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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1호 : 남원 실상사 약수암 목각아미타여래설법도
(南原 實相寺 藥水庵 木刻阿彌陀如來說法圖) 금산사성보박물관, 1965.07.16
이것은 화면(畵面)을 불화(佛畵)의 배치구도와 동일하게 배치했지만 나무에 부조(浮彫)로 새겨 후불탱화(後佛幀畵)의 기능을 하도록 한 목조후불탱화(木造後佛幀畵)이다. 이러한 탱화가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재 조선 후기의 작품들이 10여점이나 남아 있어서 적어도 이 시대부터는 유행했다고 생각된다.
이 약수암의 목조후불탱화는 이러한 여러 예 가운데 연대(정조(正祖) 6년, 1782)가 확실하고 작품이 우수하여 당대의 대표작으로 손꼽을만한 것이다. 화면을 상·하단(上·下段)으로 나누었는데 하단에는 중앙에 아미타본존불(阿彌陀本尊佛)과 좌우로 관음(觀音)·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등 4보살을 배치하고, 상단에는 2대제자(二大弟子)와 지장보살(地藏菩薩) 등 4보살을 배치하여 아미타(阿彌陀)와 협시제자(脇侍弟子) 그리고 8대보살(八大菩薩)을 나타낸 것이다.
하단 본존불의 연꽃대좌에서 뻗어나온 연꽃들이 2제자와 8보살의 대좌를 이루고 이들 협시상 사이로 올라가면서 연꽃봉오리를 만들어 화불(化佛)을 표현하였다. 불상의 형태는 얼굴과 신체 모두 사각형이며 근엄하면서도 친근감이 넘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옷은 두껍고 옷주름은 간략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사각형의 형태와 아울러 둔중한 느낌을 나타내어 조선 후기 불상양식을 썩 잘 나타내고 있다.
제422호 : 남원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南原 禪院寺 鐵造如來坐像)
이 불상은 적정< 寂靜 >한 얼굴, 당당하고 균형있는 신체, 안정된 결가부좌< 結跏趺坐 >의 자세, 얇고 간략한 평행의문< 平行衣紋 > 등 춘궁리< 春宮里 > 철조석가여래좌상< 鐵造釋迦如來坐像 >과 흡사한 특징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고려철불< 高麗鐵佛 >이다.
즉 유연성이 사라진 삼각형의 얼굴, 넓고 날카롭게 치올라간 눈, 예리한 코, 꽉 다문 입, 앞으로 내민 턱, 형식적인 삼도< 三道 >표현 등 고려불상의 특징을 썩 잘 표현하고 있다. 법의< 法衣 >는 얇아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가슴 앞에서 V자로 여민 옷 입는 법이 마치 한복을 입는 것처럼 표현되어 퍽 특징적이다.
손은 요즘 만들어 끼운 것이지만, 팔의 형태로 보아 원래부터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 >을 했던 것 같다. 이처럼 이 불상은 추상성이 짙게 보이는 일면도 있지만 균형잡힌 체구나 재치있는 주조기법 등으로 고려시대 철불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작품이라 생각된다.
제423호 : 남원신계리마애여래좌상(南原新溪里磨崖如來坐像)
제424호 : 청룡사석조여래좌상(靑龍寺石造如來坐像) 예천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의 청룡사에 모셔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청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25호)과 나란히 법당 안에 모셔져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크고 나지막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표현되어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는 눈·코·입이 섬세하고 작게 새겨져 있으며 짧은 귀와 뚜렷한 목주름 또한 인상적이다. 어깨는 좁은 편이며 손과 발이 섬약하고 체구 또한 몹시 약화되어 긴장감이 빠진 듯하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에는 평행한 주름이 나타나고 가슴에는 띠매듭이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통일신라 불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끝이 뾰족한 타원형을 하고 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는데, 머리광배의 중심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몸광배에는 상상의 꽃이라는 보상화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몸광배의 주변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8각형인데 아래 부분에는 엎어진 모양의 연꽃무늬가, 윗부분에는 활짝 핀 모양의 연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제425호 : 청룡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靑龍寺石造毘盧舍那佛坐像) 예천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의 청룡사에 모셔져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청룡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24호)과 나란히 법당 안에 모셔져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크고 나지막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4각형에 가까워 넓고 풍만하지만 볼륨이 별로 없이 평판적인 느낌을 주며, 코와 입이 매우 가깝게 붙어있는 독특한 인상을 준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넓적하고 평면적인 신체를 두껍게 감싸고 있다. 어깨에서부터 양 손에 걸쳐 흘러내린 평행의 옷주름은 부드럽기는 하나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가슴 부근에 있는 두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손모양이다.
