리를 위해 제대에서 끊임없이 희생제사 미사를 봉헌하는 사랑의 대사제 예수님이신지요! 희생제사와 밥상의 이중 역할을 하는 주님의 제대가 참 고맙고 소중하게 생각됩니다. 대사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청탁을 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계시니, 바로 하느님 오른쪽에 영원히 좌정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이웃을, 예수님을, 주님의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할 때 그대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요 이런 사랑을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아계시다!
나의 반석께서는 찬미받으시리니,
내 구원의 하느님께서는 드높으시도다.”(시편18,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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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루카 12,34)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머리로 하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마음으로 하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손발로 하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온 삶으로 하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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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3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웃사랑과 하느님사랑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부터 이미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위 19,18)는 ‘제 2계명’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들에 있어서도 벌써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나 적대는 하느님께 대한 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창세 3,12; 4,9). 또 율법도 하느님께 대한 의무와 이웃에 대한 의무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웃들 특히 가장 버림받은 자들과 자신과 별로 상관없는 자들을 돌보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결합될수가 없습니다. 이웃에 대해 냉담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생각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사랑의 이중계명은 율법의 정점이며 완성이요 중심입니다. 이웃사랑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박애가 아닙니다. 그 종교적 성격을 두 가지 점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 자신이 모범을 보여 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원천이 하느님 자신이시며 따라서 우리의 이웃 사랑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이라는 점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에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 인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하느님께로 오며 동시에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실로 인하여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기에 우리도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 모두가 세상 끝날까지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근본 요청인 동시에 최후의 심판도 바로 이 사랑의 실천에 의해 판가름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이것이 예수님께서 남기신 유언입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의 사랑의 유언은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실천되어 왔고 우리또한 사랑을 실천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이에게 미치며, 사회적 내지 인종적 차별의 벽을 모두 타파하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이들을 소중히 여깁니다. 더 나아가 원수에 대한 사랑까지도 요구합니다. 사랑은 의기소침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한없이 용서하고, 원망을 품고 있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화해하며, 모든 것을 참고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악을 선으로 보답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의 찬가(1고린 13장)에서 사랑의 본질과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이미 지상에서 영원한 하느님의 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인하여 교회 공동체가 성숙한 인간이 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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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 게오르겐베르크-피히트/티롤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일어난 고귀한 성혈의 기적 사건
오스트리아-1310년
수도원장 미카엘 가이써(Michael Geisser)는 슈바쯔의 교구 성당에서 수많은 군중들 앞에 나가 훌륭한 강론을 하였는데,이 강론을 하면서 그분은 성스러운 성체를 모신 제단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데 대한 증거로서 성 게오르겐베르크에서의 성혈의 기적을 기꺼이 인용하였다. 심지어 그분은 강론대 위에서 성혈을 모신 성광을 들고서 그것을 청중들에게 보여 주었다. 또 그 수도원장 신부는 그 곳에 참석한 개신교 목사들을 훌륭하게 반박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지역을 떠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에 의해 현혹당한 신도들이 다시 옛날의 참된 신앙으로 되돌아 섰기 때문이었다. 경건한 신자들은 주님께서 자신의 성혈에 경건한 경배를 드리도록 하신 특별한 은총에 감사하면서 그 그릇된 교리에 대한 완전한 숭리를 지켜 보았다.
