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 가까운 목욕탕은 주로 단골 손님들이 많습니다.
어차피 목욕탕 가면 다 지울 거 화장도 대충하고 입던 옷 그래도 입고 가려면 아무래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동네 목욕탕이 좋지요.
그 목욕탕에 대략 6시 반쯤이면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출근을 하십니다.
저는 퇴근 길에 가끔 목욕탕에 가는데 그 때마다 그 아주머니를 만납니다.
얼굴은 곱상한데 워낙 마르고.. 투박한 손을 보니 젊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저는 사람을 볼 때 얼굴은 대충봐도( 어차피 내 얼굴도 그다지 빛이나는 미인도 아니고 설상가상으로 젊지도 않은데.. 그러니 상대방도 대충 보면 더 좋고) 손은 유심히 봅니다.
요즘 워낙 성형수술이 발달하고 화려하고 젊은 감각의 옷과 헤어스타일/ 성형수술과 보톡스 등 의학의 힘으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지나 온 삶이 고스란히 두 손에 배여 있는 삶의 이력서입니다.
그것도 아주 정직한~
어느 유명한 중견 여자 탤런트가 얼굴은 보톡스를 주기적으로 맞아서 다소 팽팽해 보이는데 손과 목은 주름살을 감출 수가 없어 보톡스를 손까지 맞았다가 너무 많이 맞아서 부작용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대나 어쨌대나 ㅋ
그건 그렇고...
보통 여탕은 주부들이 많아서 저녁엔 가족들 식사준비를 해야하므로 일찍 손님이 끊깁니다.
그래서 마지막 타임엔 젊은 대학생이나 저처럼 퇴근 길에 들르는 직장 여성 몇 명만 남습니다.
그렇게 몇 번 만나니까 그 아주머니와 자연스럽게 가벼운 인사를 나누게 됐는데..
어느 날은 저와 그분 단 둘이만 남게 됐습니다.
커다란 탕안에 둘만 있으니 무섭고 너무 적막해서 급히 집으로 가려는데 그분이 저를 부르더군요.
늘 혼자서 청소하기가 적막하고 심심하니 저더러 안 바쁘면 잠시 말동무나 하자면서..
사실 요즘 안 바쁜 사람이 어딨나요?
그것도 퇴근 길인데..
집에 가서 당장 해야 할 일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지만 제게 어렵게 간청 했을텐데.. 싶어서 차마 거절을 못하고 그냥 어정쩡하게 탕안에 남았습니다.
그분은 손으론 연신 목욕탕 바닥과 세숫대 등 목욕탕 안의 집기를 닦으면서도 자신이 현재 사는 얘기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 털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신랑( 60이 넘었다는 노인 입에서' 우리 신랑'이라는 말이 술술 나와서 얼핏 웃음이 나왔지만.. 그분은 아주 입에 뱄더군요)은 젊어서부터 내가 직장 다니는 걸 싫어했다우"
"어머~ 왜요?"
"응 여자들이 말야~ 직장 다니면 다른 남자들이 쳐다보고 그러다.. 손 탄다고.. 그래서 질색을 했어요"
저는 물건도 아닌 사람에게 그 '손 탄다'는 말이 웃기기도 하고 좀 어이가 없어서" 아이쿠! 직장도 직장 나름이고 자신이 처신만 똑바로 하면 되죠"
그러자 " 낸들 안 그랬겠수?? 그래도 우리 신랑이 절대 안 된다는 거야. 그렇다고 자기가 돈이나 잘 벌면 내가 말을 안해~ 맨날 하는 일마다 말아 먹으면서 말야"
하시면서 커다란 플라스틱 통( 남탕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탕안에는 아기들을 데리고 오는 엄마들을 위해 큰 세숫대야 욕조가 있음)으로 욕조 안의 물을 가득퍼서 바닥에 확 뿌리더군요.
어쩜 자신의 한풀이를 물로 씻어내려는 듯~
그러다 잠시 힘이 드시는지.. 아님 화가 치밀어 올라서 진정 하시려는지~
"오늘도 낮에는 희망근로( '공공근로'라는 말이 官 주도 냄새가 나서' 몇 년전부터' 희망근로'로 명칭이 바뀌었답니다)하고 또 여기와서 청소까지 하고 있으니.."