4각형의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나뉘어 진다. 상대의 4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지고, 중대에는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하대는 앞부분이 파손되어 있으며, 옆면에 안상이 2개씩 배치되어 있다.
제426호 : 예천동본동삼층석탑(醴泉東本洞三層石塔)
제427호 : 예천동본동석조여래입상(醴泉東本洞石造如來立像)
이 거대한 석조불입상(石造佛立像)은 괴량감(塊量感)이 넘치는 신체, 평판적(平板的)인 상체, 좀 어색한 자세이면서 네모진 얼굴 등에서 그 당시의 서 있는 불상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뿐 아니라 하체에 나타난 평행계단적(平行階段的)인 옷주름, 가슴의 띠 같은 승각기(僧脚崎)(내의) 표현 등은 도피안사(到彼岸寺)나 축서사상(鷲棲寺像)과 흡사한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활기찬 미소를 띤 풍만한 괴량감을 지닌 얼굴에서, 당대의 거구불상(巨軀佛像)에서 나타난 뛰어난 조형성(造形性)을 직언해 주는 대작으로 생각된다.
제428호 : 인각사보각국사탑및비(麟角寺普覺國師塔및碑) 군위
제429호 : 불굴사삼층석탑(佛窟寺三層石塔) 경산시
불굴사는 신라 신문왕 10년(690)에 창건되었고,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50여채의 건물과 12암자 등을 갖춘 큰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탑은 절 안의 법당 앞에 세워져 있다.
제430호 : 보경사부도(寶鏡寺浮屠) 포항
보경사 뒷산의 중턱에 서 있는 묘탑으로, 원진국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원진국사 신승형(申承逈)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 51세에 입적하자 고종이 그를 국사로 추증하고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기단부(基壇部)의 아래·중간·윗받침돌 가운데 3단으로 이루어진 8각 아래받침돌은 맨윗단에만 연꽃조각이 둘러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겨두었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꽃잎의 끝이 뾰족하고 중앙의 세로선이 볼록하게 돌출되어 당시로서는 드문 모습이다.
탑신(塔身)은 몸돌이 매우 높아 마치 돌기둥처럼 보이며, 한 면에만 자물쇠모양을 새겨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느리고, 모서리에서 뻗어나가는 곡선의 끝마다 꽃장식이 조그맣게 솟아있다. 처마의 곡선은 양쪽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고, 추녀는 두터워 보인다.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나, 몸돌이 지나치게 길어 전체가 길쭉해 보이며 너비도 좁아 안정감이 적다.
제431호 :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 "갓바위 부처" 경산시 선본사
제433호 : 각연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覺淵寺石造毘盧舍那佛坐像) 괴산
이 불상은 광배(光背), 대좌(臺座)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 신라말부터 크게 유행되기 시작한 비로자나불상(毘盧舍那佛像)의 하나이다. 화려하고 복잡한 8각대좌 위에 당초(當初)무늬와 불꽃무늬 그리고 7화불(七化佛) 이 현란하게 새겨진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대좌나 광배와 잘 조화되게 아담하고 오밀조밀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육계(肉계)가 불분명한 머리, 계란형의 단아한 얼굴에 알맞게 묘사된 이목구비(耳目口鼻), 조용한 미소 등에서 단정한 선사(禪師)의 얼굴을 엿볼 수 있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와 지권인(智拳印)을 한 손에서 이루어지는 삼각형구도의 체구는 우람하거나 격정적인 모습이 아닌 안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따라서 신라최성기의 전형적인 불상처럼 긴장된 활력과 세련된 기교는 줄었지만 일면 단아하면서 일면 화려해진 조각양식을 묘사하고 있어서 선적(禪的)인 독특한 분위기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는 것이다.
제434호 : 범어사대웅전(梵魚寺大雄殿) 부산
대웅전은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을 봉안(奉安)한 곳을 말하는데 이 대웅전에는 주존불(主尊佛)인 석가여래(釋迦如來)를 비롯하여 좌협시(左脇侍)인 미륵보살(彌勒菩薩), 그리고 우협시(右脇侍)인 가라보살(迦羅菩薩)의 삼존(三尊)을 모시고 있다.