170년이 지난 1480년에도 성혈은 여전히 “마치 오늘날 어떤 한 사람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그렇게 신선하다”고 기록에 적혀 있다. 현재---나는 1968년에 그 성유물(聖遺物, 성혈)을 볼 수가 있었는데 그 성혈은 피섬유(Blutfaser)로 말라 붙었고,언제나 순례자들에게 기꺼이 보여지고 있다.(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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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같게 되려는 것이 용서와 사랑 /
박윤식 [big-llight] 241102. 18:11 ㅣNo.177271
사람마다 자신의 신조(信條)를 지니고 있다. 신조란 일종의 인생 목표인 신념이다. 한번은 공자의 애제자로 공문십철(孔門十哲)중의 한 사람인 자공(子貢)이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 평생 지켜야 할 신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서(恕)이다.” 한자의 용서할 ’서’(恕) 자를 풀이하면, ‘마음(心)이 서로 같다(如).’ 라는 뜻이다. 이는 그 유명한 위령공21에 나오는 내용이다. 우리말로는 ‘용서’일 게다. 내 마음과 상대방인 너의 마음이 서로 같게 만드는 것이 서(恕)이다. 이는 이웃 사랑하는 이는 이웃의 마음을 헤아려, 그것과 하나가 되는 ‘같게’된다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이는 이웃이 바라는 것을 실천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의 마음, 곧 하느님의 뜻과 하나가 되는 거다. 하느님 마음을 닮고 하느님 뜻을 이 세상에 이루어 가는 게 우리 ‘신앙인의 신조’일 게다.
‘그때에 어떤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와, “계명 중 첫째는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고, 둘째는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그분은 한 분이시고 그 밖에는 없다.’ 하시니,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 그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더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답하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를 못하였다.‘
사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고 믿는 신앙인이다. 그렇지만 마치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마시는 공기처럼, 날마다 받는 햇살처럼 하느님께서는 나보다 더욱 내 곁에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지만, 때로는 너무 가까이 계셔서 그분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 때가 더 많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시작과 마침을 하는 삶을 고백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고 가르치신다.
그러기에 때로는 나도 나를 모른다고 느껴지는 마음 흔들릴 때는, 언제든지 하느님께 도움 청해야만 할 게다. 올바른 믿음을 간직하려면 정신을 헛된 것에 쓰지 않아야 하고, 삶에 지쳐 쓰러지더라도 온 힘 다잡아서 일어날 줄도 알아야만 하리라. 이것이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인 사랑을 삶의 첫째 신조로 두는 이다. 이 사랑은 내가 나의 중심이 아닌, ’네가 나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이다. 나를 향해 가는 게 아닌, 너와 같게 되려는 것이다.
이처럼 같게 되려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이 사랑의 순서를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을 첫째로 두고, 다음을 그 첫째이신 그분께서 사랑하는 모든 이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의 첫째 계명은 이웃 사랑으로 완성된다. 사랑은 마음이나 생각에만 머무는 게 아닌, 실천으로 드러나기에. 그래서 내가 만나는 이웃들, 특히 신앙생활에서 만나는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은 물론, 가족과 직장 동료, 일상에서 부딪히는 이웃들이 다 하나같이 나의 사랑 실천 대상이다. 이처럼 하느님을 중심에 두는 나의 중심은 이웃보다 내가 아닌, 그 이웃이 나 안에 중심 되는 것이다. 나와 이웃이 같게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용서요 사랑이다. 모두와 같게 되려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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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내가 중심이기를 멈추고, 상대가 나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향한 이기주의적 움직임을 포기하고, 다른 이를 향하여 내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민범식, 『하느님 길만 걸으세요』, 156-165면 참조).
그래서 만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가 나에게 있다면 그 사랑은 아직 성숙한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기쁘기 때문에, 내가 충만해지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면 아직도 내가 중심에 있고 그 사랑은 나를 향한 움직임입니다.
반면에 사랑하는 상대의 행복을 바라고, 상대의 완성을 위하여 기꺼이 나를 희생할 마음이 있다면, 진정으로 성숙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자신의 중심이 되고 자신이 상대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생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보다 하느님께서 먼저이시고, 이웃이 먼저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바치신 것은 참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포기하신 ‘너-중심적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정한 사랑 안에서는 상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상대가 불행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고, 상대가 행복하면 내가 불행해진다는 사고로는 이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상대가 중심이 되는 진정한 사랑 안에서 아주 쉽게 이해되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 여기는 사랑이 우리 안에 깊게 자리하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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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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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밖에도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각하면서
지켜야 할 계명들과 규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오래, 그리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그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규정을 지키다보면
지금의 상황에 딱 들어 맞지 않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누구는 그래서 새로운 규정을 만들기도 하지만
규정이 많이 생기는 것은
때로는 우리의 자유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그 규정을 새로운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그 규정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 묻게 되고
그 질문을 이 율법 학자는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로 묻고 있습니다.
