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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흥성공회
양도면에 성공회는 삼흥 2리 산문 부락에 위치한 교회로, 한 곳 뿐이다
그러나 삼흥 성공회의 역사는 다른 기독교와 맞먹는 백년이 지났다.
비록 소규모의 신앙공동체였지만 한 세기를 넘기는 이들의 역사 속에는 인간의 영혼갈급에 신앙적 생명력을 함양하고 문명의 여명기였던 십구 세기 말엽에 그들의 고된 역정(歷程)은 교육 사업을 통하여 문맹퇴치와 국민계몽 운동에 앞장서 오늘에 이르러는 모름지기 대한성공회의 서울교구 강화 교무구 삼흥리성공회로 당당히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성공회란 어떤 종교인가?
성공회는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같이하는 개신교이다. 한국에 영국 성공회가 들어오던 시기는 1890년대로 거슬려 올라간다.
이미 1880년에 일본성공회의 개척자인 ‘쇼’ (Ale.xander Croit)선교사가 1880년에 전도사로 활약하는 일본인 한 사람을 한국에 파송하여 전도사역을 하기위해서 한국어 공부를 시켰다. 그에 따르는 경비는 동경 교회가 부담하도록 하였다. 이런 일들은 한국에 성공회가 뿌리내리려는 효시(嚆矢)였다.
다른 한 편에서는 중국의 복주(福州)에서 울프(j.R.Wolfe)라는 신부가 ‘알렌’이라는 선교사와 우연한 기회에 한국을 방문하여 이 나라에 전도의 필요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후 ‘울프’는 남중국선교회의 복건성 (福建省) 연차총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한국전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여기에 나갈 지원자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성공회선교부는 한국에 선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결국 ‘울프’선교사가 주장하는 한국선교 지원요청은 받아드려지지 않았었다.
1883년에 한국정부는 영국정부와 한영조약을 체결하고 .한영 간에 새로운 여명이 떠오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중국에 주재하고 있는 버든,(burben) 모울,(Moule) 스코트(Scott) 등 주교들이 강력히 한국선교를 주장하고 나섰다. 한국에 성공회를 세우는 일은 1888년 북중국주재 주교에게 선교자금으로 2.500불을 보내면서부터 본격화 되었다 (대한성공회백년사30p)
성공회의 한국선교 전래과정
한국선교는 일본이나 중국정책과는 달랐다
“주교(主敎) 없는 곳에 교회를 가질 수 없다” 는 영국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벤슨’(Benson) 대주교는 영국해군 종군사제인 ‘코프’신부를 한국선교의 책임자로 선임하였다. 한국에 성공회가 들어오기까지는 일본에 주재한 ‘쇼’ 신부 와 중국의 스코트주교가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성공회 백년사에서 서술하고 있다,
선교의 문을 두드린 최초의 신부 코프(Chares john Corfe)
한국명; 고요한 (1843-)
다시 간추려 말하자면 성공회는 영국의 국교로서 유일신이신 하느님을 신봉하고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죄에서 구원받고 천당에 이른다는 진리를 믿는 신앙공동체이다.
1889년 11월1일 한국선교의 책임을 맡은 초대 한국주교로 임명을 받은 ‘코프’는 한국에 실정으로나 교회 재정 면으로 보나 여러 가지 악 조건이 에 워 쌓인 가운데 한국선교에 나섰다. 그의 한국선교의 시작은 참으로 험하고 좁은 문이었지만 오로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열정 하나를 가슴에 품고 불모지에 땅, 한국에 개척자정신으로 뿌린 씨앗이 오늘날 대한성공회 120세의 연륜을 따라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열매를 맺고 있다
강화도에 성공회 복음이 오기까지
1890년 9월29일 코프 (고요한) 신부가 인천항에 도착하던 시기에 한국의 정세는 매우 어수선하던 때였다 코프신부는 (이하 고요한 신부) 영국영사관(현 올림픽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부영사의 갓난 애기에게 유아 영세를 베풀어주던 성례가 한국성공회선교 최초의 첫 발이었다.(강화선교백년사22쪽) 그 후 한 삼 년이 지난봄에 고요한 주교는 강화를 면밀히 탐색하여 선교를 시도하였는데 외국인은 강화성내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법이 고신부에 길을 막았다 그해 7월이었다. 왕란도(Warner)신부를 파송하였다 강화외성 출입문인 진해루 (鎭海樓)밖에 있는 나루터(현 갑곶리)에서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기도처로 삼고 선교를 개시하였다.
