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06
7월2일[연중 제1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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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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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A4xzRnE21M
[서울대교구 양재모 안드레아(사목국 직장사목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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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왜 이리 더디 오십니까? 대체 어디 계시니까?>
신앙 안에서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시계 바늘과 인간의 시계 바늘의 속도가 현격히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시편 작가의 말씀처럼 주님께는 천년도 하루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기에 인간은 너무 조급하고 성급한 반면 주님 측의 반응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고 더딥니다. 그러나 그분의 시계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갈릴래아 호수에서 큰 풍랑을 만나 허둥지둥 대던 제자들의 모습과 뱃고물을 배게삼아 주무시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크게 비교되고 있습니다.
높은 파도에 배가 기우뚱거리고 배 안에 물이 가득 차게 되자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비상 사태를 맞아 제자들은 업무를 분담했을 것입니다. 한 제자는 더 세게 노를 젓고, 다른 제자는 배 안에 고민 물을 바가지로 퍼내고, 또 다른 제자는 배의 방향을 잡아주고...
다들 한번 살아보려고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는 순간, 제자들은 기가 차지도 않은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야단을 피우는 와중에 스승님께서 쿨쿨 주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강도 높은 전도 여행에,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에, 예수님의 육체는 과부하가 걸렸을 것입니다. 어디 앉기만 앉으면 꾸벅꾸벅 조셨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체험을 해봤기에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기가 차지도 않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리고 볼맨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5)
조급한 제자들에 비해 예수님은 한없이 느긋하십니다.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제자 교육을 단단히 시키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하늘과 바다를 다스리시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많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의 신원, 당신의 정체성을 말과 동시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분께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즉시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돌아보니 저도 참 믿음이 약했습니다. 주님의 시간이 되면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해주실텐데,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왜 이리 더디 오시냐고, 대체 어디 계시냐고, 투덜거리고, 갖은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조급한 마음을 떨치고 좀 더 너그럽고 큰마음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진리, 그분께서 내 안에 언제나 현존하신다는 진리, 그분께서 내 인생 여정에 굳건히 동반하신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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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mKCi2l3U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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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두려움, 무서움의 차이점>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에 죽을까 봐 두려워합니다. 결국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하시며 바람과 호수를 꾸짖어 고요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을 하느님 아드님으로 대하고 있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믿으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이 순서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살기 위해 무서운 것을 제거하려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불안이 가라앉아야 사라지지 무서운 것들이 사라진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불안은 오직 믿음만으로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먼저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의 정의를 알아야 합니다. 두려움이란 ‘무언가를 잃을 걱정’ 입니다. 그 무언가는 궁극적으로 생존과 관계됩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잃을까봐 이성이 만들어내는 감정입니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대상은 ‘무서운 것들’입니다. 무서움은 우리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무엇입니다. 오늘 제자들에게는 거센 파도와 바람입니다. 이것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그 무서운 것들로 생명을 잃게 될까 하는 걱정입니다.
두려움은 이성적인 측면이고 무서움은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이성이 육체보다 더 높은 수준의 차원입니다. 더 높은 수준의 차원을 고쳐야 아래 것도 고쳐지는데 우리는 자칫 아래 것을 고치며 윗것도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면 두려움이 사라질까요? 돈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교통사고나 강도를 만날까 두렵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세상 모든 것들은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두려운 데 바람과 물과 싸우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을 없애려면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이성적인 차원이기에 마음 차원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마음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만약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불안’입니다. 불안은 믿음의 차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서 살려달라고 합니다. 불안합니다. 불안은 ‘환경’에 대한 믿음입니다. 내가 죽을 위협에 있는 환경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를 놓으면 1미터 밑에 땅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불안한 것입니다. 불안하니까 생명을 잃을까 봐 두렵고 생명을 잃게 할 것들이 무섭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려면 무서운 것들을 치우는 일이 아니라 불안함을 없애면 됩니다. 아기들은 불안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품에 안겨있으면 평화롭습니다. 어머니가 모든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들을 해결해 줄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평화를 가지면 아이는 착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부모의 부모싸움과 같은 것으로 아이들이 불안해지면 아이들은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세상 것들에 집착하여 악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우리 불안을 없애주는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하느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를 지으면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을 수 없어서 불안해집니다. 그러면 내 힘으로 두려운 것들과 맞서 싸웁니다.
