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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염소의 차이
본문 : 마태복음 25:31-46
의인은 자기의 선한 행실을 망각하고,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본문말씀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재림의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말하고, 성도들의 충성은 結舛?대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입증되고 성취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가 현실 도피적이고 이기적인 기복신앙에 빠지는 위험과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 (31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친숙한 생활풍습을 들어서 최후의 심판의 모습을 예시하는 장면입니다. 당시 목자들은 양을 키우면서 반드시 몇 가지 다른 종류의 동물들을 함께 섞어 키웠는데, 개, 나귀, 말, 그리고 염소등이었습니다. 개는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귀와 말은 넓은 곳에서 많은 양을 돌보는 경우에 기동성을 위해 필요했습니다.
특별히 염소를 양과 같이 키워야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선 먹이를 먹일 때가 문제입니다. 들에서 방목할 경우는 상관이 없지만 겨울에 먹이를 공급할 때 양들은 미련하여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앞에서 넘어지는 양은 치어 죽게 됩니다.
그런데 양과 염소를 함께 키우면 성질이 난폭하고 이기적인 염소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양들을 이리저리 흩어 놓음으로써 양들이 서로 치어 죽는 일을 방지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리가 올 때는 끝까지 반항하는 염소의 성질 때문에 다소간 양들을 보호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키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녁에 우리로 들어갈 때는 언제나 양과 염소를 갈라 놓습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추위에 강하여 아무 곳에서나 밤을 재워도 되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하여 따뜻한 곳에서 재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배경으로 하여,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마지막 종말에 가서는 자신이 심판주로서 의인과 악인, 구원 받을 자와 구원 받지 못 할자,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를 엄격히 구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 (33)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성경에서 오른편은 선과 영광, 생명의 자리로 이해된 반면, 왼편은 항상 불길하고 어두우며, 저주와 사망의 자리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보좌 우편에 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영생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좌편에 선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과 형벌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 비유에서 왜 양이 의인으로, 염소가 악인으로 비유되었을까요? 그것은 양이 염소보다 더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양의 흰털은 의를 상징하고 염소의 검은 털은 악을 상징합니다. 성격상 양은 온순하고 염소는 난폭하며 거칠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양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비유되고, 염소는 악한자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양과 염소가 아니라 의인과 악인이 분리되어, 의인은 영생에 악인은 영벌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34-36)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여기서는 6가지의 선한 행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세가지는 구약에서의 선민의 의무사항이요, 나머지 세가지는 능동적인 봉사활동입니다. 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죄와 소극적인 죄입니다. 적극적인 죄란 스스로 죄를 짓는 것을 말함이요, 소극적인 죄란 선과 사랑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해 보이지 않는 죄입니다.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죽은 믿음을 소유한자는 선택된 자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반드시 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그리스도에 의해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된 자들의 반문입니다. 그들은 언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들이 그렇게 행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어 사람에게 보이고자 노력하지만, 의인의 특징은 자신의 선행의 모습을 감추는 정도가 아니라 기억조차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아예 망각 한 것입니다 (눅 19:9-14).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공덕을 온 천하에 알리고 내 이름 석자가 신문에 기사화 되고 방송을 타야 직성이 풀립니다. 내가 낸 헌금은 봉투에 이름을 써서 목사에 의해 호명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나타내 보이고 과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자신의 공덕을 드러내는 일은 이미 선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남을 의식하는 외식적인 신앙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분노하고 계십니다.
▲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란 지극히 미미한 자를 가르키는 말로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내게 한 것이니라,” 결국 예수께서는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곧 자기에게 행한 것이라고 확증하십니다.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고 계십니다.
▲ (41-43) 또 왼편에 있는 --- 저주를 받은 자들아 ---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ou)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ou)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ou) 벗었을 때에 오 입히지 아니하였고(ou)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 보지 아니하였느니라(ou).
본 구절은 35-36절에서 복 받을 자들이 복을 받게 된 이유를 나열하는 것과 같은 형식을 빌어, 저주받은 자들이 정죄받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아니하였고” (ou, 우) 라는 부정어 구가 다섯번이나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악을 행했기 때문에 정죄 받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죄 받았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것도 죄이지만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웃과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정죄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개인주의 적인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기적인 종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 (44) 우리가 어느 때에 --- (41-43에 열거된 5가지 선한 행실들을) --- 아니하였나이까. 37-39절에서 의인들의 경우처럼, 악인들은 판결에 대하여 놀라운 의문을 제기합니다. 오른편의 의인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기억하지 못했던 반면, 왼편에 있던 악인들은 자신의 악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말합니다: “신에게 택함을 받은 자는 자기의 공덕을 모르고, 신에게 버림을 받은 자는 자기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모른다.”
▲ (45하)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40절과 근본적으로 대칭되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본 절은 그리스도께서는 소외 받고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무관심한 것을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과 동일시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외받고 고난당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찾아 오심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미미한 자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회임을 깨닫게 됩니다.
히브리 속담에도, “이땅에서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내세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부자에게 상급을 베푼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땅에서 돈 있고 힘있는 자들은 미미한 자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세를 획득할 수 없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위에서 미미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양과 염소로 엄격히 구분 됩니다. 염소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고 주님을 영접했으나 행함을 찾아 볼 수 없는 거짓 그리스도인임을 말하며, 양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임을 상징합니다.
양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순수한 사랑의 동기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미미한자; 즉 굶주린자, 헐벗은자, 가난해서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병든자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도와 주어봐야 돌아 올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헌금과 위대한 행실로 이웃을 도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되돌려 받거나 그 일로 인하여 칭송을 받고 영광을 취했다면 이미 상급을 받았으므로 내세에 주어질 상급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로 취급하고 계십니다.
▲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돨까 하라 (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게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눅 14:12-14).
이것을 바울사도는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 (딤전 1:5)이라 말하고, 야고보는 “믿음이 그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약 2:22)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지혜를 얻고, 그들의 무능이 능력으로 바뀌어지고, 죄 있는 곳에 은혜가 있게 하기 위하여 낮은 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이러한 사실과 역행하는 경우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뒷전에 밀려나 있고, 마치 재산 있고, 신분높고, 힘있는 자들만이 성공한 신앙인인양 모델로 삼고 그들에게서 어떤 능력이나 영향력이 발휘되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복음은 약한 사람들에게서 발휘되어지는 강함에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듯 합니다. 교회가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할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없고 천대 받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하여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성취하고 존재 의의를 더욱 분명히 하는 복음의 빛이 발하여 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눅4:18-19).
▲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말하면서 자신의 시간과 재물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질에 축복받은 백만장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아방궁같은 호화저택에 사는 목사가 있다면 그건 이미 목사일 수 없고, 바벨탑같은 예배당 건물들은 복음 팔아 장사하는 회사로 전락했습니다.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축복은 받음에 있지 않고 나눔에 있습니다. 수많은 불쌍한 영혼들이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나 홀로 배불리며 부를 축적할 수 있을까요? 이웃에 대한 성도의 사랑은 복잡한 이론이나 시끄러운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과 배려입니다.
만일 형제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4-17).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향한 기독작가 공지영씨의 외침입니다:
|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
|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바로 아는 것이란다.
=공지영의 <공순이 언니>중에서=
잠언(29:7)기자는,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말하고, 요한(일서 4:20)은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 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함이 얼마나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의인은 자기의 선한 행실을 망각하고,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유 창윤교수,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에서)
첫댓글 오늘도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넉넉히 승리 하시는 하루 되시길 기도 합니다.
주신글 감사합니다 주님과 함께 행복한 시간 되시길...
마음에 와 닿는 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