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이야기 II] 물가에서 물을 즐기며 살아가는 부들과 창포
[2010. 9. 13]
겨우 그쳤습니다만, 지난 한 주 내내 내린 비는 적잖이 사나웠습니다. 일기예보를 꼼꼼히 짚어보며 비 오는 곳의 가장자리로 살금살금 옮겨다니며 나무 답사를 이어갔지만, 비를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서울 한강 잠수교의 통행이 금지될 정도로 비가 퍼붓던 그 날 서울에서 고작 1백50 킬로미터 남짓 남쪽인 논산, 금산 쪽의 아침 하늘은 마알간 파란 색이었습니다. 볼 때마다 남다른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금산 요광리 행정은행나무 앞에서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나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화들짝 렌즈 위로 빗방울이 쏟아졌습니다.
카메라를 나무 옆의 정자 안으로 피해놓고, 다시 나무 앞으로 나와 나무가 못다 한 이야기를 직수굿이 바라보며 비를 맞았습니다. 그렇게 십 여 분 지나자 언제 비가 쏟아졌느냐 싶게 구름 사이로 햇님이 환하게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아! 무지개라도 떠오를 만큼 변덕 심한 날씨이지 싶어, 나무 그늘에 들어서서 먼 산을 바라보았지만, 바라던 무지개는 피어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빗속에 한 주일이 지났습니다.
수목원의 식물 가운데에는 물이 좋아서 물 속이나 물가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을 좋아한 까닭인지, 물을 맑게 하는 정화작용까지 탁월하다는 부들(Typha orientalis)이 그들 중 하나입니다. 잎사귀가 부들부들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이 식물의 꽃차례의 표면이 빌로드 천처럼 부드러워서 그랬다고도 합니다. 또 꽃차례가 방망이처럼 돋아난다 해서 포봉(蒲棒)이라는 이름도 가진 수생식물이지요. 포봉의 ‘棒’은 방망이를 뜻하는 글자이고, ‘蒲’는 부들이나 창포 등을 아우러 가리키는 한자입니다.
부들은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게 아니어서, 눈에 확 띄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연못 가장자리에서 갈대처럼 무성하게 잎을 키우다가 여름 되면 독특한 모습의 꽃이삭을 내밀어서 연못 풍경을 운 치있게 만들어주는 좋은 식물입니다. 대개는 7월 중에 꽃이삭이 피어나는데,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어나기는 하지만, 하나의 개체에서 함께 피어납니다. 구별이 쉽지 않은 부들의 꽃은 꽃잎조차 따로 없어서, 꽃인지 열매인지 알쏭달쏭합니다. 실제로 부들은 암꽃과 열매가 같은 생김새를 가졌답니다.
사진 위쪽에 조금 거칠게 갈색으로 길쭉하게 뭉쳐있는 부분이 수꽃차례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간격을 두고 아래 쪽에 보드랍게 돋아난 방망이처럼 보이는 부분이 암꽃차례이지요. 수꽃의 수술에는 매우 많은 꽃가루가 형성되는데, 이 꽃가루는 작은 바람에도 그대로 흩날리면서 암꽃을 찾아가는 밀월 여행에 오르지요. 바람이 혼사를 이뤄주는 이른바 풍매화입니다.
풍매화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부들의 꽃도 화려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굳이 화려한 꽃잎을 피워내느라 애쓸 필요가 없는 거죠. 꽃잎이 화려한 건 곤충을 끌어들여서 혼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지만, 풍매화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풍매화는 꽃잎 만드는 데에 쓰일 에너지를 더 많은 꽃가루를 생산하는 데에 쓰는 겁니다. 그래서 풍매화들은 무척 많은 꽃가루를 만들어냅니다. 꽃가루를 날려보내고 나면 수꽃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꽃가루받이를 마친 뒤에도 암꽃은 별다른 변화 없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오늘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위쪽 두 장의 사진은 7월 초(7월9일)에 막 피어난 꽃의 모습입니다. 위쪽으로 수꽃차례가 보이고, 그보다 조금 아래 쪽에 암꽃차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 이어진 두 장의 사진은 8월 말(8월27일)에 꽃가루받이를 마치고 암꽃차례가 맺은 열매입니다. 수꽃은 없지만, 처음 피어났을 때 암꽃의 모습과 열매의 생김새가 똑같아 보입니다. 굳이 구별을 하려 든다면, 수꽃이삭이 모두 떨어지고 암꽃 부분만 홀로 남아있다거나, 혹은 처음 피어났을 때보다는 조금 더 오동통하게 부풀어 오른 상태를 열매라고 보시면 됩니다.
부들의 열매는 처음 피어났던 꽃 중에 아래 쪽에 피었던 암꽃과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좋아하는 핫도그처럼 생겼지요. 이 열매는 그대로 계속 익어가다가 초겨울 되면, 열매의 겉 부분에 흰 털이 자욱하게 돋아나, 하얀 솜 모양으로 한 차례 모습을 바꿉니다. 열매에 담겨있던 털을 단 씨앗들은 서서히 공기 중으로 튀어올라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섭니다. 아직은 시간이 좀 더 있어야 열매가 익어갈 것입니다.
