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로 배우는 지혜 (1)
「논어(論語)」는 전체 20장으로 되어있다. 첫 장「학이(學而)」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장은「요왈(堯曰)로 끝난다. 이러한 구성은 첫 장의 첫 편이 제목의 이름이 되는 데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제1장「학이(學而)」란 제목은 첫 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학이(學而)」라는 첫 장의 이름이 비롯된 것이다. 논어의 첫 편인 '學而編'은 논어의 서편(序編)으로 학문의 중요성과 공자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
위에 적은 글은「논어」의 첫머리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논어」에서 '자왈(子曰)'이란 표현은 예외 없이 모두 "공자님께서 말씀 하신다"는 뜻이다. 이때 '자(子)'는 제자들이 '선생님'을 높여서 부른 말이다. 제자들이 아닌 타인들, 즉 외부 사람들이 말할 때는 '공자왈(孔子曰)'과 같이 보다 객관화된 표현을 쓴다. 따라서 '자(子)'를 현대적인 의미로 보면 'master[스승, 大家]'나 'teacher[先生, 敎授者]'와 같은 맥락(脈絡)의 의미로 통용(通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논어」에서 '관(冠)'이라 할 수 있는 이 첫마디 어귀는 얼핏 보면 무애(无涯) 양주동 (梁柱東)박사의 말대로 너무 평범해서 진부(陳腐)하게 들릴 수도 있다. "배워서 예습과 복습을 잘 하니 기쁘다"는 표현이 '위대한 말'이라고 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은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성서의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세례 요한의 말이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의 표현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하고 일상적인 표현인가? 하고 반문을 한다.
여기서 혹자는 '시습지(時習之)'를 "때때로(occasionally) 익힌다"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때에 맞추어(timely) 익힌다"로 해야 정확한 번역이 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불역열호(不亦說乎)"라는 구절에서 '열(說)'은 다른 책(正平本)에서는 '열(悅)'로 되어 있다고 한다. '열(說)'과 '열(悅)'은 의미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으로 본다.
'불역낙호(不亦樂乎)'의 '낙(樂)'과 첫 구문(句文)의 '열(說)'은 어떻게 다른가? '說'은 '실존적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고 '樂'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즐거움'으로 본다. 또 '有朋自遠方來'에서 '붕(朋)'은 단순히 우리말의 '친구(friend)'가 아니라, '붕당(朋黨)'이요, '동문(同門)'이요, '동지(同志)'로 보는 견해가 옳을 것 같다. 공자가 학문을 추구하는 분위기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학(學)'을 위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人不知而不慍'에서 '인(人)'은 '타인(他人)'이라는 뜻이다. 옛말에서 '남(타인)'을 나타내는 '人'은 '자기'를 나타내는 '己'와 대비(對比)되는 말이었다. '부지(不知)'는 단순히 "알아주지 않는다"라기 보다는 '사람이 등용(登用)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된 상태에서 소인(素人=비전문가, 아마추어, 풋나기)으로 남아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온(慍)'이란 "노여워하다. 성내다"의 뜻으로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해당하는 말이니 우리말의 '한(恨)'에 해당하는 말로 볼 수도 있다.
'정치적 현실(現實)'과 '군자'라고 하는 '도덕적 이상(理想)'과의 갈등 사이에서 궁극적으로 공자는 '군자'라는 '도덕적 이상'을 선택한 것으로 본다. 이 말속에서 공자는 '분노(忿怒)'와 '한(恨)'이 있는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으나 바로 자신이 '군자'라는 자부감(自負感), 즉 '소인(素人)으로 부터 탈출의 기쁨'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을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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