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오늘의 본문이 던지는 2가지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신학적 질문) (2) 하나님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보기를 원하시는가? (윤리적 질문). 이 둘은 사실 동일한 질문의 양면이다.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그들의
신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윤리는 신학에서 흘러나온다.
34절에서 예수가 무리를 보고 “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he had compassion for them)”는 표현이 나오는데, “ 불쌍히 여김 (연민, compassion, 그리스어로는 splagchnizomai- 스트롱번호 4697)”은 예수가 인간을 대하는 입장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것이고, 치유 사역을 비롯한 예수의 생애 전체는 동일한 내용을 간접적으로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결정적 계시이므로 우리는 예수를 통해 compassion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는 매우 파격적인 신관이다. 전통적으로 종교에서 신은 불길하고, 저주를 내리고, 분노하고, 복수하고, 판결하는 절대자로 묘사했고, 그래서 특별한 계층인 사제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존재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드러내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절대성 속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과의 인격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분은 명령만 내리고 복종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영향을 받는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일에 관심을 두시고, 세상과 운명공동체를 이루신다. 예수의 연민은 창조주 하나님의 연민(pathos)이 육화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훼퍼가 말한 대로 은혜를 값싼 것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Compassion이 독일어로는 Mitleid (with-suffering)인데 이는 이 단어의 원래의 뜻을 더욱 명확히 해준다. Compassion은 동정(pity)과는 구별된다. 동정은 거리를 두고도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나 compassion은 그 대상과 같이 고통을 당하지 않고는 가질 수 없다.
Compassion의 전제 조건은 그 대상과의 무조건적인 유대이다. 예수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들에게 느끼신 연민은 높은 위치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예수는 그들과 동일화되었다. 그리고 그 동일화는 골고다에서 우리들과 동일한 운명(출생과 삶, 죽음을 다 포함하여)을 모두 겪을 지경까지 완전한 동일화였다. 이것은 예수라는 성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생명과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에 관한 선언이다. 우리는 그 분 앞에서 매일을 살고, 그 분 앞에서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윤리학은 신학에서 흘러나온다고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연민을 받아서 새로운 존재가 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그 연민을 베풀지 않는다면 자기모순에 빠진다.
Karen Armstrong은 T r a n s f o r m a t i o n : T h e B e g i n n i n g o f O u r R e l i g i o u s T r a d i t i o n s (2009)라는 책에서 기원전 9세기의 “ 축의 시대 (Axial Age)”에 오늘의 종교들의 기초가 세워졌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폭력이 난무했던 그 시기에 종교적 현자들은 신학의 원형이 되는 (prototheological) 신앙을 발전시켰고, 거기서 랍비적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파생되었다. 저자는 이 새로운 신앙의 핵심에 “ 신적인 연민(divine compassion)”의 개념이 있다고 본다. 이 개념은 너무나 파격적인 것이어서 당시에도 끊임없는 의심과 조작의 대상이 되었었고, 오늘날도 근본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종교에 의해 계속 공격을 당하고 있다. 저자는 난관에 처한 현대 문명의 유일한 희망은 축의 시대에 탐구되었던 심오한 신학적 지혜를 회복함으로 위기를 통한 갱신을 이루어 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가 하나님의 연민을 놓치고 전투적이고 폭력적인 신관을 받아들였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된다고 한다.(벧전 4:17) 우리는 먼저 우리가 연민의 하나님에 대한 과격한 신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더 나가 우리가 교회로서 오늘과 같은 위협적인 세계에서 연민을 실천하는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주석적 관점
▶ 오늘 본문은 기적이야기를 설정한 것에 반해서 과도적이고 비필연적이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귀중하고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 오천 명을 먹인 긴 이야기와(35-44)와 물위로 걸은 이야기(45-52)가 중간에 넣고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제자들의 첫 번째 선교적 사명을 감당한 이후에 고향으로 돌아오기(12-13,30-31)와 뜻하지 않은 예수와의 여행(45-52) 그리고 많은 치유가 필요하고 행해졌던 게네사렛 지역에의 도착(53-56)등이다.
예수의 정체성과 선교에 대한 잘못된 추측과 강하게 대비함에 있어, 갈릴리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는 광범위하게 인지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생명을 회복하는 예수의 사랑의 목적과 신적능력은 분명하다.