이 대웅전은 정면(正面)과 측면(側面) 모두 3칸으로 된 맞배지붕의 다포(多包)집이다. 공포는 외3출목(外三出目)이고 옥내(屋內)에는 2개의 고주(高柱)를 세워 대량은 고주에 결구되고 후불벽(後佛壁)을 만들어서 그 앞에 불단(佛壇)을 설치하였으며 불단위에는 화려하게 장식한 닫집을 얹었다. 이 건물은 기둥머리와 두공(枓)과 처마의 구조가 섬려하고 아담한 교창(交窓)이 달렸으며, 닫집과 불단의 조각이 정교하고 섬세하여 조선 중기 불교건축의 아름다움과 조선시대 목조공예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제435호 : 안성죽산리오층석탑(安城竹山里五層石塔)
이 탑은 단층기단(單層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구성한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부 구성에서 후비(厚肥)·둔중(鈍重)함을 볼 수 있고 탑신의 양우주(兩隅柱)가 형식적으로 흘렀다. 그러나 옥개석(屋蓋石)받침이 층마다 정연하게 5단씩이며, 석재(石材) 결구(結構)에서 규율성을 잃지 않은 거대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안성군 내에 많은 석탑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이 석탑이 가장 우수한 것이다. 건립 연대는 고려(高麗) 중기(中期)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제436호 : 불곡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佛谷寺石造毘盧舍那佛坐像) 창원시
제437호 : 김회련공신록권(金懷鍊功臣錄券) 정읍 도강김씨종중
제438호 : 이태조4년및6년왕지(李太祖四年및六年王旨) 정읍 도강김씨종중
조선 태조 4년과 6년에 김회련(金懷鍊)에게 내린 왕지이다. 왕지는 사령서(辭令書)로 뒤에 교지(敎旨)라 했다. 태조 4년(1395)의 왕지는 공주목사(公州牧使) 겸(兼) 관내권농방어사(管內勸農防禦使)를 제수한 것이며 행서(行書)로 쓰여 있다.
태조 6년(1391)의 왕지는 해주목사(海州牧使) 겸(兼) 권농병마단련사(勸農兵馬團鍊使) 염장관(鹽場官)을 제수한 것으로 초서(草書)로 쓰여 있다. 보인(寶印)은 『조선왕보(朝鮮王寶)』이다. 이들 왕지는 희귀한 고문서(古文書) 자료들이며 공신녹권과 함께 연시각(延諡閣)에 보존되어 있다.
제439호 : 진전사지부도(陳田寺址浮屠) 양양군
멀리 동해바다가 내다보이는 진전사터 안의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탑으로, 진전사를 창건한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추정된다. 도의는 선덕왕 5년(784)에 당에서 선종을 이어받고 821년에 귀국하여 설법을 시작하였으나, 당시는 교종만을 중요시하던 때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 절로 들어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다.
이 부도는 일반적인 다른 부도와는 달리 8각형의 탑신(塔身)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아래부분이 석탑에서와 같은 2단의 4각 기단(基壇)을 하고 있어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석탑을 보고 있는 듯한 기단의 구조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볼 때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첫 출발점이 되며, 세워진 시기는 9세기 중반쯤이 아닐까 한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치밀하게 돌을 다듬은 데서 오는 단정함이 느껴지며, 장식을 자제하면서 간결하게 새긴 조각들은 명쾌하다.
제440호 : 통영충렬사팔사품(統營忠烈祠八賜品) 재단법인통영충렬사
제441호 : 태화사지12지상부도(太和寺址十二支像浮屠) 울산시
우리나라 석종형(石鐘形) 부도 중에 가장 오래된 유물일 뿐만 아니라 표면에 십이지상을 조각한 것으로도 유일한 고승의 사리탑이다.
이 부도는 장방형의 대석(臺石) 위에 석종형의 탑신(塔身)을 안치한 형태이며, 그 탑신의 앞면에 감실(龕室)을 설치하고 그 하단에는 십이지상을 양각(陽刻)했는데 사람의 몸에 짐승머리를 한 형상이다. 십이지상은 능묘(陵墓)와 석탑에는 보이나 부도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남쪽은 오상(午像 :말)이고 북쪽은 자상(子像 :쥐)이다.
태화사는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632∼647, 재위) 때의 창건으로 전하나, 이 부도는 그 뒤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時代)에 이르러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110cm이다.
제442호 : 관가정(觀稼亭) 경주양동
제443호 : 향성사지삼층석탑(香城寺址三層石塔)
이 석탑(石塔)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層)의 탑신(塔身)을 세운 전형적(典型的)인 통일신라 석탑(石塔) 양식(樣式)을 따르고 있다. 꼭대기에 있던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없어졌다. 높이 4.3m.