믿음이 있다면 나의 창조자에게 청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청하는 모든 이들을 보호하십니다.
믿음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대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직도 그들을 보호해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심을 믿게 되자 두려움을 이깁니다. 그리고 세상의 위협은 더는 무섭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처럼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합시다. 아이들이 이성이 생기면 부모의 뜻을 따를 때만 부모로부터 보호받게 된다고 여깁니다. 아이들이 부모 돈을 훔치면 부모와 멀어집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무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하느님 마음이 기쁘다는 것을 느끼고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느낍니다. 그렇게 온 평화는 모든 두려움을 없애고 당당하게 세상에 나아가게 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움츠러들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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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당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재웠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으면서도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표징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입니다. 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또한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자매님이 운전 중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때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너는 누구냐?” 그때 자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의 아내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사모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나는 네가 누구의 아내인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그러자 자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공부도 잘하고,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러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나는 네가 누구의 엄마인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그러자 자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성당에 다니는 신자입니다. 교무금과 헌금도 잘 내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합니다. 주일미사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나는 네가 어떤 종교를 믿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문득 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생물학적으로 ‘종속과목강문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포유류이고, 포유류 중에서도 영장류입니다. 지금의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하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한 대답은 못 됩니다. 사회학적으로 저는 1991년 사제서품을 받은 서울대교구의 사제입니다. 지금은 댈러스 교구로 파견되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사목하는 사제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한 대답은 못 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은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입니까?’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두 사람이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같이 갈 수 있겠느냐?”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명예, 권력, 재물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날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당신의 넘치는 자애에 힘입어, 당신 집으로 들어가, 경외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 경배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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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23-27: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배에 타신 것은 그들이 위험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겸손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군중을 보내신 다음 그들만 옆에 있게 하시고 풍랑에 휩쓸리게 하셨다. 그들이 시련을 인내심 있게 견디도록, 어떠한 어려움이나 박해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신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24절)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깨어 있고,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완전한 파멸의 위험 속에 있는데도 당신 혼자만 잠이 드셨을까? 폭풍을 이겨나가기 위해 고도의 기술의 키잡이가 필요한 때 말이다.
배를 모는 제자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허사였다. 그들은 겁에 질려 예수님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께 풍랑에 죽게 되었다고 구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26절) 그리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잠잠해졌다. 제자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분을 찾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분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배가 물속으로 잠길 것 같은 어려움에 부닥치자,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25절) 했을 때,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꾸지람을 듣는다. 그들은 결코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위험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신다. 당신의 교회라는 배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든 세상의 풍랑을 잠재울 수 있으시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이 안전한 항해로 하늘 본향에 도달하도록 이끄신다. 그리스도께 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배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거룩한 키잡이가 있어야 교회라는 배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할 수 있고 목적지 항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27절) 예수님께서는 명령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재우셨다. 그래서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바로 그분이야말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하고 믿었다. 그분을 온전히 믿고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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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믿음이 약한 자들아!”로 옮긴 그리스 말은 “믿음이 거의 없는 자들아!” 또는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아!”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믿음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산상 설교와 그 뒤에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지금 눈앞에 들이닥친 풍랑 앞에서 그들의 믿음은 한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이 거의 없다고 할 만한 제자들의 울부짖음을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죽음의 공포로 내몰던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십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일지라도, 설령 거의 믿음이 없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을 찾는 우리의 목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죄와 악의 유혹이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어둠의 공포로 끌고 가는 순간이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라는 오늘 복음의 묘사처럼, 그분께서는 주무시고 계시는 하느님, 고통이나 아픔과는 아무 상관 없으신 하느님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그분께서 풍랑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우리가 겪는 풍랑 속에서도 분명히 함께 계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선택’입니다. 믿음이 거의 없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도움을 청하였던 것처럼,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님을 찾는 선택을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경계하여야 할 것은 우리의 약한 믿음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도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찾는 방법을 완전히 잃어버린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는 신앙인인가요?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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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무신다고 해서 모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3-2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자연계도 복종시키시는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믿음이 많이 부족했다는 제자들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는데, 예수님의 명령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
