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파 행진을 이겨낸 박희영
스코어 카드에 적힌 긴 파 행진은 아마추어 골퍼들에겐 환상 그 자체지만 프로골퍼들에겐 고통이고 스트레스다.
프로의 세계에선 뭔가 될 듯 될 듯 하면서 풀리지 않을 경우 파 행진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게 답답하고 지루할 수 없다. 어서 빨리 파 행진을 끝내야겠다는 조바심으로 무리한 시도를 하다 자멸의 길로 들어서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길게 이어지는 파 행진은 프로골퍼들에겐 고문에 비유되기도 한다. 견뎌내느냐 견디지 못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박희영(24)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의 첫 승은 바로 긴 파 행진과의 싸움에서 건져 올린 귀한 것이다.
11월20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그랜드 사이프레스 골프코스에서 열린 LPGA투어 CME그룹 타이틀홀더스 대회 마지막 날 박희영은 7언더파로 독일의 미녀골퍼 산드라 갈과 공동선수로 라운드를 시작했고 2타 차 폴라크리머가 뒤를 추격했다.
전반 4번 홀에서 보기를 범한 박희영은 5, 6, 8번 홀에서 버디를 챙겨 9언더파로 산드라 갈에 두 타 앞섰다.
그러나 9번 홀부터 18번 홀까지 10개 홀에 걸쳐 지루한 파의 행진이 이어졌다. 서너 차례 아쉬운 버디 기회를 놓치기도 했지만 역시 서너 차례 보기 위기를 파로 막아냈다. 버디를 놓친 것은 아쉽기 그지없지만 거의 보기 위기를 파로 세이브한 것은 버디 못지않게 값진 것이었다.
반면 산드라 갈은 8번 홀의 보기를 9번 홀 버디로 커버한 뒤 12번 홀 보기, 13번 홀 버디, 14번 홀 버디, 15번 홀 보기 등 오르락 내리락을 거듭했다.
한때 한 타 차이로까지 바짝 추격해온 산드라 갈이 결국 박희영에게 무릎을 꿇은 것은 버디를 놓친 아쉬움과 보기의 위기를 모두 이겨낸 박희영의 놀라운 평정심에 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5언더파로 시작한 폴라 크리머 역시 전반 버디 2개와 보기 하나, 후반 버디 3개로 맹추격을 했지만 지루하고 답답한 10개 홀 파행진과의 싸움에서 무너지지 않은 박희영에 두 타 뒤진 7언더파로 산드라 갈과 함께 공동 2위에 만족해야 했다.
2008년 LPGA에 뛰어든 박희영은 1년 후배인 최나연, 신지애 등이 LPGA에서 승수를 쌓으며 정상급 선수로 올라섰으나 이번 대회 직전까지 출전한 95개 대회에서 한 차례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는 불운한 시기를 보냈다. 가장 좋은 성적이 2009년 3월 혼다 LPGA타일랜드와 같은 해 11월 미즈노 클래식에서의 준우승이 고작이다. 상금 역시 2009년 66만6천305달러를 벌어 상금순위 20위에 오른 것이 최고였다.
95전96기에 성공한 박희영은 사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한영외고에 재학 중인 2003년부터 2년간 국가대표를 지냈고, 2004년 아마추어 자격으로 출전한 국내대회 하이트컵에서 우승한 뒤 2005년 프로로 전향했다. 2005년 9월 파브 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한 박희영은 최나연을 제치고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신인왕을 차지했다. 그는 2005년 국내 상금랭킹 50위 이내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가장 좋은 스윙 폼을 지닌 선수'로 뽑힐 만큼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었다.
이런 좋은 기량을 갖추었음에도 우승의 운이 따르지 않자 LPGA 선수들이 오히려 안타까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대회에서도 마지막 라운드가 시작되기 직전 연습장에서 관록의 크리스터 커가 박희영에게 다가와 “이번엔 반드시 우승할 수 있을 테니 자신감을 갖고 마지막 라운드에 임하라”고 격려해준 것으로 밝혀졌다.
박희영에게 우승을 빼앗긴 산드라 갈의 인터뷰 내용이 박희영의 기량과 인간성을 대변해준다.
산드라 갈은 대회가 끝난 뒤 가진 인터뷰에서 “박희영은 정말 대단한 플레이를 펼쳤고 우승할 자격을 갖추었다. 라운드 내내 보여준 무서운 평정심과 집중력으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루할 정도의 파 행진과의 싸움에서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한 박희영을 극찬한 것이다.
첫 우승의 산고가 길었던 만큼 박희영이 LPGA무대에서 화려한 전성기를 맞을 것을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