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6월 1일(월)
* 시작 기도
(시 88:18)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주님...
이 시는 고라 자손 중에서 헤만이 쓴 시이며 일명 무덤으로 내려가는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셔서 주님의 분노가 그를 심히 누르고 괴롭히는 파도로 인하여 견딜 수 없음을 토로합니다.
심지어 시인이 아는 자들을 다 그에게서 떠나게 하셨고 자신을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심으로 어느 한 곳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최종적으로 하는 고백이 흑암만이 나의 절친이라고 합니다.
내가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친구들은 다 떠났고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요 주님의 인자와 신실을 보이심인 줄 믿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지는 귀하고 소중한 시간입니다.
하여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살기 원합니다.
이 하루도 주님 안에서 사는 거룩한 불구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고전 11:1-16
제목 :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 나의 묵상
고전 8장에서 11:1절까지의 주된 주제였던 우상 제물 취식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다.
이는 믿음이 강한 자가 행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여자들이 공적 예배에서 머리에 베일을 쓰는 문제에 대하여 다룬다.
그런데 이 문제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마음껏 행사할 수 있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들로 하여금 그것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 것을 권면한다.
다만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그 자유를 사용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여자와 남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권위의 문제를 언급한다.
머리에 베일을 쓰는 일이 사소한 일인 것처럼 보여도 결코 당시에는 사소한 일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음을 시사한다.
오늘 본문은 공적 예배에서 여성들이 머리에 예배포라고 하는 베일을 쓰는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이는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절대적 진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회와 종교적 전통 그리고 문화와 밀접한 관계에 바탕을 두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헬라 문화의 밀접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헬라 사회에서는 여인들이 외출하거나 공적인 모임에 참석할 경우 반드시 머리에 베일을 썼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의 권위 아래 있다는 표시였다.
이는 물론 당시 남성 우월주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일부 여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주장하면서 더 이상 사회 문화적 관습에 속박당하지 않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공적 예배에 참석할 때 머리에 베일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문제야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서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어떤 모임에 참석할 때 머리에 베일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나는 창녀’라는 사실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도들이 교회에서 머리에 베일을 쓰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알 턱이 없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마치 부도덕한 자들의 집합소로 오해하게 만드는 일이 된 것이다.
이에 바울은 남성 우월사상을 지지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인간의 자연적 본성(13-15절)에 근거해서 주장한다.
여성들이 공적 예배에서 머리에 베일을 쓰는 것이 합당하기에 그것의 착용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또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며 영생의 공동체로써 항상 세상과 구별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세상이 하는 것 다 하고, 세상이 먹는 것 다 먹으며, 세상이 마시는 것 다 마신다면 사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교제 모임과 구별이 될 수 없다.
물론 내가 먹고 마시고 하는 일들이 베일을 쓰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고린도교회의 몇몇 여성도들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행사하는 일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진리가 아니요 그것 때문에 구원의 근간이 흔들릴 수는 없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권면은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되라고 한다.
그것은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며 그것이 진정한 자유인임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복음이 들어오는 선교 초기에는 남자와 여자가 예배당에 함께 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석 여자석 따로 구분하여 앉게 하였고 그것은 교회의 관습이 되어 그로부터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내가 어렸을 때 교회에 가면 예배당이 보통 4줄로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여자들이 남자보다 많으니까 맨 왼쪽 줄은 남자석이고 2-4줄은 여자석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교회에 올 때는 온 가족이 다 함께 올지라도 예배당 안에 들어서면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따로따로 찢어져서 앉았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적 사상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모든 것을 자유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고 함께 섞어서 앉을 수 있지만 당시 유교적 관습을 떨치지 못하고 처음 교회에 나오면서 교회에서도 그 관습을 그대로 이어갔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를 세운 벽안의 서양 선교사들의 눈에는 아마도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남녀가 구분 없이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선교사들이 이렇게 앉지 말고 가족끼리 앉으라든지, 아니면 남자 여자 섞어서 앉으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말, 구한말 당시에 아무리 영적 지도자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은 조선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자유할 수 있는 자기의 자유를 성도들을 위하여 포기하였을 것이다.
