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부활의 날에 내가 살아 날 수 있을까요?
The Valley of Dry Bones in Jesus Christ,
부활절을 앞두고 우리는 부활의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꿈꾸며 사람들은 부활의 바람을 일어켜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있지 않을까요? 그냥 어떻게 살 수 있나요. 계란이 부화 되려면 조건이 있는것 처럼 살고자 하는 자는 부활의 조건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생명의 씨가 그 안에 있는 자입니다.씨가 없다면 생명이 그 속에서 자랄 수 없습니다. 둘째는 오늘 말씀처럼 그것은 한 마디로 “죽음”으로 준비된 자입니다. 완전히 죽은데서 부활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아주 상식적이죠.그러나 계란 속에 이미 닭이란 생명이 이미 있다면, 부활은 물건너간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처럼 죽지도 않고 살아 있는 곳에서 또 다른 부활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믿음”에 대하여 지금 고민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내가 죽었는가!” 를 그 부활의 날이 오기 전에 말입니다. 부활은 죽은 내쪽에서의 살아남이 아니라, 외부로 부터 심겨진 씨에 생명의 에너지를 받아 살아나게 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활 이전에 먼저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죽은 곳에서 생명의 씨가 싹을 티우며 살아나게 됩니다. 이것들이 그 부활의 가능성입니다.
이 부활의 메세지는 죽은자에게만 희망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자에게는 고통과 저주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자에게 희망을 주는 메세지가 있다고요? 그것은 거짓이요 세상의 일일 것입니다.
“He said to me, “Prophesy to the breath, prophesy, son of man. Say to it: This is what the Lord God says: Breath, come from the four winds and breathe into these slain so that they may live! ””(Ezekiel37:9)
"또 내게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 부터와서 이사망을 당한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사망을 당한자, 즉 죽임을 당한자들을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하나님이 하나님됨을 보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죽음도 내가 병들어 죽고,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이 내게 덮쳐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도 부활도 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이미 준비된 것임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지 오래된 죽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새사람으로 창조하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지금 몸을 지땡하고 있는 뼈 골격만이 남아 집에 바람이 솔솔 들어 오는 완전히 망가진 집입니다.몸 즉 집에 성령이 들어와 살고자 그 몸집을 새롭게 건축하시겠다고 하십니다.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He led me all around them. There were a great many of them on the surface of the valley, and they were very dry. Then He said to me, “Son of man, can these bones live? ” I replied, “Lord God, only You know.” "
그곳에는 죽은지 오래되어 뼈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이는 살아나기 전에 완전한 죽음이 되어 망가지고 고쳐 설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완전히 망가진 집과 같이 죄의 삯으로 죽음이 선포된 자들입니다.
또한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 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혜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뼈가 완전히 말라버렸고 살이없다면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입니다.죽음은 살아 있음과의 분명한 단절이 있음을 말합니다.산자는 바로 이 죽음의 단절이 있었음을 알고 인식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살아 있는 자는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며 그가 주인된 집에 은혜만으로 사는 자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개”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면, 만약 우리는 죽은지 얼마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한번 전기 충격요법을 한번 더 사용하여 살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또한 죽은지 얼마되지 않았으면, 무덤을 겁히 파헤쳐서 마지막 어떤 도전을 해보고 혹시나 하는 이런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이런 일들은 한 번식 세상에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이런 것들은 죽음이 삶으로 부터 완전한 단절이라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눈이나 계기에는 생명이 단절된 것같이 보이나 실제는 미세하게 연결되어 있다가 살아난 경우를 말할 것입니다. 증명할 수 없지만,…
그러나 여기서 뼈가 완전히 말라버렸다면 이는 이땅에서 어떤 인간의 능력으로는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선포하는 것입니다.분명한 생명으로부터의 단절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살리심의 역사' 이 일 이전에는 완전한 이전의 생명으로 부터의 단절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어 시체가 되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옆구리를 찔러서 확인 사살을 하면서까지 완전한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건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날 기미가 전혀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은 것과 같은 어떤 소망이 내 쪽에 남아있지 않은 것을 성경은 마른뼈,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 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전의 것이 가미 되기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새창조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셔서 그의 능력으로 그의 백성을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접근 방법과 죽지 않고자 발부텅치는 인간의 접근 방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구원을 받는데, 살아 있는 나의 어떤 것으로 기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No”,”사탄아! 물러 가라!”고 합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스스로 살아 있다고 하는 인간들에게 죽음(자기부인)으로 단절을 부여 하십니다. 그리고 새 창조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 스스로 자기 자신(자아,에고)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아에 심하게 상처를 받게 되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내가 열심히하고 노력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되었다" 이런 말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내가 잘했기 때문에, 내가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특출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알고보면 거짓이요 차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인간과 구원자 하나님사이에서는 어떤 것이 가미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때로는 이 땅에서도 우리는 자기 생각에 싸로 잡혀있을 때면 상황파악이 안될 때가 있죠. 본문의 상황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답을 찍어면 모두 오답인 것과 같습니다. 이런 나의 성공은 살아 있는 자기 욕심과 탐욕이 만들어낸 세상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으로 다시 산영이 되었다면 죽음이 전제된 일시적 완전한 단절이 되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식으로든 죽음을 인식하는 상태가 온다는 것입니다.이때 인간은 한계상황 속에서 세상과 자기(자아)와의 단절이 이루져 허무속에서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이때 나는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며 그리스도의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내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한 자아의 욕망으로 부터 단절되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며, 그 죽음뒤에 있는 십자가의 은혜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부활은 이미 죽은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창조역사요 십자가 사건의 결과 입니다.그러므로 죽은 자에게는 어떤 권한이나 관여가 불가능 합니다. 그 분의 은혜와 긍휼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