1894년 1월20일 강화성공회에 참으로 역사적인 하느님에 축복이 임하였다. 그것은 이 초라한 한옥이 성 니콜라회당이 라고 축복하게 된 것이다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 주재하고 있었던 성공회 사제들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소원을 성취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강화지방에서는 최초의 성공회 선교 사업이 시작된 영광스러운 역사였다.
(성공회강화선교 백년사 24p)
그러나 강도지에는 이보다 약간 다른 시각으로 기록하고 있어 아래에 소개한다. 강도지(江都誌)에는
“距今 三十三年前 卽 光武二年戊戌(1898년)에 英人 宣敎師 馬可 와 의사 노인산 二人이 以傳道敎務로 始人本郡하드니 再明年 庚子에 府內城峴에 창축 성전하고 定中央傳道區하야...施設醫藥하니 救療患者하니라”
강도지에 기록으로는 감리교회와 같이 1898년에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강화성공회의 전래는 1894년1월20일에 갑곶 나루터 조그마한 한옥에서 시작된 기록이 옳다.
양도면에 유일한 삼흥성공회 (성 에단교회)
양도면 삼흥리 산문부락은 뒤에는 어리석고 고지식해보이는 덕정산을 등에 업고 앞으로는 인자하고 빙그레 웃는 아버지에 얼굴과 같은 진강산을 마주 바라보며 사는 정겨운 마을이다 덕정산이 아들이라면 진강산은 아버지로 상상할 수 있다 이 산들은 사시사철 옥수를 뿜어내려 용(龍)내를 이룩하고 마을사람들은 이 물줄기로 농사짓고 생업을 찾아 살아왔다.
약 450년 전에 파주에서 이거해온 파평윤씨의 집성촌인데 예로부터 진강산은 삶에 터전으로 어머니의 품안과 같았다
19세기말 우리 민가가 거의 그러했듯이 빈곤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암혹기의 시대가 있었다. 각종 우상이 난무하였다 이른바 토착신앙에 얽매인 그들은 조금 아픈듯하면 푸닥거리 하고 고사지내고 우매한 삶을 살고 있었다. 산골 마을인지라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문맹자가 많은 동네였다 그들에게 있다면 착한 마음씨와 근면뿐이었다 산에서 나무해다 팔고 산기슭에 있는 전답에 곡식을 심고 농사라고 하였지만 빈곤을 벗 삼아 살고 있었다.
이렇게 어두움에 역사가 짙어 있을 때 희미한 샛별처럼 불이 밝혀왔으니 이 마을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여명이 밝아온 것이다
존강 부락에 이덕환 베드로(李德煥) 가 살고 있었다, 베드로는 온수리에 사는 김영선과 교분이 깊어 자주 왕래하였는데 마침내는 성공회 교리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때에 산문부락에서 사는 윤봉영(尹鳳英)과 함께 교리공부에 심취하든 중 두 사람은 하느님의 진리에 대하여 그 심오함을 깨닫고 감동하였다
이덕환 베드로는 영세를 받고 더욱 전도에 열중하고 드디어 자신의 집에 기도소를 설치하고 1907년 가을부터는 이덕환 윤봉영의 아들 윤교철 요한(尹敎哲)윤교형과 이삼손 윤창옥이 중심이 되어 산간마을인 산문부락 에 주님을 섬기고 미사 드리는 회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역사인가? 어둠에 권세를 뚫고 독생자에 밝은 빛이 산문부락에 밝혀온 것이다 그 감격 그 감동은 참으로 이 마을에 대변혁을 일으킨 것이다
마침내 1908년 1월에 길상준 신부가 “성 애단 회당” 이라고 축복하였다,
꿈에도 그리던 성전이었다. 얼마나 갈망한 염원이었나, 주일날이면 강화 읍내나 혹은 온수리 성당에를 가야 미사를 드렸는데 8년 만에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는 아이들까지도 온 동네가 한곳에 모여서 미사를 드리고 복을 받게 되었다.