저는 낮에 희망근로 하시고 밤에 목욕탕 청소까지 하시는 그분이 얼마나 힘이 드실까? 싶어서
" 어쩜~ 많이 피곤하시죠?? 그럼 제가 청소 도와 드릴까요?" 했더니 손사레를 치시며
" 어휴~ 말만 들어도 고맙수! 이게 쉬운 것 같아도 다 요령이 있고 세제를 적당하게 잘 써야 돼서 아무나 못해요. 가정집과는 달라요~" 하시면서 극구 만류하시더군요.
저도 온 종일 직장에서 바쁘고 스트레스 받아서 피곤한데...
저보다 더 나이드신 분이 청소하는데 옆에서 뻘쭘하게 바라보기도 맘이 안 편하고..
또 오다가다 얼굴은 봤지만, 개인적인 친분도 전혀 없는 사람의 60년 세월을 언제까지 다 들어 드려야하나??
잠시 혼란스러웠음.
그것도 편안한 소파에 앉아서 음악 들으며 휴식하는 카페도 아니고.
그렇게 제가 혼란스러워 하는 걸 눈치 채셨는지 "그냥 사연 많은 아지매 恨풀이 하나보다.. 하고 들어보시구랴~"하시면서 남편이 밖으로만 돌아서 그 아주머니가 농사도 짓고.. 농한기 때는 시장에서 노점도 하시고.
그러다 자녀들이 한창 학교 다닐 때는 학비를 댈 수가 없어 도배 기술도 배워서 도배도 하시고.
그러다 처음 공공근로가 생길 때부터 그일을 하셨다는데..
이제 나이가 많아서 곧 그 일도 못하신다네요.
그러면서" 그 일도 말야 좀 젊고 예쁜 것들은 쉬운 일 시키고 나처럼 나이 많은 아지매들은 온 종일 땡볕에서 공원이나 강변에서 뿔뽑기 같은 거만 시켜"
" 아무리요~"
" 사실이라니께( 어느덧 제게 반말을 섞어서)그저 남자들은 말여~ 젊고 이뿐 것(여자)들만 좋아한다니께" 그러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웃으시며" 하긴 나도 젊어서는 키도 크고 날씬하고 예쁘단 소리 많이 들었어. 그래서 우리 신랑이 늘 불안해 했당께"
그 순간 지난 날을 회상하시는 듯 잠시 얼굴에 화색이 돌았음.
"아~ 그래서 직장에도 못 나가게 하셨군요???"
"그랬지. 그럼 뭘해. 어차피 맨날 농삿 일에 노점에.. 하긴 얼굴도 귀신같이 하고 일만 했응께 누가 날 여자로 보기나 했을라고~"
계속 말씀을 듣고 보니 도대체 그 아주머니가 그렇게 젊을 때부터 힘들게 온갖 일을 하실 때 그 '우리 신랑'이라는 분은 어디서 뭘했을까?궁금해서 여쭤봤더니
" 아~ 우리 신랑. 가끔 농삿일 하다가.. 일하기 싫으믄 시내 다방가서 불여시 같은 다방 레지( 예전엔 다방 여종업원을 그렇게 불렀음)년들 그 비싼 쌍화차 사주고 그랬지.
그냥 쌍화차를 사줬겠냐고?하도 못해 레지년 손이라도 떡 주므르듯 잡았겄지...
그러다 싸우디( 사우디 아라비아)가서 돈도 벌어오고.
그 돈 다 까먹을 때까지 놀거나 화투질도 하고/ 한 마디로 한량여~ 그러니 마누라만 직싸게 고생혔지"
그런데.. 웃으면 안 되는데. 그 '불여시 같은 레지년'이란 말에 눈치없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웃음이 나와?? 그려 남 일이니께.. 지금도 난 열불이 나는구먼~"
저는 미안하기도 하고 온 종일 몹시 피곤하실 듯해서 탙의실 안에 있는 홍삼음료를 사다 드렸더니 말로는 됐다고 하시면서도 손은 벌써 뚜껑을 비틀고 계셨음.
그렇게 그 아주머니의 파란만장한 60년을 듣다보니.. 어느덧 9시가 넘어서 청소도 끝나고.
