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멜리 히사리 (마호멧 2세가 1452년 콘스탄틴노플(이스탄블)을 정복하기 위해 당시 군사물자의 항로였던 보스포러스 해협에 세운 군사 요새)
비잔틴 제국(동로마)
비잔틴 제국이라는 이름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약 1,000년 동안 존속했던 동로마 제국으로 유스티니아누스 왕조가 지중해 탈환을 위해 벌였던 게르만족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610년 이후부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한 1453년까지를 일컫는 중세 그리스의 동로마 문화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신의 은총과 영원한 로마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어서 자신들을 '로마인'이라 불렀다.
비잔티움은 원래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였다. 이 지역은 유럽과 소아시아의 경계선에 있었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t스(324~337 재위)가 330년에 이곳을 '새로운 로마'로 정하고 이를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후 수도를 옮겨온 뒤부터 동로마라는 새로운 영역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을 때(395) 제국을 양분하여 동로마를 큰아들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를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로 하여금 각각 통치하게 함으로써 동서 로마로 분리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제도 일반에서는 로마적이지만 주민·언어·문화면에서는 그리스적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일찍이 로마 제국이 완수한 적이 없었던 전략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를 중심으로 소아시아와 이탈리아 해안의 여러 섬들을 포함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조직을 갖추고 그리스도교와 동방적 색채를 포함한 군주국가로서 완전히 성립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 재위) 때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행정과 학문에서 새로운 중심이 되었고 제국의 문화는 고전적 전통 및 중세 가톨릭 유럽과 소아시아의 이교문화의 교차 지점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비잔틴과 게르만족의 관계는 반드시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야만족에 대해서는 세례만 인정하면 개방했고, 비잔틴 역시 문화의 기원이 다른 문화들인 슬라브·아랍·셈·투르크 등의 문화와 끊임없이 접촉했다. 그러므로 비잔틴 사회는 초기부터 사회적·문화적으로 유동성과 수용력이 대단히 큰 제국이었음이 분명하다. 비잔틴의 사회 구조는 서유럽과는 극히 다른 유형에 속하며, 이는 역사가들의 흥미를 끌어왔다. 또 12세기까지 지중해 교역의 중심세력으로서 아랍인과 경쟁을 벌인 역사 역시 중세 서유럽 상업을 부활시킨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12세기까지 비잔틴 제국은 중세의 국제정치무대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고 지중해 경제와 신앙·학문·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이후부터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정복지의 영역이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여러 종족간의 갈등, 종교적인 분열, 변방의 잦은 침입, 끊임없는 정복전쟁 등은 제국의 재정과 인력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결국 행정적 구조가 더이상 정복지에서의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어 제국은 마침내 붕괴 위기를 맞게 된다.
오스만제국(터키)
오스만과 셀주크는 모두 투르크계 민족이 세운 국가다. 투르크계 민족의 기원은 고대 돌궐로부터 출발했다.
중국의 한 무제(武帝)와의 대립에서 밀려난 투르크계 민족은 서진을 시작하면서, 페르시아계, 아랍계 민족과 때로는 대립하며 때로는 조화하며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이슬람을 수용하면서 적응, 발전해 가지만 나름대로의 문화적 고유성은 유지되어 이슬람이 전파된 지역에서는 모두 아랍어가 사용되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수메르(지금의 시리아)등 독자적인 언어가 있던 민족들조차도 아랍어에 의해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와중에 페르시아와 투르크계 민족만이 고유의 말을 사용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페르시아의 경우 정치적으로 아랍 민족과의 긴장과 대립을 유지하고 있었고, 게다가 이슬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도 아랍과의 대척으로 시아파 이슬람이 발전하는 등의 모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르크계의 경우 아랍 민족의 주류였던 수니 파 이슬람을 수용하면서도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한다.