새 회당이 건립된 이래 윤씨와 이씨네들 각 가호에 입교자가 날로 늘어났다 교회는 더욱 융성하였고 교우들은 하느님에 은혜를 깨닫고 인생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하여 확신을 갖는 공동체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자면 삼흥 성공회는 1901년 11월6일 이덕환과 윤봉영과 그의 아들 윤교철과 윤교형 그리고 이삼손 윤창선 이 최초의 신자로 출발한 교회이다
이들은 마치 자그마한 조각배를 타고 전쟁하러 나가는 병사와도 같았다
고난의 여정이었지만 예수의 도를 깨닫게 되니 기쁘기만 하였다
선교 전략으로 신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삼흥리 성공회에서는 선교가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 시대 우리 사회에는 문맹자가 너무 많았다 더구나 산문부락 같은 산골마을에는 거의 다 문맹자였다 특히 여성들이 더했다
복음이라는 씨앗을 뿌리려면 사람의 마음을 깨우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선교를 위하여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온수리 성공회 김영선 신부의 지원 하에 삼흥신명서당(三興新明書堂)을 세웠다 삼흥 신명서당을 세운 이야기를 강도지(江都誌)에는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三興新明書堂;
亦是 神父 金永善이 設立한 者로 聖公會 管理下에 置하고 當地 信者 尹聖瑞가 引導하야 于今 數十年을 繼續하였나니라.
그 시대에 성공회에서는 초지 신명서당. 넙성 신명서당. 삼흥 신명서당. 내리신명서당 교회단위로 서당을 세우고 문맹퇴치사업에 힘썼다. 삼흥리 신명서당에서는 처음에 윤성서가 한문을 주로 가르치다가 윤창선이 뒤를 이었고 그의 아들 윤용조가 신교육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또한 윤용조의 부인 장모대(볼리나)는 여성들에게 야학을 하고 양잠기술과 생활개선운동, 농촌에서 필요한 위생사상을 보급하는 교육에 열심을 기우렸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마을에 수 십 년을 계승해온 자그마한 서당에 비극이 다가왔다 그것은 일본의 억압이다 1910년 한일합방에 성공한 일제는 1911년 11월1일 이른바 조선교육령이라는 악법으로 우리민족의 얼을 말살하기 시작했다. 사립학교 시행규칙이라는 악랄한 법을 제정 발표하였다 1915년에는 개정공포 하였고 조선교육령도 1922년에 개정하였다 1938년에 다시 만들어 한국의 교육을 더욱 억압하였다
강도지에는 그 시대의 사립교육이 말살되는 슬픔을 (南枝花洛 北枝開)남쪽 가지에 꽃은 떨어지고 북쪽 가지에 꽃은 피어난다고 슬픈 표현을 하였다
삼흥 성공회의 신앙산맥
교회 초창기부터 성장하는 과정에는 일제의 탄압이 혹독하였고 그 세월의 흐름 속에 태풍처럼 불어 닥치는 빈곤은 우리 겨레를 슬프게 할 뿐 만아니라 교회가 성장하는 데는 장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따라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무지몽매한 노예적 근성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믿음에 맥을 계승하여 백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그 인맥들이 이덕환 운교철 윤교형 윤창선 이삼손의 후손들이다 이들 중에는 믿음에 열매를 잘 맺은 이도 있고 성장하지 못한 채 슬어버린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은 모두다 삼흥 성공회를 지켜온 귀중한 역사에 증인들이다 그 중에서 믿음에 계대를 잘 지켜온 가문을 여기 소개한다.
물론 다른 교우들도 열렬하게 신앙생활을 한 가문도 많지만 특별히 윤창선의 후손들에 신앙산맥을 기록하려고 한다.