모든 규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그 기준은
우선 '유일하신 하느님'입니다.
한 분뿐이신 하느님의 말씀이
계명이나 규정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즉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방법입니다.
유다인들에게 계명은
단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잘 살기 위해서
서로 합의한 규칙들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는 쪽으로
방향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 이어
바로 이웃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당장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다보니
사람들의 입맛을 무시하고
그것을 맞춰주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기준에서 빠진 사랑은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칫 너만을, 몇 명의 사람들만을 위한
사랑으로 바뀔 가능성이 많습니다.
즉 하느님을 그 기준으로 삼는 것이
너무 원칙만 따지는 것 같아서
딱딱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어디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좋을지
매번 고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그 기준의 하나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삶에 많은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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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을 말로만,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십시오!
선입견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수시로 예수님과 충돌하는 사람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입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학자나 바리사이 하면 다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서도 참다운 신앙인, 예수님께 우호적인 사람들도 꽤 있었습니다. 참 진리를 찾기 위해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는 참으로 열려있는 율법학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보호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다가온 율법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보여준 말투나 태도는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복음서에 통상적으로 등장하는 다른 율법학자들은 떠보기 위해, 논쟁하기 위해, 사슬에 얽어매기 위해 악의적인 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율법학자는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다른 스승과는 확연히 다른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어 좋은 의도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가 던진 질문은 참으로 기본적인 질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정말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당시 유다교에는 총613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가 하는 것은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어떤 계명은 굉장히 무겁고 부담스런 계명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계명은 가볍고 지킬 만 했습니다. 적극적인 계명이248개였고 소극적인 계명이365개였습니다.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착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장 4절을 인용하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그냥 말로만, 입술로만, 기도문 만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에 있어 적당히,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에너지를 다 투자해서 성심성의껏 사랑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조금은 불성실하고 미온적인 태도, 소극적이고 미지근한 신앙에 일침을 가하는 따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은 세상에 반은 하느님께 걸쳐놓은 우리 삶의 모습을 반성케 합니다.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을 가르쳐주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사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은 절친한 친구들, 동료들, 좋은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보다 보편적이고 확장된 의미의 이웃입니다.
착한 사람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들,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의롭고 깨끗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부정한 사람들,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 원수들조차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어야 하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듯 관대하고 폭넓은 이웃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을 뒷받침하는 토대입니다.
그간 할례나 안식일 규정, 정결례와 관련된 율법에 목숨을 걸어왔던 율법학자들에게는 뼈아픈 일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이자 최우선 순위는 사랑이라는 진리를 명명백백하게 만천하에 선포하십니다.
사랑의 계명과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다든지, 율법의 근본을 흔든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을 원래의 자리로 환원시킨 너무나도 합당하고 당연한 조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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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동기와 이유로 제시하실 만큼 밀접히 결합하신다. 인간이 위대한 존재로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하다. 하느님이 죽는 곳에서는 인간도 죽게 된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신명기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찬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어떤 계명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인지 묻는 율법 학자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그 계명에 다른 계명, 즉,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까이 놓으신다. 이 계명도 구약성서에 나타나지만 동족만을 가리킨다(레위 19,18). 마태오는 첫째 계명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22,39). 루카는 두 계명을 종속관계로 보지 않고(10,27),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이웃으로 간주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10,30-37). 마르코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자리에 놓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두 번째 자리에 놓은 것을 보면 유일신론적 배경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첫 자리에 계셔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성이나 품위도 올바로 갖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랑이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사랑은 서로 교차하며 서로를 요청한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 종교이다. 오로지 이웃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시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라고 하신다. 이 두 계명은 다시 율법 학자의 말로써 강조되고 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2-33절). 즉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다 같이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잘못하기 쉬운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 행위가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국한해 그 의미를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펼 때, 하느님은 사회적인 분이시며 위대한 창조를 하시는 분임을 증거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형제들에 대한 봉사가 되고, 또한 구체적인 필요에서 구현되기에 참된 예배가 된다. 우리가 주일을 지내는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주일미사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바쳤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이다. 봉헌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들은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라고 칭찬을 듣는다. 율법 학자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이 자리에서 가까이 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가까이 와 있다. 예수께서는 누가 당신 가까이 있는지를 아시고 또 명백하게 규정하신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자발적으로 봉헌하신 당신의 희생으로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를 확실히 가르쳐 주셨다.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성이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요청이다. 이 요청은 이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작은 일에서부터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참된 예배를 우리도 이제 이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미사가 더 기쁘고 하느님 앞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몸만 왔다 갔다 하는 타성적인 신앙생활 그래서 아무 맛이 없는 신앙생활, 전례 생활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이고 활기찬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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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웃보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에게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계명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면 계명은 왜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가르치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그래야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할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2023년 38년 동안 중증 장애인인 딸을 돌보다가 수면제를 먹인 뒤에 살해한 60대 어머니에게
법원이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선처했습니다.