투르크계 민족이 국가 비슷한 형태로 그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셀주크 때부터다. 그 이전까지 투르크계 민족은 페르시아 및 아랍 지역에서 용병 시대를 거치고 있었다. 그 후 페르시아 및 이집트 파티마 조의 성장을 두려워한 아랍의 압바스 조가 셀주크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이에 응한 셀주크가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압박하면서 이 지역의 패권은 아랍 민족에게서 투르크 민족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맞는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역의 패권은 셀주크가 종교적 권위만 압바스가 갖는 방식으로 변한다. 현재의 아나톨리아 중부에 셀주크의 수도는 Konya(앙카라 남쪽에 위치한 도시)로서 당시 셀주크의 주된 근거지가 아나톨리아 중부를 중심으로 중동 지역과 이집트, 페르시아 지역을 실질적으로 좌우했던 셀주크는 예루살렘 정복 이후, 유럽인들의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금지하게 되고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십자군이 조직되어 1~2차 십자군 원정은 모두 패배로 긑나자 맹위를 떨치던 셀주크가 패망한 것은 같은 투르크계인 오스만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쪽에서 온 몽고의 군대에 의해서였다. 실제 셀주크의 마지막 군주가 눈앞에서 아내가 몽고의 장군에 의해 강간당하고 아들의 목이 잘리우는 것을 보고 실성하였고 이로 인해 셀주크 시대가 종언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셀주크를 비롯한 투르크계 민족들의 통치 방식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투르크계의 조상은 아시아 유목 민족인 돌궐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러다 보니 통치 방식 역시 아시아 유목민족의 특성을 잘 활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목 민족의 삶의 양식 자체가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지역을 정복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결국 한 이동 단위의 복종을 받아내는 것이 그 지역에서의 패권을 보장 받게 되고 같은 이유로 유럽과 같은 총독 문화가 아니라 단위 지도자의 지위를 그대로 보장하는 방식으로 정복 사업이 추진되었다. 이동하는 단위에 총독을 파견한다는 것은, 총독도 이동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되며 총독이 그의 군사들과 계속해서 단위를 따라 이동한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 새로운 단위를 점령할 때마다 군사력의 단위별로 분산되는 효과를 가져오므로 당연히 총독 문화는 불가능한 대표적인 예가 몽고이다. 하나의 몽고라는 단위 내에도 오고타이, 차카타이, 킵차크 등 단위가 나뉘어 각각 독립적으로 유지되었고, 또 각각의 단위 내에도 단위별로 지도자가 따로 있었다. 셀주크 역시 이러한 전통에 따라 통치 지역 내에 다양한 단위가 존재하였고, 단지 세금과 국방의 의무만을 강요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이민족 단위 뿐만 아니라 투르크계 민족 간에도 적용되어 셀주크 말기만 하더라도 셀주크 내에 존재하는 각 투르크계 민족단위만 13여개 이상이었다.
오스만 역시 이들 투르크계 민족 단위 중 하나로서 셀주크의 십자군 전쟁에서 최선봉에 있었다. 오스만의 초기 수도는 Bursa, Iznik으로 이스탄불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셀주크가 몽고에게 패망한 이후 이 지역에서는 다시금 이민족 그룹 뿐만 아니라 투르크계 민족 사이에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어 이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단위가 일한(Ilhan)과 오스만(Osman)이었고, 이 중 십자군과의 대척점에 서서 당당히 지하드(성전 원칙)을 표방하고 무슬림의 단결을 외쳤던 오스만이 정통성을 확보했을 테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군사력이 다른 단위의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결과 투르크를 대표하는 단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셀주크를 계승하는 단위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오스만은 3~8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비잔틴의 모든 영토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마저 함락시키며, 결국 비잔틴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든다. 그후 오스만은 약 400여년 이상을 건재하며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운영하였고, 제 1차 대전에서 독일의 손을 들어 주었다가 패배하게 된다. 이후 유럽과 미국의 윌슨이 나서서 투르크계 민족의 재기를 두려워하며 아랍국들에게 민족 자결 주의를 외치며 아랍 민족으로 하여금 민족이 다른 오스만과 결별토록 부추킨다. 그리고 나서는 그 지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드는 짓을 함으로 인해 결국 대제국은 초라하게 줄어갔고, 역사 속에서 오스만이 사라지려던 찰나 터키 민족의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케말 파샤)이 독립 전쟁에 나서게 되고 3년간의 전쟁을 통해 현재의 터키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돌마바흐체 궁전(오스만 제국이 쇠퇴하자 국력쇄신을 위해 베르샤이 궁전을 본떠 초호화판으로 짓다 막대한 지출로 나라가 망한 비운의 궁전)