탑(塔)의 몸체인 탑신(塔身)과 지붕돌인 옥개석(屋蓋石)은 한돌로 만들었으며 탑신에는 모서리 기둥인 우주(隅柱)만 조각(彫刻)되어 있다. 옥개석 받침은 5단(段)씩이다. 옥개석의 추녀선은 직선(直線)이며 추녀 끝이 위로 들리는 맛이 없어 무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옥개석 네 귀퉁이에는 풍경(風磬)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 풍경은 가라앉은 느낌을 경쾌하게 보이게 한 것으로 본다.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많이 나타나는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탑양식과 달리, 전체적인 형태가 무겁고 형식적인 장식을 둔 면이 많다. 그러나 이 석탑은 동해안에서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신라시대 석탑이어서 그 보존의 가치가 매우 크다. 절터에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들어진 기와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제444호 : 선림원지삼층석탑(禪林院址三層石塔) 양양
1948년에 명문(銘文)이 있는 신라 범종이 발견되어 주목되었던 선림원터에는 석탑을 비롯하여 석등·홍각선사탑비·석조부도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들 석조유물들은 대부분 쓰러져 있었으나 모두 복원되었다.
제445호 : 선림원지석등(禪林院址石燈)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의 귀꽃조각은 앙증맞게 돌출되어 아름답고, 그 위로 가운데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은 모양이며 그 장식이 화려하다. 즉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러 모두 3개의 마디를 이루게 하였다. 지붕돌이 일부 탈락되긴 하였으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전체적인 양식과 장식적으로 흐른 조각 등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개선사지석등(보물 제111호)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같은 절터내의 홍각선사탑비(보물 제446호)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제446호 :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귀부및이수>(禪林院址弘覺禪師塔碑<龜趺및螭首>)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이다. 선림원터에 있으며, 통일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비는 일반적으로 비받침인 거북머리의 귀부(龜趺)와 비몸, 비머리돌로 구성되는데 이 비는 비받침 위에 바로 비머리가 올려져있다.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은 파편만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비받침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고, 등에는 6각형의 무늬가 있다.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비몸을 세우는 자리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비머리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비의 파편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경서에 해박하고 수양이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비문은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다른 곳에서 모아 새긴 것인데 신라 후기에 왕희지의 글씨가 보급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제447호 : 선림원지부도(禪林院址浮屠)
제448호 : 봉정사화엄강당(鳳停寺華嚴講堂) 안동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화엄강당은 스님들이 불교의 기초 교학을 배우는 곳이다.『양법당중수기』등의 기록에 따르면 같은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17세기에 고쳐 지었을 때 화엄강당도 함께 고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이 부재들이 다른 기법과 섞여 절충형식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징인데 대웅전보다 간결한 형태의 장식성을 사용하였다. 또한 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이기 때문에 기둥은 낮지만 공포를 크게 잡아 겉모습의 균형을 살리고 있다. 2칸은 방이고 1칸은 부엌으로 되어 있으며 부엌과 방 사이에는 벽장을 설치하였다.
차분하고 안정감 있게 지은 건물로 우리나라 전통 건축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제449호 : 봉정사고금당(鳳停寺古今堂)
이 건물은 극락전(국보 제15호) 앞에 동향(東向)으로 서 있으며 원래 불상을 모시는 부속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승려가 기거하는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1969년 해체·복원공사 당시 발견한 기록에 광해군 8년(1616)에 고쳐 지은 것을 알 수 있을 뿐 확실하게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복원 전에는 북쪽 지붕 모양도 달랐고 방 앞쪽에 쪽마루가 있었으며 칸마다 외짝문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앞면 3칸에 2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옆면과 뒷면은 벽으로 막아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비록 건물은 작지만 다양한 건축기법을 사용하여 구조가 꼼꼼히 짜인 건축물로 주목 받고 있는 문화재이다.
제450호 : 안동의성김씨종택(安東義城金氏宗宅)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종가(宗家)인 이 집은 16세기(世紀)에 불타 없어졌던 것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先生)이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건물(建物)은 口자형 안채와 4칸 x 2칸의 사랑(舍廊)채 및 一자형 행랑(行廊)채가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巳자형 평면(平面)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다른 ㅁ자형 평면주택(平面住宅)과 달리 안방이 바깥쪽으로 높게 자리잡고 동향(東向)한 대청(大廳)은 삼단(三段)을 이룬 점이 특이(特異)하다. 행랑(行廊)채에서 안뜰(內庭)로 통하는 중문(中門)이 없어 외부인(外部人)의 출입(出入)이 불가능한 점은 조선시대 유교(儒敎)의 남녀유별(男女有別), 내외사상(內外思想)을 철저히 보여주는 예이다.
사랑(舍廊)채의 출입은 행랑(行廊)채의 대문(大門)을 거치지 않고 사랑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별도의 문으로 한다. 사랑채와 행랑채를 잇는 부속(附屬)채는 완전한 2층 구조로 되어 윗층(上層)은 서고(書庫)로서 사랑채의 대청(大廳)과 이어지고 아랫층(下層)은 헛간으로 쓰인다. 이같은 2층 구조의 부속사(附屬舍)는 당시(當時)의 다른 주택(住宅)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樣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