검찰은 징역 12년을 구형했는데, 어머니는 최후 진술에서 “버틸 힘이 없었고 끝내자는 생각이었다.”라면서, “딸과 같이 갔어야 했는데 혼자 살아남아서 정말 미안하다.”라고 오열했습니다.
분명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랑이 저절로 솟아나면 부모에게 키워질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사랑은 실체가 없고 개념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더라도 그들도 부모에게 사랑받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없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받아야만 줄 수 있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하고 하실 때 중요한 부분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그 부족한 부분을 이웃에게 채우려 해서 나중에 본인은 사랑했다고 말하겠지만, 자녀들에게나 이웃에게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최고야 원장의 『벼랑 끝, 상담』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20대 중반에 무역회사에 다니며 이미 팀장의 자리까지 오른 능력 있는 여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 자매는 어렸을 때 항상 부모의 싸움만 보며 자랐습니다.
그중에서도 피해의식이 컸던 엄마가 큰 문제였습니다.
엄마는 모든 분풀이를 딸에게 해대고 있었습니다. 딸이 수학 95점을 받아 반에서 1등을 하고 기뻐서 엄마에게 내밀었을 때 엄마는 그 시험지를 찢어버리며 “내가 이런 점수 보자고 이 고생하며 키웠냐?”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은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죽도록 공부만 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직장에 취직해서 독립했을 때도 딸을 찾아와 괴롭혔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스트레스가 폭발할 때면 자해하며 풀었습니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있어서 남자친구는 쉽게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하던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고 그렇게 많은 남자가 떠나갔습니다. 남자가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면 자해하며 피 흘리는 모습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유일하게 지금 이 남자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었기에 여자는 이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고야 원장은 그녀에게 남자를 위한 공간을 제공해 달라고 했습니다.
집 안에 텐트를 하나 마련해서 그 안에 남자친구가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자유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잘 됐을까요? 나중에 다 부숴버렸습니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면 남자친구 사랑받아야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것에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이고 지금으로 말하면 ‘십일조’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자녀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행복한 아내가 되어야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아내의 겨울’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노동으로 하루살이 하던 정호는 경기 침체로 넉 달째 일을 못 나갑니다.
그 남편을 위해 고깃집에서 일하다가 사장이 줬다며 아내가 불고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이들보다 먼저 남편에게 주었고 그 안에 씹다 버린 껌이 노란 종이에 싸여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자녀 몰래 그 껌을 집어삼켰습니다.
남편은 숫기 없는 아내가 몰래 남들이 먹다 남긴 고기를 모으느라 고생했을 생각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배부르다며 밖으로 나온 남편은 아내의 구두를 닦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존재로서 자녀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랑이기에 순수한 사랑이고 그 사랑은 자녀들의 자존감을 높여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이고 그 나라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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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은, 이미 받은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1) 사랑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전에’ 했었다는 말이나, ‘나중에’ 하겠다는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전에는’ 사랑했는데 어떤 이유 때문에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너 하는 것을 보고, 사랑하겠다.” 라고 말한다면, 지금은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조건을 걸고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나 목적이나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바로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특정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성당에 있는 동안에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지금은 먹고 살기가 너무 바빠서 여유가 없다. 나중에 시간이 좀 나면 그때 신앙생활을 하겠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말은, 주님에 대한 사랑도 없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사랑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일 뿐입니다.