심지어 내 고향 전라북도 김제에는 아주 유명한 ‘ㄱ’자 교회가 있다.
꼭지점에는 선교사가 서고, 꼭지점을 중심으로 한 쪽은 남자석, 다른 한 쪽은 여자석으로 정한 것이다.
선교사는 모든 사람을 한 번에 다 볼 수 있지만, 남자나 여자는 예배 시간에 서로를 볼 수 없도록 만든 교회도 있었다.
이 ‘ㄱ’자 교회가 후에 교회의 전통을 유지한 기념교회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런 모습이 점차 사회 문화적으로 개화되면서 교회 안에서의 모습도 점점 바뀌어 갔다.
물론 당시에는 이런 사회 문화적 변화를 교회가 주도해 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자석 여자석을 구분하는 개념이 점자 변하더니 80년대부터는 조금씩 남자와 여자들이 섞여서 앉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남자석 여자석으로 구분된 교회를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이처럼 이런 사회 문화적인 관습은 진리는 아니다.
하지만 교회일지라도 그 영향을 많이 받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 먹거나 마시는 문제 그 자체로는 진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선교 초기부터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는 일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고쳐야 할 일, 제 1순위로 술과 담배를 꼽은 것이다.
그리고 것을 그리스도인의 표지로 삼았다.
하여 적어도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으로써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집에서나 동네에서나 교회 밖 어디서든지 술과 담배를 하지 못하도록 교육시켰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그 교육의 결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회의 통념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술과 담배를 하는 일이 비교적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 통념이 있기에 자신이 교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드러내놓고 술 담배를 하지는 못하고 숨기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세상이 교회를 향한 최소한의 기대감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물론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갔고 그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것에 별 갈등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강한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아왔기 때문에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그런 모습을 보면 인상을 찌푸리고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이 이런 일로 얼마나 갈등할지는 가늠하지도 못한 채 그저 나의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재단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술 담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틀림없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라고 먼저 칼질을 하던 자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칼빈(깔뱅)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담배를 피우는 골초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유명한 어거스틴 역시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른 종교에 빠지기도 하고 술에 절어 살기도 하였으며 다른 여자에 빠져 살기도 하는 등 그의 삶이 엉망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물론 이런 과정들이 참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과정의 일부분이었음을 주지해 둔다.
나는 진리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이나 관습을 구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것,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 색에 빠지지 않는 것, 주일에 돈을 쓰지 않는 것 등 이러한 것들이 곧 진리라고 착각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나의 모습은 비교적 어리거나 젊었을 때의 사고였다.
그러나 이제는 복음을 알게 되면서 진리가 무엇인지 그런 참된 진리를 위해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때로는 그 자유를 제한하거나 포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제의 본문과 오늘 본문 곧 우상 제물의 취식 문제와 여자가 머리에 베일을 쓰는 문제 등 소제는 다르지만 거기서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결코 다르지 않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남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사회 문화적 관습과 전통이나 교회의 소중한 전통을 위하여서는 나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무조건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거나 재단하는 일이 그 영혼을 위하여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지르는 일인가를 다시 한 번 깊이 반성한다.
이에 나의 자유를 나의 유익을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나타내는 차원에서 사용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며 오늘도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할렐루야로 한 걸음 나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할 수 있으나 아직 믿음이 약한 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답답해했던 자가 바로 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절제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하지 않으면서, 교회에 다니면서도 절제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여전히 행하는 이들을 보면서 나 자신이 그들을 얼마나 많이 판단하고 비난하였는지 모릅니다.
주님, 그런 자들 역시 주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말입니다.
나는 나의 신앙의 잣대, 관념의 잣대로 그들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한편 마음으로 미워하며 죽이기까지 했던 자입니다.
그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죽어야 할 자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을 나는 미워하고 판단하고 마음으로 죽이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서 어떠하든지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을 용납할 수 있는 진정한 믿음과 자유를 허락하시고 그들을 품어 주님께로 인도하는 참 전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육신과 생각 그리고 마음의 힘을 빼고 오직 내 안에 예수로 부요하여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는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