여기서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라는 말을,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라는 예수님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제자들이 몸으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아직은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따르는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면 제자들도 함께 자면 됩니다. 물론 전부 다 잠을 잘 수는 없고, 몇 명은 노를 저어야 하지만, 어떻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하루 종일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시느라고(마태 8,16) 피곤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믿으셨음을 나타내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어부 출신들이 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으셨기 때문에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력을 믿으셨는데, 제자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못 믿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믿음의 부족함’에 속한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주무셨다고 해서 제자들의 상황을 모르셨던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큰 풍랑과 파도가 일어난다는 것과 그 바람과 파도가 제자들을 죽일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알고 계셨고, 그래서 그렇게 주무셨던 것인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고,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고 겁에 질렸습니다.<그들은 아마도 큰 풍랑과 파도 때문에 배가 침몰하고 사람들이 죽는 상황을 많이 겪었거나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에 걸림돌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2)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말만 보면, 믿음이 좀 부족하긴 했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말은 27절의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라는 말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면서, 즉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도 없으면서 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 기도를 하시든지, 무엇을 하시든지 간에, 자기들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시라고 재촉하는 말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4,38; 루카 8,24) <믿음도 없이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으니까 주님께 기도합니다. 안 믿는 사람이라면 아예 기도하지 않겠지만, 혹시 기도하더라도 그것은 기도를 흉내 내는 것이고, 기도를 흉내 내는 것은 ‘빈말’입니다. 구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구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기도하고 있다면 주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노를 저어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어서 고요하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로 해석됩니다. <바람과 호수를 내버려 두어도, 고생은 좀 하겠지만,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면, 굳이 일부러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신 것은, 당신의 권능을 계시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한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은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보면,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났을 때, 주님께서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만 하셨고, 폭풍우 자체를 막아주지는 않으셨습니다.(사도 27장)
4) 누구든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을 겪기도 하고 ‘뜻밖의 불행’을 겪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을 ‘사람의 힘’으로 물리치거나 극복할 수 있다면 기도하지 않아도 되지만, 많은 경우가, 사실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사람의 힘’으로는 극복하기가 어렵고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 ‘내 곁에’ 계셔 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내가 믿음을 잃고 주님을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 또는 ‘내가 흔들림 없이 주님 곁에’ 고요하게 머무를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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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오 8,26).
<앞 장면>에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도 그 배에 오르시어 동행하십니다.
사실, 배는 항구에 메여 있을 때 안전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항구에 가만히 정박해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항해하라고 만들어졌습니다. 항해하면 당연히 풍랑을 만나고 표류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항해하라고 배는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배, “가정”이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런데 배 안에 그분이 함께 계시는데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세시풍랑에 배가 흔들릴 때도 있고, 방향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몰리는 바람에 휘청거릴 때도 있고, 기울어 져 위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도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킬 수 있으면서도 그 풍랑 속에서도 잠들어 계십니다. 그러니 그분은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도 곁에 함께 계십니다. 곧 우리가 눈을 떠야할 때가 바로 이때 인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뢰하지도 의탁하지 못한 까닭에 그만 겁에 질려버렸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의혹에 빠지는 순간 겁에 질려 물에 빠졌듯이 말입니다.
사실, 그분은 암과 치매 온갖 질병을 고치실 수 있으면서도 그 고통과 수난을 몸소 지시는 분이시고, 부서진 뼈와 마음의 상처를 새롭게 하고 죽은 이마저 살리면서도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리어 죽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늘의 유황불로 도시를 휩쓸어버리고 하늘 군대로 평화롭게 하실 수 있으면서도 무능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분이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한 힘을 지니고도 결코 우리의 응답이 없이는 이루시지 않으시는 무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순수한 의탁과 신뢰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도 유혹이나 악을 제거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아버지께 의탁하고 신뢰를 두도록 가르치십니다. 곧 그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분께 의탁하고 신뢰를 두는 일입니다.
실상, 지금도 당신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우리와 함께 풍랑에 휩싸이시고 흔들리면서 항해를 동행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막상, 마치 물고기들이 맘껏 물속을 헤험쳐 다니면서도 물 밖에 나와 숨을 깔딱거리면서야 비로소 자신이 헤험칠 수 있었음은 물이 있는 까닭이었음을 알게 되듯이, 또 새들이 맘껏 하늘을 날다가도 새장에 갗치고 나서야 하늘이 있어서 날 수 있었음을 알게 되듯이, 그렇게 우리는 풍랑을 맞고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내가 키잡이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물결이 들이치고 배가 흔들려도 분명,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그분이 아니라나 자신일 뿐,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신 그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니 깨어나야 할 이는그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분이 함께 계시건만 두려워하고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일 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배가 가라앉으면서야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키잡이 이십니다. 그러니, 이제 결코 겁낼 일이 없습니다. 두려워 할 일이 없습니다.