윤창선 교사에서 윤병학 신부까지
윤창선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교회에 창립일꾼 중에 주역이 되어 신명서당(新明書堂)을 설립하고 마을 사람들에 무지를 일깨웠다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비롯해 민족이 나라를 빼앗긴 설음도 우리민족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애국정신을 함양하였다 그가 나이 들어 죽으매 그의 아들 윤용조가 신명서당을 이어 가르치는데 힘썼다 아버지가 한학을 중심으로 교육했지만 용조는 신문학을 받아들여 산수 국어 작문법 등을 가르쳐서 누구나 편지정도는 쓸 수 있는 실력을 키워 문맹퇴치운동에 힘썼다.
그의 아내 장모데(볼리나)는 특히 믿음이 돈독하여 기도생활에 용장으로 신유에 은사를 받고 교회에서의 ‘다비다’와 같은 일꾼으로 그 시대의 여성들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을 하였다 부녀자들에게는 주로 야학 반을 설치하고 한글을 터득하도록 하였으며 양잠하는 기술과 재봉틀 사용하는 방법 기타 육아법 과 음식영양학과 가정위생교육을 고취 시키는데 힘쓰는 당대의 신여성이었다. 윤용조의 아들 윤형구와 며느리 함‘유내시’도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교회에 충성하였다. ‘유내시’ 는 친가인 흥왕리 교회에서 이미 믿음을 쌓은 여성이었다. 그는 사회에 나가서 빛과 소금에 역을 함으로 성공회복음을 전교하기로 결심하고 병원에 환자들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하는 동안에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를 받은 천사와 같은 여성이었다. 불치의 병에 걸린 환자를 위하여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찾아가서 기도해주고 간병까지 해주었다 마침내 ‘유내시’가 손을 대고 기도하면 각종 병마가 물러나는 신의 권능을 받았다, 그의 아들 윤병학은 할아버지 윤창선의 믿음을 이어받아 성공회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신부가 되어 믿음의 계대를 이어왔다
이삼손의 후손들
이삼손은 교회창립당시의 일원으로 그 후손들이 꾸준히 신앙의 맥을 이어 이 교회의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 그 의 손자 이명천이 평신도회장으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새 성당을 건축할 때 대지 200평을 아낌없이 헌납하는 믿음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의 형인 이동섭의 내외가 항상 교회의 버팀목으로 충성했다. 동섭의 아내 윤교순이 먼저 하늘나라에 입성하게 되어 그의 소천 함을 기념하여 교회 앞에 종을 헌납함으로 지금도 미사시간 때마다 성도들을 부르는 소리가 그윽하게 들려오니 이삼손의 믿음을 계승하는 증언처럼 새벽을 깨운다.
윤교철의 후손들도 윤백선 윤춘선 윤노선 삼형제들이 대를 이어 교회 평신도회장직을 충성으로 수행하였다. 그의 후손 윤용출이 성당건축 할 때 대지 200평을 아낌없이 헌납하여 조부님의 믿음을 계승하고 있다.
삼흥 성공회가 배출한 사제들
이삼손의 가문에서 이진식 이진산 두 사제를 키웠고 윤창선의 후손에서 윤병학 신부를 배출하였으며. 또한 윤교철의 후손에서는 윤군자를 수녀로 육성하여 교회와 사회에 봉사로 헌신하여 삼흥 교회가 거둔 기념비적인 여성 봉사자이다. 이밖에도 삼흥 성공회를 지켜온 인간 산맥은 참으로 그들의 불타는 믿음이 널리 칭찬할만하다 위대한 헌신 자들 중에는 이미 잠들어 있는 이도 많고 또 숨겨있으며 지금도 그 인맥은 살아 숨 쉬고 있다 여기 그 이름들을 남기고저 한다.