부들은 꽤 크게 자라는 풀입니다. 잘 자라면 1.5미터까지 자랍니다. 줄기 옆으로 자라는 잎이 크게 자라니 쓰임새도 요긴하지요. 크기도 하지만, 부드러운 느낌 때문에 부들은 돗자리를 만드는 데에 많이 쓰였습니다. 부들로 엮은 돗자리는 왕골로 만든 자리보다 부드러워서 폭신해서 좋긴 하지만, 질기지 않다는 게 단점입니다. 두 세 해만 쓰면 헤어져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부들 자리는 왕골만큼 환영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처음 만들었을 때의 느낌이 좋아서, 부들 자리를 최고로 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부들 역시 우리 한방에서는 약재로 이용했습니다. 특히 꽃가루를 말려서 여자들에게 자주 생기는 병을 낫게 하는 데에 많이 쓴다고 합니다. 또 우리 산과 들의 다른 풀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순은 무치거나 쪄서 먹기도 했답니다. 최근에는 꽃차례의 독특한 모습이 풍기는 운치가 좋아서, 꽃꽂이와 같은 꽃을 이용한 장식에 많이 쓰인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물을 정화하는 능력이 탁월해서 연못이나 습지에 심어 키우기도 하지요.
부들과 비슷한 수생식물 가운데 창포(Acorus calamus var. angustatus)가 있습니다. 창포는 한자로 ‘菖蒲’라 적습니다. ‘菖’은 창포라는 뜻을 가진 글자여서 ‘창포 창’으로 읽는데, ‘蒲’는 창포를 뜻하기도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부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흔히 ‘부들 포’라고 읽는 한자입니다. 천남성과의 창포와 부들과의 부들은 식물학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생김새가 서로 비슷하게 생긴 탓에 만들어진 글자일 겁니다.
우리 수목원의 초가집 옆 작은 습지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창포에서 꽃송이가 올라왔습니다. 5센티미터 쯤 되는 창포의 꽃송이가 올라온 것은 지난 7월 초의 일입니다. 오늘 나무편지의 사진은 부들의 꽃이 처음 올라오던 날(7월9일)과 같은 날의 사진입니다. 마음 먹고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꽃송이입니다. 게다가 이 무심한 색깔의 꽃송이가 무성하게 난 잎사귀 안쪽에서 숨은 채 살그머니 올라오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아직 채 열리지 않은 상태의 이 꽃송이는 이때로부터 며칠 지나면 연한 황록색으로 피어납니다. 사진의 볼록 튀어나온 부분들이 모두 하나 씩의 꽃으로 피어나는 거지요. 창포의 꽃은 암술 1개와 수술 6개를 갖고 함께 갖고 있는 양성화이며, 6개의 꽃덮개까지 갖고 있답니다. 물론 꽃덮개나 꽃술이 워낙 작아서 맨눈으로는 일일이 나눠 살펴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해살이풀인 창포는 오월 단오를 이야기하면 먼저 떠오르실 겁니다. 단오 날에 창포를 넣어 끌인 물에 여자들은 머리를 감고 어린 아이들은 목욕을 하는 풍속이 있어서지요. 이 창포를 끓인 물을 창포탕이라고 부르며 피부와 머릿결을 좋게 하는 귀한 약으로 여겼던 겁니다. 창포는 머리카락을 비단결처럼 곱게 할 뿐 아니라, 한햇 동안 잡귀 잡신을 막아낼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몸을 깨끗이 단장하고, 주위를 깨끗이 하면 잡귀가 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닐까 싶습니다.
창포는 실제로 미용효과를 보이는 성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창포를 이용한 비누와 샴푸를 비롯해 갖가지 화장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창포는 향긋한 내음을 갖고 있어서 욕실용 향수나 입욕제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창포의 잎을 살짝 비벼보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지요. 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해도 옛 사람들의 경험은 그렇게 우리 삶에서 오랫동안 요긴하게 쓰인 지혜였던 겁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에서도 잘 자라는 창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울가나 연못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었습니다. 단오 때마다 개울가에 무성하게 자란 창포를 뜯어내 머리를 감곤 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최근 들어서 자연 상태에서의 창포를 찾아보기는 무척 어려워졌어요. 아직 환경부에서 멸종위기식물로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관심을 가져야 할 식물’로 분류하고 있는 식물입니다.
어느 틈에 아침 바람에는 가을 내음이 묻어납니다. 여름 가고 가을 오는 건 자연의 순리이건만, 언제나 마음은 성급하게 오는 계절을 독촉하곤 하지요. 비, 바람, 무더위로 잔인했던 지난 여름도 이렇게 기억 속으로 흩어져 갑니다. 이번 주부터는 일교차가 큰 날씨가 이어진답니다. 예보를 보니, 아침과 한낮의 기온 차이가 10도 정도 되는 날씨입니다. 고뿔 들기 좋은 날씨, 건강 조심하셔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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