오늘도 그분께서는 배가 하늘 항구에 닿기까지 우리를 이끄시고 동반하십니다. 단지 동반하실 뿐만 아니라 배를 인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주무셔도, 깨어 계셔도 우리의 키잡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죽으면서도 인류를 구원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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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주님!
당신은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시지만,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고통과 수난을 몸소 겪으시지만,
온갖 질병을 고치시는 분
못에 박히고 창에 찔려 죽임당하지만,
부서진 뼈와 마음의 상처를 새롭게 하고
죽은 이마저 살리시는 분
잠들어 계서도 깨어 계서도
저의 키잡이이신 당신이
진정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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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송동림 레오 신부님]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어디 꽃뿐이더냐!>
언젠가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서울의 한 도심을 지나다가 이런 글귀를 본적이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어디 꽃뿐이더냐! 꽃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피어난다.’
제게 그 글귀는 당시 시대 상황과 어우러져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현수막 내용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꽃뿐이 아닌 듯합니다.
신앙인들도 고통 앞에서, 죽음 앞에서, 유혹 앞에서 흔들릴 수 있습니다. 삶이 흔들리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상치 못한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는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제자들을 보게 됩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도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간청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가오는 사실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어도 폭풍이 닥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갑자기 예고 없이 몰아칠 수 있다는 겁니다. 나아가 우리의 한계 상황, 위기 상황에서도 주님은 주무시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쳐 하느님께 매달렸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부족했기에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잠재우기 전에 먼저 믿음이 없는 제자들부터 꾸짖으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바람이나 호수나 풍랑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과 그들 삶의 중심에 믿음이 없음을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배와 물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배는 물 위에 떠 있습니다. 그런데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물이 들어오면 배는 가라앉게 됩니다.
신앙인의 마음에도 믿음이 아닌 의심이 그 중심을 차지하거나 세상의 그릇된 풍조가 물밀 듯이 밀려들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맙니다.
반면 아무리 험한 세상 한가운데서도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의 정도가 깊을수록 세상 풍파를 잘 견뎌내고 덜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다의 풍랑이나 세상의 폭풍과 같은 외적 환경이 아니라 영적으로 깊게 뿌리내리지 못해 쉬이 흔들리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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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호수에서 풍랑을 가라앉히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 함께 배에 올랐는데,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일 지경에 이릅니다.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제자들의 혼란과 공포를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배가 뒤집힐지도 모를 참으로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을 흔들어 깨우며 말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시며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풍랑이 멎고 호수가 잠잠해집니다. 제자들이 몹시 놀라워하며 말합니다. “이 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보여 주십니다.
전통적으로 성경에서 배는 교회를, 바다는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항해하는 배로 자주 묘사됩니다. 또한 바다의 거친 바람과 파도는 세상을 항해하는 교회가 겪는 갖은 어려움과 곤경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그 어떤 어려움도 당신의 권능과 말씀만으로 다스리실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주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족한 믿음’이 아닌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맡겨 드리며 도우심을 간절히 청한다면, 그분께서는 기꺼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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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8,26)
어떤 여행지든 첫 번째 갔던 여행의 순간이 가장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에 관한 기억도 마찬가집니다. 1986년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티베리아 호수를 배를 타고 유람할 때입니다. 정말이지 호수 중간쯤 왔을 때 오늘 복음의 상황과 흡사하게 거센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기 시작했고, 함께 승선했던 일행 중에서 딱히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거센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자 저 역시 겁도 나고 두렵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저는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정말 복음의 제자들처럼 똑같이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8,25)라고 기도하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두려움을 온몸으로 저도 체험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특이한 점은 그토록 거센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파선할 위기 상황 속에서도 편안히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 여정에서 겪을 수많은 역경의 순간에도 그렇게 태평스럽게 주무시고 계실지 모릅니다. 인생도 자연의 리듬처럼 끊임없이 오고 가기에, 선과도 평온하게 지내야 하듯이 악과도 평온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신 듯싶습니다. 역풍이 불어닥칠 때도 순풍이 불어오는 때에도 똑같이 의연하고 태연하게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려고 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평온하심에 반해서 제자들은 겁에 질려서 구해달라고 당신께 소리 지르며 매달리자,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8,26)고 말씀하시며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8,26)하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약한 믿음으로 갈팡질팡하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따끔한 일침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합니다. 인생의 거센 풍랑을 탓할 게 아니라, 그 풍랑을 평온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의 믿음 약함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예기치 않은 큰 풍랑이 일어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의 작은 배가 파도에 휩쓸릴 것을 알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도중 늘 미풍만이 불어오는 게 아니라 거센 바람도 불어오기 마련입니다. 이런 인생의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늘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믿고 꿋꿋이 노를 저어나가길 바라십니다.
