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비 내리고 - 편지 1 / 나희덕
비 / 강은교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봄비 오던 날 / 최옥
혼잣말을 합니다
그대가 나를 조금만 자유롭게
하기를 그렇게 하기를...
가두었던 말(言)들을
빗물속에 흘려 보냅니다
구름처럼
먼 데 둘 수밖에 없는 사랑
수평선처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대
한때 당신을 향했던
불같은 몸살도
이제는 편안해진 그리움이길
재울 것은 재우고
깨울 것은 깨우며
봄비속에 연신 혼잣말을 합니다
가두었던 말(言)
우산 / 도종환
혼자 걷는 길 위에 비가 내린다
구름이 끼인 만큼 비는 내리리라
당신을 향해 젖으며 가는 나의 길을 생각한다
나도 당신을 사랑한 만큼
시를 쓰게 되리라
당신으로 인해 사랑을 얻었고
당신으로 인해 삶을 잃었으나
영원한 사랑 만이
우리들의 영원한 삶을 되찾게 할 것이다
혼자 걷는 길 위에 비가 내리나
나는 외롭지 않고
다만 젖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먼 거리에 서 있어도
나는 당신을 가리는 우산이고 싶다
언제나 하나의 우산 속에 있고 싶다
사랑에 관한 짧은 생각
빗방울 똑똑 떨어진다 내 발등 위
빗속의 하얀색 보라색 도라지꽃
저 빗줄기 갈래갈래 너머엔
우리가 갈 곳이 있어
비 개기를 기다리다 같이 걸었어
어깨 위에 머리 위에 똑똑 떨어진다 빗방울
피리소리가 맑게 울리던
비안개 속에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비안개 속에
손목에 묶은 풀꽃팔찌가 떨어지지 않게
춤사위 하늘하늘하게
춤을 추면서 걸어가던 도라지 꽃밭길
저 너머 숲에 연못에
무지개가 다시 뜨지 않더라도
빗방울 방울방울 듣는 때마다
도라지 꽃밭길을 걸어가네.
도
라
지
꽃
밭
길
을
걸
어
가
네
우기의 사랑
돌아오고 있다
누우떼가 되어 그가 일으키는 발소리에 나뭇잎이 떤다
나도 오래 전 그가 온 것처럼 왔을 것이다
청춘의 사순절을 지내고 거친 숨소리로
악어가 도사린 강을 건너고
상처로 쩔뚝이며 건기의 도시를 지나
젖은 눈으로 사랑을 찾고
젖은 눈으로 그리워하려고 왔을 것이다
꿈속에서도 잘 떠오르지 않는 길을 더듬어 왔을 것이다
죽음의 사막 몇 개 저렇게 건너 왔을 것이다
어떤 귀소본능이 마른 그의 등짝을 후려쳤나 보다
아니면 오래 전 피로 유전된 길을 따라 그가 오나보다
밀렵꾼처럼 도사린 어둠 속으로 그가 돌아오고 있다
우기의 하늘을 밀고 밀어 돌아오고 있다
자세히 보면 벌써 몇 뼘 더 자라있는 그리움의 풀들
세상을 더듬으며 비 내리고
옛사랑이 돌아오고 있다
그가 돌아오고 있다
비 / 김기림
굳은 어둠의 장벽을 시름 없이 `노크'하는 비들의 가벼운 손과 손과 손과 손……
그는 `아스팔트'의 가슴 속에 오색(五色)의 감정(感情)을 기르며 온다.
대낮에 우리는 아스팔트에게 향하여
"예끼 둔한 자식 너도 또한 바위의 종류구나" 하고 비웃었다.
그렇지만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보는
눈물에 어린 그 자식의 얼굴을 보렴
루비 에메랄드 싸파이어 호박(琥珀) 비취(翡翠) 야광주(夜光珠)……
`아스팔트'의 호수면(湖水面)에 녹아 내리는 네온싸인의 음악(音樂).
고양이의 눈을 가진 전차(電車)들은(대서양(大西洋)을 건너는 타이타닉호(號)처럼)
구원할 수 없는 희망(希望)을 파묻기 위하야 검은 추억(追憶)의 바다를 건너간다.
그들의 구조선(救助船)인 듯이
종이 우산(雨傘)에 맥없이 매달려
밤에게 이끌려 헤엄쳐 가는 어족(魚族)들
여자(女子)―
사나이―
아무도 구원(救援)을 찾지 않는다.
밤은 심해(深海)의 돌단(突端)에 좌초(坐礁)했다.
S O S S O S
신호(信號)는 해상(海上)에서 지랄하나
어느 무전대(無電臺)도 문을 닫았다.
빗방울로 걸다
띄엄띄엄 외우지도 못할 긴 번호입니다.
벽지 구석마다 얼룩이 잦아들면 빗방울 소리가 나를 대신합니다.
부엌 창틀에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다르고,
패인 아스팔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다릅니다.
띄엄띄엄 알지 못할 긴 번호를 눌러 봅니다.
낮은 구름장이 붉은 빛을 띤 새벽,
발신음도 들리지 않았는데 급한 걸음들이 달려 갑니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그 소리는 늘 틀림없는 번호로 이어집니다.
깨진계란 가지런히 둘러져 있는 화분에 닿는 소리가 다르고,
철벅이는 발자국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다릅니다.
마음의 틈새마다 사방 벽지마다 참한 얼굴로 솟아오릅니다.
잠들 무렵이면, 어두운 손길마다 하나씩 훤히 불이 켜지고
머리칼의 길을 따라 빗소리가 참하니 나를 다듬습니다.
비의 사랑 / 문정희
몸 속의 뼈를 뽑아내고 싶다.
물이고 싶다.
물보다 더 부드러운 향기로
그만 스미고 싶다.
당신의 어둠의 뿌리
가시의 끝의 끝까지
적시고 싶다.
그대 잠속에
안겨
지상의 것들을
말갛게 씻어내고 싶다.
눈 틔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