▶열두제자의 귀환(30-31)
이 구절은 열 두 제자의 선교이야기(7-13)의 결론을 내린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와 똑같은 권위를 주어 둘씩 내보내며 그가 했던 설교, 가르침, 귀신을 쫒아냄, 그리고 병자를 치유하는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대하고자 했다. 효과적인 선교여서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관계적으로 치유받았다. 예수의 영향력은 확대되었다.
이제 이 구절에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사도라고 부르는데 예수께 돌아와 그들이 행하고 가르쳤던 것을 보고했다. 흥미롭게도 가르치는 것은 마가에서 부분적으로 예수의 분명한 책임이 아니였는데 사람들이 듣도록 격려하고(11)회개를 설교하는(12)것을 가르침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들의 재회에서 예수는 그들을 “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 고 권고한다. 설교와 가르침, 치유는 지치는 사역인데 이 사역이 고향에 까지 이어졌다. 그들이 만나는 중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오고가며 찾아와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31).
마가가 예수가 계속해서 그들을 ‘ 외딴 곳’ 으로 초대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31-32). 쉬는 것이 그들의 사명의 완성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광야는 투쟁과 시험의 장소였고(1:12-13;신8:2), 또한 그곳은 하나님께서 신실한자들을 만나시고 먹을 것과 보호 갱신 그리고 방향을 주시기 위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출3:1이하;13:20-21; 삼상23:!4;왕상19:4;시63). 광야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다(출32:10;33:13).
▶사랑의 목자(32-34)
본문 후반부에서 광야가 반복되는데 새로운 공동체가 구원자를 둘러싸고 형성됨으로 새로운 출애굽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와 제자들이 쉬기 위해 외딴 곳으로 배를 타고 갔지만 근처 마을의 사람들이 이를 알고 배가 정박한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쉴만한 장소로 떠났지만 그들의 여행은 그들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들은 다른 해변에서 다른 군중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떠난 무리들보다 더 많았다.
마태와 같이(14:14) 마가에서도 예수는 큰 무리들을 보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는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지만 여기에서는 큰 무리들에게 더 관심을 보이셨다. 예수는 그들이 “ 목자없는 양과 같으므로” 마음이 아팠다. 이 비유는 놀라운데 왜냐하면 모세가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광야에서 임명할 때 사용했던 비유였고(민27:17), 또한 그의 모든 말이 이루어질 장차의 예언자인 메시야를 보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언했기 때문이다(신18:18). 더구나 에스겔은 예언하기를 장차 오실 이가 목자가 되어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들겠다고 말한다(겔34:16-31).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인들의 삶에 필수적이고 그들의 희망의 기초이다. 더구나 그것들은 오늘 성서일과를 이해함에 있어 필수적이다. 광야에 있는 많은 무리들과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길을 길게 가르침으로써 사랑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목자되신 예수 곁에 모여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부각된다. 곧바로 예수는 제자들이 쉬는 동안 굶주린 영혼들을 먹여 주신다.
▶치유자가 여기에 있다(53-56)
오늘의 본문 세 번째 부분은 게네사렛 근방에 예수와 제자들이 예상외로 오셔서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장면이다. 게네사렛은 막달라와 가버나움 중간의 갈릴리 호수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수많은 미네랄 온천들이 있어 옛날부터 병자들이 찾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치유사역을 통해 많은 주목을 끈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1:28;6:1,7,13). 예수가 그 곳으로 가자 많은 병자들을 사람들이 데려왔다. 그들은 예수가 그의 능력이 워낙 크서 사람들이 그의 옷술을 만지기만 해도 나을 수 있는 치유자로 여겼다(56). 그것은 미신일까? 마가에 따르며 그렇치 않는데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짐으로 병이 나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치유에는 전제가 없다. 마가에게는 치유이야기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도 예수의 신적 능력의 현현이다.
목회적 관점
“ 거기에는 오고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 다.” (31절)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점심을 제대로 먹기 위해 쉬지도 못할 만큼 너무 바빠서, 젊은 직장인들은 일하는 동안 책상에 앉아서 자동판매기에서 산 음식을 우걱우걱 먹는다. 십대들은 아침식사로 베이글을 들고 문을 나서서 학교로 간다. 부모와 자녀들은 방과 후 학교가 끝나고 운동 연습을 하러 가는 사이에 일련의 패스트푸드 식당들을 차를 탄 채로 거쳐 간다. 통근하는 사람들은 이른 아침 운전하면서 더블 라테를 홀짝이고, 회의 중간에 미니 당근을 먹고, 집에 가는 길에 포장요리를 골라서 간다. 가족들이 쇼핑을 하는 동안 유아들은 그들이 음식 먹을 시간표 때문에 어른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도록 시리얼 조각들과 다른 휴대용 손가락 과자들을 뜯어 먹는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활동들과 책임들 때문에 식사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의 기능들마저 고쳐야 한다. 우리의 업무는 가족식사를 위해 모이는 것을 가로막아서, 함께 식사를 하려고 기꺼이 일을 멈추지 못하게 하고, 특히 우리 인생을 채워주는 많은 활동들에서 기쁨과 충족감을 얻지 못하게 한다.