대부분 사람은 어려운 시련의 시기에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은총을 받습니다. 이런 위기의 때가 바로 인생이나 신앙이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시련의 때 오히려 하느님을 떠나서 혼자 세상을 방황하다가 나락으로 추락하기도 합니다. 어려움이 닥치고 위험이 몰아치는 내 인생의 위기에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점입니다. 시련의 풍랑 중심에 위로와 능력의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때마다 겸손되이 저희의 믿음이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하도록 합시다. 그분이 우리 영혼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에 힘입어 거친 풍랑을 헤쳐 나갈 때 우리는 분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두네.” (복음환호성/시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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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사람이 비가 내리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강으로 투신하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방관했습니다.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또 자기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냐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이 여인은 강으로 투신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이 사람은 큰 문제를 겪게 되었습니다. 기억 속에서 여인은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 투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후회가 밀려옵니다. 만약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말렸다면 이런 기억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도덕성과 인간성이 결여된 자기의 무관심이 이제 자기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카뮈의 소설 내용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 삶에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대형 참사를 겪은 당사자는 큰 트라우마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단순히 그때의 사건 그 자체 때문일 때도 있지만, 그 안에서 살아남은 자기가 하지 않았던 행동에 대한 후회가 아픔으로 자리 잡게 되어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이렇듯 자기 기억을 만드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으로 끔찍한 기억을 간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보살피고 책임지는 것, 나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했습니다. 그 누구도 나와 상관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나와 상관있으며 나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런 관계 안에 살아갈 때, 지금 사는 이 세상에 이미 온 하느님 나라가 완성 되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완벽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계속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면서 사랑의 반대편에 서려고만 합니다. 그때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처럼 외면하신다면 어떨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외면하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서둘러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약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보았던 많은 기적과 말씀에서 믿음을 굳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겁을 내고 울부짖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나약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괘씸하기도 한 우리의 모습을 제자들의 모습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임에도 당신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면하지 않는 사랑을 우리도 실천해야 함을 당신이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무관심한 모습이 아닌,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보호 아래 영원히 머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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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불안할수록 더 큰 믿음이 필요>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으면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굳센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믿음이 큰 만큼 하느님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믿고 의탁하는 만큼 강하고 깊게 만납니다.
풍랑이 이는 호수에서 같은 배를 탔는데 어떤 이는 잠을 자고 있고, 어떤 이는 겁에 질려 허둥거립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있었기에 무섭지 않고 절박한 생존의 난국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는 위기는 아예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깨운 것을 보면 아직 그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품 안에 있었으면 아무 걱정할 것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였지만 철저히 맡기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아마 우리도 같은 위험에 처했더라면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려움에 맞서 주님께 살려달라고 청했다는 것입니다.
허둥대던 제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를 가지고 선포한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고, 풍랑과 파도를 지배하는 주님의 능력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이제는 단순한 무서움의 차원을 넘어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면서 커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따른다기보다 따름으로써 성장합니다.