지금 없는 사랑이 나중에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는 것이 너무 편하고 좋아서 주님을 아쉬워하지 않고, 아예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사는 것이 힘들어지면 그때서야 잘못했다고 주님께 빌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미신과 다르지 않은 기복신앙일 뿐입니다.
2) 사랑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하는 일입니다.
남에게 시켜도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대사제 카야파가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이 말은, “민족을 위해서 예수를 죽입시다.”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그가 참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내 목숨을 바치겠소.”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목숨을 바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남을 희생시킬 생각만 했습니다.
<그는 민족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도 같은데, 그가 정말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했다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남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습니다(판관 11,31).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 서약 자체가 무효입니다.
사랑은, 목숨도 포함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아낌없이 내주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ㄱ).”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은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면서
당신의 아드님만 희생시키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사랑 실천이 ‘계명’으로, 또 ‘해야 한다.’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하기 싫어도 하여라.” 라는 강제 명령은 아닙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계명 실천도 아니고 사랑 실천도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큰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에,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계명이어서 의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쁘고 행복하니까, 또 내가 원하는 일이니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고,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9-17).
형제를(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한다는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1요한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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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12,28ㄱㄷ-34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저 신부가 갑자기 무슨 쌩뚱맞은 소리를 하나 싶으실 겁니다. 사랑이라는건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에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사랑의 정체와 본질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기도 하지요. 그런데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남긴 말씀을 통해 사랑의 모습에 대해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고, 가난한 자와 곤궁한 자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비극에 처한 자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고,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 이 문장은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겉모습을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랑이 지향해야 할 실천이라는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에, 이를 통해 내가 손과 발로, 눈과 귀로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내가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점검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적당히 설렁설렁이 아니라, 내 만족과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그리고 진심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또한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저 뜬구름 잡듯 관념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은지, 꼭 실천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나 구체적 계획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임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학자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처음에 모세에게 주신 계명은 열 가지 였습니다. 그 십계명 만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지요. 그 계명을 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그 계명을 통해 실현해야 할 근본정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것들은 희미해지고, 계명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데에만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어겼다가 큰 벌을 받게될까 두려워 계명들을 어기지 않기 위한 규정들을 만들었고, 그 규정들을 어기지 않기 위한 또 다른 규정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어 나중에는 지켜야 할 율법조항이 613가지로 늘어났고, 그 중 무엇이 정말 중요한 하느님의 뜻이고 무엇이 인간이 만든 부수적인 부분인지를 식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겁니다. 그래서 다른 ‘대 예언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복잡한 율법조항들을 단순하게 압축해달라고, 그것들만 잘 지키면 하느님의 뜻을 어길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한 것이지요.