윤교철 윤백선 윤춘선 윤노선 윤영일 윤영우 윤용범 윤용혁 윤용무 윤교영 윤일선 윤용서 윤용박 윤상선 윤용해 윤용완 윤용달 윤운선 윤용식 윤교형 윤임선 윤수길 윤여선 윤은길 윤용득 윤충선 윤재웅 윤재목 윤윤선 윤창선 윤용인 윤현구 윤용조 윤형구 윤숙이 윤흥선 윤용헌 윤유구 윤필선 조유내시 윤용윤 윤시내 윤만구 윤명구 윤수원 윤용길 윤용전 윤용필 윤용명 윤봉구 윤병근 윤병재 윤병문 윤용은 윤근성 윤은구 윤병옥 윤용각 윤용영구 윤희선 윤용옥 윤항구 윤용문 윤우선 윤용업 윤용광 윤보경 윤예선 윤용복 윤용유 윤용산 윤호근 윤재근 윤규선 윤용달 윤경서 윤용훈 윤강구 윤용근 윤진구 윤선구 윤용중 윤부선 윤용부
윤용천 윤인선 윤용환 윤민구 윤일성 윤장옥 윤영주 윤석규 윤재옥 윤병학 이덕환 이삼손 이상렬 이학섭 이흥섭 이명천 이영섭 이진식 이동섭 이효순 이효춘 유재욱 이강현 이영운 이인선 이강숙 이근배 이칠성 이범성 김승기 이진산 노수복 노영수 노승수 노경래 주인선 이루시아 정ㄴ다 김카티리나 민애은 오엘리사벳 강모니카 한을님 한푸리스카 이옥심 윤군자
최아가타 김앵니스 조글라라 허마르다 최안젤라 김다시아니 김세실리아 이모니카 최실타
최아가타 조데레사 이헬리나 유헬레나 추엘리사벳 김사라 윤또루티아 유에스터 최필에스 조모니카 한누시 함유내시 (151명) 필자에 연구부족으로 누락된 성도에게 양해를 구한다.
위에 기록한 이름들은 삼흥교회 (성 애단 회당) 에서 인생의 애환을 같이하며 교회를 섬겨온 고귀한 이름들이다 이 많은 교인들의 한 사람 한사람을 살펴보면 참으로 연약하기 그지없다 문맹자도 있고 빈곤하여 몸에 병이 있어도 치료를 받지 못해서 불구가 된 이도 많았다. 더욱이 불행했던 일은 급수시설이 비위생적이었던 그 시대에 산문부락에 우물들이 토질이 강해서 음료수로는 적합하지 못했다. 그런 관계로 나면서부터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사람이 많았다 민족의 수난기에 가난을 헤치고 신앙생활을 하는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축복이 남달랐다 그들이 그렇게 빈곤 속에서 살면서도 그 산골마을에는 교육열만은 강했다 교인들 가운데는 비록 작은 산골 두메에 있는 교회였지만 윤은구 면장이 이 동네에서 났고 교장으로 윤명선 윤춘선 윤용헌 윤노선 이승환 이종환(강화교육장) 다섯 사람이며 윤덕진(일명 윤순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교수에, 참으로 산골 교회답지 않게 자녀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
마침내 이들은 일본정치 구시대에 가난 속에서 미사를 드리던 성전을 버리고 사제관 21평과 2층에 교육관 21평을 건립하였는데 이는 누구에 도움 없이 오직 삼흥교회 공동체의 힘으로 성축하였다, 1988년에는 전교인이 합력하여 현대식 건축양식으로 웅장하게 44평 성당을 성축하였고 그해 11월6일에는 봉헌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그날은 외지에 나가서 흩어져 살던 교우들이 고향교회 성축 식에 와서 축하하였고 김성수 주교의 집례로 봉헌미사를 드렸다. 이때의 감격을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는 오로지 하느님의 은덕으로 생각하고 전 교인이 감격의 눈물을 억제하지 못했다 한 편 이 성전을 건축하는 위대한 사업에 대지로 이명천교우가 2백 평을 윤용출 교우가 200평을 아낌없이 헌납해주었다
그동안 사제관도 없고 담임 신부도 없어서 온수성당신부가 와서 중요한 행사를 관활하던 것이었는데 초현대식 주택을 건립하여 사제관으로 봉헌하고
마침내 삼흥 성공회의 단독신부를 모시고 꿋꿋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성 애단 교회 는 1901년11월6일 이덕환의 집에서 윤봉영과 그의 아들 윤교철과 윤교영 이삼손 윤창선이 최초의신자로 출발하여 오늘날 그 107년의 역사가 오래된 느티나무처럼 인간의 영혼을 감싸고 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다음번 모임때 발표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