혹 어려움에 직면할 때 아직도 허둥대고 있다면 믿음의 부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1베드 5,7)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25.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수많은 폭풍우 속, 시련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느끼지 못한다고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주님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주님께 떠맡기십시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5) 성경을 보면 롯의 가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하는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 19,26)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민수 21,9)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역사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처럼 말입니다”(까롤로 까레또). 믿음 안에서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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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두려워 마시게>
마태오 8,23-27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그대 두려워 마시게>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홀로인 듯
늘 함께 걷는
우리의 벅찬 길에서
내 곁에
늘 그대 있어
나 두렵지 않듯이
그대 곁에
늘 나 있으니
그대 두려워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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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이정은 요한보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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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춘천에 살 때였습니다. 춘천교구의 역사 깊은 공소 중 곰실공소 옆 사제관에 계시는 춘천교구 최고 원로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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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부는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에 대해서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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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 생각해보지 못한 차이점이라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물쭈물하는 저를 보시고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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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라는 것은 내가 얻고자 발버둥치지만 그것을 얻지 못했을 때 오는 감정이고, 고독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스스로 선택하는 거야. 그리고 외로움은 상실감이고 고독은 얻는 것이지. 그래서 성소의 길을 걷는 사람은 결코 외롭다고 해서는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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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안에서 비로소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고독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하느님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60여년 이상을 사제로 살아오신 신부님의 명언이었습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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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은 고독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얻고자 발버둥치기 보다 겸손되이 내려놓을 때 비로소 얻게 될 것입니다. 여우의 굴과 새들의 보금자리는 하느님을 따르는 인간이 얻지 못할 지라도 머리 둘 곳 없는 삶 안에서 오히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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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고독을 느껴보셨습니까? 바쁜 일상 안에서 잠시 고독에 빠지는 것은 그리 나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고독을 통해 만나는 하느님 안에서 힘을 얻고 그 분의 말씀을 통해 희망을 얻는다면 우리의 삶이 그만큼 행복하고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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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느님을 바라보기 위함인가 아니면 내 만족을 위한 것인가!! 기도 중에 그 답을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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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홀로와 더불어>
-믿음의 인생 항해 여정-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 130,5)
왜관수도원과 인연이 깊은, 이제는 고인인 된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시인이 구상 선생입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과 교류한 삶인지 시인 구상 추모문집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추모문집 제목이 “홀로와 더불어”입니다.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홀로와 더불어의 균형잡히고 조화로운 삶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교황님이 특히 강조하는바가 더불어의 삶입니다. 빨리가려면 홀로가고 멀리가려면 더불어 가야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마침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더불어의 인간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남의 장점을 키워주면 그 장점은 내것이 된다. 남의 단점을 조장하면 그것 역시 내것이 된다.”<다산>
“군자는 남의 장점을 키워주고 단점은 막아준다.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논어>
이래서 더불어의 공동생활입니다. 공동체로부터 받는 상처보다는 공동체로부터 받는 은혜와 고마움이 백배는 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오늘 복음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홀로와 더불어, 믿음의 인생 항해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 중심의 더불어 제자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새삼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하루이틀 따름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을 따르는 여정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여기서 배는 공동체를, 배안에서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있는 제자들의 한몸의 운명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한폭의 살아 있는 그림같습니다.
배가 떠나자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는 위기상황을 맞습니다. 그대로 인생 항해 여정중의 공동체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세상 바다를 인생항해여정중 거센 풍랑에 좌초되거나 파선 조난당한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거센 풍랑중에도 아랑곳 없이 예수님은 숙면을 취하고 계시니 주님의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깨닫게 됩니다. 두려움 때문에 겁에 질린 제자들의 이구동성의 기도입니다.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공동체의 중심에 계신 주님을 향한 간청입니다. 아주 예전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한 노신부님을 문병했을 때 신부님은 끊임없이 한 말마디를 되뇌이고 있길래 물었을 때 간병하던 자매의 말이 생각납니다. “날살려줘!”라는 말마디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노신부님은 끊임없이 “날살려줘, 날살려줘...”기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즉각적인 응답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말씀하시며, 일어나시어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자 아주 고요해졌다 합니다. 호수의 풍랑은 물론 제자들의 마음의 풍랑도 잠잠해졌을 것입니다. 결국은 제자들의 믿음 약함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새삼 우리 인생 항해 여정은 더불어의 믿음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주님의 질책과 더불어 꼭 기억해야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서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환대하는 예수성심상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I AM)’는 바로 탈출기에서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 이름입니다. 여기에 보어를 붙이면 주님의 자비로운 정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I AM for you)”
바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있는, 우리를 위해 있는 임마누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이 놀라워하며 쏟아낸 말은 은연중 예수님이 하느님같은 존재임을 들어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바로 우리 공동체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은 하느님같은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성구도 예수님이 하느님같은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애당초 타고난 좋은 믿음은 없습니다. 말그대로 믿음의 여정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날로 깊어지면서 믿음도 날로 성장 성숙해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아마 이런 예수님의 풍랑을 가라앉히셨던 체험을 제자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며 믿음의 성장에 결정적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중심의 더불어 믿음의 여정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제와 같이 열화와 같이 분노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입니다. 회개란 삶의 중심인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자, 공동체의 중심 자리에 생명과 빛의 주님을, 자비와 지혜의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다음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은 더불어 믿음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모두의 분발과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느냐? 나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은 것처럼, 너희를 뒤엎어 버리니, 너희가 불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처럼 되었다. 그런데 너희는 돌아오지 않았다....이스라엘아, 너의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
주님께 돌아와 주님을 삶의 중심에 맞이하고 살라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새삼 우리의 더불어의 믿음의 여정은 동시에 회개의 여정과 함께감을 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공동전례가 시스템화된 우리 수도원의 일과표는 얼마나 고마운지요!