만약 그가 계명의 본질이 ‘사랑’임을 알았더라면 무엇이 ‘첫째’가는 계명인지는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걸어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모두가 당신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도록 하시려고 주신 게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셨으니 우리도 받은 그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의미인 것이지요. 그러니 ‘첫째 가는 계명’은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하라’가 될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적당히 대충 할 수 없습니다. 내 기분 내킬 때만 선택적으로 할 수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크고 깊은 사랑에 비해 피조물인 내가 드릴 수 있는 사랑은 너무나 미약하고 보잘 것 없기에, 내가 받은 만큼 돌려드리지는 못해도 최소한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드려야 마땅하겠지요. 그러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지켜야 할 첫번째 필수조건이 됩니다. 한편 하느님을 사랑할 때 지켜야 할 두번째 필수조건은 우리 마음이 갈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양다리 걸치기’는 참된 사랑이 아니지요. 말로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것들에 한눈을 팔아 마음이 갈라진다면 그건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아닌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말고도 사랑해야 할 존재가 있습니다. 나와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이웃’입니다. 아까 분명히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니 뭔가 모순적이라고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웃사랑은 넓은 차원에서 보면 하느님 사랑이라는 큰 틀 안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하고 싶어도,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며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건 쉽지 않기에, 행동과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는 사랑은 금새 관념적으로 변해 옅어지고 흩어져 버리기에, 우리는 이웃에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꿩 대신 닭’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 안에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자 근거는 복음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무자비한 종에게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느님은 부족하고 약한 우리가 당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음을 잘 아시기에 받은만큼 당신께 갚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당신께 받은 그 사랑이 ‘내리사랑’처럼 이웃에게 전해지기를 바라시지요. 그러니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말로는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이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웃은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내가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나 자신입니다. 내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내 양심에 비추어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기준도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이 때는 ‘나’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방법이 좀 다릅니다. ‘내 나름대로’, ‘내가 느끼기에’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이웃을 제대로 사랑한 게 아닌 겁니다. 이웃사랑에서 나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은 ‘황금률’입니다. 즉 내가 남에게 받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이지요. 내가 좋아하는 건 이웃도 좋아할 수 있으니 기쁜 마음으로 그를 위해 양보해줍니다. 내가 싫어하는 건 이웃도 싫어할 수 있으니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배려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방법인 겁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이와 같은 원칙과 방법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가 아직 남아있지요. 예수님께서 사랑에 대한 당신 가르침을 슬기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인 율법학자에게 하신 말씀 안에서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사랑이 우리 삶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사랑해야 할 이유에 대해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하느님 나라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목표는 하느님 나라의 정문 앞까지 가서 그곳을 구경하는게 아니라, 그 나라 안에 들어가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기에 아직 구원이 완성된 게 아닌 겁니다. 구원을 완성하는 마지막 한 가지는 바로 마음에 받아들인 사랑을 삶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천국은 사랑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그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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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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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연중 제31주일. 기경호 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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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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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삶
<2024.11.3> 아침을 여는 묵상 (딤전 2:1~7절)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삶❞
❚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길 원하시며, 이 일을 위해 독생자 아들을 주셨습니다.
✔ 자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세상 권력자를 위하여 기도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1~2절).
바울은 세상의 치리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인 인류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기도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의 성격은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입니다(1절). ‘모든 사람을 위한’ 다양한 종류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공동체에 덕을 이루고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중보 기도의 대상으로 먼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언급됩니다(2절). 세상 통치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정치적인 마찰이 피하고, 교회가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간구는 긴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고, 기도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통하며 기원하는 모든 행위를 총칭하며, 도고는 중보 기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간구와 중보 기도도 기본적으로 감사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곧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이는 공동체의 덕을 이루고 성숙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의 바른 성장을 위해 나 한 사람이 먼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상황이 내 앞에 발생한다 할지라도 그에 대응하는 행동과 외침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지금의 상황을 아뢰고 또한 이웃들의 아픔과 사정을 도고하므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고요하고 평안이 깃들 수 있도록 힘쓰는 삶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는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라는 진리 안에서 화평의 삶, 평안의 삶은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권력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모든 열방들을 향하여 구원받길 원하기 때문입니다(3~4절).
바울은 통치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3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진리를 아는 데 이르는 것이기 때문(4절)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에 부합되는 일이며,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 전도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내 자신, 내 가족, 내 교회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하며, 섬기는 일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뿐 아니라 그 누구도 죄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야를 더 넓게 열어 열방을 품고 그들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5~7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도 한 가지뿐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5절,쉬운성경).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주셨습니다(6절). 이러한 뜻에 따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도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대로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7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해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죄를 속하시기에 충분하십니다. 그 십자가를 믿는 모든 자는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찬양과 경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순종이 나오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도록 친히 대속물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를 힘써 자랑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시야를 더욱 넓혀 그 누구도 죄로 인해 심판 받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중보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딤전 2:1~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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