만약 기독교인이 너무 바빠서 일에서 벗어나 함께 빵을 나눌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오늘 본문은 노동을 멈추고 쉬기 위하여 신앙 공동체로 모이는 것과 공동 식사에 참여하는 것은, 함께 하는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오늘의 교회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신다. 우리의 개별적인 활동에서 돌아오는-그 활동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고 예수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을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손과 발로서 쓸모 있게 되기 위하여 투쟁하느라 망가지고 탈진하게 될 것이다.
설교와 가르침과 치유와 정의를 추구하는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분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목회의 분주함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군중들로부터 따로 떼어놓으려고 했던 시도가 그를 따르는 군중들에게 허를 찔렸다는 것은 묘하다. 만약 33절에 나오는 반전이 아니었다면 안식일의 중요성에 대한 논쟁을 이어가는 좋은 본문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이 휴식을 취하려 할 때, 느긋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휴가지로 알려진 외딴 곳으로 가는 대신, 그들은 돌봄이 필요한 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 것을 보았다. 눈치 빠른 교인들은 그들의 일정표에 있는 모든 구제 활동을 하려면 그와 동등한 여러 가지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가 만난 무리들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신앙 공동체가 그들에게 알려진 모든 요청들에 대하여, 길잡이와 도움을 찾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에서 나오는 응답을 하려고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따라서 30-34절의 메시지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여러분 자신을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지탱하기 위하여 구별하라.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영적으로 버티는데 곤란을 겪을 때 당신 자신을 위한 휴가를 따로 마련해 두라. 교인들은 어떻게 이 두 가지 가르침을 모두 존중하면서 살아갈까?
18세기 영적인 지도자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이 질문에 두고 씨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Jean-Pierre de Caussade(1675-1751; 프랑스의 사제, 신학자; 자기포기를 강조)는 하나님이 매일 매 순간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아는지 이해하기 원했다. 그는 하나님이 매 순간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가르쳤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현존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지속적으로 그들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굴복하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영적인 휴가의 시간을 통해서든지 혹은 목회자가 외적인 활동을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심을 통해서든지 제공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해야 한다. De Caussade는 이렇게 썼다. “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모든 것은 나를 먹여 살리는 빵과 나를 씻는 비누와 나를 정화하는 불과 나를 만드는 조각칼이 된다. 은혜는 내 모든 필요를 공급해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안식일을 지키고 성만찬을 하고 신학적으로 반성하는 공동체의 실천을 통해 우리를 갱신하려고 부르시는 동안, 하나님은 또한 다른 사람의 요구가 휴가를 위한 우리의 계획에 끼어들 때 우리를 지탱해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53-56절은 신앙공동체가 세계가 고통당하고 있고 기독교의 치유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촉구한다. 마가복음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서 온전하게 될 기회를 얻으려고 몰려와서 간청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오늘날 교인들이 세계의 일부가 된 결핍을
경험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아니다. 사람들은 치유 받으려고 교회 건물로 들어가기보다는 치료전문가, 의사, 자가 치료 도서, 처방약 같은 것들을 훨씬 더 많이 찾는다. 아마도 이것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의 공동체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치유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를 치유자라고 인식했고. 그 인식에 따라 반응했다. 만약 오늘날 교회가 치유의 장소로 인식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의 사명과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이 시대 우리 사회에 하나님의 치유라는 복음을 전할 것인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오늘 본문의 두 부분은 교회가 일상생활의 번잡함에서 떨어진 교회 건물 안에 있는 수도원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예수와 제자들은 본부를 세워놓고 사람들이 거기를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만났다. 치유는 신앙 공동체와 그들이 돌보는 사람들이 서로 필요해서 서로에게 다가갈 때 일어났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교회로 오는 것처럼, 신앙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죄로 인하여 망가진 사람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돕기 위해 세상으로 보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목회 사역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스도의 옷술이라는 역할을 받아들임으로 교회는 온전해지고 싶어서 기독교 공동체에 다가가는 모든 사람을 치유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설교적 관점
-마가복음에서 발견되는 사건들은 그 사건 저편에 있는 감추어져있는 인간의 고통을 보게 해준다. 마가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드러낸다. 마가가 사용하는 극단적인 캐릭터는 약한 자, 악한 세력에 의해 지배당한 자, 건강한 삶을 살기가 어려운 자들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고있다. 마가복음 6장에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고 오가고 있다.