역시 기도도, 회개도, 믿음도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끊임없이 공동전례수행에 충실함으로 우리 회개의 여정, 믿음의 여정은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더불어 믿음의 인생 항해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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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마음은 호수>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오늘은 내 마음은 호수라는 주제로 나눔을 할까 합니다. 내 마음은 호수여 라는 노래가 있잖습니까?
내 마음도 오늘 복음의 호수처럼 파도가 크게 일 수 있고, 그러던 내 마음이 아주 고요해질 수도 있지요.
어떤 때 우리는 한마디 말에 마음이 요동칠 때도 있고,
좋지 않은 일이 생겨 마음이 몹시 불안할 때도 있지요.
이것이 외인성 마음의 동요라면 내인성 마음의 동요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욕망이 들끓습니다. 어떤 때는 주장이 아우성칩니다.
어떤 때는 분노가 가득합니다. 어떤 때는 걱정이 가득합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 안에서 요동칠 때 적절한 프란치스코의 권고가 있습니다. <악습을 몰아내는 덕>의 일부분입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동요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걱정도 방황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권고하듯 동요를 잠재우는 데는 덕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덕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잠재웁니다. 인내와 겸손의 덕은 분노와 흥분을 몰아내고 잠재웁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덕을 얘기하다가 고요와 묵상도 얘기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마음의 동요는 잠재우고 고요는 얻는 것입니다.
이때의 묵상은 오늘 주님께서 파도를 잠재우는 것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기도는 ‘잠잠해지고 고요해져라!’라고 주님께서 내 마음의 파도들을 꾸짖으시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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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5ㄴ)
<부르짖는 믿음!>
오늘 복음(마태8,23-27)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말씀'입니다.
풍랑을 가라않히는 이 자연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원, 곧 그분의 신성(神性)이 드러나고 있고, 하느님께 드리는 깊은 신뢰(믿음)와 청원이 필요한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큰 풍랑 앞에서 제자들이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5ㄴ)라고 부르짖자,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ㄱ) 하고 말씀하시면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호수가 아주 고요해집니다.
우리네 삶 속에서 크고 작은 풍랑들은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고통들, 시련들이 늘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것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 나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신뢰)이 어느 정도인지가 드러납니다. 크고 작은 풍랑들, 고통들, 시련들은 지금 나의 믿음을 알 수 있는 '믿음의 척도'입니다.
겁도 많고 믿음도 약한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풍랑들 앞에서 자주 넘어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런 우리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길, 내가 크고 작은 풍랑을 이겨내고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제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어떤 이들은 풍랑이 찾아오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고, 다시 부활합니다.
계시의 중요한 두 원천인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성경)'과 '전해져 오는 하느님의 말씀(성전)'이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하느님께 부르짖는 이들, 매달리는 이들이 다시 부활하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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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iujYjDxNg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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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 25)
거칠게
몰아치는
큰 풍랑입니다.
그 속에서
감출 수 없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풍랑은 우리들
삶의 모습입니다.
큰 풍랑 속에서
두려움을 만나고
기도를
만나게 됩니다.
큰 풍랑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큰 풍랑에
필요한 것은
큰 믿음입니다.
큰 풍랑조차
우리의 믿음을
훼손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
믿음을
되살려 놓는
은총이 됩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요동치는
이 마음까지
이끌어가시며
고요하게 만드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알게되고
주님을 믿게하는
큰 풍랑의
은총입니다.
주님을 믿고
나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이란
풍랑속에서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거센 풍랑속에서
자라나는
간절한 믿음입니다.
풍랑속에서도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의 길을
오늘도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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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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