함께 목욕탕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반전이~
남루한 옷차림의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노인이 서성거리고 있다가 쏜살같이 달려와서 마치 20대 연인처럼 그 아주머니의 손을 부여잡더니 이내 가볍게 어깨를 감싸 안더군요.
그러자 방금전까지 입이 삐뚤어 질 정도로 '그 우리 신랑' 흉을 보던 아주머니가 저를 보기 민망했던지" 아니~ 이 양반이 왜 안하던 짓하구 그래요??"
" 아니~ 내 마누라 이뻐서 내가 어깨동무를 하기로 서니 어느 누가 뭐라고 한대나? 법으로도 안 걸려"
그러더니 이내 가로등 골목길로 한 걸음에 사라졌습니다.
저는" 아~ 저 맛에 사나보다!!! 부부간의 일은 부부만이 안다더니..."
비록 몸은 피곤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순식간에 수 십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남의 삶의 여정을 듣는 것도 색다르고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그래도 다 읽고나니 재밌죠???. 조금도 가감없이 보고 들은 대로 쓴 글입니다-
첫댓글 뭐랄까요?
마치 단막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냥 소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재밌습니다.
단막극... 그렇죠.누구든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고. 더구나 60여 년을 살아온 삶인데~
얼마나 구구절절하게 할 말이 많을까요?
저는 그 아주머니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공부 많이하고 그중엔 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여성 작가나 교수, 연구원들이 쓴 書評이나 인터뷰를 보면 이런 말이 종종 나옵니다.
" 내 영혼의 안식처~" 갈 곳 몰라 헤매는 내 영혼의 쉼터같은 책" 자아실현을 위해 다니는 직장" 물론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단지 생계를 위해 여성성도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거의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런 실체도 안 보이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현란한 말들이 얼마나 언어
의 유희, 즉 말장난처럼 느껴질까?? 하는.
그 아주머니 말씀을 들으면서도 새삼 느낀 바는 나이든 여성들이 젊고( 사실 젊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움)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 부러움?심지어 적대감도 어느 정도 있는게 사실입니다.
자신도 예전에 지나온 生의 주기건만..
그래도 자기 딸만 빼고 느끼는 감정은 비슷합니다.
한 마디로 같은 여자가 봐도..그 싱그러움이 부럽죠.
그리고 영원히 다시 돌아 갈수 없는 젊음이기에... 세상은 연목구어라는걸 다 알면서/ 그러니까 잘 알기에 더욱 아쉽고 안타깝고 슬픈 일들도 많습니다.
그중에 으뜸은 가버린 젊음일테고.. 영원히 내편이 아닌 사람을 짝사랑하는 고통?
ㅎㅎㅎㅎ네 잼있어요
첨에..손을 먼저보신다길래..자판기 두드리는 제 손을 잠시보면서...
에구..내손은 공사판 아저씨 손일세...그랬네요...
아무리 남편 흉을봐도 남편사랑 받는 그분은 행복합니다...ㅎㅎㅎㅎㅎ
남들이 보면 어떤가요..부부만의 애정의 표현이 보기싫지 않을만큼 행복해 보여요
예쁜 손- 즉 흔히 말하는 섬섬옥수는 사실상 부끄러운 손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기본적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 만큼 일을 소홀히 했거나 누군가에게 전가 시켰다는 얘기일 수도 있지요.
자판을 열심히 치시는 어느 노인의 손을 경탄하는 최신 광고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렇게 평생을 정직하게, 열심히 일한 거칠고 투박한 손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올바른 것임에도..
세상은 가늘고 여리고 섬세한 손을 더 좋아하죠. 예쁘다고 칭찬하고.. 심지어 한 번이라도 만지고 싶어하고
제 손도 안 예뻐요.평생을 손빨래와 손으로 방 닦고(그래야 직성이 풀림) 늘 무거운 짐 들고 다녀서 혹사한 미안한 손입니다. 그럼에
도 솔직히 제 자신부터 자랑스런 손이라는 생각은 별로 안 듭니다.
세상은 당장 예쁘고 근사하게 포장된 상품과 사람을 선호하는 불편한 시선이 많아서요~ 저 혼자서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그냥 내식대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