그들은 단지 예수의 뒤를 따를 뿐 아니라 예수가 가는 방향을 예측하고 앞서가기도 한다. 예수와 제자들이 쉴 곳을 찾아 도착하는 곳에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군중들이 있다. 후에 게네사렛에서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군중들은 예수를 보려고 몰려들고 병자들을 데리고 오고있다.
-우리는 이 군중들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절망감에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다. 치유와 해방을 위해 이들은 소리지르고 애걸하고 군중들 사이로 밀고 나오고 창피스러운 줄도 모른다. 마가는 이들의 절박함이 질서 보다 위에 있는 이 광경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만지기 위해 군중들 사이를 뚫고 나온다. 이들은 예수를 보려고 걷는 것이 아니라 그를 향하여 뛰고 그래서 예수께서 도착할 때 그를 만질 절호의 기회를 잡으려한다.
-비록 억압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용인하는 기독교를 필요로 하고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우리 예전은 자신들의 생활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질서와 예의바르게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우리는 제자들이 떡과 물고기 [오병이어 이야기를 생각]를 나누어주고 있는 동안 몇몇 소그룹으로 잔디밭에 앉아있는 “ 질서있는 군중” (ordered crowd)으로 보이기를 원한다. 점심도 가져오지 않고 예수를 향해 달려가는 그런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군중들을 먹이는 모습은 예수의 사역을 보도하는 언론의 생생한 사진을 떠올리게한다. 이 절박한 사람들의 가운데에 "다수"(the many)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한 사람” (the One)이 서있다. 그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 지쳐있을 때도 가르치고 홀로 있고 싶을 때에도 만져주고 치유하며 그 자신은 굶주렸을 때도 수 천명의 사람들을 먹인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어수선한 군중 가운데 서있는 모습으로 그려져있다. 이 장면을 상상해보라.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축하하고 떡을 뗀다. 이 떼어진 떡으로부터 수천의 사람들을 먹인다. 이 장면은 다시 마가복음 14:22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떡을 떼고 축사한 후 “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라고 말하면서 제자들에게 준다.
-설교자는 이 성만찬에 나타나는 예수의 이미지를 오늘날 배부른 회중들을 향하여 설명해야하는 과제를 안고있다. 그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 회중들은 마가복음 6장의 힘든 삶을 사는 군중들이 아니다. 이들은 설교자에 앞서 교회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군중들을 뚫고 떡과 포도주를 향하여 달려갈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옛날과는 달리]교회는 현대적 삶의 여러 활동가운데 하나이다. 이 말은 회중들이 굶주리지 않는다거나 절망적인 상황은 오늘날 없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우리도 “ 다수” (the many)이다. 우리 자신들도 "한 분" (the One)을 필요로 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마가복음이 그리고 있는 절망적인 군중들과 다르지 않다.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 배부른 사람들” (the filled)에게 한 말을 들어보자: “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계 3:17). 목회적, 예언적으로 말한 이 말은
외적으로 드러난 것 이면에 놓여있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설교를 통하여 예수의 사역을 기억하게 하고 그의 구원사역, 치유, 해방을 드러나게 하는 일은 위대한 신비이다. 인간의 굶주림과 예수의 내민 손과의 만남은 은혜의 기적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한 분” (the One)의 은혜가 절박한 삶을 사는 “ 다수” (the many)의
삶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마가를 설교하는 일은 이러한 연결을 만들고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인간의 "필요한 영역“ (not enough)에 그의 손을 내밀어 주는 것으로 하는데 좋은 기회가 된다. 절박한 상황에 있지않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마가의 질문은 이렇게 다가온다: ” 너는 떡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아무리 많은 떡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도 생명의 떡을 요청하는 깊은 굶주림을 채울 수는 없다. 여기서 느끼는 조용한 절망감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이 그 떡을 공급하도록 요청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